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강현수는 임유진의 손을 잡고 룸 밖으로 걸어 나갔다.강지혁은 떠나는 강현수와 임유진의 뒷모습을 힐끔 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이한을 향해 말했다.“네 사람들 내보내.”“응? 그럼 이 둘은...”이한은 손가락이 다친 여성과 아직 바닥에 꿇고 있는 이 사장을 가리키며 물었다.“둘만 빼고 내보내.”그 말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웨이터들과 다른 여자들에게 전부 다 룸에서 멀리 떨어질 것을 명했다.몇 초 후 룸 안에는 강지혁과 이한, 손가락을 다친 여성과 이 사장, 그리고 고이준과 강지혁의 경호원들만 남았다.강지혁은 여성의 손을 다시금 잡더니 붕대가 감긴 그녀의 손가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이에 여성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한은 미간을 찌푸렸다.‘설마 진짜 저 여자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야?’그때 굳게 닫혔던 강지혁의 입이 열리고 이내 그 입에서 무시무시한 말이 흘러나왔다.“그렇게도 손톱이 뽑히는 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 소원대로 해주지.”강지혁은 말을 마치고는 여성의 손을 다시 내려놓았다.그 말에 당황한 여성은 얼굴이 사색이 돼서 물었다.“강 대표님...? 저... 방금 한 말 농담이시죠? 왜 제가 손톱을...”“왜냐고?”강지혁은 그녀에게 되묻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옆에 있던 고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고 비서, 왜 손톱이 뽑혀야 하는지 이 여자한테 알려줘.”그 말에 고이준은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여성의 앞으로 다가가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친척 중에 감방살이했던 분이 마침 임유진 씨와 같은 방이었죠? 아마 그 친척분한테서 들었을 겁니다. 임유진 씨의 손톱이 뽑힌 적 있었다는 사실을요. 그걸 듣고 기회다 싶어 평소 친분이 있었던 이 사장한테 부탁했겠죠. 강 대표님 눈에 들 수 있게 도와달라고. 어떻게, 이제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된 것 같은데.”강지혁이 임유진과 연인이었다는 건 상류계층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공공연히 다 알려진 사실이고 서민들도
이한은 이에 조롱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는 네 스스로가 대단한 가치라도 있는 줄 아나 보지? 그리고 이따위 멍청한 연극을 계획하기 전에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단단히 각오했었어야지.”그는 말을 마치고는 여자의 손을 차갑게 뿌리쳐버렸다. 그리고 아무런 미련도 없이 유유하게 룸을 빠져나갔다....임유진을 차에 태워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길, 강현수는 핸들을 꽉 잡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만약 이한 그놈이 또다시 쓸데없는 일로 유진 씨 찾아가면 그때는 나한테 바로 연락 줘요.”임유진은 그 말에 잠깐 침묵하더니 손가락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어제... 버스에서 말이에요. 그냥 날 깨우지 그랬어요.”“아, 영상 봤어요? 곤히 자고 있길래 깨우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설마 그 모습을 누가 찍고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그걸 인터넷에 올리기까지... 만약 그 영상이 신경 쓰이면 지금 당장 모든 영상을 내리도록 지시할게요.”강현수는 도촬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예민한 사람이었지만 어제 버스 안에서는 온 신경을 전부 다 임유진에게 쏟는 바람에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어제 그녀가 버스에서 졸았던 시간은 고작 반 시간 남짓이었지만 강현수에게 그 반 시간은 그 어느 순간보다 더 소중한 시간이었다.심지어 영상을 찍은 사람에게 소중한 추억을 남겨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강현수는 영상 속에 찍힌 자신의 얼굴을 보며 이토록 가슴이 따뜻해지고 또 설렘으로 부풀어 올랐던 순간이 또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네, 그렇게 주세요.”비록 얼굴 전체가 찍힌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생판 모르는 타인이 자신의 모습이 찍힌 영상을 보고 있다는 건 많이 불쾌한 일이었다.그때 임유진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가 탁유미라는 것을 확인한 임유진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유진 씨, 혹시 지금 40만 원만 송금해줄 수 있어요? 급하게 쓸 데가 있어서요.”“언니, 혹시 무슨 일 있어요?”탁유미는 평소와 달리 목소리에 힘도 없었
