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연아는 설영준이 결정을 발표한 후, 전례 없이 압도적인 위기감을 느꼈다.그녀는 자기가 뭔가 이 상황을 뒤집을 만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을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회의가 끝난 후, 소연아는 주동적으로 송재이에게 다가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재이 씨, 따로 할 얘기가 있는데 시간 좀 내줄래요?”송재이는 소연아를 힐끗 쳐다봤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 대신 확고함만이 가득했다.“그러죠, 연아 씨, 대화가 꼭 필요하다면 기꺼이 상대해 드릴게요.”두 사람은 함께 회의실을 나와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설영준은 회의실 문가에 서서 송재이와 소연아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설영준의 마음속에는 걱정이 앞섰지만 동시에 호기심도 슬슬 올라왔다.그래서 그는 송재이의 안전을 위해 몰래 따라가기로 했다.카페에서 소연아와 송재이는 한적한 구석에 앉았다.소연아는 커피를 시키며 교활한 눈빛을 보이며 선수를 치기 시작했다.“재이 씨 집안이 뛰어나지 않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죠. 그런데도 재이 씨 실력으로 여기까지 오다니 참 감탄할 만한 일이에요.”송재이는 차갑게 소연아를 바라보았고 눈빛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연아 씨, 제 집안이 어떻든 제 능력과는 상관없어요. 설한 그룹이 중요하게 여기는 건 제 업무 성과이지 제 출신이 아니니까요.”소연아의 입꼬리가 비웃듯 올라갔고 도발을 이어갔다.“맞아요, 능력은 출중하시겠죠. 하지만 재이 씨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다는 건 인정해야 하지 않나요?”송재이는 소연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알아채 가슴이 철렁했다.순간 송재이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지만 이내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연아 씨, 모든 사람은 각자의 가치를 지니고 있어요. 출산 능력만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죠.”소연아는 여전히 송재이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쌀쌀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재이 씨는 그럴지 몰라도 설영준은요? 영준 씨는 설씨 가문 외아들인데 과연 재이 씨 말대로 하나도 신경 쓰지 않을까요?”송재
송재이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고 그녀의 눈빛에는 설영준에 대한 깊은 애정이 묻어났다.“내가 가장 놓치기 싫은 건 네가 나에게 보여준 이해와 지지야. 영준아, 넌 나에게 수없이 많은 용기를 줬어. 그 덕분에 난 모든 어려움과 도전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어.”송재이의 허심탄회한 말은 설영준의 마음에 큰 감명을 줬다. 그는 송재이를 꼭 끌어안고 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재이야, 나도 그래.”하지만 두 사람의 감정이 점점 무르익어가고 있을 때, 설영준은 해외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 긴급하게 한 달 동안 출장을 떠나야 했다.송재이는 설영준과 갈라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를 보내야 했다.공항에서의 이별은 유난히 쓸쓸했다. 송재이는 설영준을 꼭 껴안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영준아, 네가 많이 그리울 거야. 꼭 무사히 돌아와.”설영준은 송재이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약속했다.“재이야, 한 달 뒤면 돌아올 거야. 어디에 있든 내 마음은 항상 너와 함께야.”설영준이 떠난 후 송재이는 전에 없던 공허함을 느꼈다.그래서 생활의 초점을 딴 곳에 맞추려는 목적으로 송재이는 일에 몰두하려고 애썼지만 그 공허함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공허한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있을 때, 송재이의 친구 유은정이 송재이의 정서 변화를 알아차리고 그녀를 식사에 초대해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말로 위로하려 했다.송재이는 유은정의 초대를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아늑한 분위기의 작은 식당에서 만났다.유은정의 따뜻한 배려와 이해는 송재이에게 약간의 위로가 되었고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송재이의 꿀꿀하던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졌다.“재이야, 너도 알다시피 설영준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거야. 그래야 너에게 더 좋은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안 그래?” 유은정이 송재이의 손을 잡고 따스한 말로 격려했다.송재이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의 따스한 배려가 그저 고맙기만 할 따름이었다.“은정아, 고마워. 나도 영준이 우리의 미래를
송재이는 설영준과의 관계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비록 설영준의 갑작스러운 출장 때문에 의도치 않은 외로움을 느끼긴 했지만 송재이는 두 사람의 감정이 시간과 거리가 주는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바쁜 업무 속에서 설영준을 그리는 애타는 시간이 흘러 한 달이 지나자 마침내 설영준이 돌아오는 날이 다가왔다.설영준의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하자마자 송재이는 그의 전화를 받았다.설영준은 많이 피곤한 듯한 목소리였지만 집으로 돌아온 기쁨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재이야, 나 돌아왔어. 근데 회사에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프로젝트가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해. 저녁에 같이 밥 먹자.”그 말에 송재이는 부드럽게 대답했다.“알았어, 영준아. 먼저 볼일 봐. 저녁에 보자.”전화를 끊은 후 송재이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설영준을 놀래주기로 결심하고 일찍 일을 마치고 회사로 향했다.송재이는 일부러 설영준에게 알리지 않고 꽃다발을 들고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설한 그룹의 사무실로 차를 몰았다.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사무실 빌딩은 직원들이 대부분 퇴근한 상태였고 복도는 유난히 조용했다.송재이는 익숙한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겨 설영준의 사무실 문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안에서 들리는 대화 소리에 자연스럽게 움직임이 멈췄다.무심코 들린 대화 내용은 송재이의 마음을 순식간에 무겁게 만들었다.“대표님, 정말 송재이와 결혼할 생각인 건가요? 송재이의 출신이 명문대가인 대표님 집안에 어울린다고 생각해요?”이는 다름 아닌 문예슬의 목소리였다. 문예슬의 말 속에는 송재이에 대한 경멸과 도발이 담겨 있었다.문예슬은 설영준의 테이블 앞에 서 있었고 얼굴에는 얄미운 미소가 가득했다. 그녀의 눈에는 오래전부터 꾸며왔던 계획이 끝내 성공한 듯한 교활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그리고 문예슬의 손에는 송재이의 과거에 대한 정보를 담은 서류가 들려 있었다. 이 서류들을 얻기 위해 문예슬은 피타는 노력을 들였다.문예슬은
