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연신은 그녀의 말에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조금 놀란 것 같았다.“만약... 만약에 말이에요. 어느 날 내가 정말 임신하게 되면, 만약 그때도 가문의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때는 결혼을 조금 미뤄도 좋아요. 당신한테 바로 결혼하자는 소리 안 할게요. 먼저 무사히 아이를 낳은 다음 위협이 다 사라지고 나서 그때 결혼하는 거로 해요.”“너...”“나는 소문 같은 거 무시할 수 있어요. 그딴 건 절대 날 무너트리지 못해요. 내가 원하는 건 연신 씨랑 평생을 함께하는 거예요. 그 길이 험난하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어요. 그런 게 다 상관없을 만큼 당신이 좋으니까.”한지영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확신에 차 있었고 눈빛은 무척이나 올곧았다.백연신은 벅차오르는 마음에 그녀를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그가 사랑하는 한지영이라는 여자는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 용감했다. 그의 상황도 다 이해해주고 함께 견뎌줄 수 있을 만큼 멋있는 사람이었다.“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이렇게 멋진 여자인 걸 이제 알았네.”백연신은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나지막이 속삭였다.“널 사랑해서 참 다행이야.”...강씨 저택 별채.강지혁은 임유진을 데리고 별채 안으로 들어왔다.이곳은 강지혁이 아버지인 강선우를 추모하는 곳으로 임유진도 두 번 정도 와 본 적이 있다.임유진은 지금 이 시각에 그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올 줄은 몰랐다.강지혁은 그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아버지의 사진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임유진이 떠나지 못하게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다.“여기는 왜 데리고 왔어?”임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때 여기서 네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강지혁의 말에 그녀는 바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오래된 일이잖아. 기억 안 나.”지금 한 건 거짓말이지만 언젠가는 정말 기억 속에서 잊어버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와의 추억도 함께.“기억이 안 난다고.?”강지혁은 낮게 웃었다.오늘은 유독 그 웃음소리가 거슬리게
“그때 넌 여기서 나한테 평생 나만 사랑할 거라고, 내 옆에 있을 거라고, 영원히 떠나지 않을 거라고 했어.”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까만 눈동자 속에는 언뜻 조급함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그의 얼굴에 닿아있던 그녀의 손이 흠칫 떨렸다.그날 새벽 지독하게 외로운 얼굴로 홀로 이곳에 서 있던 그를 보며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그를 발견한 순간 모든 걸 내던져서라고 그를 지켜주고 싶었고 안아주고 싶었다.그가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그에게 안정감을 주고 싶었다.그에게 사랑한다 속삭이고 강현수와의 기억을 떠올렸음에도 그가 불안해하는 것 같아 기억 안 나는 척, 모르는 척했었다.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는 정말 강지혁이 전부였던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은...임유진은 강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게 뭐? 너도 그때는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사랑하기 싫다고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어. 약속이라는 건 생각보다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야. 언제든지 번복할 수 있는 거지.”“만약 내가 그때 그런 말 한 걸 후회한다면? 그러면 너도 다시 생각해줄 수 있어?”“한번 엎질러진 물은 두 번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어.”“확정 짓지 마. 내가 주워 담지 못하는 물은 없어.”강지혁은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널 너무 사랑하게 될까 봐 겁이 났어. 아버지와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봐, 내가 내 목숨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될까 봐 겁이 났어...”그의 낮은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에서 천천히 울려 퍼졌다.이건 그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는, 줄곧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마음이다. 그는 지금 그 마음속 깊은 곳을 그녀에게 보여주려 하고 있다.임유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런데 헤어지고 나서 알겠더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이미 네가 없이는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헤어지고 나서 알았어. 유진아,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주면 안 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임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잡혔던 손을 살짝 움직여 그의 눈썹을 매만졌다.