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아니면 내가 지영이한테 부탁해서 윤이 유치원 바꿔 달라고 할까요?”임유진이 물었다.지금쯤이면 유치원 전체에 탁유미의 일이 다 퍼졌을 것이고 앞으로 또다시 오늘 같은 일이 생길 수 있다.임유진은 윤이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걸 원하지 않는다.이미 벌어진 사실을 바꿀 수 없다면 지금 해야 할 건 윤이의 상황을 바꿔주는 것뿐이다.하지만 임유진의 제안에 탁유미는 대답이 아닌 다른 것을 물었다.“유진 씨, 만약 내가 사건을 뒤집으려고 한다면 결백을 받을 수 있을 확률이 어느 정도 될까요?”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30%일 거예요.”그 말에 탁유미는 쓰게 웃었다.고작 30%...이 적은 확률로 정말 사건을 뒤집을 수 있을까?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단 1%라도 사건을 뒤집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탁유미는 그럴 수 없었다.“시간이 꽤 지난 사건이라 당시 언니한테 유리한 증거들이 다 사라졌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뒤집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사건을 다시 자세하게 훑어보고 새로운 증거를 찾아내면 돼요.”임유진은 당시 탁유미의 사건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전에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탁유미의 사건은 허술한 구석이 많았고 그 점을 확실하게 찌르면 어쩌면 판도가 바뀔 수도 있다. 만약 거기에 새로운 증거까지 생겨나면 사건을 뒤집을 확률이 더더욱 커지게 되고 말이다.“만약 정말 사건을 뒤집으려 하면 기사화되어 사람들이 다 알게 되겠죠? 그러면 그 영향으로 윤이까지 거론될 수 있고요?”임유진은 잠깐 멈칫했다.“그렇게 되는 건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하겠지만... 이경빈 씨가 이름이 알려진 사업가라 막는 것이 쉽지는 않을 거예요.”탁유미는 두 손을 꽉 말아 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줘요.”정말 재심 절차를 밟게 된다면 그때는 꼭 무죄를 받아야 내야 한다. 만약 패소하게 되면 그때는 전 국민이 그녀에게 비난을 쏟아낼 테니까.그리고 그렇게 되면 윤이는 아마 지금보다 더 큰 상
“너는 억울한 피해자야!”김수영이 분개하며 말했다.“죄지은 얼굴을 해야 할 건 네가 아니라 공수진이야! 차라리 이럴 거면 그냥 재심 청구해. 유진 씨도 확률이 30%는 된다잖아.”탁유미는 그 말에 그저 가만히 윤이만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한참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엄마, 내가 지금 좀 많이 피곤해서요. 윤이 옆에는 엄마가 대신 있어 줘요. 나는 이만 쉬러 갈게요.”김수영은 그 말에 조금 의아했다.탁유미라면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윤이 옆에 있어 주려 했을 테니까.하지만 이내 요즘 포장마차 때문에 낮과 밤이 거의 바뀐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기도 해 김수영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제대로 자지도 못했을 텐데 빨리 돌아가서 쉬어.”“네,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요.”탁유미는 가방을 챙겨 병실을 나왔다.하지만 병원에서 나온 후 그녀는 집 방향이 아닌 반대편으로 걸어가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탁유미예요. 윤이 일로 이경빈이랑 할 얘기가 있어요. 연락처를 알려주는 게 불편하시면 제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대신 전해주세요. 꼭 오늘 만나야 해요.”그녀가 건 번호는 양육권 소송 때문에 고용된 이경빈 쪽 변호사의 번호였다.전에 소장을 받았을 때 이경빈 변호사의 명함도 같이 동봉되어 있었다.“네, 알겠습니다. 금방 다시 연락 드리죠.”변호사는 정중하게 얘기를 건넨 후 전화를 끊었다.탁유미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가 한 대 한 대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텅 빈 눈으로 바라보았다.10월의 찬 바람이 매섭게 불며 그녀의 볼을 스쳐 지나갔다.그렇게 5분 정도 지나자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전화를 건 사람은 아까 그 변호사였다.“이경빈 씨께서 알겠다고 하셨습니다.”변호사는 이경빈이 있는 호텔 이름을 알려주며 거기로 가면 된다고 얘기했다.반 시간 후, 탁유미는 택시를 타고 호텔 앞에 도착했다.이곳은 S 시에서 꽤 이름 있는 호텔이고 지난번 이경빈이 그녀를 데리고 왔던 곳이기도 했다.그리고 오늘,
탁유미는 이를 꽉 깨문채 방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이경빈은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탁자 위에 있는 커피를 마셨다.“그래서, 할 얘기가 뭔데? 설마 양육권 포기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건 아니지?”탁유미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부탁하면 포기해 줄 거야? 윤이만 포기해주면 뭐든 다 할게.”“뭐든 다 하겠다고?”“응.”“네가 지금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이경빈이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불임이 되어버린 수진이한테 아이라도 낳아주게? 하지만 그것도 윤이를 데려오면 해결되는 문제야. 그런데 네가 이 상황에서 뭘 더 할 수 있는데?”