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영은 음식을 나르다 주위를 삥 둘러보았다.탁유미네 옆에는 다양한 메뉴를 판매하고 있는 포장마차들이 많았다.손님들도 제법 많이 오는 편이어서 거의 모든 포장마차에 손님들이 다 꽉 들어차 있었다.“유진 씨, 지영 씨!”그때 탁유미가 두 사람을 불렀다.“배고프죠? 떡볶이랑 김밥이랑 해서 줄까요?”“좋아요!”한지영은 안 그래도 배고프던 찰나에 잘됐다며 활짝 웃었다.“언니는요? 언니도 저녁 아직이잖아요.”임유진이 탁유미에게 물었다.“나는 이따 아무거나 집어 먹으면 돼요. 음식들이 이렇게 많은데 설마 굶을까 봐요.”탁유미는 그녀에게 미소를 짓더니 금세 맛있는 떡볶이와 김밥, 튀김과 오뎅을 준비해 주었다.“잘 먹을게요, 언니.”“맛있게 먹어요.”두 사람은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떡볶이를 한입 먹은 한지영은 눈을 반짝이며 정말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들었다.“언니, 요리 솜씨 진짜 대박이에요. 우리 엄마가 한 것보다 맛있어요!”“아직도 아주머니가 요리하셔?”임유진이 물었다.“그래. 요리도 못하면서 맨날 주방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어. 물론 그렇게 된 제일 큰 원인 제공자는 아빠지. 맨날 맛없는 것도 맛있다고 그러니까 엄마가 자기 요리 실력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얻지 못해요.”한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그런 그녀의 아버지도 가끔은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을 때는 휴식 좀 하라는 핑계를 대며 직접 요리를 하곤 했다.“아저씨가 아주머니를 엄청 사랑하신다는 증거잖아.”임유진은 평범하면서 그 안에 사랑이 있고 행복이 있는 그런 따뜻한 가정이 너무나도 부러웠다.전에는 자신도 언젠가는 그런 가정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했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사치가 되어버렸다.“뭐 하긴, 가끔은 나도 부러울 정도로 사랑하시긴 해.”한지영은 어깨를 으쓱거렸다.“참, 강지혁이랑은 어떻게 됐어? 아직도 그 누나 동생 놀이를 계속하겠대?”그 말에 임유진은 순간 그날 밤 다시 사귀자며 다시 사랑할 테니 자기도 다시 사
하지만 그럼에도 탁유미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고개 숙여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저녁이라 제가 제대로 보지 못했나 봐요. 돈은 바로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금방 다시 새 음식을 올려드릴게요.”“지금 우리가 공짜로 밥이나 얻어먹으려는 사람으로 보여? 파리가 나왔다고 파리가! 이것 때문에 식중독이라도 걸렸어 봐, 병원비 감당할 수 있었겠어? 응? 그리고 이미 한번 이딴 게 나왔는데 우리가 뭘 믿고 또 음식을 주문해?”“됐어. 쓸데없이 입씨름하지 말고 그냥 돈으로 보상해달라고 해.”“그래, 빨리 돈으로 보상해! 절대 이대로 못 넘어가.”셋 중 키가 제일 작은 남자 한 명이 죽은 파리를 젓가락으로 집어 탁유미의 코앞에서 흔들어댔다. 꼭 증거가 나왔으니 빼도 박도 못한다고 얘기하는 듯했다.옆 테이블에서 식사 중이던 손님들은 어느새 젓가락을 내려놓고 전부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탁유미는 남자 세 명이 돈을 뜯어내기 위해 이러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파리를 그 남자들이 넣었다는 증거가 없으니 마땅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그러면 10만 원 보상해드릴게요.”이 정도면 많이 양보한 것이었다.하지만 상대방은 그 돈이 성에 차지 않는 건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코웃음을 쳤다.“10만 원 먹고 떨어져라? 이게 지금 누굴 거지로 아나.”“천만 원. 당장 천만 원 내놓지 않으면 이곳에서 다시는 장사 못 할 줄 알아.”천만 원이라니.탁유미가 제시한 금액의 100배가 되는 금액이었다.옆에서 듣다 못한 한지영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보자 보자 하니까 뭐 이런 양심 없는 것들이 다 있어. 천만 원은 무슨! 그 파리도 그쪽 세 명이 작당하고 음식 안에 넣어둔 거 아니야?!”“야, 너 뭐라 그랬어.”험악한 얼굴의 남자가 한지영을 무섭게 노려보았다.“내가 틀린 말 했어? 지금 일부러 행패 부리는 거 맞잖아!”한지영은 전혀 그들의 기세에 눌리지 않았다.“우리가 음식에 파리를 넣었다는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도망갈 거면 같이 가야죠, 언니!”임유진은 한 손으로 탁유미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바로 112에 전화를 걸었다.한지영은 옆에 있던 플라스틱 의자를 남자들에게 던지며 탁유미에게 말했다.“그래요, 언니, 우리 일단 먼저 도망가요! 이것들 상대할 필요 없어요. 무사히 도망치고 나서 연신 씨한테 이 사람들 처리해달라고 내가 부탁해볼게요.”지금은 일단 도망가는 게 우선이었다.