“고맙다라... 난 너한테서 그런 말이 듣고 싶은 게 아니야...”강현수는 언제나 타인과는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왔었다. 그 때문에 친구인 이한도 가끔은 그에게 너무 차갑다며 이유 모를 벽이 느껴진다고까지 했었다.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강현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쉽게 곁을 허락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그러나 막상 자신이 누군가의 바운더리 밖에서 들어가지 못하자 조바심이 나고 초조해 났다.강현수는 계속해서 임유진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임유진은 좀처럼 그와의 거리를 좁히려고 하지 않았고 일정한 선을 그어 그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그에게 지어주는 미소도 그저 예의상 짓는 미소일 뿐 큰 의미는 없었다.“대체 어떻게 해야 너랑 더 가까워질 수 있는지 알려줘, 유진아...”...임유진은 헐레벌떡 병원 안으로 들어가 윤이의 이름을 대고 간호사에게서 병실 번호를 들은 다음 다시 발걸음을 돌려 빠르게 거기로 뛰어갔다.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윤이는 이미 곤히 자고 있었다.하지만 평온한 아이 얼굴과는 달리 다리에는 두꺼운 붕대가 감겨 있었고 얼굴에는 멍이 들어있었다.누가 봐도 다른 누군가에게 맞은 얼굴이었다.그리고 병상 바로 옆에는 탁유미의 엄마인 김수영이 빨개진 눈가로 윤이를 바라보고 있었다.임유진은 병상 가까이 다가가 윤이가 깨지 않게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아주머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윤이는 괜찮아요?”“왔어요?”김수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유치원에서 아이들이랑 싸웠어요. 검사는 했고 의사 선생님도 큰 문제는 없대요.”김수영의 말에 임유진은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온순한 성격의 윤이가 누군가와 싸웠다는 게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윤이는 진심으로 누군가를 싫어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그 사람을 무시하는 아이지 손부터 먼저 나갈 아이는 절대 아니었다.“싸운 이유는요?”임유진의 질문에 김수영은 더 크게 한숨을 쉬었다.“유미 때문에요. 유치원
“언니, 아니면 내가 지영이한테 부탁해서 윤이 유치원 바꿔 달라고 할까요?”임유진이 물었다.지금쯤이면 유치원 전체에 탁유미의 일이 다 퍼졌을 것이고 앞으로 또다시 오늘 같은 일이 생길 수 있다.임유진은 윤이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걸 원하지 않는다.이미 벌어진 사실을 바꿀 수 없다면 지금 해야 할 건 윤이의 상황을 바꿔주는 것뿐이다.하지만 임유진의 제안에 탁유미는 대답이 아닌 다른 것을 물었다.“유진 씨, 만약 내가 사건을 뒤집으려고 한다면 결백을 받을 수 있을 확률이 어느 정도 될까요?”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30%일 거예요.”그 말에 탁유미는 쓰게 웃었다.고작 30%...이 적은 확률로 정말 사건을 뒤집을 수 있을까?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단 1%라도 사건을 뒤집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탁유미는 그럴 수 없었다.“시간이 꽤 지난 사건이라 당시 언니한테 유리한 증거들이 다 사라졌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뒤집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사건을 다시 자세하게 훑어보고 새로운 증거를 찾아내면 돼요.”임유진은 당시 탁유미의 사건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전에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탁유미의 사건은 허술한 구석이 많았고 그 점을 확실하게 찌르면 어쩌면 판도가 바뀔 수도 있다. 만약 거기에 새로운 증거까지 생겨나면 사건을 뒤집을 확률이 더더욱 커지게 되고 말이다.“만약 정말 사건을 뒤집으려 하면 기사화되어 사람들이 다 알게 되겠죠? 그러면 그 영향으로 윤이까지 거론될 수 있고요?”임유진은 잠깐 멈칫했다.“그렇게 되는 건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하겠지만... 이경빈 씨가 이름이 알려진 사업가라 막는 것이 쉽지는 않을 거예요.”탁유미는 두 손을 꽉 말아 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줘요.”정말 재심 절차를 밟게 된다면 그때는 꼭 무죄를 받아야 내야 한다. 만약 패소하게 되면 그때는 전 국민이 그녀에게 비난을 쏟아낼 테니까.그리고 그렇게 되면 윤이는 아마 지금보다 더 큰 상