탁유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지금의 그녀는 그에게 자비를 요구할 명분도 없었고 조건을 내밀 처지도 되지 않았다.탁유미는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너 아직 나 원망하잖아. 우리 아빠가 그때 너희 집안을 벼랑 끝으로 내몬 것 때문에. 네가 나한테 접근한 것도 나한테 복수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아직 복수 다 못한 거면 지금 해. 때리든 뭘 하든 뭐든 받아줄 테니까.”그녀는 윤이만 옆에 둘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윤이는 그녀에게 정신적 지주자 다 꺼져가는 생명에 불을 밝혀준 유일한 숨구멍이니까.이경빈은 탁유미를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았다.그의 집안은 그때 탁유미의 아버지 때문에 하마터면 하루아침에 쫄딱 망할 뻔했다.결과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이경빈은 그녀의 아버지를 증오하고 또 증오했다. 그래서 성인이 되고 바로 복수하려고 찾아갔었다.하지만 그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탁유미의 아버지는 이미 10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결국 복수 대상을 잃은 이경빈은 모든 원망과 분노를 탁유미에게로 돌렸다.하지만 그녀와 연애하는 것으로 시작했던 복수는 마지막이 그렇게 통쾌하지 않았다.이경빈은 차라리 그때 연애가 아닌 다른 방법을 택했으면 지금쯤 복수고 뭐고 다 잊고 탁유미라는 여자도 진작에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복수? 그럼 윤이를 네 옆에서 강제로
너라는 존재는 이제 나한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처럼 말이다.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에 마음이 아파 났다. 그라는 사람을 내려놓은 지 오라지만, 더 이상 그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지만 그럼에도 범죄자라는 입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가슴이 미어졌다.“나는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지 않았어. 계단에서 멋대로 구른 건 공수진이야. 내 말 좀 믿어주면 안 돼...?”탁유미는 그에게 믿어달라고 애원했다.이경빈이 자신을 믿어주기를, 자신을 범죄자로 보지 말아주기를 빌었다.물론 이경빈이 믿든 믿지 않든 그녀가 감옥살이한 사실은 변하지 않고 법적으로 전과자가 되었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하지만 탁유미는 그 사실이 윤이에게 상처로 돌아갈까 봐 무서웠다.이경빈은 그녀의 말에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지었다.“믿어달라고? 너를? 탁유미, 너는 정말 양심이라는 게 없어? 수진이는 너 때문에 아이를 잃었고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렸어! 그런데 한다는 말이 뭐? 너를 믿어달라고? 가슴에 손을 얹고 네 스스로에게 물어봐. 지금 네가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게 맞는지!”“정말 내가 한 거 아니야.”탁유미는 이경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이경빈, 눈에 보이는 게 꼭 진실은 아니야.”“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그날 내가 봤던 장면이 다 거짓이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한 증언도 거짓이고?”이경빈이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탁유미는 그런 그를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실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 아니다. 5년 전 공수진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직후 탁유미는 바로 그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사실대로 얘기했다.하지만 그는 그녀를 벌레 보듯 쳐다보며 아예 귀를 닫아버렸다.그리고 지금도 역시 그는 변한 것이 없다. 그는 여전히 탁유미의 말을 믿지 않고 있다.하긴 그에게 있어 그녀는 언제나 원수의 딸일 뿐이었으니 믿어달라고 하는 게 오히려 멍청한 짓일 지도 모른다.하지만...“나는 누군가를 해쳐본 적도 없
이경빈은 탁유미에게 네 두 눈은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하며 이제껏 봐왔던 사람 중에서 그녀의 제일 예쁜 눈이라고 항상 얘기했었다.심지어 그는 잠자리를 가질 때도 탁유미의 눈가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매만지곤 했었다.그리고 탁유미는 그가 그럴 때마다 자신의 눈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누구보다 그녀의 눈을 좋아했던 이경빈이 그녀에게 스스로 그 눈을 찌르라고 하고 있다.탁유미는 천천히 눈을 뜬 후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았다.이경빈은 그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거리가 가까운 탓인지 어쩐지 사귀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다시 사랑하게 될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이경빈은 전처럼 그녀의 허리를 다정하게 감지 않을 테고 그녀 역시 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며 애교를 부리지 않을 테니까.탁유미는 미친 듯이 사랑하고 또 미친 듯이 원망했던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잘생겼다. 