이에 강지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지만 피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던 손도 서서히 느슨하게 풀렸다.임유진은 그의 눈썹을 매만지던 손을 천천히 내려 그의 눈 그리고 코 마지막으로 입술을 매만졌다.무척이나 예쁜 입술이었다. 무표정일 때는 섹시하고 매력적이지만 웃을 때면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그녀의 마음을 간지럽힐 만큼 사랑스러웠다.“아버지와 똑같은 결말을 맞이할까 봐, 네 목숨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할까 봐 무서웠다고 했지? 그 말은 내가 너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너를 배신할 거라 생각했다는 거네?”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오히려 지극히 부드러웠고 마치 고요한 물길 같았다.하지만 그 고요함이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일전 월세방에서도 그녀는 이런 얼굴로 그의 마음을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으니까.“너랑 사귈 때 내가 널 사랑한다고 했던 말도, 널 떠나지 않을 거라 했던 말도 너는 믿는다고 하고선 끝까지 믿지 못했던 거야. 그래서 헤어지기로 한 거고, 내 말이 맞아?”강지혁의 동공이 흔들렸다.“네가 방금 날 사랑한다고 했을 때 나한테 목숨도 내어줄 수 있다고 했었지? 그 말은 너는 아직도 내가 널 언젠가는 배신할 거라 생각한다는 거야. 너의 어머니가 너의 아버지를 배신했던 것처럼.”강지혁은 간절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내가 널 확실히 믿으면... 그때는 날 사랑해 줄 거야? 내 곁으로 돌아와 줄 거야?”임유진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네 믿음이 뭐라고 내가 다시 널 사랑해야 해? 너는 지금은 날 믿으려고 해도 결국 또다시 믿지 못할 거야. 그리고...”그녀는 손을 거두어들이고 자기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널 사랑했을 때 미칠 듯이 뛰던 심장이 이제는 안 뛰어.”그 말에 강지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
다음날, 퇴근한 후 한지영이 찾아와 임유진은 그녀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작은 식당으로 향했다.“어제 강지혁이랑 그렇게 가고 나서 별일 없었어? 뭐라고 안 해?”한지영은 주문하고 나서 곧바로 그녀에게 물었다.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더니 물을 한잔 들이키고 말했다.“다시 시작하재.”“뭐?”한지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다시 시작하자 했다고? 그러니까... 다시 사귀자고 했단 말이지?”“응.”한지영은 눈을 부릅뜨며 발끈했다.“이제 와서? 헤어지자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다시 사귀고 싶은 건데?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 안 한대?!”아무리 뒤에서라도 강지혁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한지영뿐일 것이다.임유진은 씩씩거리는 그녀의 표정이 어쩐지 웃겨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우중충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그러게.”“그래서 너는?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임유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다시 시작할 일은 아마 영원히 없을 거야.”그때 직원이 다가와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식사하기 시작했다.아까까지만 해도 화를 내던 한지영은 그녀의 대답을 들은 뒤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너 정말 강지혁 이제 안 좋아해?”강지혁과 막 헤어질 당시 임유진은 옆에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힘들어했었다.그런데 고작 몇 개월 사이에 그 감정을 다 내려놓았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응.”임유진은 대답하고는 다시 음식을 입에 넣었다.“그래서 강지혁은? 네가 거절한 거로 무슨 짓 하지는 않았어?”“응 일단은 아무 짓도 안 했어.”한지영은 걱정이 되었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노릇이었다.강지혁 같은 남자는 임유진이 싫다고 해도 분명히 갖은 수단을 다 써서 그녀를 곁에 두려고 할 테니까.“내 걱정 안 해도 돼. 이제는 무슨 짓 당할 것도 없어. 내가 가진 게 뭐가 있다고.”말 그대로 그녀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그리고 잃을 게 없으
“알았어. 연신 씨한테 부탁해볼게. 그보다 유미 언니는 그 뒤로 괜찮았대? 또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고?”한지영의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응, 오늘 아침 전화해서 물어봤는데 그 뒤로 깽판 치러 오는 사람은 없었고 단골손님들이 찾아와줘서 장사도 괜찮았대.”“다행이다!”임유진의 말에 한지영은 그제야 안심했다.저녁을 다 먹은 뒤 한지영은 임유진을 데려다주고 나서 백연신을 찾으러 갔다.“배 아픈 건 좀 어때?”서재에서 서류를 훑어보던 백연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지영의 곁으로 다가왔다.“괜찮아졌어요. 어제처럼 막 아프지는 않아요.”그 뜻은 오늘도 아프기는 하다는 건가?백연신은 눈썹을 꿈틀대며 물었다.“언제쯤이면 안 아픈데?”