강씨 가문의 재력이라면 출산한 뒤 아이들을 위해 분명히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면 조산아라고 해도 살 수 있는 확률이 대폭 커지게 된다.“너는 네 몸 생각 안 해?!”강지혁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커졌다.“뭘 해도 리스크가 따른다면 차라리 나는 아이들과 함께 리스크를 짊어지고 싶어. 나는 아이들의 엄마니까. 나 혼자 편하자고 어떻게 이제 막 심장이 뛰기 시작한 아이 한 명을 보낼 수 있겠어.”임유진의 입에서 나온 ‘엄마’라는 두 글자에 강지혁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그의 어머니는 그가 많이 다쳤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떠나버렸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인간의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겠다고 하고 있다.임유진은 그의 어머니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만약 아이가 태어나면 임유진은 분명히 좋은 엄마가 될 것이다.그리고 그의 아이들은 그처럼 버림받을 일이 영원히 없을 테지...“혁아, 나는 한 명이라도 잃고 싶지 않아. 네 눈에는 내가 감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너는 몰라. 그때 의사 선생님한테서 내가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걸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가족 한 명 없이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어. 그런데, 그런 나한테 지금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왔잖아. 내 핏줄이 이 세상에 세 명이나 더 있게 돼! 그러니까 나는 한 명도 포기할 생각이 없어. 아이들은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야!”임유진은 마음속 깊숙이 묻어뒀던 생각을 가감 없이 뱉어냈다.그녀의 눈은 결연했고 한점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아이들을 위해 목숨도 내걸 수 있다, 이 말이야?”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응!”임유진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너는...!”강지혁의 목소리가 갑자기 멈췄다.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에서 막혀 내뱉을 수가 없었다.“그럼 뭐?”임유진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
사실 한동안 불을 켜지 않아도 잘 수 있었지만 강지혁과 헤어진 뒤로 다시 불을 켜야만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은 눈을 감고 속으로 양을 세며 빨리 잠이 들기 위해 노력했다.하지만 야속하게도 오늘따라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역시 바로 옆에 한 사람이 더 누워있어서 그런 걸까?눈을 감아도 코끝에는 강지혁의 체취가 맴돌고 귓가에는 강지혁의 숨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바로 강지혁과 몸이 닿아버리게 된다.분명 킹사이즈 침대이건만 어째서인지 너무나도 쉽게 그에게 닿아버릴 것만 같았다.그렇게 양을 100마리까지 셌을 때 임유진은 결국 눈을 뜨고야 말았다.그런데 자기 전 옆으로 누운 탓에 눈을 뜬 순간 그대로 강지혁의 얼굴과 마주치고 말았다. 다행히 강지혁은 눈을 뜨고 있지 않아 어색한 분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임유진은 자세를 고쳐 누울 생각도 잊은 채 강지혁의 자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강지혁은 속눈썹이 여자 못지않게 길었다. 그래서 이처럼 자고 있을 때면 항상 눈에 그림자가 지고는 했다.오뚝한 콧날과 섹시한 입술은 정말 다시 봐도 신이 정성껏 빚은 조각상 같았다.순간 임유진은 사람들이 잘생긴 조각상에 왜 그렇게 환장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강지혁은 지금 눈을 뜨고 있는 게 아닌데도 여전히 그녀에게 압박감을 줬다.그런데 그 사람들 꼭대기에 있는 남자가 지금은 그녀의 남편이 되었고 지금 그녀의 바로 옆에 누워있다.1년 전이였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내일 병원으로 가면 또다시 아이를 포기하는 일로 다투게 될까?임유진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생각에 빠졌다가 문득 강지혁의 가슴으로 시선이 갔다.잠옷 앞섬이 다른 옷보다 파인 탓에 강지혁의 심장 가까이에 있는 흉터가 여실히 보였다.어릴 때 입은 상처라 많이 옅어졌다고는 하나 당시 강지혁이 얼마나 두려워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갔다.이건 강지혁의 어머니가 어린 그에게 남긴 상처다.강지혁은 그때... 많이 아팠겠지?그때 임유진의 상념을 깨는 통증이 손으로부터 전해져왔다