이런데 어떻게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 얼굴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순간 탁유미는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병실에 있을 때 윤이 얼굴을 조금 더 많이 봐둘 걸 그랬다며 쓰게 웃었다.“할게.”탁유미는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와 담담하게 두 글자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오른손을 들어 검지를 쫙 핀 채 눈을 향해 가져갔다.이경빈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눈을 크게 뜨고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녀의 오른손을 덥석 잡았다. 순간 심장이 그대로 멈춰버리는 줄 알았다.그리고 그는 오른손이 묶여버린 탁유미가 왼손을 쓰게 될까 봐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그녀의 왼손도 꽉 잡았다.탁유미의 두 눈은... 생채기 하나 없이 모두 멀쩡하다.이경빈은 그녀의 두 눈을 확인하고는 가장 먼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빠르게 반응한 자신의 두 손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었다.만약 1초라도 더 늦었으면 탁유미의 눈에서는 지금쯤 피가 철철 흘러나왔을 테니까.“
하지만 다급하게 말리는 걸 보면 이경빈은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꼭 나한테서 윤이를 뺏어가야 직성이 풀리겠어?”탁유미는 이경빈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이경빈은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아버지로서 아들의 양육권을 원하는데 죄책감 가질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그래. 난 윤이를 꼭 데리고 올 거야. 네 옆에 있으면 윤이는 고생만 하게 될 게 뻔하니까. 너는 윤이한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 그깟 포장마차 수익으로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없다고, 알아?”이경빈이 또다시 그녀를 다그쳤다.이에 탁유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알겠어.”그러고는 차분하게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그에게 꽉 잡힌 두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이 손 좀 풀어줄래? 네가 약속을 깨버린 이상 나도 내 눈 찌를 생각 없어.”이경빈은 그 말에 천천히 손을 풀어주었다.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손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손바닥뿐만 아니라 그의 등줄기에도 식은땀이 흘러내렸다.탁유미는 지난번에 복부를 찔렀을 때처럼 또다시 그를 심장을 철렁하게 했고 또다시 손에 땀을 쥐게 했다.탁유미는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거리가 꽤 많이 벌어졌을 때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갈게.”그러고는 미련 없이 뒤돌아 문을 향해 걸어갔다.그녀의 뒷모습은 바람이 불면 금세 날아갈 것 같았다.이경빈은 심각하게 마른 듯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사실 아까 탁유미의 손목을 잡았을 때 지난번보다 더 말랐다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그때도 말랐지만 지금은 거의 뼈만 붙어있는 것 같았다.이경빈은 순간 아까 그런 어마어마한 행동을 해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던 탁유미의 얼굴이 떠올랐다.자신은 아직도 심장이 쿵쿵 뛰는데 그녀는 너무나도 평온했다.그는 그게 기분이 나쁘고 심지어 심장이 자꾸 찔린 것처럼 아파 났다.탁유미는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가 문고리를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지금 몸으로 양육권을 가지려고 하고 있다.대체 언제부터 이딴 제안을 스스럼없이 하게 된 거지?이경빈은 잔뜩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좋아. 네가 지금 당장 여기서 옷을 벗으면 생각해 볼게.”그가 이런 말을 한 건 단지 그녀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서였다.하지만 탁유미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알겠다고 한 뒤 바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이에 이경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분노를 터트렸다.“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알아.”탁유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녀는 이경빈이 단지 자신을 욕보이기 위해 이런 제안을 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말이 모두 진짜가 아니라고 해도 그녀는 너무 간절했다.그래서 그가 변심이라도 할까 봐 손을 더 바쁘게 움직였다.이제 그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으니까.이경빈은 그녀의 행동에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이내 탁유미의 팔을 잡고 거세게 밖으로 내보냈다.“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널 안을 생각 따위 없으니까!”