아마 예전의 그였더라면 여자의 생리통 따위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그 상대가 한지영이라서 이런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아마 내일쯤이면 완전히 괜찮아 질 거예요. 대체로 그랬거든요.”“그럼... 내가 또 배 마사지해줄까?”한지영은 그의 손기술이 꽤 나쁘지 않아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서 얼른 소파에 누워 편한 자세를 취하더니 그에게 다가오라며 손짓했다.백연신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고는 도우미에게 따뜻한 생강차와 초콜릿을 부탁하고 그제야 한지영의 곁으로 다가왔다.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배 위에서 부드럽게 움직였다.“연신 씨 마사지 배운 적 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기분 좋게 할 수가 있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부터 부려먹을 걸 그랬어.”한지영은 그의 앞에서 생리라는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백연신은 진작 부려먹지 못해 못내 아쉬운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며 기가 찬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오늘 유진 씨 만났어?”“네. 참, 강지혁이 유진이한테 다시 사귀자고 했대요.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백연신은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왜 안 놀라요?”한지영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언젠가는 그럴 것 같았어.”강지혁이 임유진을 대하는 태
어제는 백연신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춤을 보려고 했었는데 임신 소동과 생리가 오는 바람에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백연신은 그걸 아직 기억하냐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렇게 보고 싶어?”한지영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마사지 안 해줘도 괜찮겠어?”“다 추고 나서 또 해주면 되잖아요, 응?”한지영의 두 눈은 오늘따라 유독 더 반짝였다.백연신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춤춰주면 다른 남자한테는 신경 꺼. 앞으로는 나만 봐, 알겠어?”그 말에 한지영은 흠칫했다.티비를 틀면 나오는 게 남자 연예인들인데 어떻게 신경을 끌 수가 있을까. 하지만 너무나도 뜨거운 그의 시선에 그녀는 서둘러 약속했다.“약속할게요. 다른 남자들은 그저 순 감상용이고 연신 씨한테만 나쁜 마음먹을게요!”백연신은 그녀의 말에 기가 차서 웃음이 다 터져 나왔다.하지만 썩 나쁘지는 않은 듯 피식 웃더니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어가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그는 한지영의 시선이 오직 그에게만 향하기를 원하고 그녀가 원한다면 그 무엇이든 해줄 각오가 되어 있다.그때 도우미가 생강차와 초콜릿을 들고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하지만 두 걸음도 채 내딛기 전에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고야 말았다.백연신은 지금 셔츠 단추를 다 풀어헤친 채 단단한 가슴팍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눈을 반짝이며 두 손을 들어 열렬히 호응해주는 한지영이 있었다.그러다 한지영과 눈이 마주친 도우미는 눈만 깜빡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손에 든 생강차와 초콜릿을 내려놓고 후다닥 서재의 문을 닫고 나갔다.문이 닫힌 순간, 한지영은 백연신을 향해 조금 어색하게 말했다.“연신 씨, 다음에는 우리 문부터 잠가요...”“다음에 또 춰달라고?”“연신 씨 이런 재능을 썩히는 것도 안 좋아요. 나 지금 심장이 두근거려서 그런지 배도 안 아픈 것 같아요.”한지영은 왼쪽 가슴에 손을 대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선생님과는 많이 친한가 봐요?”가는 길, 임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강현수가 그런 작은 의원의 의사 선생님과 친하다는 것이 꽤 의외였다.“알고 지낸 지 오래됐어요. 여진이랑 산에서 내려올 때 다리가 골절됐었거든요. 병원이란 병원은 다 가봤지만 치료는 할 수 있어도 후유증이 남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엄마가 용한 의사가 있다고 해서 소 선생님께 치료받게 됐어요.”강현수의 말에 임유진은 옆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골절이요?”“네. 3개월 정도 치료하고 그제야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게 됐어요.”골절이 있었다고? 혹시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다쳤던 건가?임유진은 속으로 그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절벽에서 그를 끌어올리고 난 후부터 강현수는 확실히 걷지 못했었다. 그때는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 그저 엄살을 부리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골절이었을 줄이야...산에서 내려올 때까지도 그는 한 번도 다리를 다쳤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등에 업힌 채로 미안하다는 말만 줄곧 내뱉었었다.“그때... 많이 아팠어요?”임유진은 주먹을 꽉 말아주며 물었다.강현수는 그녀 쪽을 힐끔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예요?”