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가 잘못될 가능성은요?”강지혁의 목소리에 일말의 긴장이 묻어 있었다.“산모가 잘못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만 수술 과정에서 가끔 출혈이 발생하거나 자궁내감염 또는 장기손상 등의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분의 현재 몸 상태로 볼 때 만약 유산하게 되면 다시 아이를 가질 확률이 매우 희박해집니다.”의사는 가능한 상황들을 다 설명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을 듣더니 표정이 심각해졌다.세쌍둥이를 낳는다는 것 자체도 위험이 큰데 지금은 한 명을 포기한다고 해도 여러 문제가 따라 진퇴양난인 상황이었다.하지만 그에게 있어 선택은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강지혁은 아이보다는 임유진이 훨씬 더 중요했으니까.애초에 임유진을 사랑하게 됐을 때부터 그는 이미 그녀가 임신이 힘들다는 사실과 어쩌면 둘 사이에는 영원히 아이가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때는 아예 상관이 없었고 지금은 살짝 아쉽긴 하지만 그럼에도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자신이 원하는 게, 자신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그럼 한 명을 포기할게요.”“싫어!”강지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임유진이 반대했다.“나는 아이 포기하기 싫어.”그러자 강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임유진을 노려보았다.“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알아! 하지만 어차피 한 명을 포기해도 세 명 다 유산하게 될 수도 있잖아. 그러면 차라리 세 명 다 살리는 방법으로 시도해보고 싶어.”만약 지금 아이를 한 명 포기하게 되면 임유진의 안전에는 어느 정도 보장이 생기지만 아이들이 위험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한 명도 포기하지 않고 낳으려고 하면 임유진과 아이들 모두 위험하게 된다.변호사라면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유리한지 알고 있어야 하는데 임유진은 지금 자신의 목숨으로 위험한 수를 던지려고 하고 있다.어쩌면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는 게, 자신만의 가정을 이루는 게 너무 간절한 탓일 수도 있다.임유진은 만약 여기서 한 명을 포기함으로써 나
“그럼, 당연하지.”이한이 헤실헤실 웃었다.“그런데 너는 다쳤으면 다쳤다고 왜 얘기를 안 하냐? 내가 네 일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들어야 해? 왜, 내가 있으면 유진 씨랑 감정을 쌓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았냐? 뭐가 됐든 그렇게 멋지게 구해줬는데 이번에야말로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겠지?”강현수는 시선을 내리고 그날 아침의 기억을 떠올렸다.대문에서 막 나왔을 때 임유진은 그 가녀린 몸으로 망설임 없이 차량 앞에 뛰어들었다.그때의 그녀는 창백하고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태임에도 그를 만나겠다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오로지 곽동현을 위해!강현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불사할 수 있는데 그녀는 곽동현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임유진은 곽동현에게 유리한 증거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곽동현의 말을 조건 없이 믿어주었다.대체 곽동현이 뭐라고 그녀가 그렇게 한단 말인가!강현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또다시 질투와 분노가 피어올랐다.그는 이번 기회에 임유진에게 똑똑히 알려줄 생각이다. 곽동현은 파렴치한 인간이고 그녀는 처음부터 곽동현 같은 걸 믿어서는 안 됐다는 사실을!“너 그 표정 뭐야? 설마... 아직도 유진 씨 마음을 얻지 못한 거야? 왜? 유진 씨가 여전히 지혁이를 못 잊겠대?”이한의 말에 강현수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이한은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어색하게 웃었다.“하하, 야, 농담인 거 알지? 지혁이랑 유진 씨랑 헤어진 지가 언젠데. 그리고 전에 클럽에서도 분위기 장난 아니었어. 유진 씨한테 얼마나 싸늘하게 대하는지 내가 다 살 떨리더라니까? 유진 씨를 완전히 내려놓은 게 분명해.”이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휴대폰에 알림이 울렸다.그는 평소 SNS를 해도 중요한 친구들만 팔로우하기에 지금처럼 메시지가 왔다는 건 자주 연락하는 친구들이 메시지를 보냈다는 뜻이었다.이한은 친구가 또 어떤 메시지를 보냈나 싶어 흥미 가득한 얼굴로 메시지를 확인했다.하지만 메시지를 확인 한 지 3초도
