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럼에도 탁유미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고개 숙여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저녁이라 제가 제대로 보지 못했나 봐요. 돈은 바로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금방 다시 새 음식을 올려드릴게요.”“지금 우리가 공짜로 밥이나 얻어먹으려는 사람으로 보여? 파리가 나왔다고 파리가! 이것 때문에 식중독이라도 걸렸어 봐, 병원비 감당할 수 있었겠어? 응? 그리고 이미 한번 이딴 게 나왔는데 우리가 뭘 믿고 또 음식을 주문해?”“됐어. 쓸데없이 입씨름하지 말고 그냥 돈으로 보상해달라고 해.”“그래, 빨리 돈으로 보상해! 절대 이대로 못 넘어가.”셋 중 키가 제일 작은 남자 한 명이 죽은 파리를 젓가락으로 집어 탁유미의 코앞에서 흔들어댔다. 꼭 증거가 나왔으니 빼도 박도 못한다고 얘기하는 듯했다.옆 테이블에서 식사 중이던 손님들은 어느새 젓가락을 내려놓고 전부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탁유미는 남자 세 명이 돈을 뜯어내기 위해 이러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파리를 그 남자들이 넣었다는 증거가 없으니 마땅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그러면 10만 원 보상해드릴게요.”이 정도면 많이 양보한 것이었다.하지만 상대방은 그 돈이 성에 차지 않는 건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코웃음을 쳤다.“10만 원 먹고 떨어져라? 이게 지금 누굴 거지로 아나.”“천만 원. 당장 천만 원 내놓지 않으면 이곳에서 다시는 장사 못 할 줄 알아.”천만 원이라니.탁유미가 제시한 금액의 100배가 되는 금액이었다.옆에서 듣다 못한 한지영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보자 보자 하니까 뭐 이런 양심 없는 것들이 다 있어. 천만 원은 무슨! 그 파리도 그쪽 세 명이 작당하고 음식 안에 넣어둔 거 아니야?!”“야, 너 뭐라 그랬어.”험악한 얼굴의 남자가 한지영을 무섭게 노려보았다.“내가 틀린 말 했어? 지금 일부러 행패 부리는 거 맞잖아!”한지영은 전혀 그들의 기세에 눌리지 않았다.“우리가 음식에 파리를 넣었다는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도망갈 거면 같이 가야죠, 언니!”임유진은 한 손으로 탁유미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바로 112에 전화를 걸었다.한지영은 옆에 있던 플라스틱 의자를 남자들에게 던지며 탁유미에게 말했다.“그래요, 언니, 우리 일단 먼저 도망가요! 이것들 상대할 필요 없어요. 무사히 도망치고 나서 연신 씨한테 이 사람들 처리해달라고 내가 부탁해볼게요.”지금은 일단 도망가는 게 우선이었다.“여보세요? 지금 남자 세 명이 제 친구를 때리려고 하고 있어요. 여기 주소가 종로 3가...”전화가 연결되자 임유진은 다급하게 상황설명을 했다. 하지만 이제 곧 주소를 얘기하려던 찰나 세 명 중 한 명이 그녀를 발견했다.“야, 저년 신고했어! 휴대폰 뺏어!”그 말에 덩치 큰 남자가 임유진을 향해 무섭게 달려들었다.이에 임유진이 서둘러 몸을 피하며 도망가려던 그때 옆으로 누군가가 빠르게 달려와 그대로 남자에게 발차기를 날려버렸다.명치 쪽을 제대로 가격당한 남자는 비틀거리며 정신을 못 차리더니 결국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그 모습을 본 나머지 두 명은 잠깐 움찔하더니 이내 기세로 몰아붙이며 위협적으로 달려들었다. 그 순간 또 다른 누군가가 빠르게 나타나더니 아무런 망설임 없이 두 사람을 제압해 나갔다.3:2였지만 압도적인 힘으로 세 사람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고 그 세 사람을 쓰러트린 남자 두 명은 태연하게 옷가지를 정리했다.“어... 우리 도망 안 가도 되겠는데?”한지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탁유미는 갑작스럽게 반전된 상황에 넋을 잃은 채 가만히 자리에 멈춰 섰다.한지영의 말대로 이제는 도망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임유진은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 남자 두 명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들은 강지혁이 그녀에게 붙여둔 경호원들로 얼마 전 소지혜의 팬에게 해를 입을 뻔한 순간 도와줬던 사람들이었다.다만 그 사람들이 아직 그녀를 경호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신고자분, 신고자분? 제 말 들리세요? 지금 거기가 어딘지 얘기해 주세요!”전화기 너머로 신고