“여보세요? 지금 남자 세 명이 제 친구를 때리려고 하고 있어요. 여기 주소가 종로 3가...”전화가 연결되자 임유진은 다급하게 상황설명을 했다. 하지만 이제 곧 주소를 얘기하려던 찰나 세 명 중 한 명이 그녀를 발견했다.“야, 저년 신고했어! 휴대폰 뺏어!”그 말에 덩치 큰 남자가 임유진을 향해 무섭게 달려들었다.이에 임유진이 서둘러 몸을 피하며 도망가려던 그때 옆으로 누군가가 빠르게 달려와 그대로 남자에게 발차기를 날려버렸다.명치 쪽을 제대로 가격당한 남자는 비틀거리며 정신을 못 차리더니 결국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그 모습을 본 나머지 두 명은 잠깐 움찔하더니 이내 기세로 몰아붙이며 위협적으로 달려들었다. 그 순간 또 다른 누군가가 빠르게 나타나더니 아무런 망설임 없이 두 사람을 제압해 나갔다.3:2였지만 압도적인 힘으로 세 사람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고 그 세 사람을 쓰러트린 남자 두 명은 태연하게 옷가지를 정리했다.“어... 우리 도망 안 가도 되겠는데?”한지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탁유미는 갑작스럽게 반전된 상황에 넋을 잃은 채 가만히 자리에 멈춰 섰다.한지영의 말대로 이제는 도망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임유진은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 남자 두 명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들은 강지혁이 그녀에게 붙여둔 경호원들로 얼마 전 소지혜의 팬에게 해를 입을 뻔한 순간 도와줬던 사람들이었다.다만 그 사람들이 아직 그녀를 경호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신고자분, 신고자분? 제 말 들리세요? 지금 거기가 어딘지 얘기해 주세요!”전화기 너머로 신고
“네... 괜찮아요.”한지영은 백연신이 갑자기 나타난 것에 꽤 놀란 듯 보였다.“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녀는 구체적인 장소는 얘기해주지 않았다.“그걸 말이라고 해?”통화가 끊기기 전에 갑자기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와 남자들의 큰소리에 그는 잠깐이지만 온갖 나쁜 생각들이 머리를 지배했었다.게다가 한지영은 상황설명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고 다시 걸어보니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에 그는 바로 차에 시동을 걸어 그녀가 말한 [화로 3가]와 [포장마차]를 토대로 가장 먼저 포장마차 거리가 있는 이곳에 왔다.20분이 넘는 거리를 단 10분 만에 와버렸으니 과속 딱지가 날아올 것은 분명해 보였다.“다음에는 어떤 상황인지 얘기 좀 하고 끊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백연신은 걱정했던 마음과 놀랐던 마음을 그대로 담아 그녀에게 소리를 질러버렸다.한지영은 그런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에 이마에는 식은땀도 흘리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걱정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미... 미안해요.”한지영은 고개를 숙이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사과했다.그 모습에 그녀를 노려봤던 백연신의 눈도 서서히 풀렸고 걱정과 초조함 그리고 불안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더 이상 화를 내려고 해도 화가 나지 않았다.백연신은 길게 한숨을 내뱉더니 한지영을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걱정돼 죽는 줄 알았어.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그의 품속은 무척이나 따뜻했다.한지영은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품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백연신을 걱정하게 만든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가 이렇게 걱정해주는 게, 이렇게 꼭 끌어안아 주는 게 어쩐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아마 이 생각을 그대로 입 밖에 내뱉었으면 백연신이 또다시 화를 냈을 것이다.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서로 꼭 붙어있었고 한지영은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자기들 쪽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평소 부끄러움 따위 없던 그녀도 지금은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
