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다행이고.”한지영의 얼굴도 아까보다는 많이 편해진 듯해 백연신은 그제야 안심한 듯 서서히 표정을 풀었다.아까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아파할 때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생리통을 대신 겪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그는 그녀가 언제나 활짝 웃고 활기찬 모습이기를 바란다.그 모습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백연신의 손은 여전히 한지영의 배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연신 씨, 나 결국 임신 아니었잖아요. 정말... 실망 안 했어요?”한지영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임신 아니라고 해서 실망하지는 않아. 지금이 아니라도 우리 사이에 언젠가는 아이가 태어날 거니까. 아까는...”백연신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아까는 오히려 임신이 아니라고 해서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어.”줄곧 평정심을 잃어 본 적 없을 것 같은 그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연신 씨가 평정심을 잃을 때도 있어요?”“그래. 아까 너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만약 정말 임신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엄청 어지러웠어.”그는 한지영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정말 임신했다면 나는 바로 너와 혼인 신고할 거고 네가 안심하고 아이 낳을 수 있게 준비를 해야겠지.”이것 모두 그가 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가 하고 싶은 것들이다. 하지만...“하지만 만약 내가 정말 그렇게 하면 너는 가문 내의 싸움에 휘말리게 될 거야.”한지영이 이해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백연신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이런 얘기는 끝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괜히 이상한 오해를 하게 놔두고 싶지는 않았다.“백씨 가문의 현 가주가 나인 건 맞지만 그렇다 해서 그 여자가 모든 걸 포기한 건 아니야. 자기 아들들을 데리고 언제든지 나를 끌어낼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만약 네가 단순히 여자친구인 거면 그들도 뭘 하려고 들지 않겠지만 나와 결혼하고 임신까지 한 걸 알게 되면 그들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질 거고
백연신은 그녀의 말에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조금 놀란 것 같았다.“만약... 만약에 말이에요. 어느 날 내가 정말 임신하게 되면, 만약 그때도 가문의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때는 결혼을 조금 미뤄도 좋아요. 당신한테 바로 결혼하자는 소리 안 할게요. 먼저 무사히 아이를 낳은 다음 위협이 다 사라지고 나서 그때 결혼하는 거로 해요.”“너...”“나는 소문 같은 거 무시할 수 있어요. 그딴 건 절대 날 무너트리지 못해요. 내가 원하는 건 연신 씨랑 평생을 함께하는 거예요. 그 길이 험난하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어요. 그런 게 다 상관없을 만큼 당신이 좋으니까.”한지영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확신에 차 있었고 눈빛은 무척이나 올곧았다.백연신은 벅차오르는 마음에 그녀를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그가 사랑하는 한지영이라는 여자는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 용감했다. 그의 상황도 다 이해해주고 함께 견뎌줄 수 있을 만큼 멋있는 사람이었다.“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이렇게 멋진 여자인 걸 이제 알았네.”백연신은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나지막이 속삭였다.“널 사랑해서 참 다행이야.”...강씨 저택 별채.강지혁은 임유진을 데리고 별채 안으로 들어왔다.이곳은 강지혁이 아버지인 강선우를 추모하는 곳으로 임유진도 두 번 정도 와 본 적이 있다.임유진은 지금 이 시각에 그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올 줄은 몰랐다.강지혁은 그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아버지의 사진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임유진이 떠나지 못하게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다.“여기는 왜 데리고 왔어?”임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때 여기서 네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강지혁의 말에 그녀는 바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오래된 일이잖아. 기억 안 나.”지금 한 건 거짓말이지만 언젠가는 정말 기억 속에서 잊어버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와의 추억도 함께.“기억이 안 난다고.?”강지혁은 낮게 웃었다.오늘은 유독 그 웃음소리가 거슬리게