“네... 괜찮아요.”한지영은 백연신이 갑자기 나타난 것에 꽤 놀란 듯 보였다.“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녀는 구체적인 장소는 얘기해주지 않았다.“그걸 말이라고 해?”통화가 끊기기 전에 갑자기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와 남자들의 큰소리에 그는 잠깐이지만 온갖 나쁜 생각들이 머리를 지배했었다.게다가 한지영은 상황설명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고 다시 걸어보니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에 그는 바로 차에 시동을 걸어 그녀가 말한 [화로 3가]와 [포장마차]를 토대로 가장 먼저 포장마차 거리가 있는 이곳에 왔다.20분이 넘는 거리를 단 10분 만에 와버렸으니 과속 딱지가 날아올 것은 분명해 보였다.“다음에는 어떤 상황인지 얘기 좀 하고 끊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백연신은 걱정했던 마음과 놀랐던 마음을 그대로 담아 그녀에게 소리를 질러버렸다.한지영은 그런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에 이마에는 식은땀도 흘리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걱정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미... 미안해요.”한지영은 고개를 숙이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사과했다.그 모습에 그녀를 노려봤던 백연신의 눈도 서서히 풀렸고 걱정과 초조함 그리고 불안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더 이상 화를 내려고 해도 화가 나지 않았다.백연신은 길게 한숨을 내뱉더니 한지영을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걱정돼 죽는 줄 알았어.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그의 품속은 무척이나 따뜻했다.한지영은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품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백연신을 걱정하게 만든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가 이렇게 걱정해주는 게, 이렇게 꼭 끌어안아 주는 게 어쩐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아마 이 생각을 그대로 입 밖에 내뱉었으면 백연신이 또다시 화를 냈을 것이다.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서로 꼭 붙어있었고 한지영은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자기들 쪽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평소 부끄러움 따위 없던 그녀도 지금은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
경찰서로 가는 길, 한지영은 포장마차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전부 다 백연신에게 들려주었다.백연신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점점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다 경호들이 해결했다고 했을 때야 서서히 표정을 풀었다.오늘은 강지혁이 붙여준 경호원들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그들이 아니었으면 세 명의 여자가 어떤 봉변을 당했을지 모를 일이었다.“나도 경호원을 붙여줄까?”그의 말에 한지영이 단칼에 거절했다.“싫어요.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것 같아서 불편해요.”“하지만 오늘 같은 일이...”“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연신 씨한테 연락한다고 꼭 약속할게요.”한지영은 그의 말을 자르고 손까지 들어 올리며 맹세했다.백연신은 진심으로 싫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서에 도착한 후, 임유진은 경찰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녹음했던 내용도 제출했다.그렇게 조서를 다 마치고 나오자 한지영이 그녀에게 얘기했다.“집에 데려다줄게.”“응.”세 사람이 경찰서를 나오자 조서를 마친 두 명의 경호원도 임유진을 따라 경찰서 밖으로 나왔다.백연신의 차는 주차장 바로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다만 그 뒤편에 아까는 없었던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임유진은 그걸 보더니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그 차는 강지혁의 차였다.언제 온 거지?그때 뒤에 있던 경호원 두 명이 그녀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임유진 씨는 이쪽으로 가시죠.”두 사람은 강지혁이 올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지금 생각해보면 경호원들은 강지혁의 사람이니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바로 보고했을 게 분명했다.“유진아, 왜 그래?”한지영도 걸음을 멈추고 뒤에 멍하니 서 있는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연신 씨랑 먼저 가. 나는... 다른 차 타고 갈게.”한지영은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다 검은색 벤틀리를 발견하더니 알겠다는 얼굴로 물었다.“강지혁이 온 거야? 지금 저 안에 있는 거고?”임유진은 고개를 끄덕