경찰서로 가는 길, 한지영은 포장마차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전부 다 백연신에게 들려주었다.백연신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점점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다 경호들이 해결했다고 했을 때야 서서히 표정을 풀었다.오늘은 강지혁이 붙여준 경호원들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그들이 아니었으면 세 명의 여자가 어떤 봉변을 당했을지 모를 일이었다.“나도 경호원을 붙여줄까?”그의 말에 한지영이 단칼에 거절했다.“싫어요.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것 같아서 불편해요.”“하지만 오늘 같은 일이...”“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연신 씨한테 연락한다고 꼭 약속할게요.”한지영은 그의 말을 자르고 손까지 들어 올리며 맹세했다.백연신은 진심으로 싫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서에 도착한 후, 임유진은 경찰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녹음했던 내용도 제출했다.그렇게 조서를 다 마치고 나오자 한지영이 그녀에게 얘기했다.“집에 데려다줄게.”“응.”세 사람이 경찰서를 나오자 조서를 마친 두 명의 경호원도 임유진을 따라 경찰서 밖으로 나왔다.백연신의 차는 주차장 바로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다만 그 뒤편에 아까는 없었던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임유진은 그걸 보더니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그 차는 강지혁의 차였다.언제 온 거지?그때 뒤에 있던 경호원 두 명이 그녀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임유진 씨는 이쪽으로 가시죠.”두 사람은 강지혁이 올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지금 생각해보면 경호원들은 강지혁의 사람이니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바로 보고했을 게 분명했다.“유진아, 왜 그래?”한지영도 걸음을 멈추고 뒤에 멍하니 서 있는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연신 씨랑 먼저 가. 나는... 다른 차 타고 갈게.”한지영은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다 검은색 벤틀리를 발견하더니 알겠다는 얼굴로 물었다.“강지혁이 온 거야? 지금 저 안에 있는 거고?”임유진은 고개를 끄덕
임유진은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알았어.”한지영은 때로는 엄마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언제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주었다.임유진이 정말 괜찮다며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인 뒤에야 한지영은 백연신의 차에 올라탔다.그리고 임유진은 뒤편으로 가 검은색 벤틀리에 올라탔다.한지영은 임유진을 태운 뒤 바로 떠나는 차량을 보며 옆에 있는 백연신에게 말했다.“우리도 이만 가요.”차에 시동을 걸어 경찰서를 벗어난 백연신이 물었다.“이제 어디로 갈 건데?”“집으로 가요.”한지영은 어쩐지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기분 안 좋아? 영화 보러 갈까?”“아니요. 영화 본다고 나아질 기분 아니에요. 연신 씨 춤이라도 보면 모를까.”한지영은 지난번 술에 잔뜩 취해 있을 때 그 춤을 봐서 그런지 술이 깬 다음 날 흐릿했던 그의 모습만 기억날 뿐 어떻게 그녀를 홀려놨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그녀는 술이 원수라며 기억을 못 하는 자신을 몇 번이나 자책했다.백연신을 그녀를 힐끔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그렇게 보고 싶으면 다음에 원하는 만큼 보여줄게.”순간 한지영은 침에 사레들릴 뻔했다.지금 뭐라고 한 거지?그 춤을 또 춰준다는 건가?그렇게 싫어해 놓고서는 또다시 보여준다고?백연신은 티비에 남자 아이돌이 춤추는 것만 봐도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이다.“정말이에요? 정말 또 춰줄 거예요?”“그래.”백연신은 호기롭게 대답했다. 한지영은 모르겠지만 그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줄 수 있다.한지영은 침을 한번 꼴깍 삼키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지금은 이렇게 대답해도 언제 다시 생각을 바꿀지 몰라.’“그럼 오늘 보여줘요.”“오늘?”백연신이 눈썹을 꿈틀거렸다.“네. 어차피 달리 할 거 없잖아요. 나 영화관은 싫어요. 그러니까 일단 연신 씨 집으로 가서 춤추는 거 보고 나서 그 뒤에 다시 집으로 갈게요.”지금은 벌써 저녁 9시라 백연신의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10시가 넘게 된다.백연신은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그러고는
