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는 설영준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여진에게 부탁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던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 설영준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힘겹게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배에서 전해지는 극심한 통증에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여진은 송재이를 설득할 수 없어 결국 택시를 불러준 뒤 택시 기사에게 안전 운전 해줄 것을 당부했다.송재이는 택시에 올라탔다.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마치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 빠진 기분이었다.아버지와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그녀가 엿들은 말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던지라 믿기지 않았다.마음 속에 수많은 의문이 생겼지만 어떻게 이 의문을 풀어야 할지 모른다.택시는 유유히 어두운 밤을 가로 지르며 달리고 있었다. 송재이는 여전히 발견하지 못했다. 치마에 묻어버린 자신의 피를.차에서 내렸을 때 순간 머리가 어질 거리며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마침 지나가던 류지안이 그녀를 발견하고 부축했다.류지안은 창백한 그녀의 안색을 보다가 이내 치마에 묻은 피를 보았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든 류지안이 급히 말했다.“재이 씨, 무슨 일이에요? 다친 거예요?”송재이는 고개를 저으며 힘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아, 지안 씨. 전 괜찮아요. 그냥 넘어진 것 뿐이에요.”류지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송재이 치마에 묻은 피가 너무도 신경 쓰였고 무언가 떠올랐다.“재이 씨, 혹시... 임신했어요?”송재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임신이요? 그럴 리가 없을 거예요. 전...”류지안은 송재이가 대답하기도 전에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더 말을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송재이를 부축해 차에 올라탄 뒤 직접 병원까지 데려가 검사를 진행했다.병원 응급실에서 의사는 송재이의 몸을 꼼꼼히 검사했다.송재이는 불안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녀의 두 눈엔 두려움으로 가득했다.류지안은 그녀의 곁을 지켜주며 손을 꼭 잡은 뒤 계속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검사 결과
송재이의 목소리엔 떨림이 가득했고 절망에 빠진 눈빛이었다.“지안 씨, 부탁할게요. 이 일을 영준 씨에게 알리지 말아줘요. 전... 전 정말로 영준 씨를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류지안은 송재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도 마음이 복잡했다.그녀는 송재이의 마음과 절망이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류지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재이 씨, 약속할게요. 절대 설영준 씨에게 이 일을 알리지 않을 테니까 재이 씨는 몸 회복하는 데만 신경 써줘요.”송재이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그녀는 괴롭기도 했다.이 모든 게 운명의 장난 같았다. 믿었던 가족의 이중적인 모습과 지금은 제일 소중한 아이를 잃게 되었다.얼마 후, 의사는 병실로 들어와 잔뜩 진지하고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송재이 씨, 저희가 수술하는 도중에 송재이 씨 자궁의 손상도가 심각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송재이 씨 몸은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무도 큰 충격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이 소식은 그녀에게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녀의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류지안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고개를 돌려 송재이를 보았다. 그녀가 너무도 가여워 보였다.류지안은 이 소식이 송재이에게 어떤 충격을 안겨 주었는지 알고 있었다. 송재이는 더는 엄마가 될 수 없다는 의미였으니까.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송재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선생님, 정말로... 정말로 다른 방법은 없는 거예요?”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유감스럽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송재이 씨, 저희는 이미 최선을 다했습니다. 송재이 씨는 지금 안정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몸이 회복해도 나중에 임신할 확률은... 저희는 그저 희박하다고만 할 수밖에 없겠네요.”송재이는 절망에 빠졌다. 모든 걸 잃은 기분이었다.아이를 잃었을 뿐 아니라 엄마가 될 기회마저 잃었다. 그녀는 정말로 설영준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고 두 사람의 관계도 어떻게 될