그 말에 이한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버렸다.사실 이 일은 그가 지금 얘기하지 않아도 강현수라면 금방 알게 될 사실이다.이 일은 감출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알겠어. 대신 마음의 준비부터 해. 그리고 나도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아직 몰라.”이한의 말에 강현수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한의 휴대폰으로 보게 될 내용이 영원히 알고 싶지 않은 무언가일까 봐.아니나 다를까 이한이 건넨 휴대폰을 본 강현수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강현수는 휴대폰을 거칠게 뺏어가더니 휴대폰 속 사진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피가 거꾸로 솟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강현수가 본 사진에는 두 남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꼭 커플인 것처럼 두 사람 모두 흰색 옷을 입고 있었다.두 남녀는 큰 홀의 대기 의자 같은 곳에 앉아 있었고 해당 사진은 캡처 사진이었다.그리고 사진 아래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도 달려있었다.[여러분, 구청에 혼인 신고하러 온 이 남자가 누군지 알아맞혀 보세요~! 제일 먼저 맞히는 사람한테는 선물도 드려용!]이한의 친구는 해당 캡처 사진을 이한에게 보내며 메시지까지 보냈다.[한아, 이거 아는 지인이 나한테 보낸 건데 사진 속 남자 강지혁 아니야? 강지혁 결혼해? 진짜?]강현수가 보고 있는 사진 속 남자는 강지혁이 확실했다. 그리고 강지혁 옆에 같이 찍힌 여자는 임유진이었다.‘구청이라고? 둘이 정말... 혼인 신고하러 갔단 말이야?’강현수는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버렸다.하지만 그러면서도 두 눈은 여전히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이한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서둘러 강현수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았다.“야, 이런 건 가짜인 경우가 많으니까 신경 쓰지 마! 이러다 괜히 회복하는데 영향이 가겠네.”강현수는 창백한 얼굴로 텅 비어버린 자신의 손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탁자 위에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그대로 임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두어
임유진이 좋아하는 건 곽동현일 텐데 왜 갑자기 강지혁과 결혼한 거지?배 속의 아이 때문인가?‘유진 씨한테 제대로 물어봐야겠어!’강현수는 통화를 마친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차 키를 집어 들고 현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야야, 너 어디가?”그때 이한이 다급하게 달려와 그를 막아섰다.“유진 씨한테 가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확실히 물어봐야겠어.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야.”강현수의 얼굴은 지금 불안과 초조함으로 가득했다.그는 지금 임유진이 그의 차량을 막아선 그날 아침의 광경만 떠올랐다.그때 그는 곽동현을 향한 질투 때문에 결국 그녀를 무시했고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얼굴에는 절망만이 남아있었다.그때 뭔가 놓친 게 있었던 걸까?강현수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아직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무슨! 차 키 줘. 차라리 내가 몰게. 같이 가.”이한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뭐가 됐던 강현수에게 그 사진을 보여준 건 자신이니 책임을 져야만 했다.그리고 오랜 친구 사이인 강지혁과 강현수가 임유진 때문에 크게 싸우기라도 할까 봐 두렵기도 했다.강지혁이 임유진 때문에 강현수의 목을 조른 장면이 아직 눈에 선했으니까.이한은 강현수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순식간에 차 키를 빼앗았다.그리고 잠시 후, 은색 승용차 한 대가 별장에서 빠져나왔다.한편, 검사를 마치고 나온 임유진은 강지혁이 자신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검사는 다 마쳤어?”강지혁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응. 검사 결과는 내일 나올 거래.”임유진은 말을 마친 후 휴대폰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하지만 강지혁은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너, 내 번호 지웠어?”그 말에 임유진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응.”헤어진 후 그녀는 강지혁과 철저하게 끝내기 위해 번호를 지워버렸다.하지만 기억은 휴대폰처럼 지우고 싶다고 지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번호를 지웠음에도 임유진은 그의 두 개 번호를