“그때 넌 여기서 나한테 평생 나만 사랑할 거라고, 내 옆에 있을 거라고, 영원히 떠나지 않을 거라고 했어.”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까만 눈동자 속에는 언뜻 조급함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그의 얼굴에 닿아있던 그녀의 손이 흠칫 떨렸다.그날 새벽 지독하게 외로운 얼굴로 홀로 이곳에 서 있던 그를 보며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그를 발견한 순간 모든 걸 내던져서라고 그를 지켜주고 싶었고 안아주고 싶었다.그가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그에게 안정감을 주고 싶었다.그에게 사랑한다 속삭이고 강현수와의 기억을 떠올렸음에도 그가 불안해하는 것 같아 기억 안 나는 척, 모르는 척했었다.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는 정말 강지혁이 전부였던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은...임유진은 강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게 뭐? 너도 그때는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사랑하기 싫다고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어. 약속이라는 건 생각보다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야. 언제든지 번복할 수 있는 거지.”“만약 내가 그때 그런 말 한 걸 후회한다면? 그러면 너도 다시 생각해줄 수 있어?”“한번 엎질러진 물은 두 번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어.”“확정 짓지 마. 내가 주워 담지 못하는 물은 없어.”강지혁은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널 너무 사랑하게 될까 봐 겁이 났어. 아버지와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봐, 내가 내 목숨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될까 봐 겁이 났어...”그의 낮은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에서 천천히 울려 퍼졌다.이건 그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는, 줄곧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마음이다. 그는 지금 그 마음속 깊은 곳을 그녀에게 보여주려 하고 있다.임유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런데 헤어지고 나서 알겠더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이미 네가 없이는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헤어지고 나서 알았어. 유진아,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주면 안 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임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잡혔던 손을 살짝 움직여 그의 눈썹을 매만졌다.이에 강지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지만 피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던 손도 서서히 느슨하게 풀렸다.임유진은 그의 눈썹을 매만지던 손을 천천히 내려 그의 눈 그리고 코 마지막으로 입술을 매만졌다.무척이나 예쁜 입술이었다. 무표정일 때는 섹시하고 매력적이지만 웃을 때면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그녀의 마음을 간지럽힐 만큼 사랑스러웠다.“아버지와 똑같은 결말을 맞이할까 봐, 네 목숨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할까 봐 무서웠다고 했지? 그 말은 내가 너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너를 배신할 거라 생각했다는 거네?”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오히려 지극히 부드러웠고 마치 고요한 물길 같았다.하지만 그 고요함이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일전 월세방에서도 그녀는 이런 얼굴로 그의 마음을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으니까.“너랑 사귈 때 내가 널 사랑한다고 했던 말도, 널 떠나지 않을 거라 했던 말도 너는 믿는다고 하고선 끝까지 믿지 못했던 거야. 그래서 헤어지기로 한 거고, 내 말이 맞아?”강지혁의 동공이 흔들렸다.“네가 방금 날 사랑한다고 했을 때 나한테 목숨도 내어줄 수 있다고 했었지? 그 말은 너는 아직도 내가 널 언젠가는 배신할 거라 생각한다는 거야. 너의 어머니가 너의 아버지를 배신했던 것처럼.”강지혁은 간절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내가 널 확실히 믿으면... 그때는 날 사랑해 줄 거야? 내 곁으로 돌아와 줄 거야?”임유진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네 믿음이 뭐라고 내가 다시 널 사랑해야 해? 너는 지금은 날 믿으려고 해도 결국 또다시 믿지 못할 거야. 그리고...”그녀는 손을 거두어들이고 자기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널 사랑했을 때 미칠 듯이 뛰던 심장이 이제는 안 뛰어.”그 말에 강지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