박윤찬과 류지안 덕에 송재이는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몸이 너무도 피곤했던 그녀는 수액을 놓자마자 잠들어 버렸다.그녀의 꿈자리는 아주 뒤숭숭했다. 꿈속에서도 그녀는 슬픔과 불안을 느끼고 있었지만, 눈을 떴을 때 어떤 꿈을 꿨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송재이는 고개를 돌려 핸드폰을 보았다. 설영준이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다시 복잡해졌다.설영준은 따듯한 어투로 그녀를 걱정하는 문자를 보냈지만, 그녀는 죄책감이 들어 사실대로 말해줄 수 없었다.그녀는 설영준에게 답장을 보냈다. 류지안의 집에서 하룻밤 머물며 처리할 일이 있다고 말이다.설영준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저 푹 쉬라며,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다음 날, 박윤찬은 또 그녀의 병문안을 왔다.그녀가 깨지 않게 조용히 들어왔지만 송재이는 이미 깨어있었다. 침대에 기대어 앉아 펜으로 글을 끄적이고 있었다.그녀의 어깨가 다소 떨리고 있었다. 눈물이 종이에 뚝뚝 떨어지며 글씨를 번지게 했다.박윤찬은 문 앞에 서서 한참 조용히 송재이의 모습을 보았다. 가슴이 너무도 아팠다.그는 송재이가 지금 설영준의 이름을 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써 내려간 글에 전부 설영준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었다.박윤찬은 순간 충동이 일었다. 얼른 다가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그는 한참 그렇게 서서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송재이의 덜덜 떨리는 어깨와 종이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볼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프고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숨을 깊게 들이쉬며 그는 이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더 복잡했다.그는 알고 있었다. 송재이를 향한 자신의 감정은 사랑이었지만 송재이의 관심은 온통 설영준에게 있었다는 것을.박윤찬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영원히 송재이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영원히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가슴이 괴롭고 아팠다. 심지어 무력감도 들었다
남자들은 28살이 넘으면 다들 그쪽으로 욕구가 강렬한 걸까?오늘 밤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송재이는 더 이상 감당이 안 됐다.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설영준을 잘 알기에 가느다란 손으로 그의 척추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서툰 솜씨로 더듬거리며 끝내 그의 성감대를 찾았고 설영준의 무거운 신음과 함께 뜨거웠던 섹스도 마침내 끝났다.“나 다음 달이면 25살이야.”송재이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널브러진 속옷과 원피스를 주워서 하나씩 챙겨입기 시작했다. 뒤에 달린 지퍼가 손이 닿지 않아 고개 돌려 침대 머리맡에 기댄 설영준을 힐긋 쳐다봤는데 그는 한창 담배에 불을 지피고 뽀얀 연기를 내뿜으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송재이는 우아한 자태로 자리에 앉아 긴 머리를 쓸어넘기고 새하얀 등을 훤히 드러냈다.설영준의 눈빛이 그녀의 몸에서 맴돌았다.잠시 후 그나마 신사답게 담배를 지그시 물고 몸을 일으키며 제법 자연스럽게 그녀의 지퍼를 올려주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공기 속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나도 이젠 어린 나이가 아니야. 나만의 가정을 차리고 싶어.”그녀가 답했다.설영준은 담뱃재를 톡톡 털었다.“우리가 처음 섹스할 때 내가 했던 말을 까맣게 잊었나 봐?”“안 잊었어. 나랑 결혼 안 한다고 했잖아.”송재이는 치맛자락을 꽉 잡고는 애써 담담한 척 웃어 보였다.“사실 이 3년 동안 너에게 무척 고마웠어. 내가 가장 힘들 때 나 대신 중병에 걸린 우리 엄마를 위해 신장을 찾아주고 병원비도 대줬잖아. 비록 살려내진 못했지만...”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목소리가 슬픔에 잠겼다.6개월 전, 그녀는 엄마의 장례식을 마치면서 설영준과 이별할 결심을 했지만 마음속에 줄곧 일말의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어제 그가 조건이 비슷한 집안의 주현아 씨와 함께 반지를 고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완전히 단념했다.애초에 송재이가 설영준과의 이런 관계를 시작하기로 했을 때 두 사람 다 솔로였다. 설영준은 의젓했고 그녀는 돈이 시급했기에