드디어 임유진을 손에 넣었다.이제 그녀는 명실상부 그의 아내다.나라가 인정하는 관계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그 덕에 그녀를 옆에 묶어둘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이 그와 결혼을 결심한 게 한지영 때문이든 아이 때문이든 아무래도 좋았다.그에게는 임유진이 옆에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충분했으니까.“만약 네가 그 언젠가 또다시 나를 떠나면 그때는 네 날개를 부러트려서라도 내 옆에 둘 거야. 네가 날 원망해도 상관없어. 네가 전처럼 다시 무릎을 꿇어도 절대 안 놔줘. 무슨 짓을 해서든 내 옆에 묶어둘 거야.”강지혁은 자고 있는 임유진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말 속에는 경고의 의미도 담겨있었고 애정도 담겨있었다.그는 말을 마친 후 임유진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그녀를 보는 그의 두 눈에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지독한 사랑이 뚝뚝 흘러나왔다.눈앞에 있는 여자가 이렇게 간절해질 줄은 강지혁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깊은 상처를 준 여자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놓아버릴 수가 없었다. 여전히 그녀를 원하고 또 원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당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품었던 감정만큼 깊은지, 아니면 그 이상인지 아직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결말이 아버지와 같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그때, 평온하게 달리던 차량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기사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임유진은 갑작스럽게 멈춘 차 때문에 그만 잠에서 깨버렸다.“무슨 일이야?”강지혁이 기사를 향해 물었다.“그게 차 한 대가 위험하게 달라붙는 바람에 차를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기사가 서둘러 해명했다.그 말에 임유진은 깜짝 놀라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은색 승용차를 보고는 흠칫했다.그건 강현수의 차였다.강현수는 강지혁의 차량이 멈춘 것을 확인한 후 이내 조수석에서 내렸다.임유진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강현수를 보고 있던 그때 두꺼운 팔이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감싸왔다.이에 임유진
임유진이 입고 있는 옷은 사진에서 봤던 것과 똑같았다.강현수의 시선이 임유진을 넘어 차 안에 있는 강지혁에게로 향했다.뒷좌석 차 문이 닫히지 않은 탓에 강현수는 강지혁이 입고 있는 옷도 사진에서 봤던 것과 똑같다는 것을 똑똑히 확인하게 되었다.임유진은 강현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고는 두어 걸음을 남겨두고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나 찾으러 온 거예요?”임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강지혁이랑 오늘 혼인 신고했다는 거... 사실입니까?”강현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네.”“왜요?”강현수가 힘겹게 두 글자를 뱉어냈다.“강지혁의 아이를 임신했어요.”상당히 격앙된 강현수와 달리 임유진은 무척이나 평온했다.강현수의 얼굴은 그녀의 말이 들리자마자 하얗게 질려버렸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로 그녀의 복부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의 말이 다 사실이었다는 건가?사실 강현수는 아까 어쩌면 강지혁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그건 거짓말이 아닌 사실이었다.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다른 남자와 혼인신고를 하고 그 남자의 애까지 뱄다.“만약 강지혁이 아이로 유진 씨를 협박하고 있는 거라면 내가...”강현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유진이 그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협박당한 적 없어요. 내가 원한 거예요. 내가 강지혁의 옆에 있겠다고 했어요.”협박당한 것이 아닌 그녀가 원한 거라는 말에 강현수의 심장이 욱신거렸다.“강지혁을 사랑해요?”강현수가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그 질문에 임유진이 침묵했다.사실 그녀도 자신이 강지혁을 아직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 몰랐으니까.강지혁과 연인이었을 때의 감정이 산산이 조각나버린 지금, 다시 원래대로 돌리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강지혁을 사랑하지 않는 거죠? 그렇죠? 그런데 왜 유진 씨가 원한 거라는 말을 해요.”강현수가 다급하게 말했다.“내가 도와줄게요. 사실은 강지혁한테서 도망치고 싶은 거면 내가 유진 씨를 도와줄게요.”임유진은
