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알았어.”한지영은 때로는 엄마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언제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주었다.임유진이 정말 괜찮다며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인 뒤에야 한지영은 백연신의 차에 올라탔다.그리고 임유진은 뒤편으로 가 검은색 벤틀리에 올라탔다.한지영은 임유진을 태운 뒤 바로 떠나는 차량을 보며 옆에 있는 백연신에게 말했다.“우리도 이만 가요.”차에 시동을 걸어 경찰서를 벗어난 백연신이 물었다.“이제 어디로 갈 건데?”“집으로 가요.”한지영은 어쩐지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기분 안 좋아? 영화 보러 갈까?”“아니요. 영화 본다고 나아질 기분 아니에요. 연신 씨 춤이라도 보면 모를까.”한지영은 지난번 술에 잔뜩 취해 있을 때 그 춤을 봐서 그런지 술이 깬 다음 날 흐릿했던 그의 모습만 기억날 뿐 어떻게 그녀를 홀려놨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그녀는 술이 원수라며 기억을 못 하는 자신을 몇 번이나 자책했다.백연신을 그녀를 힐끔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그렇게 보고 싶으면 다음에 원하는 만큼 보여줄게.”순간 한지영은 침에 사레들릴 뻔했다.지금 뭐라고 한 거지?그 춤을 또 춰준다는 건가?그렇게 싫어해 놓고서는 또다시 보여준다고?백연신은 티비에 남자 아이돌이 춤추는 것만 봐도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이다.“정말이에요? 정말 또 춰줄 거예요?”“그래.”백연신은 호기롭게 대답했다. 한지영은 모르겠지만 그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줄 수 있다.한지영은 침을 한번 꼴깍 삼키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지금은 이렇게 대답해도 언제 다시 생각을 바꿀지 몰라.’“그럼 오늘 보여줘요.”“오늘?”백연신이 눈썹을 꿈틀거렸다.“네. 어차피 달리 할 거 없잖아요. 나 영화관은 싫어요. 그러니까 일단 연신 씨 집으로 가서 춤추는 거 보고 나서 그 뒤에 다시 집으로 갈게요.”지금은 벌써 저녁 9시라 백연신의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10시가 넘게 된다.백연신은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그러고는
“아닐 거예요 아마... 그냥 혹시 하는 마음에 물어본 거예요.”한지영은 서둘러 해명하며 조금 어색하게 몸을 움직였다. 배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때문에 어쩐지 민망해졌다.“그런데 나 이번 달 아직 생리 안 했어요...”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이 말을 덧붙였다.백연신은 그 말을 듣더니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다른 증상은 몰라도 생리를 아직 안 한 거면 충분히 임신 가능성이 있었다.만약 한지영이 임신한다면...“임신인지 아닌지는 병원 가서 혈액 검사해보면 돼.”그 말에 한지영은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잡았다.“혈액 검사 말고 우리 일단은... 임신 테스트기로 확인부터 해요, 네?”“...”백연신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혹시 피 뽑는 거 무서워서 그래?”한지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집에 가기 전에 약국에 들러서 임신 테스트기 사다 줘요. 혹시 모르니까 여러 개 많이 사 와요.”별장으로 가기 전 마침 약국이 보였다.백연신은 도로 옆에 차를 주차하고는 약국으로 들어가 그녀의 말대로 여러 종류의 테스트기를 다 집은 다음 계산했다.그러고는 다시 차로 돌아와 그것들을 전부 한지영에게 건네주었다.한지영은 조수석에 앉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임신 테스트기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설명서를 읽었다.하지만 막상 백연신의 별장에 도착해 화장실에 들어가 확인하려 하자 갑자기 긴장이 밀려와 심호흡을 여러 번 내뱉었다.“어떡해요? 나 지금 너무 떨려요!”한지영은 백연신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맞잡은 그의 손이 축축한 것이 땀으로 가득 젖어있었다.“설마... 연신 씨도 떨려요?”“응. 나도 떨려.”백연신은 고개를 끄덕였다.이건 유례없는 떨림이었다. 백씨 가문을 곧 손에 넣을 때도 이렇게 떨리고 긴장되지는 않았었다.한지영은 그 모습을 보더니 오히려 서서히 떨림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뭐가 떨려요. 그냥 임신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뿐이잖아요. 기다려요. 금방 확인하고 나올 테니까.”테스트하는 쪽이 도리어 안 하는 쪽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실망했어요?”한지영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백연신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실망 안 했어. 