임유진은 아무 말 없이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강현수는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말했다.“엄청 많이 아팠어요. 그때는 그게 평생 겪을 고통 중에서 제일 큰 고통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그런데 뭐요?”임유진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뒤에 말을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강현수는 말해주지 않았다.물리적 고통이 제일 큰 고통인 줄 알았지만 그 여자아이를 찾지 못한 것이 더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이대로 찾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만큼 그렇게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다.그러나 막상 배여진을 만나고 나니 그런 북받쳐 오르는 감정은 온데간데없었고 상상과는 많이 다른 그녀의 모습에 이유 모를 실망감만 남았다.그는 요즘 어쩌면 그저 그리움일 때가 더 나은 인연도 있다는
역시 그간 너무 많은 여자친구를 만났던 게 독이었을까? 그래서 모든 행동이 진심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임유진은 그가 여자친구를 바꾸는 것에 회의적이었고 누군가를 정말 그리워한다면 대체품들은 결국 소용이 없을 거라고 일침을 놓기도 했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간의 행적을 그대로 돌려받는 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강현수는 이제껏 누군가를 이토록 원한 적이 없고 누군가의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적이 없다.전부 다 잊을 거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언제나 수포가 되고야 말았다.그는 임유진을 원하고 있다. 강지혁과 척을 지는 일이 있다고 한다 해도 말이다.그때 고통스러운 신음이 치료실 안에서 들려왔다.강현수는 반사적으로 몸을 바로 세우더니 치료실 문을 활짝 열었다.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소영훈이 손에 들린 침으로 임유진의 손등을 찌르고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강현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임유진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가 천천히 관자놀이 쪽으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졌다.그녀의 다른 한쪽 손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든 고통을 참아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치료과정 전반이 다 고통스러울 거라는 소영훈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평소 심각한 상황이 아니면 그런 말은 되도록 하지 않는 소영훈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분명히 엄청나게 아픈 것이 틀림없다.하지만 임유진은 아까의 신음을 끝으로 한 번도 소리 내지 않았다.강현수는 드라마 촬영이나 영화 촬영 중에 고통을 참는 여자의 얼굴은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다. 심지어 어떤 여자들은 그의 시선을 끌기 위해 조그마한 상처에도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연약한 척 안겨 왔었다.그 모습들을 다 보아왔음에도 임유진이 고통을 참는 모습은 이상하게 마음이 쿡쿡 찔리듯 아파 왔다.강현수는 소영훈이 이제 막 다른 침을 놓으려고 할 때 임유진에게로 걸어가 그녀의 꽉 쥔 주먹을 자신의 팔 위에 올려놓았다.임유진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그 언젠가 임유진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나면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해서 일지도 모른다....탁유미는 이틀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모든 수치가 안정된 후 바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다만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탁유미는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갈아줄 때마다 보이는 수술 자국을 보면서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그녀가 아무리 원치 않았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간은 이경빈의 간이었다.어쩌면 하늘이 조금은 그녀를 가엽게 여겨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윤이와 김수영은 요 며칠 거의 탁유미 곁에서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고 임유진도 자주 탁유미를 보러 병원에 왔다.“유진 씨,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게 왔다 갔다 하고...”탁유미는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의 큰 배를 바라보았다.지금쯤 집에서 태교나 들으며 휴식을 취해도 모자란 데 괜히 자신 때문에 임유진이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나였으면 안 이랬을까요?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나 윤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둘이서 얘기하고 있어.”