임유진은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알았어.”한지영은 때로는 엄마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언제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주었다.임유진이 정말 괜찮다며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인 뒤에야 한지영은 백연신의 차에 올라탔다.그리고 임유진은 뒤편으로 가 검은색 벤틀리에 올라탔다.한지영은 임유진을 태운 뒤 바로 떠나는 차량을 보며 옆에 있는 백연신에게 말했다.“우리도 이만 가요.”차에 시동을 걸어 경찰서를 벗어난 백연신이 물었다.“이제 어디로 갈 건데?”“집으로 가요.”한지영은 어쩐지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기분 안 좋아? 영화 보러 갈까?”“아니요. 영화 본다고 나아질 기분 아니에요. 연신 씨 춤이라도 보면 모를까.”한지영은 지난번 술에 잔뜩 취해 있을 때 그 춤을 봐서 그런지 술이 깬 다음 날 흐릿했던 그의 모습만 기억날 뿐 어떻게 그녀를 홀려놨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그녀는 술이 원수라며 기억을 못 하는 자신을 몇 번이나 자책했다.백연신을 그녀를 힐끔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그렇게 보고 싶으면 다음에 원하는 만큼 보여줄게.”순간 한지영은 침에 사레들릴 뻔했다.지금 뭐라고 한 거지?그 춤을 또 춰준다는 건가?그렇게 싫어해 놓고서는 또다시 보여준다고?백연신은 티비에 남자 아이돌이 춤추는 것만 봐도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이다.“정말이에요? 정말 또 춰줄 거예요?”“그래.”백연신은 호기롭게 대답했다. 한지영은 모르겠지만 그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줄 수 있다.한지영은 침을 한번 꼴깍 삼키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지금은 이렇게 대답해도 언제 다시 생각을 바꿀지 몰라.’“그럼 오늘 보여줘요.”“오늘?”백연신이 눈썹을 꿈틀거렸다.“네. 어차피 달리 할 거 없잖아요. 나 영화관은 싫어요. 그러니까 일단 연신 씨 집으로 가서 춤추는 거 보고 나서 그 뒤에 다시 집으로 갈게요.”지금은 벌써 저녁 9시라 백연신의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10시가 넘게 된다.백연신은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그러고는
“아닐 거예요 아마... 그냥 혹시 하는 마음에 물어본 거예요.”한지영은 서둘러 해명하며 조금 어색하게 몸을 움직였다. 배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때문에 어쩐지 민망해졌다.“그런데 나 이번 달 아직 생리 안 했어요...”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이 말을 덧붙였다.백연신은 그 말을 듣더니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다른 증상은 몰라도 생리를 아직 안 한 거면 충분히 임신 가능성이 있었다.만약 한지영이 임신한다면...“임신인지 아닌지는 병원 가서 혈액 검사해보면 돼.”그 말에 한지영은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잡았다.“혈액 검사 말고 우리 일단은... 임신 테스트기로 확인부터 해요, 네?”“...”백연신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혹시 피 뽑는 거 무서워서 그래?”한지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집에 가기 전에 약국에 들러서 임신 테스트기 사다 줘요. 혹시 모르니까 여러 개 많이 사 와요.”별장으로 가기 전 마침 약국이 보였다.백연신은 도로 옆에 차를 주차하고는 약국으로 들어가 그녀의 말대로 여러 종류의 테스트기를 다 집은 다음 계산했다.그러고는 다시 차로 돌아와 그것들을 전부 한지영에게 건네주었다.한지영은 조수석에 앉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임신 테스트기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설명서를 읽었다.하지만 막상 백연신의 별장에 도착해 화장실에 들어가 확인하려 하자 갑자기 긴장이 밀려와 심호흡을 여러 번 내뱉었다.“어떡해요? 나 지금 너무 떨려요!”한지영은 백연신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맞잡은 그의 손이 축축한 것이 땀으로 가득 젖어있었다.“설마... 연신 씨도 떨려요?”“응. 나도 떨려.”백연신은 고개를 끄덕였다.이건 유례없는 떨림이었다. 백씨 가문을 곧 손에 넣을 때도 이렇게 떨리고 긴장되지는 않았었다.한지영은 그 모습을 보더니 오히려 서서히 떨림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뭐가 떨려요. 그냥 임신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뿐이잖아요. 기다려요. 금방 확인하고 나올 테니까.”테스트하는 쪽이 도리어 안 하는 쪽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실망했어요?”한지영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백연신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실망 안 했어. 임신은 천천히 해도 돼. 그보다 이제 거기서 나와.”“나 지금 못 나가요.”한지영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갑자기 터진 거라 나 지금 생리대도 없단 말이에요. 연신 씨가 나가서 사다 줘요.”