미행은 절대 아니다. 송재이는 자신이 그럴만한 매력이 없다는 걸 잘 아니까.설영준을 본 순간 그녀는 왜 가슴이 찔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일정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그녀는 설영준의 눈에 담긴 웃을 듯 말 듯한 기운을 바로 알아챘고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났다.“아는 사이에요?”맞은편에 앉은 지민건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뒤쪽을 바라봤다.하지만 그는 근시이고 오늘 급하게 나오느라 깜빡하고 렌즈를 착용하지 못해서 눈앞이 희미할 뿐 아무것도 안 보였다.송재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전화를 끊었다.“아니요, 몰라요.”곧이어 저번에 쥬얼리샵에서 본 주현아 씨가 나타났다.이제 막 화장실을 다녀온 모양인지 하이힐을 신고 새하얀 롱 원피스를 하늘거리며 설영준의 옆으로 걸어갔다.설영준도 송재이한테서 시선을 거두고는 맞은편에 앉은 주현아만 쳐다볼 뿐 더는 곁눈질하지 않았다.방금 마신 커피가 입맛에 안 맞았던지 혹은 또 설영준을 마주쳐서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별안간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지민건은 그녀의 안색이 안 좋은 걸 보더니 집으로 바래다주겠다고 했다.마침 그녀도 같은 생각인지라 가방을 챙기고 그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가게 문 앞까지 가려면 설영준과 주현아를 스쳐 지나야 하니 그녀는 무심코 두 사람을 힐긋 쳐다봤는데 주현아가 한창 수줍은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설영준의 손가락을 매만졌다.설영준도 거침없이 바로 주현아의 손을 꼭 잡았다....돌아가는 길에서 송재이는 유은정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소개팅을 잘했냐고 물었다.“어때 재이야? 마음에 들어?”지민건은 옆에서 운전에만 집중했다.송재이는 그를 힐긋 쳐다보다가 입을 막고 솔직하게 대답했다.“괜찮은 분 같아. 성실하고 착해 보여.”적어도 처음 봤을 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어차피 그녀도 결혼할 생각이 있었던지라 인연이 닿으면 지민건과 더 가깝게 지내볼 의향도 있었다.여기서 제일 뿌듯한 건 당연히 유은정이다. 그녀는 먼저 설영준의 험담을 잔뜩 늘려놓고
그 생각이 든 순간 송재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고 벼락을 맞은 것만 같았다.지금 이 추측을 입증하기 위해 송재이는 당일 밤에 바로 약국에 가서 임테기를 샀다.빨간 줄 두 줄이라니!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몇 번이고 더 테스트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이제 막 힘겹게 설영준을 단념하고 그와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는데 왜 또 이런 치명타를 주는 걸까?임신한 몸으로 남자의 집까지 찾아가 결혼을 다그치는 파격적인 스토리는 많이 들어봤지만 그녀는 늘 그런 방식이 존엄도 없고 멍청해 보였다.게다가 그녀가 마주해야 하는 건 설씨 일가와 같은 재벌 가문이다.막강한 권력으로 서민의 삶을 처참하게 짓밟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만약 설영준이 그녀가 임신한 걸 알면 기뻐할까?어휴, 당연히 아니겠지.그와 함께한 3년 동안 이 남자가 처음부터 섹스와 결혼을 철저하게 갈라놓는 인간이란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안다.설영준의 아내가 될 사람은 오직 그와 조건이 대등한 정략결혼 상대일 것이다. 주현아와 같은 재벌가 따님이 제격이다.송재이처럼 바람이 불면 휙 쓰러지는 하찮은 존재는 가당치도 않다.그녀는 설영준에게 끌려가 낙태를 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에 그녀의 가족은 단 한 명도 없다.배 속에 아이는 유일한 핏줄이니 그녀는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다....설도영의 과외를 관둔 송재이는 친한 선배에게 또 다른 학생들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선배는 아주 열성적으로 곧장 그녀에게 학생을 찾아줬다.이런 1대1 레슨은 시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아 낮에는 밴드에 가서 공연 리허설을 하고 밤에는 또 아르바이트를 한 건 할 수 있다.그녀는 배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어쩌면 요 녀석을 위해서라도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더 열심히 살아가야 할 듯싶다.지민건은 송재이가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구했다고 하니 축하하는 의미로 밥 한 끼 사주겠다고 했다.