그래서 강현수는 배여진이 자신을 ‘현수야’라고 다정하게 부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 호칭을 기억 속 깊이 묻어두었다.그런데 지금 임유진이 그를 ‘현수야’라고 불렀다.대체 왜?순간 강현수의 머릿속으로 지난번 병원에서 그녀가 ‘현수야’라고 부르며 그를 구해준 사람이 배여진이 아닌 자신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당시 그는 곽동현을 위해 임유진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그런데...‘설마... 설마...’강현수는 이 이상 상상하기 두려웠다.그때 임유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나 구해준 거 정말 고마워. 그리고 날 좋아해 줘서 그것도 정말 고마워. 하지만 나는 네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못해. 나는 널 한 번도 이성적으로 좋아해 본 적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나를 향한 마음을 이만 접어줬으면 좋겠어. 나한테 괜한 감정 낭비하지 마. 네가 내 목숨을 구해준 건 보답할 수 있는 날이 오면 반드시 보답할게.”“나는 보답 같은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강현수는 임유진과 두 눈을 마주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유진 씨예요? 내가 찾고 있던 사람 유진 씨예요...? 대답해 봐요.”“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임유진이 담담하게 얘기했다.“유진 씨죠? 내가 어렸을 때 만났던 여자애, 유진 씨죠?!”강현수가 임유진의 손을 잡기 위해 팔을 뻗었다.하지만 그때 누군가가 먼저 팔을 뻗어 그의 손을 막아버렸다.그리고 임유진은 뒤편에서 다가온 남자에 의해 허리를 잡혀버렸고 등은 남자의 가슴팍에 찰싹 기대게 되었다.익숙한 체향이 순식간에 그녀를 감쌌다.“강현수, 내 아내한테 뭐 하는 짓이야.”강지혁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공중에 울려 퍼졌다.강현수는 이에 흠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강지혁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아내라는 두 글자가 이렇게도 거슬렸던 단어였던가.“나는 그냥 유진 씨가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진작 찾아놓고 왜 자꾸 애먼 사람을 들쑤셔.”강지혁의 담담한 목소리에는 언뜻 조롱하는 듯한
이에 강지혁이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그대로 강현수에게 손을 뻗었다.하지만 그때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덥석 잡았다.“왜, 내가 강현수한테 손대는 게 싫어?”강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강현수는 나랑 아이의 목숨을 살려줬어.”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이 움찔하더니 다시 천천히 팔을 거두어들였다.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현수를 바라보았다.“만약 내가 맞다고 하면 이번에는 내 말 믿어줄 거야?”강현수의 몸이 움찔 떨렸다.“역시 너였던 거야. 그렇지?!”“예전에 여자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산속에서 놀다가 유괴당했다가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남자아이를 한 명 발견했어.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줘야겠다고 생각했지. 산속에서 하룻밤도 보내고 위험하고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두 사람은 그 누구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어. 서로한테 의지하며 결국 성공적으로 구출됐지.”임유진은 이야기 형식으로 마치 자신은 제삼자인 양 어렸을 적 이야기를 꺼냈다.강현수는 그녀가 말을 하면 할수록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마음속 깊은 곳에서 ‘제발 그만 말해’라는 말이 끊임없이 들려왔지만 그는 도망치지 않고 자리에 선 채 임유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남자아이는 다리를 다쳤고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를 병원까지 데려다줬어. 그때 남자아이가 여자아이한테 반드시 너를 찾아가겠다고 했고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에게 작은 팔찌를 건네줬어. 남자아이가 늦게 찾아올 수도 있으니 약속의 증표라고 어른이 돼서 서로를 기억하지 못해도 팔찌로 서로를 확인하자고 했지.”강현수는 지금 숨 쉬는 것조차 힘이 들었고 심장은 계속 욱신거렸다.어렸을 적 산속에서 함께했던 여자아이는 임유진이 맞다.임유진이 확실했다.임유진은 당시 강현수가 상상했던 그대로였다.그런데 왜 그때는 몰라봤을까.그렇게도 마음이 동했는데, 그렇게도 그녀에게 끌리고 있었는데, 왜 못 알아봤을까!왜! 왜!왜 임유진을 놓쳤을까.수많은 의문이 그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그리고 그 많은 질문을 뚫고 나온 말은 이거였다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