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문씨 가문 남매를 마주한 그녀는 차분하고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이런 영상이 일파만파 퍼진다면 주현아 씨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줄뿐더러 우리 모두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 부정적인 뉴스일수록 시장 반응은 더욱 신속하고 거셀 것이며, 특히 상장기업의 경우 주가 하락은 물론 투자자의 신뢰를 저버리고, 심지어 주주들의 소송까지 이어질지도 몰라.”문예슬은 냉소를 지으며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다.“내가 그런 말에 겁먹을 것 같아? 설영준에게 고통이란 무엇인지 똑똑히 느껴주게 할 거야. 모든 걸 쥐락펴락해야 성에 차는 사람이니까 이 난장판을 어떻게 수습할지 두고 보지.”송재이는 문예슬의 도발에 흔들리지 않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물론 화가 많이 나서 그럴 수 있다고 쳐. 하지만 결국 너와 네 가족만 봉변당할 거라는 사실을 잊지 마. 영준 씨는 쉽게 무너지지 않아. 괜히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가 처참한 결말이라도 맞이하고 싶어?”문예슬은 고집스럽게 상관없다는 식으로 쏘아붙였다.“괜찮아. 어차피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쳤어.”반면, 옆에 잠자코 앉아 있던 문성호가 갑자기 휴대폰을 꽉 움켜쥐더니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그는 비서가 보낸 문자를 받았다.“예슬아, 방금 비서가 얘기하길 우리 주가가 하락하기 시작했대. 투자자들도 줄줄이 자금을 회수했고 우리한테 불리한 소문이 이 바닥에서 슬슬 떠돌고 있다네.”문예슬의 안색이 돌변하더니 벌떡 일어섰고,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싶었다.“네? 그럴 리가 없어요!”송재이가 그 틈을 타 말을 보탰다.“이제 알겠지? 지금은 힘을 합쳐서 진실을 바로잡고 위기가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할 때야.”문성호는 여동생에게 형세를 잘 판단하라는 식으로 눈짓을 보냈지만, 문예슬은 썩 내키지 않았다.이내 문성호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고, 매서운 눈빛으로 문예슬을 바라보며 현재 얼마나 심각한 사태인지에 대해 상기시켰다.“예슬아,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온라인에서 동영상이 퍼져갈수록 여론의 압박도 더욱 거세졌다.결국 주현아는 관련 부서에 연행되어 조사받았다.이 사건은 곧 주요 언론 매체와 소셜 미디어 플랫폼의 초점이 되었고, 대중의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이에 문정 그룹은 즉시 해명 성명을 발표하여 진상을 밝히기 위해 애를 썼고, 주현아와 선을 긋고 모든 거짓 의혹을 부인했다.하지만 현재로서는 대중의 의심과 불만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판명 났다.시장의 반응은 특히 민감했다.해명 성명을 발표한 이후에도 문정 그룹의 주가는 파동을 일으켰고, 투자자들의 신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라 일부 주주들은 매각을 고려하기 시작했다.게다가 시장에는 소문과 추측이 난무했다.비록 회사 최고 경영진이 긴급회의를 열어 해결책을 논의했지만, 국면이 복잡할뿐더러 대중의 반감이 워낙 심한 탓에 그동안의 노력이 무색하게 효과는 미미했다.한편, 교탁 위에 놓인 송재이의 휴대폰이 별안간 울리자 그녀는 본의 아니게 수업을 잠시 중단했다.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이내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재빨리 교실에서 나와 전화를 받았다.“송 선생님! 지금 어디예요?”휴대폰 너머로 민효연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울음기가 살짝 섞여 있었다.“지금 학교에 있어요. 무슨 일이시죠?”민효연이 이 시간에 연락했다는 건 분명 급한 일일 가능성이 컸다.“현아가... 끌려갔어요! 동영상은 이미 인터넷을 도배했고, 해명 성명도 발표했는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요. 이제 어떡하죠?”민효연의 목소리는 절망이 가득했고, 지금 얼마나 무력하고 당황한 마음일지 가히 짐작이 갔다.결코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만큼 송재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모님, 우선 진정하세요. 평정심을 잃으시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믿을 만한 법조계 조력자를 찾아서 현아 씨에게 필요한 법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죠.”반면, 현재 민효연과 주현아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재판 당일, 법정의 분위기는 유난히 긴장감이 넘쳤다.방청석에 앉아 있는 송재이와 설영준의 표정은 하나같이 진지했다.두 사람은 이번 재판의 결과가 모두의 운명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박윤찬은 변호석에 서서 열심히 변호했다. 비록 최선을 다했지만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결국 패소하게 되었다.판사가 판결문을 읽는 순간 주현아와 민효연은 패닉에 빠졌다.주현아의 눈에는 절망이, 민효연의 얼굴에는 불신과 분노가 가득했다.