다음날, 퇴근한 후 한지영이 찾아와 임유진은 그녀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작은 식당으로 향했다.“어제 강지혁이랑 그렇게 가고 나서 별일 없었어? 뭐라고 안 해?”한지영은 주문하고 나서 곧바로 그녀에게 물었다.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더니 물을 한잔 들이키고 말했다.“다시 시작하재.”“뭐?”한지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다시 시작하자 했다고? 그러니까... 다시 사귀자고 했단 말이지?”“응.”한지영은 눈을 부릅뜨며 발끈했다.“이제 와서? 헤어지자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다시 사귀고 싶은 건데?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 안 한대?!”아무리 뒤에서라도 강지혁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한지영뿐일 것이다.임유진은 씩씩거리는 그녀의 표정이 어쩐지 웃겨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우중충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그러게.”“그래서 너는?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임유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다시 시작할 일은 아마 영원히 없을 거야.”그때 직원이 다가와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식사하기 시작했다.아까까지만 해도 화를 내던 한지영은 그녀의 대답을 들은 뒤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너 정말 강지혁 이제 안 좋아해?”강지혁과 막 헤어질 당시 임유진은 옆에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힘들어했었다.그런데 고작 몇 개월 사이에 그 감정을 다 내려놓았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응.”임유진은 대답하고는 다시 음식을 입에 넣었다.“그래서 강지혁은? 네가 거절한 거로 무슨 짓 하지는 않았어?”“응 일단은 아무 짓도 안 했어.”한지영은 걱정이 되었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노릇이었다.강지혁 같은 남자는 임유진이 싫다고 해도 분명히 갖은 수단을 다 써서 그녀를 곁에 두려고 할 테니까.“내 걱정 안 해도 돼. 이제는 무슨 짓 당할 것도 없어. 내가 가진 게 뭐가 있다고.”말 그대로 그녀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그리고 잃을 게 없으
“알았어. 연신 씨한테 부탁해볼게. 그보다 유미 언니는 그 뒤로 괜찮았대? 또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고?”한지영의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응, 오늘 아침 전화해서 물어봤는데 그 뒤로 깽판 치러 오는 사람은 없었고 단골손님들이 찾아와줘서 장사도 괜찮았대.”“다행이다!”임유진의 말에 한지영은 그제야 안심했다.저녁을 다 먹은 뒤 한지영은 임유진을 데려다주고 나서 백연신을 찾으러 갔다.“배 아픈 건 좀 어때?”서재에서 서류를 훑어보던 백연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지영의 곁으로 다가왔다.“괜찮아졌어요. 어제처럼 막 아프지는 않아요.”그 뜻은 오늘도 아프기는 하다는 건가?백연신은 눈썹을 꿈틀대며 물었다.“언제쯤이면 안 아픈데?”아마 예전의 그였더라면 여자의 생리통 따위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그 상대가 한지영이라서 이런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아마 내일쯤이면 완전히 괜찮아 질 거예요. 대체로 그랬거든요.”“그럼... 내가 또 배 마사지해줄까?”한지영은 그의 손기술이 꽤 나쁘지 않아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서 얼른 소파에 누워 편한 자세를 취하더니 그에게 다가오라며 손짓했다.백연신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고는 도우미에게 따뜻한 생강차와 초콜릿을 부탁하고 그제야 한지영의 곁으로 다가왔다.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배 위에서 부드럽게 움직였다.“연신 씨 마사지 배운 적 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기분 좋게 할 수가 있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부터 부려먹을 걸 그랬어.”한지영은 그의 앞에서 생리라는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백연신은 진작 부려먹지 못해 못내 아쉬운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며 기가 찬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오늘 유진 씨 만났어?”“네. 참, 강지혁이 유진이한테 다시 사귀자고 했대요.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백연신은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왜 안 놀라요?”한지영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언젠가는 그럴 것 같았어.”강지혁이 임유진을 대하는 태
어제는 백연신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춤을 보려고 했었는데 임신 소동과 생리가 오는 바람에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백연신은 그걸 아직 기억하냐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렇게 보고 싶어?”한지영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마사지 안 해줘도 괜찮겠어?”“다 추고 나서 또 해주면 되잖아요, 응?”한지영의 두 눈은 오늘따라 유독 더 반짝였다.백연신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춤춰주면 다른 남자한테는 신경 꺼. 앞으로는 나만 봐, 알겠어?”그 말에 한지영은 흠칫했다.티비를 틀면 나오는 게 남자 연예인들인데 어떻게 신경을 끌 수가 있을까. 하지만 너무나도 뜨거운 그의 시선에 그녀는 서둘러 약속했다.“약속할게요. 