말을 마친 그는 문을 부술 듯이 세게 닫았다.탁유미는 꽉 닫힌 문을 보며 쓰게 웃었다.오늘 그녀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 아니, 치욕감만 잔뜩 얻었다.이미 충분히 많은 걸 잃었는데 이제는 아이마저 잃어야 하는 것일까?탁유미는 지금 억울하게 누명 쓴 사건의 재심도 양육권 분쟁도 그 어느 하나 진행하기 무서웠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윤이가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게 되면 진 거나 다름없으니까.청각장애라는 이유로 이미 차별대우를 받고 산 아이에게 여기서 더 큰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탁유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덜터덜 자리를 벗어났다.그리고 이경빈은 문에 기댄 채 실성한 듯 웃었다.“하하... 하하하...”그는 스스로도 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겠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왜 아직도 탁유미만 보면 분노든 뭐든 마음에 파도가 치는 거지?
“휴, 다행이네요.”한지영은 이곳으로 오기 전 윤이가 시무룩해 있을까 봐 일부러 마트에 들러 장난감을 사 왔다.“자, 이거 윤이 선물이야.”“고맙습니다, 이모.”윤이는 장난감이 마음에 드는 듯 배시시 웃었다.그때 한지영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이에 한지영이 서둘러 전화를 받아보자 전화를 건 사람은 병원 경비원이었다.“안녕하세요. XXX 차주 맞으시죠? 지금 그쪽 차에서 경보음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거든요? 빨리 이쪽으로 오셔서 어떻게 해주셔야겠습니다.”“그래요? 알겠습니다. 바로 갈게요.”한지영은 전화를 끊은 후 임유진을 향해 말했다.“유진아, 나 잠깐 주차장 좀 갔다 올게. 경보음이 계속 울린다네?”“그래, 갔다 와.”한지영은 다급하게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간호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탁유미를 밖으로 불러냈다.그렇게 병실 안에는 임유진과 윤이밖에 남지 않았다.탁유미가 나간 후 윤이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손에 들린 장난감을 살포시 옆에 내려놓았다.“왜? 재미없어?”임유진이 묻자 윤이가 꿍얼거리며 말했다.“이모... 윤이 이제 나쁜 아이죠?”“왜 그렇게 생각해?”“친구랑 싸우고 입원까지 해서 엄마 돈을 많이 섰으니까요. 엄마 돈 버는 거 엄청 힘들 텐데...”임유진은 윤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윤이는 어렸을 때부터 청력을 잃은 탓인지 항상 또래들보다 더 성숙하게 행동했고 철도 빨리 들었다.그리고 그만큼 무척이나 섬세하고 또 예민했다.물론 아이처럼 뛰어놀며 활짝 웃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항상 조용히 있었다.임유진은 어제 김수영이 해줬던 말을 떠올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윤이에게 물었다.“윤이 친구랑 싸운 거 엄마 지켜주려고 그런 거지? 친구가 윤이 엄마를 나쁘게 말해서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었던 거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윤이는 절대 나쁜 아이가 아니야. 윤이는 아주 따뜻하고 남도 지켜줄 줄 아는 멋있는 아이야!”윤이는 그 말에 눈을 깜빡이며 임유진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아무리 화가
공한철은 이경빈의 기에 눌려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경빈 씨, 혹시 아직도 화 나 있는 거예요? 기증 일은 내가 거짓말한 게 맞지만 그건 다 경빈 씨를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나는 경빈 씨가 나를 모르고 있을 때부터 쭉 경빈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아니,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짓말도 무릅쓰고 내가 기증해줬다고 한 거예요! 내가 경빈 씨를 속인 건 맞지만... 그게 범법 행위까지는 아니잖아요...”공수진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을 했다.이에 이경빈은 시선을 돌려 공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내가 아닌 우리 집안을 사랑하는 거겠지. 더 정확히는 우리 집 재산을. 공수진, 네 그 욕심 때문에 나는 인생이 망가졌어!”“거짓말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네?”공수진은 전과 같은 유약한 얼굴을 하며 그를 붙잡았다.“나 정말 경빈 씨 사랑해요. 경빈 씨 속상하게 만든 거 내가 다 잘못했어요. 탁유미 씨한테 사과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사과할게요. 보상도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잘해봐요. 나 정말 경빈 씨 없으면 못살아요!”“사랑이라고? 사랑한다는 사람을 그렇게도 감쪽같이 속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까지 주면서? 탁유미를 범죄자로 몰아가 결국 감방에까지 보낸 게 나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야? 탁유미만 사라지면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오는 게 쉬울 것 같았어? 그래?!”이경빈은 공수진을 턱을 으스러질 듯 잡으며 분노를 표출했다.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공수진은 자신의 턱뼈가 이대로 부서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경빈이 그때 당시의 진상을 모두 알아버렸다는 것에 그녀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어떻게 된 거지? 이경빈이 그때 일을 다 알아버렸다고? 증거는 이미 내가 다 소거했는데?! 그래, 그냥 추측일 뿐일 거야. 실질적인 증거는 없는 게 분명해!’“오, 오해예요.”공수진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나는 탁유미 씨를 범죄자로 몰아간 적 없어요. 나는