재판이 끝난 뒤 민효연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설영준을 향해 걸어갔다.그녀는 실망하면서도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고, 무시무시한 눈빛은 마치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였다.옆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송재이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이러한 결과는 민효연과 주현아에게 큰 타격을 줄뿐더러 설영준한테도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이내 설영준의 옆으로 다가가 나지막이 위로했다.“영준 씨 잘못 아니야. 우린 최선을 다했어.”...법원에서 나오자 설영준은 긴장된 분위기를 깨려고 송재이와 박윤찬에게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함께 저녁을 먹자고 초대했다.평소 성격이 무딘 편인 송재이도 오늘 밤은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자신을 향한 박윤찬의 마음을 우연히 알게 된 이후로 특히 설영준 앞에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레스토랑에서 박윤찬과 마주 앉은 송재이는 그의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고, 다소 어색해 보였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스테이크를 자르며 최대한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반면, 맞은편에 앉은 박윤찬도 법정에서 카리스마 넘치던 모습과 달리 오늘 밤 송재이 앞에서 안절부절못했다.그러다 가끔 고개를 들어 송재이를 바라보기도 했지만, 눈이 마주칠 때면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설영준은 두 사람 사이에 앉았다.그리고 송재이와 박윤찬을 번갈아 보면서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감지한 듯싶었다.결국 먼저 침묵을 깨고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업무와 관련된 얘기를 가볍
다음 날, 퇴근길에 오른 송재이의 발걸음은 유난히 분주했고 머릿속에는 어젯밤 어색한 공기가 흐르던 레스토랑의 여러 장면이 맴돌았다.단골 카페 입구를 지나치던 중 우연히 창가 좌석에 앉아 있는 박윤찬을 발견했는데, 손에 책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싶었다.어쨌거나 오랜 친구로서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게 정상이었다.하지만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망설였다.괜히 단둘이 만났다가 불필요한 오해라도 일으킬까 봐 걱정했다.송재이는 뒤돌아서서 재빨리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정신이 딴 데 팔린 탓에 정면에서 마주 오는 차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위기일발의 순간, 박윤찬이 카페에서 뛰쳐나와 그녀를 인도로 끌어당겼다.송재이는 갑작스러운 충격 때문에 현기증이 났고, 박윤찬은 초조한 얼굴로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괜찮아요? 재이 씨!”박윤찬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했다.송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팔과 무릎이 쓸렸는지 통증이 밀려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를 본 박윤찬은 두말없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단호하게 말했다.“병원으로 가요.”송재이는 민망하고 불편한 나머지 거절하려고 했다.“아, 아니요. 심하게 다친 건 아니라서...”하지만 박윤찬이 강하게 밀어붙였다.“안 돼요. 감염될 수도 있으니까 상처부터 치료해야 해요.”병원 응급실에 도착해서 의사가 상처를 치료해 줄 때까지 박윤찬은 송재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송재이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윤찬 씨, 고마워요.”박윤찬이 미소를 짓더니 절제된 어조로 말했다.“친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송재이를 바라보는 박윤찬의 눈빛은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비록 자제하려고 노력했지만 감정까지 숨길 수 없는 법이다.송재이는 만감이 교차했다. 박윤찬의 배려와 관심에 감동하면서도 한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왜냐하면 짝사랑의 대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병원 복