임유진은 몇 분간 마음을 가라앉힌 뒤 다시 눈을 감았다.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아주 빠르게 잠이 들었다.그런데 그녀가 잠들자마자 이번에는 강지혁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그는 옆에 누워 있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호흡이 고른 것이 자고 있는 건 확실한 듯했다.임유진은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 아까 그녀가 강지혁에게 손을 뻗었을 때 강지혁이 남아 있는 모든 자제력을 동원해 그녀의 손을 제지했다는 것을 말이다.아마 임유진의 손이 그대로 가슴팍에 닿았으면 그는 아마 그녀의 의사 같은 건 상관없이 그녀를 안았을 것이다....다음날.의사는 여전히 아이를 포기하는 것을 가장 권유한다고 했다.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으니까.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권유지 세 명의 아이 중 누구 한 명을 반드시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 세 명을 무사히 출산하는 방법도 있다고 얘기했다.다만 그 방법은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크고 임유진의 몸에도 일정한 데미지를 줄 수 있었다.“만약 이대로 아이 셋을 다 지키게 되면 임유진 씨의 자궁이 매우 위험해지게 될 겁니다. 아이를 출산할 때 대량의 출혈이 있을 수 있고 출혈을 빨리 잡지 못하면 자궁을 적출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괜찮으시겠습니까?”자궁이라는 건 여성에게 있어 단지 아이를 낳는 기관이 아니다. 만약 자궁이 없으면 생식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은 물론이고 노화도 더 빨리 오게 되며 어쩌면 후유증으로 장기간 약을 복용해야 할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런 의사의 말에도 임유진의 마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네, 괜찮아요. 아이 셋을 다 지키는 방향으로 갈게요.”그러나 강지혁의 의견은 달랐다.“아이를 한 명 포기하겠습니다.”“혁아 제발!”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강지혁의 손을 꼭 잡았다.“나한테 기회를 줘. 아니, 우리 아이들한테 기회를 줘!”그녀의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흥건했고 강지혁의 손을 꽉 잡은 것 치고는 일말의 긴장감도 살짝 묻어있었다.하지만 그녀의 두 눈은 단호하고 또 언뜻 희망도 보였으며 심지어는 절
임유진은 처음 아이 셋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하지만 만약 임유진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는...강지혁의 두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정말 잘 생각하고 결정한 거 맞아?”“응, 번복은 없어.”“마지막에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응, 있어. 절대 후회 안 해!”강지혁은 입술을 꾹 닫은 채 잠시간 임유진과 시선을 주고받더니 다시 서서히 시선을 돌려 의사를 바라보았다.“이대로 아이 세 명을 다 지킬 경우 모자 모두 무사할 확률은 얼마나 되죠?”“50%입니다.”의사의 말에 강지혁의 표정이 더욱더 어두워졌다.임유진과 아이들 모두 무사할 확률이 60%도 되지 않았다.강지혁은 확실하지 않은 것에는 투자든 뭐든 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그럼 일단은 아이 셋 모두 지키는 거로 합니다. 그런데 만약 위험한 상황이 온다면 그때는 산모부터 지키는 거로 하고요.”“하지만...”임유진이 뭔가 얘기하려는 그때 강지혁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임유진, 이게 내가 물러설 수 있는 마지막 한계선이야. 만약 네가 이 제안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네가 날 평생 원망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어.”임유진은 그 말에 숨겨진 뜻을 바로 이해했다.강지혁은 지금 그녀가 동의하지 않으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수술대에 올려놓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알겠어.”결국 임유진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일단은 아이 셋 모두 지킬 수 있게 됐으니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만 했다.그 뒤로 임유진과 강지혁은 의사에게서 아이를 무사히 출산하기 위한 조언을 들었다.임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집중한 얼굴로 얘기를 들으며 질문도 많이 했다.그리고 강지혁은 그런 임유진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얘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의사가 먼저 회의실 문을 열고 자리를 떠났다.