김수영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이를 안아 들며 보호자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탁유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혁이가 그러는데 이경빈 씨도 며칠 전부터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대요. 그런데... 언니 병실까지 왔다가 매번 들어오지는 못하고 다시 돌아가나 봐요.”그 말에 탁유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이경빈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에요. 어차피 이경빈도 몸이 다 나아지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나는 계속 여기서 살게 되겠죠. 물론 나랑은 끝이라도 윤이랑은 부자간의 정이 있으니까 둘이서는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이경빈 씨와는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임유진의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
“임유진 씨한테 맡기려고 했는데 너를 설득하지 못할까 봐... 그래서 너와 직접 얘기하려고 들어왔어. 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내 간이 너한테는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이경빈은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탁유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수술은 받아줘. 네가 수술을 받으면 그때는 두 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이경빈은 지금 오직 그녀가 살기만을 바랐다.그녀만 살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탁유미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만약 나한테 간을 기증해주면 수술 후에 후유증 같은 게 생길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평온한 그녀의 말투에 이경빈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수, 수술받으려고?!”“...응.”윤이와 김수영을 위해 그녀는 한번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간을 기증해주는 대신에 뭐 바라는 거 있으면 지금 여기서 확실하게 얘기해. 너한테 빚지는 건 싫으니까. 물론 내가 수술대 위에서 죽게 되면 그때는 네가 바라는 게 뭐든 간에 들어줄 수 없게 되겠지만.”“아니! 넌 죽지 않아!”이경빈이 흥분해서 외쳤다.“분명히 괜찮을 거야. 네 골수를 이식받았을 때 나는 아무런 거부반응도 없었어.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주는 것도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이경빈은 확신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 조건은? 그것부터 말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조건이라니, 그녀에게 간을 기증해주는 대신 바라는 게 있다고 하면 그녀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것밖에 없다.그녀가 살 수 있다면 간 따위 몇 번이고 더 기증해줄 수 있다.“바라는 거 없어. 그리고 나한테 빚진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지금은 내가 너한테 빚진 걸 갚는 거니까. 너도 그때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잖아.”“그래? 그럼 서로 빚진 게 없는 거네? 알았어. 수술 무사히 끝나면... 우리 더는 보지 말자. 나는 더 이상 너랑
“유진 씨? 유진 씨가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탁유미가 깜짝 놀라며 임유진에게 물었다.“이경빈 씨 전화를 받고 왔어요.”임유진은 탁유미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언니, 수술해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이 기회를 포기하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져요.”“유진 씨!”탁유미는 갑작스러운 임유진의 말에 당황해하며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러고는 서둘러 윤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윤이가 바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기에 태연한 표정이었다.“언니가 남은 시간을 편히 보내고 싶은 건 알겠어요. 그리고 수술 결과가 안 좋으면 그 남은 시간마저 사라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언니... 만약 수술에 성공하면 그때는 윤이가 어른이 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어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었다.“언니, 만약 그때 내가 배 속의 아이를 한 명 지우는 걸 택했으면 어쩌면 아이들이나 나나 조금 더 안전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랬으면 결코 지금 같은 행복감은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그때 의사 선생님들의 권고에도, 혁이의 반대에도 결국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이들과 함께 이겨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언니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면 좋겠어요. 쉽게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윤이도 언니가 그러기를 바랄 거예요. 세상에 엄마를 일찍 보내고 싶어 하는 자식은 없으니까요. 윤이를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말아줘요.”