송재이는 사무실 문밖에서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이 손잡이를 잡아야만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처럼.그녀의 안색은 아주 창백했다. 문예슬이 해준 말은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고 충격받은 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잘 못 들은 것이 아닐까 귀를 의심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다정하고 자애롭던 아버지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란 말인가?순식간에 의문과 공포에 휩싸여버렸다. 이 소식은 그녀에게 너무도 충격적이었던지라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원래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지만, 지금은 설영준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몸을 돌려 이곳을 떠나 조용한 곳에서 혼자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회사 엘리베이터는 작동되지 않아 송재이는 하는 수 없이 계단으로 내려갔다.너무도 혼란스러웠던 나머지 내딛는 발이 아주 무겁게 느껴졌고 비틀대기도 했다.비상구의 불빛은 어두웠다. 그녀의 그림자도 어두운 불빛에 길게 늘어져 유난히도 쓸쓸해 보였다.송재이는 머릿속이 아주 복잡했다. 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리며 그 속에서 단서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심란해지고 가슴이 아팠다.이런 상태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던 그녀는 결국 발을 헛디뎌 넘어지게 되었다.비상구는 유난히도 조용해 그녀가 넘어지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다리에서 엄청난 통증이 전해지고 눈앞이 흐릿해졌다.그녀는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가 이곳에 쓰러져 있다는 것을 몰랐다.송재이는 배가 너무도 아팠다. 이마엔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의식은 여전히 흐릿했지만 살고 싶다는 욕망에 힘겹게 눈을 뜨려고 애를 썼다.그녀는 현재 아주 위험한 상태였다.어둠 속에서 송재이는 자신의 핸드폰을 찾아 꺼내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잠금 해제했다. 이내 설영준의 번호를 찾아 누르려 했다.그러나 핸드폰 화면에 커다랗게 뜬 설영준의 이름에 또다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사무실에서 엿들었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한 짓
송재이는 설영준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여진에게 부탁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던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 설영준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힘겹게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배에서 전해지는 극심한 통증에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여진은 송재이를 설득할 수 없어 결국 택시를 불러준 뒤 택시 기사에게 안전 운전 해줄 것을 당부했다.송재이는 택시에 올라탔다.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마치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 빠진 기분이었다.아버지와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그녀가 엿들은 말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던지라 믿기지 않았다.마음 속에 수많은 의문이 생겼지만 어떻게 이 의문을 풀어야 할지 모른다.택시는 유유히 어두운 밤을 가로 지르며 달리고 있었다. 송재이는 여전히 발견하지 못했다. 치마에 묻어버린 자신의 피를.차에서 내렸을 때 순간 머리가 어질 거리며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마침 지나가던 류지안이 그녀를 발견하고 부축했다.류지안은 창백한 그녀의 안색을 보다가 이내 치마에 묻은 피를 보았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든 류지안이 급히 말했다.“재이 씨, 무슨 일이에요? 다친 거예요?”송재이는 고개를 저으며 힘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아, 지안 씨. 전 괜찮아요. 그냥 넘어진 것 뿐이에요.”류지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송재이 치마에 묻은 피가 너무도 신경 쓰였고 무언가 떠올랐다.“재이 씨, 혹시... 임신했어요?”송재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임신이요? 그럴 리가 없을 거예요. 전...”류지안은 송재이가 대답하기도 전에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더 말을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송재이를 부축해 차에 올라탄 뒤 직접 병원까지 데려가 검사를 진행했다.병원 응급실에서 의사는 송재이의 몸을 꼼꼼히 검사했다.송재이는 불안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녀의 두 눈엔 두려움으로 가득했다.류지안은 그녀의 곁을 지켜주며 손을 꼭 잡은 뒤 계속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검사 결과