“너는 억울한 피해자야!”김수영이 분개하며 말했다.“죄지은 얼굴을 해야 할 건 네가 아니라 공수진이야! 차라리 이럴 거면 그냥 재심 청구해. 유진 씨도 확률이 30%는 된다잖아.”탁유미는 그 말에 그저 가만히 윤이만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한참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엄마, 내가 지금 좀 많이 피곤해서요. 윤이 옆에는 엄마가 대신 있어 줘요. 나는 이만 쉬러 갈게요.”김수영은 그 말에 조금 의아했다.탁유미라면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윤이 옆에 있어 주려 했을 테니까.하지만 이내 요즘 포장마차 때문에 낮과 밤이 거의 바뀐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기도 해 김수영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제대로 자지도 못했을 텐데 빨리 돌아가서 쉬어.”“네,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요.”탁유미는 가방을 챙겨 병실을 나왔다.하지만 병원에서 나온 후 그녀는 집 방향이 아닌 반대편으로 걸어가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탁유미예요. 윤이 일로 이경빈이랑 할 얘기가 있어요. 연락처를 알려주는 게 불편하시면 제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대신 전해주세요. 꼭 오늘 만나야 해요.”그녀가 건 번호는 양육권 소송 때문에 고용된 이경빈 쪽 변호사의 번호였다.전에 소장을 받았을 때 이경빈 변호사의 명함도 같이 동봉되어 있었다.“네, 알겠습니다. 금방 다시 연락 드리죠.”변호사는 정중하게 얘기를 건넨 후 전화를 끊었다.탁유미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가 한 대 한 대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텅 빈 눈으로 바라보았다.10월의 찬 바람이 매섭게 불며 그녀의 볼을 스쳐 지나갔다.그렇게 5분 정도 지나자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전화를 건 사람은 아까 그 변호사였다.“이경빈 씨께서 알겠다고 하셨습니다.”변호사는 이경빈이 있는 호텔 이름을 알려주며 거기로 가면 된다고 얘기했다.반 시간 후, 탁유미는 택시를 타고 호텔 앞에 도착했다.이곳은 S 시에서 꽤 이름 있는 호텔이고 지난번 이경빈이 그녀를 데리고 왔던 곳이기도 했다.그리고 오늘,
탁유미는 이를 꽉 깨문채 방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이경빈은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탁자 위에 있는 커피를 마셨다.“그래서, 할 얘기가 뭔데? 설마 양육권 포기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건 아니지?”탁유미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부탁하면 포기해 줄 거야? 윤이만 포기해주면 뭐든 다 할게.”“뭐든 다 하겠다고?”“응.”“네가 지금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이경빈이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불임이 되어버린 수진이한테 아이라도 낳아주게? 하지만 그것도 윤이를 데려오면 해결되는 문제야. 그런데 네가 이 상황에서 뭘 더 할 수 있는데?”탁유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지금의 그녀는 그에게 자비를 요구할 명분도 없었고 조건을 내밀 처지도 되지 않았다.탁유미는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너 아직 나 원망하잖아. 우리 아빠가 그때 너희 집안을 벼랑 끝으로 내몬 것 때문에. 네가 나한테 접근한 것도 나한테 복수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아직 복수 다 못한 거면 지금 해. 때리든 뭘 하든 뭐든 받아줄 테니까.”그녀는 윤이만 옆에 둘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윤이는 그녀에게 정신적 지주자 다 꺼져가는 생명에 불을 밝혀준 유일한 숨구멍이니까.이경빈은 탁유미를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았다.그의 집안은 그때 탁유미의 아버지 때문에 하마터면 하루아침에 쫄딱 망할 뻔했다.결과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이경빈은 그녀의 아버지를 증오하고 또 증오했다. 그래서 성인이 되고 바로 복수하려고 찾아갔었다.하지만 그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탁유미의 아버지는 이미 10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결국 복수 대상을 잃은 이경빈은 모든 원망과 분노를 탁유미에게로 돌렸다.하지만 그녀와 연애하는 것으로 시작했던 복수는 마지막이 그렇게 통쾌하지 않았다.이경빈은 차라리 그때 연애가 아닌 다른 방법을 택했으면 지금쯤 복수고 뭐고 다 잊고 탁유미라는 여자도 진작에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복수? 그럼 윤이를 네 옆에서 강제로