탁유미는 그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시선을 돌려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들을 바라보았다.윤이는 임유진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본능적으로 알아들었다.“엄마, 윤이는 엄마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윤이랑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윤이가 키도 크고 힘도 세지면 그때는 윤이가 엄마를 지켜줄게요!”탁유미는 그 말에 결국 눈물을 보였다.윤이는 서둘러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앙증맞은 손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그때 병실
임유진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얼른 답했다.“알겠어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갈게요!”“임유진 씨...”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기어들어 갈 듯한 이경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웬만하면 이런 부탁을 하지 않는데 지금은 임유진 씨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부탁 좀 할게요. 제발... 제발 유미 좀 설득해주세요. 유미가 내 간을 받고 수술할 수 있게 제발 도와주세요...”임유진은 그의 간절한 부탁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그간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경빈과는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남자인지 임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다.그런데 그런 남자가 지금 탁유미의 목숨 때문에 제발이라는 말까지 하며 그녀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만약 이대로 탁유미가 죽게 되면 이경빈은 어쩌면 평생 지옥 속에서 살지도 모른다.“알겠어요.”“무슨 일이야?”전화를 끊자마자 옆에 있던 강지혁이 물었다.“유미 언니 지금 병원에 있대. 지금 바로 간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언니가 위험하대.”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투를 챙겼다.“언니가 수술받을 수 있게 설득하러 가야겠어.”“같이 가.”“너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저녁에 다시 하면 돼. 너 혼자 보내는 게 걱정돼서 그래.”“내가 왜 혼자야. 네가 붙여둔 경호원분들이 있는데. 걱정하지 마.”“그래도 걱정돼.”강지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솔직히 그는 마음 같아서는 외딴 섬을 하나 사들여 임유진을 그 섬에 데리고 가 자신의 시야 안에서만 있게 하고 싶었다.임유진은 그의 고집스러운 말에 결국 알겠다며 같이 밖으로 향했다.병원.탁유미가 있는 병실 앞으로 뛰어와 보니 문밖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를 꽉 쥐고 있는 이경빈의 모습이 보였다.“언니는 어떻게 됐어요?”임유진이 다가와 물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고 임유진을 쳐다보았다.임유진은 이경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이 움찔했다.이경빈이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경빈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그대로 탁유미를 안아 들고 윤이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엄마 데리고 병원으로 갈 거야. 윤이도 엄마 아픈 거 싫지?”윤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경빈을 따라 차량 쪽으로 달려갔다.차 문이 열린 후 이경빈은 탁유미를 조수석에 내려놓았고 윤이는 아무 말 없이 서둘러 뒷좌석에 올라탔다.아이는 시트에 편히 등을 기대는 것이 아닌 몸을 앞으로 하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탁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조금만 참아요.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엄마 구해줄 거예요. 그러면 하나도 안 아플 거예요!”탁유미는 그 말에 남은 힘을 끌어다 애써 웃어 보였다. 아들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엄마는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금방 괜찮아져.”모자의 대화에 이경빈은 가슴이 미어져 서둘러 시동을 걸고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길 그는 혹여 아픈 소리를 내면 윤이가 걱정할까 봐 이를 꽉 깨물고 참는 그녀를 보며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그날 탁유미는 그와 나란히 걷던 도중 울퉁불퉁한 바닥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분명히 아플 텐데도 그녀는 괜찮다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걸었다.그러다 날이 어두워지고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그녀의 발걸음은 티가 나게 느려졌고 이에 이상함은 여긴 이경빈은 그녀의 발을 힐끔 봤다가 그제야 퍼렇게 멍든 그녀의 발목을 발견했다.“바보야? 왜 아프다고 말을 안 해?”이경빈의 추궁에 탁유미는 그의 눈빛을 피하며 우물쭈물 답했다.“아프다 그러면 또 걱정할 거잖아.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는 집에 가서 약 바르면 금방 나아.”탁유미는 늘 이랬다. 늘 이렇게 자기보다는 옆에 사람을 더 위하며 자기가 받는 고통은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렸다.그녀는 그런 여자였다.이경빈은 차량이 빨간 불에 멈출 틈을 타 티슈를 꺼내 탁유미의 땀을 닦아주었다.많이 아픈 건지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땀 범벅이 되었고 고통을 참느라 이빨에게 혹사당한 입술은 빨갛