다른 남자들은 그저 순 감상용이고 연신 씨한테만 나쁜 마음먹을게요!”백연신은 그녀의 말에 기가 차서 웃음이 다 터져 나왔다.하지만 썩 나쁘지는 않은 듯 피식 웃더니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어가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그는 한지영의 시선이 오직 그에게만 향하기를 원하고 그녀가 원한다면 그 무엇이든 해줄 각오가 되어 있다.그때 도우미가 생강차와 초콜릿을 들고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하지만 두 걸음도 채 내딛기 전에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고야 말았다.백연신은 지금 셔츠 단추를 다 풀어헤친 채 단단한 가슴팍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눈을 반짝이며 두 손을 들어 열렬히 호응해주는 한지영이 있었다.그러다 한지영과 눈이 마주친 도우미는 눈만 깜빡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손에 든 생강차와 초콜릿을 내려놓고 후다닥 서재의 문을 닫고 나갔다.문이 닫힌 순간, 한지영은 백연신을 향해 조금 어색하게 말했다.“연신 씨, 다음에는 우리 문부터 잠가요...”“다음에 또 춰달라고?”“연신 씨 이런 재능을 썩히는 것도 안 좋아요. 나 지금 심장이 두근거려서 그런지 배도 안 아픈 것 같아요.”한지영은 왼쪽 가슴에 손을 대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선생님과는 많이 친한가 봐요?”가는 길, 임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강현수가 그런 작은 의원의 의사 선생님과 친하다는 것이 꽤 의외였다.“알고 지낸 지 오래됐어요. 여진이랑 산에서 내려올 때 다리가 골절됐었거든요. 병원이란 병원은 다 가봤지만 치료는 할 수 있어도 후유증이 남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엄마가 용한 의사가 있다고 해서 소 선생님께 치료받게 됐어요.”강현수의 말에 임유진은 옆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골절이요?”“네. 3개월 정도 치료하고 그제야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게 됐어요.”골절이 있었다고? 혹시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다쳤던 건가?임유진은 속으로 그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절벽에서 그를 끌어올리고 난 후부터 강현수는 확실히 걷지 못했었다. 그때는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 그저 엄살을 부리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골절이었을 줄이야...산에서 내려올 때까지도 그는 한 번도 다리를 다쳤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등에 업힌 채로 미안하다는 말만 줄곧 내뱉었었다.“그때... 많이 아팠어요?”임유진은 주먹을 꽉 말아주며 물었다.강현수는 그녀 쪽을 힐끔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예요?”임유진은 아무 말 없이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강현수는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말했다.“엄청 많이 아팠어요. 그때는 그게 평생 겪을 고통 중에서 제일 큰 고통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그런데 뭐요?”임유진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뒤에 말을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강현수는 말해주지 않았다.물리적 고통이 제일 큰 고통인 줄 알았지만 그 여자아이를 찾지 못한 것이 더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이대로 찾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만큼 그렇게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다.그러나 막상 배여진을 만나고 나니 그런 북받쳐 오르는 감정은 온데간데없었고 상상과는 많이 다른 그녀의 모습에 이유 모를 실망감만 남았다.그는 요즘 어쩌면 그저 그리움일 때가 더 나은 인연도 있다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까.정다연의 뒤에는 마찬가지로 집안이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재벌가의 어린 여성들이 있었다. 그녀들 역시 강지혁을 노리고 있었고 지금은 정다연이 나서서 임유진의 기를 꺾으려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정다연은 임유진이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자 점점 더 기세등등해졌다.“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가짜 죽음으로 강 회장님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도 얘기해주시겠어요? 듣기로 다른 남자 때문이라던데 어디 한번 제대로 해명해 보시는 게 어때요? 그 강씨 가문의 안주인인데 이런 일로 가문에 먹칠하시면 안 되잖아요.”정다연의 의도는 뻔했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곁을 떠난 게 사실은 다른 남자 때문이었다는 근거 불분명한 얘기로 그녀를 깎아내리기 위해서였다.아니나 다를까, 정다연의 뒤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에 너도나도 수군거리며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지난 5년간 임유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얼토당토않은 말에도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임유진은 정다연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었다.