그 말에 백연신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생리대를 사 오라고?”오늘 밤 그는 벌써 두 번이나 삑사리가 났다.“아니면요? 내가 피를 뚝뚝 떨구며 나가서 사 올까요?”한지영은 피가 뚝뚝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그를 바라보았다.“도우미한테 사 오라고 할게.”“안돼요!”한지영이 다급하게 그를 제지했다.“민망하단 말이에요. 그리고 시간도 늦었는데 좀 미안하잖아요. 그냥 연신 씨가 사다 줘요.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남자친구가 생기면 이런 부탁 해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어릴 때 남자친구한테 이런 부탁을 하는 여자애들이 얼마나 부러웠는데요.”백연신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남자친구에게 생리대 사 와달라는 부탁이 뭐라고 부럽기까지 한 거지? 누가 사든 다를 거 없지 않나?여자들만의 그런 로망 같은 것이 있는 걸까?한지영은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백연신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네, 잘 다녀와요.”한지영은 그제야 활짝 웃었다.그러고는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에게 한마디 덧붙였다.“아, 화이X 대형에 날개 달린 거로 사 와요. 알겠죠?”“...”백연신은 참으로 복잡미묘한 기분이었다.오늘 그는 한 번도 구매해본 적 없는 것들을 참 많이도 샀다.다행히 아까도 그렇고 지금 생리대를 살 때도 그렇고 직원들이 이상한 눈길로 보지는 않았다.다만 결제하고 나가려는데 그의 귀에 대학교 신입생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야, 방금 봤어? 저 남자 생리대 사는 거?”“여자친구 아니면 와이프한테 사주는 건가 보네.”“부럽다. 나도 저런 남자랑 연애하고 싶어.”“나도.”그 말에 백연신은
한지영은 마치 공주님처럼 그의 보살핌을 받았다.생각해보면 부모님을 제외한 타인이 이렇게까지 그녀를 위하고 아껴주는 건 백연신이 처음이었다.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심각한 얼굴의 남자를 바라보았다.“많이 아파?”“네.”그의 걱정에 한지영은 일부러 불쌍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남자들은 좋겠다. 이런 고통 매달 안 겪어도 되고.”백연신은 손을 들어 그녀의 배를 살살 어루만져주었다.“이러면?”“좋네요. 계속해봐요.”그 말에 백연신은 소파에 앉아 허리를 잔뜩 숙인 채 그녀의 배를 조심스럽게 마사지해주었다.한지영은 그 손길을 편히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마사지 강도가 약해지자 눈을 감은 채로 속삭였다.“아, 멈추지 말아요. 계속해요, 계속. 응... 좋아...”“...”백연신은 그녀의 속삭임에 머리털이 쭈뼛서는 느낌이었다.그녀는 지금 본인이 내뱉은 말이 얼마나 야릇하게 들리는지 알까?한지영은 백연신이 이렇게도 마사지를 잘 할 줄 몰랐다.그녀는 그의 손이 이렇게 편하고 기분 좋을 줄 알았으면 생리할 때마다 집에서 쉬는 게 아닌 그에게 마사지해달라고 할 걸 그랬다며 다음부터는 생리하는 날에도 같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그때 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여기 생강차랑 초콜릿 가져왔습니다.”한지영은 눈을 번쩍 뜨고 도우미에게 말했다.“저한테 주세요.”도우미는 생강차를 그녀에게 건네주고 소파 옆에 초콜릿을 올려놓았다.“이만 가봐.”백연신의 말에 도우미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을 나가기 전에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을 힐끔 바라보고는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문이 닫힌 뒤 한지영은 생강차를 마시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천천히 마셔. 혀 데이지 말고.”“알았어요.”그녀는 그의 말대로 생강차를 후후 불어 조금 식힌 다음 천천히 마셨다.백연신은 그녀의 엄마보다 더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어쩌면 그런 모습 때문에 한지영은 그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남자친구에게 온전히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까.정다연의 뒤에는 마찬가지로 집안이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재벌가의 어린 여성들이 있었다. 그녀들 역시 강지혁을 노리고 있었고 지금은 정다연이 나서서 임유진의 기를 꺾으려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정다연은 임유진이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자 점점 더 기세등등해졌다.“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가짜 죽음으로 강 회장님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도 얘기해주시겠어요? 듣기로 다른 남자 때문이라던데 어디 한번 제대로 해명해 보시는 게 어때요? 그 강씨 가문의 안주인인데 이런 일로 가문에 먹칠하시면 안 되잖아요.”