송재이의 목소리엔 떨림이 가득했고 절망에 빠진 눈빛이었다.“지안 씨, 부탁할게요. 이 일을 영준 씨에게 알리지 말아줘요. 전... 전 정말로 영준 씨를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류지안은 송재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도 마음이 복잡했다.그녀는 송재이의 마음과 절망이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류지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재이 씨, 약속할게요. 절대 설영준 씨에게 이 일을 알리지 않을 테니까 재이 씨는 몸 회복하는 데만 신경 써줘요.”송재이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그녀는 괴롭기도 했다.이 모든 게 운명의 장난 같았다. 믿었던 가족의 이중적인 모습과 지금은 제일 소중한 아이를 잃게 되었다.얼마 후, 의사는 병실로 들어와 잔뜩 진지하고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송재이 씨, 저희가 수술하는 도중에 송재이 씨 자궁의 손상도가 심각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송재이 씨 몸은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무도 큰 충격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이 소식은 그녀에게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녀의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류지안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고개를 돌려 송재이를 보았다. 그녀가 너무도 가여워 보였다.류지안은 이 소식이 송재이에게 어떤 충격을 안겨 주었는지 알고 있었다. 송재이는 더는 엄마가 될 수 없다는 의미였으니까.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송재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선생님, 정말로... 정말로 다른 방법은 없는 거예요?”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유감스럽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송재이 씨, 저희는 이미 최선을 다했습니다. 송재이 씨는 지금 안정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몸이 회복해도 나중에 임신할 확률은... 저희는 그저 희박하다고만 할 수밖에 없겠네요.”송재이는 절망에 빠졌다. 모든 걸 잃은 기분이었다.아이를 잃었을 뿐 아니라 엄마가 될 기회마저 잃었다. 그녀는 정말로 설영준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고 두 사람의 관계도 어떻게 될
박윤찬과 류지안 덕에 송재이는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몸이 너무도 피곤했던 그녀는 수액을 놓자마자 잠들어 버렸다.그녀의 꿈자리는 아주 뒤숭숭했다. 꿈속에서도 그녀는 슬픔과 불안을 느끼고 있었지만, 눈을 떴을 때 어떤 꿈을 꿨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송재이는 고개를 돌려 핸드폰을 보았다. 설영준이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다시 복잡해졌다.설영준은 따듯한 어투로 그녀를 걱정하는 문자를 보냈지만, 그녀는 죄책감이 들어 사실대로 말해줄 수 없었다.그녀는 설영준에게 답장을 보냈다. 류지안의 집에서 하룻밤 머물며 처리할 일이 있다고 말이다.설영준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저 푹 쉬라며,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다음 날, 박윤찬은 또 그녀의 병문안을 왔다.그녀가 깨지 않게 조용히 들어왔지만 송재이는 이미 깨어있었다. 침대에 기대어 앉아 펜으로 글을 끄적이고 있었다.그녀의 어깨가 다소 떨리고 있었다. 눈물이 종이에 뚝뚝 떨어지며 글씨를 번지게 했다.박윤찬은 문 앞에 서서 한참 조용히 송재이의 모습을 보았다. 가슴이 너무도 아팠다.그는 송재이가 지금 설영준의 이름을 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써 내려간 글에 전부 설영준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었다.박윤찬은 순간 충동이 일었다. 얼른 다가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그는 한참 그렇게 서서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송재이의 덜덜 떨리는 어깨와 종이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볼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프고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숨을 깊게 들이쉬며 그는 이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더 복잡했다.그는 알고 있었다. 송재이를 향한 자신의 감정은 사랑이었지만 송재이의 관심은 온통 설영준에게 있었다는 것을.박윤찬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영원히 송재이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영원히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가슴이 괴롭고 아팠다. 심지어 무력감도 들었다
류지안은 박윤찬과 함께 병실에서 나왔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두 사람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마음도 똑같이 무거웠다. 송재이가 필요하다고 한 도움은 두 사람에게 큰 돌덩이가 되어 가슴에 쿵 내려앉았다.병원 밖으로 나온 뒤 박윤찬은 그제야 이 침묵을 깼다.그는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안아, 이러는 건 설영준 씨에게 좀 잔인하지 않을까?”류지안은 걸음을 멈추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재이 씨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전부 설영준 씨 발목을 잡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잖아. 만약 설영준 씨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재이 씨 편을 들어주면서 더는 이 풍파에 휘말리게 하지 않으려고 할 거야.”박윤찬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도 눈물이 걸려 있었다.“하지만 이런 잔인한 방식으로 두 사람 사이를 끝내는 건 설영준 씨에게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류지안은 숨을 내쉬며 다소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뿐이잖아. 재이 씨도 모든 고통을 떠안으려는 결심을 내렸고, 설영준 씨가 더는 상처를 받지 않길 바라고 있어.”박윤찬은 무력감이 들었다. 그는 송재이가 마음을 굳게 먹고 이런 부탁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와 류지안은 송재이의 결정을 바꿀 수 없었다.그들은 송재이의 선택을 존중하며 그녀의 부탁을 최대한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곁에 있어 주면서 힘을 주는 일뿐이야.”박윤찬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무슨 일이 있든지 우리는 재이 씨 편을 들어줘야 해.”류지안은 박윤찬의 손을 꽉 잡고 감격한 눈길로 보았다.“고마워, 윤찬아. 난 네 덕에 재이 씨가 분명 이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두 사람은 길가에 서서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두 눈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