“정다연 씨, 혹시 누구한테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정다연은 임유진의 입에서 정확히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대꾸했다.“그건 말할 수 없죠.”“그래요? 그러면 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지어내 나를 깎아내리려고 한 사람이 사실은 정다연 씨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될까요?”임유진의 말에 정다연이 발끈했다.“그게 무슨! 지금 날 의심하는 거예요? 기가 막혀서!”임유진은 평온하고 또 침착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정다연 씨, 다른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라고 한들 그걸 직접 내 앞에서 마치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엄연한 명예훼손이에요. 좋은 의도로 저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제 말이 틀렸나요?”정다연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움찔했다. 남편 덕에 신분 상승한 여자라 몇 번
백연신이었다.백연신의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은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일전 드레스 샵에서 임유진이 제일 먼저 골랐던 그 실버 드레스였다.백연신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다 임유진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리고 고은채는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고 보니 강 회장님 아내분과 아는 사이이지 않았어요? 5년만일 텐데 가서 인사해요, 우리.”그녀는 백연신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멋대로 그를 이끈 채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다.“오랜만이네요. 저 기억하죠? 고은채예요.”고은채는 예쁘게 웃으며 먼저 임유진에게 인사를 건넸다.“네, 안녕하세요.”임유진은 조금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고은채만 아니었으면 백연신과 한지영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고은채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는 백연신의 옆자리를 노렸을 것이다. 백연신은 사랑보다 백씨 가문을 온전히 손에 넣는 것을 원했던 남자였으니까.“사모님과는 연이 좀 깊은 것 같아요. 우리 연신 씨 전 여자친구가 바로 사모님 친구분이셨죠? 아직 결혼을 안 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사모님께서 좋은 남자 소개 해주는 건 어떠세요? 아니면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고은채는 생글생글 웃으며 거리낌 없이 한지영의 얘기를 꺼냈다.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백연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불빛 바로 아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색이 무척 창백해 보였다.“아니요. 지영이 친구는 나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요. 지영이가 날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힘이 돼줄 거고 도움을 청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도울 예정이에요. 물론 지영이가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그럴 거고요.”임유진은 웃음을 거두어들이며 조금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만약 그녀로 인해 한지영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고은채는 이에 가볍게 웃었다.“한지영 씨는 든든한 친구를 둬서 좋겠어요. 부러워요. 참, 이번에 다시 돌아가면 그때는 연신 씨랑 결혼식에 관해 논의
임유진은 청초해 보이는 메이크업을 하고 긴 머리를 단아하게 위로 올렸다. 물론 머리를 푼 모습도 예뻤지만 올린 것이 훨씬 더 우아해 보였다.그녀는 연예인 뺨치는 미모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강지혁의 옆에 서도 꿀린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고 오히려 차분하고 또 분위기 있는 모습 때문에 차가워 보이는 강지혁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마치 이게 바로 하늘이 내린 한 쌍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람 중에는 젊은 남성들도 있었다. 그들은 평소 연예인도 만나보고 몸매가 예쁜 모델들도 만나봤을 텐데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임유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그리고 그런 남자들의 모습에 강지혁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오늘의 임유진은 유독 더 예쁘고 단아했다. 단지 옷이 바뀌고 예쁘게 치장을 해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보다는 그녀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그녀를 더 돋보이게 했다.