정다연의 의도는 뻔했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곁을 떠난 게 사실은 다른 남자 때문이었다는 근거 불분명한 얘기로 그녀를 깎아내리기 위해서였다.아니나 다를까, 정다연의 뒤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에 너도나도 수군거리며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지난 5년간 임유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얼토당토않은 말에도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임유진은 정다연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었다.“정다연 씨, 혹시 누구한테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정다연은 임유진의 입에서 정확히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대꾸했다.“그건 말할 수 없죠.”“그래요? 그러면 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지어내 나를 깎아내리려고 한 사람이 사실은 정다연 씨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될까요?”임유진의 말에 정다연이 발끈했다.“그게 무슨! 지금 날 의심하는 거예요? 기가 막혀서!”임유진은 평온하고 또 침착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정다연 씨, 다른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라고 한들 그걸 직접 내 앞에서 마치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엄연한 명예훼손이에요. 좋은 의도로 저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제 말이 틀렸나요?”정다연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움찔했다. 남편 덕에 신분 상승한 여자라 몇 번
백연신이었다.백연신의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은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일전 드레스 샵에서 임유진이 제일 먼저 골랐던 그 실버 드레스였다.백연신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다 임유진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리고 고은채는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고 보니 강 회장님 아내분과 아는 사이이지 않았어요? 5년만일 텐데 가서 인사해요, 우리.”그녀는 백연신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멋대로 그를 이끈 채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다.“오랜만이네요. 저 기억하죠? 고은채예요.”고은채는 예쁘게 웃으며 먼저 임유진에게 인사를 건넸다.“네, 안녕하세요.”임유진은 조금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고은채만 아니었으면 백연신과 한지영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고은채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는 백연신의 옆자리를 노렸을 것이다. 백연신은 사랑보다 백씨 가문을 온전히 손에 넣는 것을 원했던 남자였으니까.“사모님과는 연이 좀 깊은 것 같아요. 우리 연신 씨 전 여자친구가 바로 사모님 친구분이셨죠? 아직 결혼을 안 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사모님께서 좋은 남자 소개 해주는 건 어떠세요? 아니면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고은채는 생글생글 웃으며 거리낌 없이 한지영의 얘기를 꺼냈다.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백연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불빛 바로 아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색이 무척 창백해 보였다.“아니요. 지영이 친구는 나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요. 지영이가 날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힘이 돼줄 거고 도움을 청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도울 예정이에요. 물론 지영이가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그럴 거고요.”임유진은 웃음을 거두어들이며 조금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만약 그녀로 인해 한지영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고은채는 이에 가볍게 웃었다.“한지영 씨는 든든한 친구를 둬서 좋겠어요. 부러워요. 참, 이번에 다시 돌아가면 그때는 연신 씨랑 결혼식에 관해 논의