네티즌들은 공수진과 주원호에게 각종 비난과 욕을 해댔고 대대적으로 기사가 난 탓에 병원 관계자들도 공수진의 병실을 지나칠 때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공수진은 그들의 눈빛에 제대로 고개를 들 수 가 없었고 이를 깨물며 하루빨리 퇴원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드디어 다가온 퇴원하는 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침부터 진을 치고 기다린 기자들이었다.“공수진 씨, 현재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동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강 그룹 대표의 약혼녀로 알고 있는데 이경빈 씨는 동영상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하시는 겁니까?”“유산한 아이가 이경빈 씨의 아이가 아니라 영상 속 남자분의 아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맞습니까?”“탁유미 씨를 음해하려고 일부러 밀쳐진 척 넘어져 유산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연이은 날카로운 질문에 공수진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찍지 마세요! 찍지 마시라고요!”공씨 부부는 공수진이 지나갈 수 있게 고용한 경호원들과 함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기자들을 뚫고 간신히 차에 오른 후 공수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탁유미 때문에 이게 뭐야!”만약 탁유미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거라며 그녀는 모든 걸 다 탁유미 탓으로 돌렸다.“일단 S 시를 떠나는 게 좋겠다. 며칠 뒤에 사태가 조금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경빈이 불러서 얘기하는 거로 해.”공한철의 말에 차량은 고속도로로 향했다.그렇게 2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검은 차들이 거리를 바짝 좁혀오며 공수진네 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끼익.“뭐야, 저것들은!”공한철이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정차된 앞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공씨 일가를 막아선 건 다름 아닌 이경빈이었다.이경빈이 내리자 검은 차에서 내린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공수진 일가를 차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경, 경빈 씨,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하지만...”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왜 그래?”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방금 아이가 내 배를 찼어!”임유진은 이쯤이면 태동이 느껴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전까지는 거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동이 미약했는데 방금 그건 정말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태동이었다.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배를 차고 있다.“아이가 네 배를 찼다고?”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겨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응! 한번 만져봐.”임유진은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만지게 했다.강지혁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그만 몸이 경직되어버렸다.태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언제쯤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도 임유진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실제로 이렇게 태동을 느끼게 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이제야 진정으로 이 작은 배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머리에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 조그마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거고 크게 울고 또 활짝 웃으며 서서히 커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넋을 잃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평소에도 물론 상당히 귀엽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이런 얼굴은 아마 그녀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임유진은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차고 있는 곳이 어딘지 그의 손을 이곳저곳 움직이며 알려주기 시작했다.아이들은 큼지막한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 그런지 그에 보답하듯 더 세게 발길질을 해댔다.덕분에 임유진의 배는 계속해서 꿈틀거렸다.강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얼굴로 태동을 느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갑자기 사진은 왜 찍어?”강지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기념하려고. 나중에