임신은 천천히 해도 돼. 그보다 이제 거기서 나와.”“나 지금 못 나가요.”한지영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갑자기 터진 거라 나 지금 생리대도 없단 말이에요. 연신 씨가 나가서 사다 줘요.”그 말에 백연신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생리대를 사 오라고?”오늘 밤 그는 벌써 두 번이나 삑사리가 났다.“아니면요? 내가 피를 뚝뚝 떨구며 나가서 사 올까요?”한지영은 피가 뚝뚝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그를 바라보았다.“도우미한테 사 오라고 할게.”“안돼요!”한지영이 다급하게 그를 제지했다.“민망하단 말이에요. 그리고 시간도 늦었는데 좀 미안하잖아요. 그냥 연신 씨가 사다 줘요.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남자친구가 생기면 이런 부탁 해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어릴 때 남자친구한테 이런 부탁을 하는 여자애들이 얼마나 부러웠는데요.”백연신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남자친구에게 생리대 사 와달라는 부탁이 뭐라고 부럽기까지 한 거지? 누가 사든 다를 거 없지 않나?여자들만의 그런 로망 같은 것이 있는 걸까?한지영은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백연신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네, 잘 다녀와요.”한지영은 그제야 활짝 웃었다.그러고는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에게 한마디 덧붙였다.“아, 화이X 대형에 날개 달린 거로 사 와요. 알겠죠?”“...”백연신은 참으로 복잡미묘한 기분이었다.오늘 그는 한 번도 구매해본 적 없는 것들을 참 많이도 샀다.다행히 아까도 그렇고 지금 생리대를 살 때도 그렇고 직원들이 이상한 눈길로 보지는 않았다.다만 결제하고 나가려는데 그의 귀에 대학교 신입생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야, 방금 봤어? 저 남자 생리대 사는 거?”“여자친구 아니면 와이프한테 사주는 건가 보네.”“부럽다. 나도 저런 남자랑 연애하고 싶어.”“나도.”그 말에 백연신은
한지영은 마치 공주님처럼 그의 보살핌을 받았다.생각해보면 부모님을 제외한 타인이 이렇게까지 그녀를 위하고 아껴주는 건 백연신이 처음이었다.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심각한 얼굴의 남자를 바라보았다.“많이 아파?”“네.”그의 걱정에 한지영은 일부러 불쌍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남자들은 좋겠다. 이런 고통 매달 안 겪어도 되고.”백연신은 손을 들어 그녀의 배를 살살 어루만져주었다.“이러면?”“좋네요. 계속해봐요.”그 말에 백연신은 소파에 앉아 허리를 잔뜩 숙인 채 그녀의 배를 조심스럽게 마사지해주었다.한지영은 그 손길을 편히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마사지 강도가 약해지자 눈을 감은 채로 속삭였다.“아, 멈추지 말아요. 계속해요, 계속. 응... 좋아...”“...”백연신은 그녀의 속삭임에 머리털이 쭈뼛서는 느낌이었다.그녀는 지금 본인이 내뱉은 말이 얼마나 야릇하게 들리는지 알까?한지영은 백연신이 이렇게도 마사지를 잘 할 줄 몰랐다.그녀는 그의 손이 이렇게 편하고 기분 좋을 줄 알았으면 생리할 때마다 집에서 쉬는 게 아닌 그에게 마사지해달라고 할 걸 그랬다며 다음부터는 생리하는 날에도 같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그때 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여기 생강차랑 초콜릿 가져왔습니다.”한지영은 눈을 번쩍 뜨고 도우미에게 말했다.“저한테 주세요.”도우미는 생강차를 그녀에게 건네주고 소파 옆에 초콜릿을 올려놓았다.“이만 가봐.”백연신의 말에 도우미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을 나가기 전에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을 힐끔 바라보고는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문이 닫힌 뒤 한지영은 생강차를 마시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천천히 마셔. 혀 데이지 말고.”“알았어요.”그녀는 그의 말대로 생강차를 후후 불어 조금 식힌 다음 천천히 마셨다.백연신은 그녀의 엄마보다 더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어쩌면 그런 모습 때문에 한지영은 그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남자친구에게 온전히