게다가 그녀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온한 감정을 갖게 하는 이상한 재주가 있었다. 그녀 곁에 있으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 같고 그래서 이대로 그녀를 계속 곁에 두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고는 했다.강지혁은 마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듯 임유진을 더 바싹 자기 곁에 붙인 후 나지막이 속삭였다.“너한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아마 5년 전에 한 번 인사를 나눴던 사람도 있을 거야.”임유진은 그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게 목적이라는 걸 임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강지혁은 사람들 쪽으로 다가가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눴다. 그러면서 자기 아내라며 그들에게 임유진을 소개해주었다.임유진과 인사를 나눈 사람 중에는 아예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고 5년 전에 한 번 정도 인사를 나눈 적이 있던 사람도 있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소개해준 대로 인사를 나누다 거의 한 바퀴를 다 돌았을 때 갑자기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나 저기서 잠깐 쉬고 있을게.”“왜, 힘들어?”“그건 아니고 힐
하지만 잠깐 눈을 판 사이 한지영을 다치게 했고 그렇게 평생 그녀의 곁에 있을 자격을 잃어버렸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리며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나와 결혼하고 싶은거라면 그렇게 해줄게. 이곳에서의 일이 다 끝이 나면 혼사에 관해 얘기하도록 하지.”“정말이에요?”고은채는 예상 밖의 답변에 활짝 웃었다.“너한테 굳이 거짓말할 이유는 없어.”백연신은 담담하게 답하더니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대신 지영이 건드리지 마. 지영이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날에는 각오해도 좋을 거야.”고은채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이토록 시린 눈빛은 처음이었다.아무리 결혼을 약속했다고 한들 이 남자의 마음은 여전히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고 그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백연신, 네가 지금은 나를 이렇게 차갑게 대하지만 머지않아 곧 내 발밑에 납작 엎드리게 될 거야. 그때는 아마 한지영은 생각도 안 날걸? 두고봐.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사랑하게 만들 거니까.’고은채는 만약 백연신과 먼저 만난 사람이 자신이었다면 한지영 같은 건 애초에 기회도 없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한지영은 얼굴로 보나 몸매로 보나 아니면 집안으로 보나 자신보다 한참이나 못난 여자였으니까.“알겠어요. 건드리지 않을게요. 그러니 연신 씨도 꼭 약속을 지켜요.”고은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임유진은 한정판 블랙 드레스를 입고 그에 어울리는 하이힐을 신었다. 예쁜 드레스에 반짝이는 루비 목걸이까지 하고 나니 한층 더 우아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비추는 건 5년 만이라 그녀는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강씨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남들에게 흠을 잡히는 일은 조금도 없어야 했으니까.사실 그녀가 원래 준비했던 목걸이는 루비 목걸이가 아닌 진주 목걸이였다. 그런데 드레스를 다 입은 후 목걸이를 하려는데 갑자기 강지혁이 다가와 그녀에게 루비 목걸이를 해주었다.“오늘 드레스에는 이게 더 어울려.”강지혁이 말했다.“뭐야?
강지혁의 마음은 어느샌가 그녀의 부재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렸다.이러한 기분은 처음이라 그는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과거의 자신은 대체 이 여자를 얼마나 많이 사랑했었는지 문득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별장으로 돌아온 백연신은 마치 집주인처럼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고은채를 보고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누가 멋대로 들어와도 된다고 했지?”차가운 남자의 말에도 고은채는 상관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왔어요? 여자친구가 남자친구 집에 오겠다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어요. 나 당신 여자친구잖아. 안 그래요? 그보다 어디 갔다 왔어요? 설마 전 여자친구 보러 간 건 아니죠?”백연신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둡게 가라앉았다.고은채의 말대로 그는 한지영을 보러 갔다. 그래서 그녀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것도 보았고 다른 남자에게 웃어주는 것까지 보았다.그 광경을 하나하나 보면서 그는 질투와 분노로 머리가 가득 찼고 한지영 옆에 있는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한지영은 그의 여자였으니까.“설사 그렇다 해도 당신이 그 여자와 다시 잘 될 가능성은 아주 조금도 없어요. 그러고 보니 그 여자도 이제 34살이나 됐죠? 