송재이는 수업을 마친 후에야 그 문자를 확인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알겠다며 단답형으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송재이는 짜증이 확 밀려와 고개를 돌리고 거들떠보지 않았다.이에 설영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휴대폰을 거둬들이고는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타!”전 애인을 마주할 때 누군들 화려하게 빛나고 싶지 않을까?하지만 오늘 밤 룸에서 그와 마주친 광경은 더할 나위 없이 초라하고 난감했다!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휴대폰 앱을 열어서 콜택시를 부르려고 했는데 설영준이 차에서 내려와 긴 다리를 내뻗으며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그의 손에 검은색 큰 우산이 쥐어져 있었다.계단 위에 서 있는 송재이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압적인 포스에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이때 설영준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말 안 들어?”거만하기 짝이 없고 뭐든 당연하다는 듯한 이 말투, 그녀는 순간 두 사람이 이별하지 않은 줄로 착각할 뻔했다.다만 송재이는 곧바로 사색을 가다듬고 말했다.“설영준 대표님, 고맙지만 나 혼자 할게...”“새 남친 별로던데.”설영준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야유의 뜻이 살짝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의 다른 한 손을 잡아당겨 그녀를 더 가까이 다가오게 했지만 송재이는 여전히 머리를 높이 들었다.“나랑 헤어지고 결혼한다더니 고작 저딴 자식을 찾아? 재이 쌤, 누굴 엿 먹이는 거야?”설영준은 지금 그녀를 비웃기도 하고 방금 그녀의 처지를 비웃기도 했다.송재이의 얼굴이 처참할 정도로 벌게졌다.그녀는 발끈 화내며 설영준을 째려봤다.“내가 어떤 사람을 찾든 너랑 뭔 상관인데? 오늘 밤에 네가 여기 있단 걸 알았다면 오지도 않았어.”그녀는 지민건에게 속아서 이리로 왔다.다만 이 점은 굳이 설영준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설영준이 그녀의 손목을 확 잡고 두말없이 차 쪽으로 끌어갔다.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그에겐 전혀 소용이 없었다.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설영준은 안으로 차 문을 잠가버렸다.설영준은 줄곧 차가운 표정이었다.매번 이런 표정을 지
지금 이건 그와 주현아가 곧 결혼할 사이라는 걸 묵인한 셈이다.그들과 같은 상류층 사람들은 결혼과 연애에 관해서 자신만의 기준과 계획이 다 있다. 송재이는 이 점을 매우 잘 안다.그럼에도 직접 그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복잡미묘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그녀가 아무 말 없자 설영준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는데 이번에 송재이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옆으로 피했다.“주현아 씨는 괜찮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송재이는 다시 한번 고개 들어 여전히 눈물을 머금고 있었지만 말투는 좀 전보다 단호하고 강인했다.“설영준 대표님, 난 어릴 때부터 엄한 가정에서 자라서 누군가의 내연녀로 살 순 없어. 그런 여자를 원하는 거라면 사람 잘못 찾았어.”그녀는 이를 악물고 설영준이 차마 입밖에 내뱉지 못한 말을 거침없이 쏟아부었다.그는 지금 송재이의 몸에 대해 조금 관심이 남아 있다. 그가 완전히 질리기 전까지 송재이는 도둑고양이처럼 숨어 지내야 한다.이게 바로 그와 함께한 대가이다.전에는 그의 ‘스폰’이 필요했다. 엄마의 병을 치료해야 하니까. 다만 이젠 유일한 아픔인 엄마가 없으니 송재이는 더는 저 자신을 속상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평소에 고양이처럼 얌전하던 그녀가 대뜸 발톱을 드러내자 설영준은 마냥 흥미진진할 따름이었다.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진한 미소를 보이더니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았다.“내연녀는 하기 싫고 떳떳하게 여자친구가 되고 싶은 거야? 지민건의 여자친구?”그는 또다시 송재이를 비꼬았다. 결국 골랐다는 게 고작 그런 쓰레기냐고 비아냥댔다.송재이는 그런 설영준이 너무 이상했다. 이번엔 그녀도 발끈한 게 아니라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내 눈엔 너나 그 인간이나 다 거기서 거기야. 아무도 선택 안 해.”그녀는 화난 기색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여자는 다양한 남자를 만나보는 것도 일종의 성장 경험이야. 너희들을 떠난 건 내게 해탈이지. 난 아직 젊고 예뻐. 성격도 나쁘지 않고. 이런 내가 나한테 꼭 어울리는 진짜 인연을 못 찾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