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야? 그럼 비켜. 이만 집으로 가야 하니까.”“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나도... 최대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고 했어. 하지만 나를 거부하지는 말아줘. 아니, 최소한 내 간만은 거부하지 말아줘. 너 계속 이대로 수술하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입 다물어!”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을 자르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윤이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자신이 아프다는 걸 윤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약을 먹을 때도 일부러 윤이가 없을 때를 봐가면서 먹었다.이제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그 시간 동안 윤이의 걱정스러운 눈빛만 보는 건 사양이었다. 이경빈은 탁유미의 표정에 그제야 이 일은 아직 윤이에게는 비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엄마 아파요? 수술해야 해요?”윤이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니, 엄마 너무 건강한데? 아빠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야.”타이밍도 참 얄궂게 이 말이 내뱉어진 다음 순간 탁유미는 또다시 간이 아파 나기 시작했다.탁유미는 고통을 참으며 다시 윤이 손을 잡았다.‘빨리 집으로 가서 약을 먹어야 해.’“자, 빨리 가자.”탁유미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그때 이경빈의 큰손이 다가와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너 지금 또 아픈 거지?”다급한 그의 질문에 탁유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이거 놔.”“대답해. 너 지금 또 진통 시작된 거지?!”이경빈은 그녀의 진통이 빈번하게 일어날수록 그녀의 몸이 점점 더 유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안 되겠다. 지금 당장 나랑 병원 가자!”“이경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병원은 무슨, 나는...”탁유미는 이경빈에게 쏘아붙이려다가 진통이 심해져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윤이는 이경빈이 탁유미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는 것을 보며 지난번 이경빈이 자신을 떼어내고 탁유미를 억지로 데려간 것이 생각났다.그 일이 있고 난 뒤 다시 만난 탁
만약 이경빈이 정말 탁유미 모자를 위해 뭔가를 하게 되면 여자의 집안은 아마 뭘 할 수 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남편이 제아무리 대기업 과장이라고 해도 이경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일 테니까.원래는 다른 학부모들의 시선을 끌어 탁유미가 스스로 아이의 유치원을 옮기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경빈이 등장한 지금 그 시선에 난감해진 건 오히려 자기 자신이었다.여자는 창피하기도 하고 또 이가 갈리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사과의 말을 건넸다.“죄, 죄송해요. 아까는 말 헛나온 거예요.”“사과는 내가 아닌 내 아들한테 해야지. 그리고...”이경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아이 엄마한테도.”그는 자신과 탁유미 사이를 뭐라고 얘기하면 좋을지 몰랐다.여자는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지금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해 얼른 탁유미와 윤이에게도 사과를 했다.“미안해요. 내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었는데... 아줌마가 미안해. 다시는 그런 말 안 할 테니까 용서해줘.”여자는 말을 마친 후 아들의 손을 잡고 빠르게 뛰어갔다.탁유미는 고개를 숙여 윤이에게 말했다.“이제 가자. 할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겠다.”“엄마, 사생아가 뭐예요?”그때 윤이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이에 탁유미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옆에 있던 이경빈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앞으로 한발 다가가 자신이 대답했다.“윤아, 미안해. 다 아빠 잘못이야. 넌 절대 사생아가 아니야. 아빠의 유일한 아들이야.”윤이는 그의 대답에 조그마한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지난번 이경빈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자신을 적대시하는 아들의 태도에 이경빈은 저도 모르게 또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윤아...”“엄마, 우리 이만 집으로 가요.”윤이는 고개를 홱 돌리며 이경빈의 시선을 피했다.윤이의 존재를 부정했던 말과 탁유미에게 상처를 줬던 말을 그렇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