그러면 머지않아 곧 선도 보고 결혼도 하겠네요. 여자들은 아닌 척해도 나이를 꽤 많이 신경 쓰고 있거든요.”고은채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백연신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이내 유혹적인 손길로 그의 가슴팍을 매만졌다.“입 다물어.”백연신은 고은채의 손을 덥석 잡더니 그대로 다시 거칠게 뿌리쳤다. 경멸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그리고 내 몸에 손대지 마.”“5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현실을 못 받아들였어요?”고은채는 그에게 뿌리쳐진 손을 아무렇지 않게 거두어들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잊은 것 같아서 다시 말해주는데 만약 그때 내가 구해주지 않았으면 한지영은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전에 벌써 싸늘하게 죽어버렸을 거예요. 그때 연신 씨가 한지영 살리겠다고 나한
임유진은 마치 점심 메뉴 정하듯 태연한 강지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너는 내 거라는 것만 확실하게 그 여자한테 각인시켜주면 돼. 만약 네가 그렇게 했는데도 헛된 희망을 품고 헛된 짓을 하면 그때는 내가 알아서 상대할게. 너는 나설 필요 없어.”남편을 누군가와 공유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으니까.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물었다.“내가 네 거야?”가까스로 가라앉은 임유진의 볼이 한순간에 다시 빨갛게 물들었다.임유진은 빨개진 얼굴로 강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응, 넌 내 거야. 내 남편이고 나만 가질 수 있어.”강지혁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는 타인이 자신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걸 쉽게 허락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 말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왜일까, 이 여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괜히 마음이 들뜨고 이상한 만족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내가 네 거라고 확신하나 봐? 내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어쩌려고?”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물었다.임유진은 그 말에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다른 여자한테 아주 잠시 끌린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네 마음을 다시 나한테로 돌려놓으려고 할 거야. 하지만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 여자 없이는 안 될 지경에 이른 거라면... 그때는 조용히 네 곁을 떠날 거야. 그게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 같으니까.”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그녀가 알고 있는 혁이가 아닐 테니 서로를 위해서라도 놓아주는 게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임유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지혁은 얼굴을 무섭게 굳히더니 곧바로 그녀를 제 품에 단단히 끌어안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그녀의 한마디로 바닥 끝까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심지어는 두려움이라는 감정까지 들었다.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거지?누군가의 한마디로 인해
강지혁은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조금 풀어진 얼굴로 임유진의 오른손을 잡았다.“다른 남자한테는 찰나의 시선도 주지 마. 너한테 남자는 오직 나뿐이니까.”임유진은 소유욕 짙은 그의 말에 문득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이 떠올랐다.예전에도 그는 그녀의 곁에 남자가 접근하는 꼴을 보지 못했고 늘 자기만 바라보며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해주기를 바랐다.집착 가득했던 당시의 그 말도 어떤 감정으로 한 건지 모를 지금 이 말도 임유진은 그저 달콤하게만 느껴졌다.그때 귓가에 따끔한 감각이 전해지고 임유진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번쩍 차렸다. 강지혁이 허리를 숙인 채 그녀의 귀를 깨물고 있었다.임유진은 그의 입술이 닿은 귓가가 한순간에 확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에 몸을 움찔 떨며 반사적으로 귀를 막으려고 했다.“혁아, 간지러워...”하지만 귀 쪽으로 손을 올리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잡혀버렸다.강지혁은 마치 달콤한 디저트라도 맛보듯 입술을 떼려 하지 않았다.“그러고 보니 오늘 드레스 샵에서... 흡... 꽤 많은 돈을 썼는데... 괜찮지?”임유진은 그의 움직임을 제지하기 위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만약 이대로 조금만 더하다가는 금세 분위기에 취해 이상한 기류로 흘러갈지도 몰랐으니까.“쓰라고 준 카드야. 원하는 대로 써. 그리고 내가 가진 재산 중 절반은 원래 네 몫이야.”“내가 네 돈만 보고 좋아한 거면 어쩌려고 이런 말을 하지?”임유진이 농담 섞인 말투로 물었다.“돈 때문이야?”강지혁이 조금 가라앉은 말투로 물으며 임유진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랑했던 공기가 한순간에 차갑게 바뀌었다.임유진은 마치 자신의 모든 걸 꿰뚫어 보려는 듯한 그의 눈빛에 괜히 목이 마르는 것 같았다.“아니.”그녀의 답에 강지혁이 다시 웃었다.“그럴 줄 알았어. 만약 너와 나를 이었던 게 돈이었으면 그렇게도 많은 일을 겪지 않았겠지.”강지혁은 임유진의 손가락을 매만지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오늘 드레스 샵에서 소민아와 트러블이