임유진은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강지혁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강지혁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아까 임유진이 아이를 위해 모든 걸 다 내걸었을 때 강지혁도 그에 따른 각오를 했다.만약 그녀가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정말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때는 그도 그녀를 따라갈 생각이다....임유진은 최 실장의 안내를 받고 한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이곳은 중환자실이었지만 흔히 보는 그런 중환자실이 아닌 한지영만 있는 독립적인 공간이었다.게다가 바로 옆에는 환자 보호자들이 머무를 수 있는 방도 있었다.전에 입원했던 병원에 비하면 상당히 좋은 곳이었다.한씨 부부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어머님, 아버님, 어서 고개를 드세요. 그리고 고마워할 필요 없으세요. 저는 그저 지영이가 저를 위해 해준 것에 보답하고 있는 것뿐이니까요.”임유진은 곧바로 한지영의 병세부터 걱정했다.“그보다 의사 선생님은 뭐래요? 위험한 시기는 언제쯤 벗어날 수 있대요?”“아직 그게 언제라고는 확실하게 얘기해주지 않았어. 아마 조금 더 시간이 걸려야 할 것 같아. 하지만 이 분야에서 최고라고 인정받는 선생님이 치료해준다고 했으니까 분명히 괜찮을 거야. 게다가 지영이에게 맞는 제일 좋은 약을 쓰고 있다고도 했어.”한종훈이 감사해하며 대답했다.그는 아버지로서 딸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현실적으로 그 많은 병원비를 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하지만 병원 측에서 한지영을 치료하는 것에 관한 모든 비용을 다 강지혁이 부담한다고 했다.강지혁이 병원비를 내준다는 건 임유진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한종훈도 이해영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럼 다행이고요.”임유진은 유리창 너머로 병상에 누워있는 한지영을 바라보았다.한지영에게는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았다.한지영이 깨어나면 아이를 한 명도 아닌 세 명이나 임신했다는 것도 말해주고 싶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 셋 모두 지키겠다는 말도 해주고 싶었다.“경찰 쪽에서는 지영이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알아냈대요?”임유진의 말에 한씨 부부의 표
“드레스요?”임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네, 들러리 설 때 입으실 드레스요. 계산은 이미 한지영 씨께서 다 하셔서 임유진 씨는 가지러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사실 한지영 씨께 먼저 연락을 드렸는데 며칠째 전화를 안 받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또 다른 수취인인 임유진 씨께 이렇게 연락을 하게 됐어요.”“지영이가 지금 입원 중이라서요. 그쪽으로는 제가 갈게요.”임유진은 매장 주소를 메모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들러리 설 때 입을 드레스라...지금 생각해보니 백연신을 만나러 가기 전 한지영이 드레스를 주문했다고 했었다.임유진한테 분명히 찰떡인 드레스일 거라고 한지영이 환하게 웃으며 얘기했었다.임유진은 주소를 따라 드레스 샵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인테리어도 고급스럽고 전시된 드레스들도 화려한 것이 무척이나 예뻤다.가격표를 보지 않아도 드레스가 비싸다는 것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한지영이 돈을 많이 쓴 게 틀림없었다.임유진이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매장 직원이 인사를 건네왔다.“드레스 보러 오셨어요?”“드레스 받으러 왔어요. 임유진이에요.”“저와 조금 전에 통화했던 분이시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직원은 임유진을 대기 의자로 안내하고 드레스를 가지러 갔다.그렇게 임유진이 드레스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매장문이 열리고 여자 세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그중에는 배여진도 있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한 배여진은 임유진을 본 순간 웃음을 지우며 멈칫했다.설마 이런 곳에서 임유진과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게다가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안색이 많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배여진은 임유진만 보면 이가 갈렸다.임유진과 강현수 사이에 틈이 생기면 그걸 기회 삼아 강현수의 마음을 쉽게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요 며칠 그녀는 강현수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고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바람에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하지만 다행히도 내일은 그녀의 생일 파티가 있는 날이다.전에 강현수가 생일 파티에 꼭 참석하겠다고 했기에 아마