너라는 존재는 이제 나한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처럼 말이다.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에 마음이 아파 났다. 그라는 사람을 내려놓은 지 오라지만, 더 이상 그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지만 그럼에도 범죄자라는 입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가슴이 미어졌다.“나는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지 않았어. 계단에서 멋대로 구른 건 공수진이야. 내 말 좀 믿어주면 안 돼...?”탁유미는 그에게 믿어달라고 애원했다.이경빈이 자신을 믿어주기를, 자신을 범죄자로 보지 말아주기를 빌었다.물론 이경빈이 믿든 믿지 않든 그녀가 감옥살이한 사실은 변하지 않고 법적으로 전과자가 되었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하지만 탁유미는 그 사실이 윤이에게 상처로 돌아갈까 봐 무서웠다.이경빈은 그녀의 말에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지었다.“믿어달라고? 너를? 탁유미, 너는 정말 양심이라는 게 없어? 수진이는 너 때문에 아이를 잃었고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렸어! 그런데 한다는 말이 뭐? 너를 믿어달라고? 가슴에 손을 얹고 네 스스로에게 물어봐. 지금 네가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게 맞는지!”“정말 내가 한 거 아니야.”탁유미는 이경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이경빈, 눈에 보이는 게 꼭 진실은 아니야.”“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그날 내가 봤던 장면이 다 거짓이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한 증언도 거짓이고?”이경빈이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탁유미는 그런 그를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실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 아니다. 5년 전 공수진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직후 탁유미는 바로 그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사실대로 얘기했다.하지만 그는 그녀를 벌레 보듯 쳐다보며 아예 귀를 닫아버렸다.그리고 지금도 역시 그는 변한 것이 없다. 그는 여전히 탁유미의 말을 믿지 않고 있다.하긴 그에게 있어 그녀는 언제나 원수의 딸일 뿐이었으니 믿어달라고 하는 게 오히려 멍청한 짓일 지도 모른다.하지만...“나는 누군가를 해쳐본 적도 없
이경빈은 탁유미에게 네 두 눈은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하며 이제껏 봐왔던 사람 중에서 그녀의 제일 예쁜 눈이라고 항상 얘기했었다.심지어 그는 잠자리를 가질 때도 탁유미의 눈가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매만지곤 했었다.그리고 탁유미는 그가 그럴 때마다 자신의 눈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누구보다 그녀의 눈을 좋아했던 이경빈이 그녀에게 스스로 그 눈을 찌르라고 하고 있다.탁유미는 천천히 눈을 뜬 후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았다.이경빈은 그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거리가 가까운 탓인지 어쩐지 사귀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다시 사랑하게 될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이경빈은 전처럼 그녀의 허리를 다정하게 감지 않을 테고 그녀 역시 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며 애교를 부리지 않을 테니까.탁유미는 미친 듯이 사랑하고 또 미친 듯이 원망했던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잘생겼다. 이런데 어떻게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 얼굴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순간 탁유미는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병실에 있을 때 윤이 얼굴을 조금 더 많이 봐둘 걸 그랬다며 쓰게 웃었다.“할게.”탁유미는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와 담담하게 두 글자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오른손을 들어 검지를 쫙 핀 채 눈을 향해 가져갔다.이경빈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눈을 크게 뜨고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녀의 오른손을 덥석 잡았다. 순간 심장이 그대로 멈춰버리는 줄 알았다.그리고 그는 오른손이 묶여버린 탁유미가 왼손을 쓰게 될까 봐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그녀의 왼손도 꽉 잡았다.탁유미의 두 눈은... 생채기 하나 없이 모두 멀쩡하다.이경빈은 그녀의 두 눈을 확인하고는 가장 먼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빠르게 반응한 자신의 두 손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었다.만약 1초라도 더 늦었으면 탁유미의 눈에서는 지금쯤 피가 철철 흘러나왔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