임유진은 청초해 보이는 메이크업을 하고 긴 머리를 단아하게 위로 올렸다. 물론 머리를 푼 모습도 예뻤지만 올린 것이 훨씬 더 우아해 보였다.그녀는 연예인 뺨치는 미모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강지혁의 옆에 서도 꿀린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고 오히려 차분하고 또 분위기 있는 모습 때문에 차가워 보이는 강지혁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마치 이게 바로 하늘이 내린 한 쌍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람 중에는 젊은 남성들도 있었다. 그들은 평소 연예인도 만나보고 몸매가 예쁜 모델들도 만나봤을 텐데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임유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그리고 그런 남자들의 모습에 강지혁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오늘의 임유진은 유독 더 예쁘고 단아했다. 단지 옷이 바뀌고 예쁘게 치장을 해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보다는 그녀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그녀를 더 돋보이게 했다.게다가 그녀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온한 감정을 갖게 하는 이상한 재주가 있었다. 그녀 곁에 있으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 같고 그래서 이대로 그녀를 계속 곁에 두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고는 했다.강지혁은 마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듯 임유진을 더 바싹 자기 곁에 붙인 후 나지막이 속삭였다.“너한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아마 5년 전에 한 번 인사를 나눴던 사람도 있을 거야.”임유진은 그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게 목적이라는 걸 임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강지혁은 사람들 쪽으로 다가가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눴다. 그러면서 자기 아내라며 그들에게 임유진을 소개해주었다.임유진과 인사를 나눈 사람 중에는 아예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고 5년 전에 한 번 정도 인사를 나눈 적이 있던 사람도 있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소개해준 대로 인사를 나누다 거의 한 바퀴를 다 돌았을 때 갑자기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나 저기서 잠깐 쉬고 있을게.”“왜, 힘들어?”“그건 아니고 힐
하지만 잠깐 눈을 판 사이 한지영을 다치게 했고 그렇게 평생 그녀의 곁에 있을 자격을 잃어버렸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리며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나와 결혼하고 싶은거라면 그렇게 해줄게. 이곳에서의 일이 다 끝이 나면 혼사에 관해 얘기하도록 하지.”“정말이에요?”고은채는 예상 밖의 답변에 활짝 웃었다.“너한테 굳이 거짓말할 이유는 없어.”백연신은 담담하게 답하더니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대신 지영이 건드리지 마. 지영이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날에는 각오해도 좋을 거야.”고은채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이토록 시린 눈빛은 처음이었다.아무리 결혼을 약속했다고 한들 이 남자의 마음은 여전히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고 그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백연신, 네가 지금은 나를 이렇게 차갑게 대하지만 머지않아 곧 내 발밑에 납작 엎드리게 될 거야. 그때는 아마 한지영은 생각도 안 날걸? 두고봐.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사랑하게 만들 거니까.’고은채는 만약 백연신과 먼저 만난 사람이 자신이었다면 한지영 같은 건 애초에 기회도 없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한지영은 얼굴로 보나 몸매로 보나 아니면 집안으로 보나 자신보다 한참이나 못난 여자였으니까.“알겠어요. 건드리지 않을게요. 그러니 연신 씨도 꼭 약속을 지켜요.”고은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임유진은 한정판 블랙 드레스를 입고 그에 어울리는 하이힐을 신었다. 예쁜 드레스에 반짝이는 루비 목걸이까지 하고 나니 한층 더 우아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비추는 건 5년 만이라 그녀는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강씨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남들에게 흠을 잡히는 일은 조금도 없어야 했으니까.사실 그녀가 원래 준비했던 목걸이는 루비 목걸이가 아닌 진주 목걸이였다. 그런데 드레스를 다 입은 후 목걸이를 하려는데 갑자기 강지혁이 다가와 그녀에게 루비 목걸이를 해주었다.“오늘 드레스에는 이게 더 어울려.”강지혁이 말했다.“뭐야?