강지혁은 꼭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대체 뭘?혹시 진기태와 연관이 있는 건가?아까 진기태는 분명...임유진은 순간 뭔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들며 그에게 물었다.“혁아, 너 혹시 내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몸은 또다시 굳어졌고 호흡도 다시 거칠어졌다.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정답인가 보네.’강지혁은 지금 진기태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하긴 아까 엄청 세게 화를 내기는 했지.’강지혁은 아까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으로 진기태를 협박했다.꼭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건드려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화 안 낼 거니까.”강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임유진에게 물었다.“정말...? 정말 화 안 내?”“응. 안 내.”임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진 회장이 너 찾아온 거 진가원 프로젝트 때문이지? 네가 내 복수를 해주겠다고 이러는 거, 나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고작 그 사람 말 때문에 우리 사이가 흔들릴 일은 없으니까.”강지혁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 인간이 했던 말, 정말 신경 안 써?”“응. 그때는 너도 내가 누군지 몰랐을 때잖아. 그때의 나는 그저 너한테 네 약혼녀를 차로 죽인 사람일 뿐이었어. 너한테 잘 보이겠다고 사람들이 일부러 나를 더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게 네 탓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 원망할 생각 없어.”임유진은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사실 너랑 사귀고 너를 정말 사랑하게 됐던 순간부터 나는 그 일을 이미 내 마음속에서 지웠어. 그리고 너도 그랬잖아. 만약 조금만 더 빨리 나를 알게 됐으면 절대 내가 그런 고통을 겪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그녀는 그가 무서워하는 게 그저 그 이유일 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방관한 것으로 여태 이렇게까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진기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다만 진기태는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앞이 아닌 사무실 안을 바라보고 있어 임유진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강지혁, 네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임유진이 그렇게 된 건 네 탓도 있어!”진기태의 분노 어린 말에 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갔다.그러자 그때 사무실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때는 진화 그룹과 당신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릴 거야.”임유진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평소와 달리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예쁜 두 눈에 살기도 어려 있었다.‘살기...? 내가 뭘 잘 못 본 건가?’진기태는 강지혁의 위협에 겁을 먹고는 그의 눈을 피하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드디어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금세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강지혁도 그때쯤 임유진이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는 그녀를 보더니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서둘러 분노를 지우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해봤지만 눈가에 서린 당황함과 초조함은 감춰지지 않았다.진기태와의 대화를 들은 걸까?만약 들었으면 어떡하지?임유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멀리하려고 들면...강지혁은 그 생각에 순간 호흡하는 것조차 곤란해지며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임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혁아, 방금 진기태 회장이랑...”“일 얘기 했어. 일 얘기만...”강지혁은 서둘러 대답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호흡은 점점 더 딸리기 시작했다.“너 얼굴이 왜 그래? 괜찮아?!”임유진은 창백한 그의 얼굴이 걱정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얼굴에 닿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저지당하고 말았다.“난... 괜찮아.”임유진은 강지