“그럼 다행이고.”한지영의 얼굴도 아까보다는 많이 편해진 듯해 백연신은 그제야 안심한 듯 서서히 표정을 풀었다.아까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아파할 때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생리통을 대신 겪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그는 그녀가 언제나 활짝 웃고 활기찬 모습이기를 바란다.그 모습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백연신의 손은 여전히 한지영의 배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연신 씨, 나 결국 임신 아니었잖아요. 정말... 실망 안 했어요?”한지영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임신 아니라고 해서 실망하지는 않아. 지금이 아니라도 우리 사이에 언젠가는 아이가 태어날 거니까. 아까는...”백연신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아까는 오히려 임신이 아니라고 해서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어.”줄곧 평정심을 잃어 본 적 없을 것 같은 그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연신 씨가 평정심을 잃을 때도 있어요?”“그래. 아까 너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만약 정말 임신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엄청 어지러웠어.”그는 한지영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정말 임신했다면 나는 바로 너와 혼인 신고할 거고 네가 안심하고 아이 낳을 수 있게 준비를 해야겠지.”이것 모두 그가 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가 하고 싶은 것들이다. 하지만...“하지만 만약 내가 정말 그렇게 하면 너는 가문 내의 싸움에 휘말리게 될 거야.”한지영이 이해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백연신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이런 얘기는 끝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괜히 이상한 오해를 하게 놔두고 싶지는 않았다.“백씨 가문의 현 가주가 나인 건 맞지만 그렇다 해서 그 여자가 모든 걸 포기한 건 아니야. 자기 아들들을 데리고 언제든지 나를 끌어낼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만약 네가 단순히 여자친구인 거면 그들도 뭘 하려고 들지 않겠지만 나와 결혼하고 임신까지 한 걸 알게 되면 그들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질 거고
백연신은 그녀의 말에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조금 놀란 것 같았다.“만약... 만약에 말이에요. 어느 날 내가 정말 임신하게 되면, 만약 그때도 가문의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때는 결혼을 조금 미뤄도 좋아요. 당신한테 바로 결혼하자는 소리 안 할게요. 먼저 무사히 아이를 낳은 다음 위협이 다 사라지고 나서 그때 결혼하는 거로 해요.”“너...”“나는 소문 같은 거 무시할 수 있어요. 그딴 건 절대 날 무너트리지 못해요. 내가 원하는 건 연신 씨랑 평생을 함께하는 거예요. 그 길이 험난하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어요. 그런 게 다 상관없을 만큼 당신이 좋으니까.”한지영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확신에 차 있었고 눈빛은 무척이나 올곧았다.백연신은 벅차오르는 마음에 그녀를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그가 사랑하는 한지영이라는 여자는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 용감했다. 그의 상황도 다 이해해주고 함께 견뎌줄 수 있을 만큼 멋있는 사람이었다.“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이렇게 멋진 여자인 걸 이제 알았네.”백연신은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나지막이 속삭였다.“널 사랑해서 참 다행이야.”...강씨 저택 별채.강지혁은 임유진을 데리고 별채 안으로 들어왔다.이곳은 강지혁이 아버지인 강선우를 추모하는 곳으로 임유진도 두 번 정도 와 본 적이 있다.임유진은 지금 이 시각에 그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올 줄은 몰랐다.강지혁은 그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아버지의 사진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임유진이 떠나지 못하게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다.“여기는 왜 데리고 왔어?”임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때 여기서 네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강지혁의 말에 그녀는 바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오래된 일이잖아. 기억 안 나.”지금 한 건 거짓말이지만 언젠가는 정말 기억 속에서 잊어버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와의 추억도 함께.“기억이 안 난다고.?”강지혁은 낮게 웃었다.오늘은 유독 그 웃음소리가 거슬리게