강지혁의 마음은 어느샌가 그녀의 부재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렸다.이러한 기분은 처음이라 그는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과거의 자신은 대체 이 여자를 얼마나 많이 사랑했었는지 문득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별장으로 돌아온 백연신은 마치 집주인처럼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고은채를 보고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누가 멋대로 들어와도 된다고 했지?”차가운 남자의 말에도 고은채는 상관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왔어요? 여자친구가 남자친구 집에 오겠다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어요. 나 당신 여자친구잖아. 안 그래요? 그보다 어디 갔다 왔어요? 설마 전 여자친구 보러 간 건 아니죠?”백연신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둡게 가라앉았다.고은채의 말대로 그는 한지영을 보러 갔다. 그래서 그녀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것도 보았고 다른 남자에게 웃어주는 것까지 보았다.그 광경을 하나하나 보면서 그는 질투와 분노로 머리가 가득 찼고 한지영 옆에 있는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한지영은 그의 여자였으니까.“설사 그렇다 해도 당신이 그 여자와 다시 잘 될 가능성은 아주 조금도 없어요. 그러고 보니 그 여자도 이제 34살이나 됐죠? 그러면 머지않아 곧 선도 보고 결혼도 하겠네요. 여자들은 아닌 척해도 나이를 꽤 많이 신경 쓰고 있거든요.”고은채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백연신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이내 유혹적인 손길로 그의 가슴팍을 매만졌다.“입 다물어.”백연신은 고은채의 손을 덥석 잡더니 그대로 다시 거칠게 뿌리쳤다. 경멸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그리고 내 몸에 손대지 마.”“5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현실을 못 받아들였어요?”고은채는 그에게 뿌리쳐진 손을 아무렇지 않게 거두어들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잊은 것 같아서 다시 말해주는데 만약 그때 내가 구해주지 않았으면 한지영은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전에 벌써 싸늘하게 죽어버렸을 거예요. 그때 연신 씨가 한지영 살리겠다고 나한
임유진은 마치 점심 메뉴 정하듯 태연한 강지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너는 내 거라는 것만 확실하게 그 여자한테 각인시켜주면 돼. 만약 네가 그렇게 했는데도 헛된 희망을 품고 헛된 짓을 하면 그때는 내가 알아서 상대할게. 너는 나설 필요 없어.”남편을 누군가와 공유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으니까.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물었다.“내가 네 거야?”가까스로 가라앉은 임유진의 볼이 한순간에 다시 빨갛게 물들었다.임유진은 빨개진 얼굴로 강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응, 넌 내 거야. 내 남편이고 나만 가질 수 있어.”강지혁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는 타인이 자신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걸 쉽게 허락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 말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왜일까, 이 여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괜히 마음이 들뜨고 이상한 만족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내가 네 거라고 확신하나 봐? 내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어쩌려고?”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물었다.임유진은 그 말에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다른 여자한테 아주 잠시 끌린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네 마음을 다시 나한테로 돌려놓으려고 할 거야. 하지만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 여자 없이는 안 될 지경에 이른 거라면... 그때는 조용히 네 곁을 떠날 거야. 그게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 같으니까.”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그녀가 알고 있는 혁이가 아닐 테니 서로를 위해서라도 놓아주는 게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임유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지혁은 얼굴을 무섭게 굳히더니 곧바로 그녀를 제 품에 단단히 끌어안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그녀의 한마디로 바닥 끝까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심지어는 두려움이라는 감정까지 들었다.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거지?누군가의 한마디로 인해