“알고 있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소민아는 말을 마친 후 빠르게 가게를 벗어났다.그날 밤.임유진은 아이 둘을 다 재운 후 곧바로 침실로 돌아와 백연신의 기사를 검색했다.현이는 자신만의 방이 다 마련되었음에도 오빠와 함께 자고 싶다며 잠잘 때만 되면 강선율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잠들 때까지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임유진은 그런 딸의 모습에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율이도 썩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고 또 두 아이가 함께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 좋아 결국에는 두 사람이 함께 자는 것을 허락했다.강선율은 이야기를 읽어달라는 동생의 말에 처음에는 조금 난감해하더니 이내 진지하게 동화책을 고르며 현이에게 이야기를 읽어주었다. 게다가 매 밤 한 권도 아니고 적어도 세 권의 책은 읽어주었다.오빠라는 호칭에 책임감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피가 당겨서인지 율이는 당황한 표정은 가끔 지을지언정 짜증이나 화는 한번도 내지 않았다.임유진은 아이들의 생각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그때 머리 바로 위쪽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연신 회장 얼굴이 네 취향인가 보지? 입꼬리가 귀에 걸렸네.”임유진은 그 말에 화들짝 놀라 바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온 건지 등 바로 뒤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백연신의 기사를 보고 있는 강지혁의 얼굴이 보였다.백연신의 사진을 켜둔 채로 웃어버린 바람에 아무래도 그 미소의 상대가 백연신이라고 오해한 듯했다.“아니야! 방금은 현이랑 율이 생각하느라 괜히 좋아져서 그래. 그리고 백연신 씨는 지영이 전 남자친구잖아. 지영이 일로 백연신 씨 기사 좀 검색해 본 것뿐이야. 정말이야!”임유진은 혹여 강지혁이 이상한 오해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해명했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너 혹시... 백연신 씨랑 지영이가 사귀었던 사실도 잊어버렸어?”임유진은 강지혁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 알
눈앞 여자의 정체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어마어마한 거물의 아내임은 틀림없었다.사장과 소민아에게 잘 보이려 했던 직원은 속으로 동시에 이 생각을 하고는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버렸다.임유진은 고이준에게서 카드를 건네받은 후 바로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신입 직원을 바라보았다.“이 드레스로 할게요. 마음에 드네요.”“네... 네! 알겠습니다!”신입은 얼떨떨한 얼굴로 허리를 바짝 편 채 대답했다. 입사한 지 불과 몇 개월 안 된 자신이 이러한 큰 주문을 따낼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소민아는 임유진 쪽으로 확 기운 분위기에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불려 세워지고 말았다.“소민아 씨, 지금 어디 가는 겁니까? 소민아 씨와도 관계되는 일이니 함께 CCTV를 보는 게 어때요?”임유진이 물었다.“아, 아니요. 그럴 필요는... 제가 실수로 물을 맞아버린 것뿐인데요.”소민아는 상황을 무마하려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아까는 내 친구가 물을 끼얹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것 때문에 고래고래 소리까지 질렀잖아요. 뭐, 좋아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오해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럼 이제 억울한 내 친구한테 사과해야겠죠?”임유진의 말에 소민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사과요?”“그럼 이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사과 한마디 없이 사건이 해결될 줄 알았어요?”임유진의 목소리가 삽시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소민아의 얼굴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소안나가 강씨 가문의 양녀로 들어간 후로 그녀는 늘 자신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던 콧대 높은 여자들마저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를 떨었으니까.그러니 누군가에게 사과한다는 일은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다. 그것도 평범하디 평범한 한지영에게는 더더욱 말이다.게다가 지금은 가게 직원들 앞이라 만약 정말 사과하게 되면 체면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질 게 분명했다.“소민아 씨,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