“그때 넌 여기서 나한테 평생 나만 사랑할 거라고, 내 옆에 있을 거라고, 영원히 떠나지 않을 거라고 했어.”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까만 눈동자 속에는 언뜻 조급함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그의 얼굴에 닿아있던 그녀의 손이 흠칫 떨렸다.그날 새벽 지독하게 외로운 얼굴로 홀로 이곳에 서 있던 그를 보며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그를 발견한 순간 모든 걸 내던져서라고 그를 지켜주고 싶었고 안아주고 싶었다.그가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그에게 안정감을 주고 싶었다.그에게 사랑한다 속삭이고 강현수와의 기억을 떠올렸음에도 그가 불안해하는 것 같아 기억 안 나는 척, 모르는 척했었다.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는 정말 강지혁이 전부였던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은...임유진은 강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게 뭐? 너도 그때는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사랑하기 싫다고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어. 약속이라는 건 생각보다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야. 언제든지 번복할 수 있는 거지.”“만약 내가 그때 그런 말 한 걸 후회한다면? 그러면 너도 다시 생각해줄 수 있어?”“한번 엎질러진 물은 두 번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어.”“확정 짓지 마. 내가 주워 담지 못하는 물은 없어.”강지혁은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널 너무 사랑하게 될까 봐 겁이 났어. 아버지와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봐, 내가 내 목숨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될까 봐 겁이 났어...”그의 낮은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에서 천천히 울려 퍼졌다.이건 그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는, 줄곧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마음이다. 그는 지금 그 마음속 깊은 곳을 그녀에게 보여주려 하고 있다.임유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런데 헤어지고 나서 알겠더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이미 네가 없이는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헤어지고 나서 알았어. 유진아,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주면 안 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임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잡혔던 손을 살짝 움직여 그의 눈썹을 매만졌다.이에 강지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지만 피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던 손도 서서히 느슨하게 풀렸다.임유진은 그의 눈썹을 매만지던 손을 천천히 내려 그의 눈 그리고 코 마지막으로 입술을 매만졌다.무척이나 예쁜 입술이었다. 무표정일 때는 섹시하고 매력적이지만 웃을 때면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그녀의 마음을 간지럽힐 만큼 사랑스러웠다.“아버지와 똑같은 결말을 맞이할까 봐, 네 목숨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할까 봐 무서웠다고 했지? 그 말은 내가 너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너를 배신할 거라 생각했다는 거네?”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오히려 지극히 부드러웠고 마치 고요한 물길 같았다.하지만 그 고요함이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일전 월세방에서도 그녀는 이런 얼굴로 그의 마음을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으니까.“너랑 사귈 때 내가 널 사랑한다고 했던 말도, 널 떠나지 않을 거라 했던 말도 너는 믿는다고 하고선 끝까지 믿지 못했던 거야. 그래서 헤어지기로 한 거고, 내 말이 맞아?”강지혁의 동공이 흔들렸다.“네가 방금 날 사랑한다고 했을 때 나한테 목숨도 내어줄 수 있다고 했었지? 그 말은 너는 아직도 내가 널 언젠가는 배신할 거라 생각한다는 거야. 너의 어머니가 너의 아버지를 배신했던 것처럼.”강지혁은 간절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내가 널 확실히 믿으면... 그때는 날 사랑해 줄 거야? 내 곁으로 돌아와 줄 거야?”임유진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네 믿음이 뭐라고 내가 다시 널 사랑해야 해? 너는 지금은 날 믿으려고 해도 결국 또다시 믿지 못할 거야. 그리고...”그녀는 손을 거두어들이고 자기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널 사랑했을 때 미칠 듯이 뛰던 심장이 이제는 안 뛰어.”그 말에 강지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