“그건...”직원은 지금 무척이나 난감했다.배여진과 나머지 두 여자가 누군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하지만 눈앞에 있는 임유진도 만만치 않은 신분의 여자 같았다.그도 그럴 것이 아까 임유진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내렸던 차량이 바로 벤틀리였으니까.배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내 친구들이 좀 직설적이라서 말이야. 음흉한 속내를 가진 것들을 보면 참지를 못해. 그리고 너는 잘 모르겠지만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은 기회주의자에 남을 깎아내려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못된 사람들을 무척이나 싫어해. 참, 방금 내 친구가 한 말 허투루 듣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얘가 아는 사람들이 좀 많아서 만약 정말 친구들에게 연락하면 이 샵은 바로 문을 닫게 될 거거든.”배여진의 눈은 임유진을 보고 있었지만 실상은 옆에 있는 직원에게 하는 말이었다.임유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배여진을 바라보았다.그날 임유진은 강현수에게 모든 진실을 다 얘기해주었다.하지만 배여진의 태도로 볼 때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배여진과 그 뒤로 얘기를 안 한 건가?뭐가 됐든 이제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배여진, 전에 내가 네 정체를 까발리지 않는 건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물론 네가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겠다고 해도 상관없어. 나는 동현 씨를 위해 어떻게든 재판에서 이길 테니까. 누가 더러운 짓을 했는지는 때가 되면 다 밝혀지겠지.”외할머니를 봐서 배여진을 봐주는 것도 이제는 한계였다.배여진은 이미 선을 넘었고 그러니 더 이상 참아줄 이유가 없었다.“너...!”배여진의 얼굴이 분노로 빨갛게 달아올랐다.설마 임유진이 대놓고 그 일을 입에 올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아니나 다를까 그녀 옆에 있던 두 여자가 임유진의 말에 의문을 품더니 배여진을 향해 이상한 눈빛을 던졌다.‘안 돼. 더 이상 임유진이 계속 떠들게 놔둬서는 안 돼. 임유진의 말을 얘네들이 믿어버리기라도 하면 그때는 주위에 말이 돌게
하지만 자존심 상할 일은 그 뒤에 있었다.“주워.”임유진이 드레스를 가리키며 말했다.“네가 던진 거니까 네가 주워.”“네가 주우라고 하면 내가 주워야 해? 네가 뭔데!”배여진이 씩씩거리며 직원들에게 또다시 화풀이했다.“빨리 얘 내보내지 않고 뭐해요?”하지만 직원들은 여전히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그러자 배여진이 임유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그럼 내가 내쫓지 뭐!”하지만 임유진의 팔을 잡으려는 그 순간 임유진의 뒤에 있던 무표정한 얼굴의 여자에게 손목이 잡혀버렸다.그 여자는 배여진의 손목을 잡자마자 바로 뒤로 꺾어버렸다.너무나도 쉽게 제압을 당한 배여진은 비명을 질렀다.“사모님, 어떻게 할까요?”여자가 공손한 태도로 임유진에게 물었다.그러자 임유진이 배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드레스 주우라고 하세요.”배여진을 제압한 여자는 강지혁이 임유진의 신변 보호를 위해 붙여둔 여자 경호원이었다.임유진이 자칫하면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에서 애를 배고도 물러서지 않았던 건 모두 경호원이 있어서였다.“네, 알겠습니다.”경호원은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 배여진을 보며 말했다.“사모님 말 들었지? 얼른 주워.”“내가 저걸 왜 주워?!”배여진이 빨개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자 잡힌 손목으로부터 또다시 알싸한 고통이 밀려왔다.이에 배여진이 직원들을 향해 외쳤다.“뭘 멍하니 보고만 있어? 빨리 이 여자 좀 어떻게 해봐! 만약 지금 당장 이 두 사람 내쫓지 않으면 이 가게 폐업시켜 버릴 거야!”배여진은 지금 고통과 분노에 잠식되어 있어 경호원이 왜 임유진을 ‘사모님’이라고 불렀는지, 애초에 왜 경호원이 임유진의 곁에 붙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배여진의 말에 직원들이 서둘러 그녀에게로 달려왔다.배여진이 이 드레스 샵의 단골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더 많게는 그녀의 뒤에 강현수가 있었기 때문이다.“얼른, 얼른 배여진 씨 도와드려!”샵 주인이 직원들을 향해 소리쳤다.강현수를 건드리면 정말 폐업을 당할 수 있기에 두려운 것이었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