“지혁아, 아무리 그래도 너랑 우리랑은 사돈이 될 뻔했던 집안이잖냐. 그간의 정도 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진기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진가원 프로젝트는 우리한테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야. 너희가 가져가봤자 사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텐데 굳이 왜 그걸 가져가려고 해.”“진화 그룹도 이제는 슬슬 무대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어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잔뜩 긴장한 진기태와 달리 그는 아주 여유롭다 못해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우리 그간 사업 파트너로서 좋은 관계를 잘 이어왔잖아. 뭐 서운한 거 있으면 그냥 나한테 직접 얘기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그럼 진화 그룹과 진화 그룹 산하의 모든 회사를 다 저한테로 넘기세요.”강지혁의 말에 진기태의 얼굴이 한순간에 변했다.모든 회사를 다 넘기라니, 그건 헐벗고 거지가 되라는 말과도 같았다.“너...!”진기태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설마...”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하지만 몇 초도 안 돼 아무리 강지혁이 미친놈이라고는 해도 그 이유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멀쩡한 가문 하나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하지만...’하지만 그거 말고는 강지혁이 갑자기 이러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하면 그건 임유진이 감옥에 간 일밖에 없으니까.“너 혹시... 임유진 때문은 아니지?”진기태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세요?”강지혁은 아주 빠르게 인정했다.“허...!”진기태는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 하나 때문에 이런다는 얘기를 듣고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하, 하지만 그 일은 그때 세령이가 이미 대가를 치렀잖아!”일전 진세령은 임유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강지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예계에서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또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돈을 받아? 공수진이 원하는 대로 해줘?”이경빈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신 의사잖아.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의사잖아! 그런데 그 간사한 혀로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의사는 이경빈의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웅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제가 보냈다뇨. 저... 저는 그냥 공수진 씨가 유산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여자가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건... 이경빈 씨잖아요.”그의 말에 이경빈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의사 말대로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한마디가 제일 크게 작용했다.이경빈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은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경빈 씨는 그때 공수진 씨의 치마가 피로 물든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수진 씨는 임신하지 않았죠. 그러니 유산은 더더욱 없을 일이고요. 그렇다면 그 피는 대체 뭐였을까요?”임유진이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경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당시의 화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어떻게 임신도 아니고 유산도 아닌데 피를 흘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필 유미 언니랑 얘기하다가 마침 계단에서 떨어져서요. 제 생각은 이래요. 애초에 공수진 씨는 유미 언니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피가 든 팩을 준비했고 언니를 계단으로 불러 일부러 마치 언니한테 밀쳐진 것처럼 계단에서 구른 거죠.”임유진은 계속해서 이경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이경빈 씨, 그날 정말 유미 언니가 공수진 씨를 밀었나요? 그걸 확실히 두 눈으로 보셨어요? 사실은 공수진 씨가 언니가 밀었다고 하니까 그렇겠거니 한 건 아니고요? 사실 그 사건은 조금만 제대로 조사해보면 금방 진실이 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경빈 씨는 그때 복수심에 눈이 멀었고 마침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