“아닐 거예요 아마... 그냥 혹시 하는 마음에 물어본 거예요.”한지영은 서둘러 해명하며 조금 어색하게 몸을 움직였다. 배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때문에 어쩐지 민망해졌다.“그런데 나 이번 달 아직 생리 안 했어요...”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이 말을 덧붙였다.백연신은 그 말을 듣더니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다른 증상은 몰라도 생리를 아직 안 한 거면 충분히 임신 가능성이 있었다.만약 한지영이 임신한다면...“임신인지 아닌지는 병원 가서 혈액 검사해보면 돼.”그 말에 한지영은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잡았다.“혈액 검사 말고 우리 일단은... 임신 테스트기로 확인부터 해요, 네?”“...”백연신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혹시 피 뽑는 거 무서워서 그래?”한지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집에 가기 전에 약국에 들러서 임신 테스트기 사다 줘요. 혹시 모르니까 여러 개 많이 사 와요.”별장으로 가기 전 마침 약국이 보였다.백연신은 도로 옆에 차를 주차하고는 약국으로 들어가 그녀의 말대로 여러 종류의 테스트기를 다 집은 다음 계산했다.그러고는 다시 차로 돌아와 그것들을 전부 한지영에게 건네주었다.한지영은 조수석에 앉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임신 테스트기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설명서를 읽었다.하지만 막상 백연신의 별장에 도착해 화장실에 들어가 확인하려 하자 갑자기 긴장이 밀려와 심호흡을 여러 번 내뱉었다.“어떡해요? 나 지금 너무 떨려요!”한지영은 백연신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맞잡은 그의 손이 축축한 것이 땀으로 가득 젖어있었다.“설마... 연신 씨도 떨려요?”“응. 나도 떨려.”백연신은 고개를 끄덕였다.이건 유례없는 떨림이었다. 백씨 가문을 곧 손에 넣을 때도 이렇게 떨리고 긴장되지는 않았었다.한지영은 그 모습을 보더니 오히려 서서히 떨림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뭐가 떨려요. 그냥 임신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뿐이잖아요. 기다려요. 금방 확인하고 나올 테니까.”테스트하는 쪽이 도리어 안 하는 쪽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실망했어요?”한지영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백연신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실망 안 했어. 임신은 천천히 해도 돼. 그보다 이제 거기서 나와.”“나 지금 못 나가요.”한지영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갑자기 터진 거라 나 지금 생리대도 없단 말이에요. 연신 씨가 나가서 사다 줘요.”그 말에 백연신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생리대를 사 오라고?”오늘 밤 그는 벌써 두 번이나 삑사리가 났다.“아니면요? 내가 피를 뚝뚝 떨구며 나가서 사 올까요?”한지영은 피가 뚝뚝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그를 바라보았다.“도우미한테 사 오라고 할게.”“안돼요!”한지영이 다급하게 그를 제지했다.“민망하단 말이에요. 그리고 시간도 늦었는데 좀 미안하잖아요. 그냥 연신 씨가 사다 줘요.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남자친구가 생기면 이런 부탁 해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어릴 때 남자친구한테 이런 부탁을 하는 여자애들이 얼마나 부러웠는데요.”백연신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남자친구에게 생리대 사 와달라는 부탁이 뭐라고 부럽기까지 한 거지? 누가 사든 다를 거 없지 않나?여자들만의 그런 로망 같은 것이 있는 걸까?한지영은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백연신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네, 잘 다녀와요.”한지영은 그제야 활짝 웃었다.그러고는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에게 한마디 덧붙였다.“아, 화이X 대형에 날개 달린 거로 사 와요. 알겠죠?”“...”백연신은 참으로 복잡미묘한 기분이었다.오늘 그는 한 번도 구매해본 적 없는 것들을 참 많이도 샀다.다행히 아까도 그렇고 지금 생리대를 살 때도 그렇고 직원들이 이상한 눈길로 보지는 않았다.다만 결제하고 나가려는데 그의 귀에 대학교 신입생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야, 방금 봤어? 저 남자 생리대 사는 거?”“여자친구 아니면 와이프한테 사주는 건가 보네.”“부럽다. 나도 저런 남자랑 연애하고 싶어.”“나도.”그 말에 백연신은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