강지혁은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조금 풀어진 얼굴로 임유진의 오른손을 잡았다.“다른 남자한테는 찰나의 시선도 주지 마. 너한테 남자는 오직 나뿐이니까.”임유진은 소유욕 짙은 그의 말에 문득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이 떠올랐다.예전에도 그는 그녀의 곁에 남자가 접근하는 꼴을 보지 못했고 늘 자기만 바라보며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해주기를 바랐다.집착 가득했던 당시의 그 말도 어떤 감정으로 한 건지 모를 지금 이 말도 임유진은 그저 달콤하게만 느껴졌다.그때 귓가에 따끔한 감각이 전해지고 임유진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번쩍 차렸다. 강지혁이 허리를 숙인 채 그녀의 귀를 깨물고 있었다.임유진은 그의 입술이 닿은 귓가가 한순간에 확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에 몸을 움찔 떨며 반사적으로 귀를 막으려고 했다.“혁아, 간지러워...”하지만 귀 쪽으로 손을 올리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잡혀버렸다.강지혁은 마치 달콤한 디저트라도 맛보듯 입술을 떼려 하지 않았다.“그러고 보니 오늘 드레스 샵에서... 흡... 꽤 많은 돈을 썼는데... 괜찮지?”임유진은 그의 움직임을 제지하기 위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만약 이대로 조금만 더하다가는 금세 분위기에 취해 이상한 기류로 흘러갈지도 몰랐으니까.“쓰라고 준 카드야. 원하는 대로 써. 그리고 내가 가진 재산 중 절반은 원래 네 몫이야.”“내가 네 돈만 보고 좋아한 거면 어쩌려고 이런 말을 하지?”임유진이 농담 섞인 말투로 물었다.“돈 때문이야?”강지혁이 조금 가라앉은 말투로 물으며 임유진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랑했던 공기가 한순간에 차갑게 바뀌었다.임유진은 마치 자신의 모든 걸 꿰뚫어 보려는 듯한 그의 눈빛에 괜히 목이 마르는 것 같았다.“아니.”그녀의 답에 강지혁이 다시 웃었다.“그럴 줄 알았어. 만약 너와 나를 이었던 게 돈이었으면 그렇게도 많은 일을 겪지 않았겠지.”강지혁은 임유진의 손가락을 매만지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오늘 드레스 샵에서 소민아와 트러블이
“알고 있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소민아는 말을 마친 후 빠르게 가게를 벗어났다.그날 밤.임유진은 아이 둘을 다 재운 후 곧바로 침실로 돌아와 백연신의 기사를 검색했다.현이는 자신만의 방이 다 마련되었음에도 오빠와 함께 자고 싶다며 잠잘 때만 되면 강선율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잠들 때까지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임유진은 그런 딸의 모습에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율이도 썩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고 또 두 아이가 함께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 좋아 결국에는 두 사람이 함께 자는 것을 허락했다.강선율은 이야기를 읽어달라는 동생의 말에 처음에는 조금 난감해하더니 이내 진지하게 동화책을 고르며 현이에게 이야기를 읽어주었다. 게다가 매 밤 한 권도 아니고 적어도 세 권의 책은 읽어주었다.오빠라는 호칭에 책임감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피가 당겨서인지 율이는 당황한 표정은 가끔 지을지언정 짜증이나 화는 한번도 내지 않았다.임유진은 아이들의 생각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그때 머리 바로 위쪽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연신 회장 얼굴이 네 취향인가 보지? 입꼬리가 귀에 걸렸네.”임유진은 그 말에 화들짝 놀라 바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온 건지 등 바로 뒤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백연신의 기사를 보고 있는 강지혁의 얼굴이 보였다.백연신의 사진을 켜둔 채로 웃어버린 바람에 아무래도 그 미소의 상대가 백연신이라고 오해한 듯했다.“아니야! 방금은 현이랑 율이 생각하느라 괜히 좋아져서 그래. 그리고 백연신 씨는 지영이 전 남자친구잖아. 지영이 일로 백연신 씨 기사 좀 검색해 본 것뿐이야. 정말이야!”임유진은 혹여 강지혁이 이상한 오해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해명했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너 혹시... 백연신 씨랑 지영이가 사귀었던 사실도 잊어버렸어?”임유진은 강지혁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 알
눈앞 여자의 정체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어마어마한 거물의 아내임은 틀림없었다.사장과 소민아에게 잘 보이려 했던 직원은 속으로 동시에 이 생각을 하고는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버렸다.임유진은 고이준에게서 카드를 건네받은 후 바로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신입 직원을 바라보았다.“이 드레스로 할게요. 마음에 드네요.”“네... 네! 알겠습니다!”신입은 얼떨떨한 얼굴로 허리를 바짝 편 채 대답했다. 입사한 지 불과 몇 개월 안 된 자신이 이러한 큰 주문을 따낼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소민아는 임유진 쪽으로 확 기운 분위기에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불려 세워지고 말았다.“소민아 씨, 지금 어디 가는 겁니까? 소민아 씨와도 관계되는 일이니 함께 CCTV를 보는 게 어때요?”임유진이 물었다.“아, 아니요. 그럴 필요는... 제가 실수로 물을 맞아버린 것뿐인데요.”소민아는 상황을 무마하려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아까는 내 친구가 물을 끼얹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것 때문에 고래고래 소리까지 질렀잖아요. 뭐, 좋아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오해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럼 이제 억울한 내 친구한테 사과해야겠죠?”임유진의 말에 소민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사과요?”“그럼 이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사과 한마디 없이 사건이 해결될 줄 알았어요?”임유진의 목소리가 삽시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소민아의 얼굴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소안나가 강씨 가문의 양녀로 들어간 후로 그녀는 늘 자신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던 콧대 높은 여자들마저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를 떨었으니까.그러니 누군가에게 사과한다는 일은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다. 그것도 평범하디 평범한 한지영에게는 더더욱 말이다.게다가 지금은 가게 직원들 앞이라 만약 정말 사과하게 되면 체면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질 게 분명했다.“소민아 씨,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