하지만 집에 돌아간 이후로 그는 송재이에게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언제나 그렇듯 사이좋게 지냈다.감정을 숨기는 데 도가 튼 사람으로서 아무런 내색도 없이 평소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대했다.3일 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송재이는 퇴근하고 교문을 나섰다.오서희의 차가 정문 앞에 멈춰 있었는데, 거울처럼 반짝이는 검은색 승용차는 교내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차를 발견한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우선 올라탔다.오서희를 다시금 마주한 송재이의 태도에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차 안에서 오서희가 명령조로 말했다.“우리 아들한테서 떨어졌으면 좋겠어요. 본인의 신분을 누구보다 잘 알지 않아요? 이쯤에서 끝내는 게 서로를 위하는 길이죠.”송재이는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사모님의 의견은 존중합니다만 저와 영준 씨의 우정도 인정해주시길 바랍니다. 우린 사모님께서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오서희가 눈살을 찌푸렸다.“건방지군, 지금 누구 앞에서 잘난 척하는 거지? 송 선생이 우리 아들을 그렇게 잘 알아요?”송재이가 무덤덤하게 말했다.“영준 씨를 잘 안다고 한 적이 없어요. 단지 우리의 결백과 우정을 증명하려고 했을 뿐이죠. 하실 말씀이 이게 끝이라면 먼저 가 봐도 될까요?”오서희가 펄쩍 뛰면서 말했다.“당장 내려가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송재이는 별말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차에서 내리고 문을 닫았다.오서희를 대하는 데 어느 정도 내성이 생긴지라 예전처럼 쉽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저녁에 그녀는 혼자 살던 집으로 향했다.설영준은 며칠 전에 급한 일을 처리하러 경주로 다시 돌아갔다.결국 그에게 연락할까 말까 고민하던 중 휴대폰을 켜자마자 알림창에 뜬 뉴스 기사를 보고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싶었다.송재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설한 그룹의 대규모 정리해고 뉴스가 온라인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해당 사건은 인터넷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기사를 확인하는 순간 이미 댓글로 도배 당했다.현재 설영준은 여론몰이에 냉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설영준은 무의식중에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속으로 만감이 교차했다.송재이와 박윤찬의 애매모호한 관계를 알게 된 이후로 그는 줄곧 불만과 질투를 억누르려고 갖은 애를 썼다.두 사람 사이에 이미 발생했을지도 모르는 친밀한 스킨십 따위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런 장면을 떠올리는 자체로 그에게 처음 느껴보는 좌절감을 안겨주었다.하지만 지금 송재이가 자신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하다니? 결국 알 수 없는 배신감에 부아가 치밀었다.또한, 송재이의 질의는 권위에 대한 도전일뿐더러 마음의 상처이기도 했다.특히 힘든 결정을 내렸을 때 그녀가 지지하고 이해해주기를 바랐다.이제 송재이마저 반대하니 오히려 고립감이 느껴졌고, 마치 전 세계 사람이 반발하는 듯싶었다.설영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져 만신창이가 되었다.이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한편, 송재이도 마음고생에 시달리고 있었다.설영준이 해고한 말단 직원만 생각하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씁쓸하고 괴로운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그가 경주에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문자로 한바탕 싸우고 얼굴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불평불만이 계속 쌓이기만 했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그러다 밤이 찾아오면 또다시 설영준을 원망했고,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순간 화가 나면서도 그리운 모순적인 느낌이었다.그리고 낮에 수업이 없을 때면 창가에 앉아 이미 식은 커피를 손에 들고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했다.설영준을 향한 그녀의 마음은 마치 식어버린 커피처럼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했다.이내 눈을 감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다.박윤찬의 연락을 받았을 때는 거의 퇴근할 무렵이었고, 혹시 시간 되면 같이 샤부샤부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평소라면 기피 대상 1호였을 테지만 지금은 우울한 기분을 달래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그래서 [좋아요]라는 답장을 보냈다.저녁 6시, 두 사람은 1층에 있는 일식집에 앉아
박윤찬의 조언을 듣고 나서 송재이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며칠 후 경주에서 돌아온 설영준은 퇴근 시간에 맞춰 송재이를 픽업하러 학교까지 찾아갔다.차는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조수석에 앉아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의 풍경에서 시선을 돌린 송재이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그러다 결국 용기를 내어 나지막이 물었다.“영준 씨, 설한 그룹은 요즘 괜찮아? 시장이 매우 불안정하다고 들었어.”설영준이 진지한 눈빛으로 송재이를 바라보았다.“재이야, 회사도 나도 걱정해줘서 고마워. 최근에 시장이 안 좋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여러 가지 대책을 세워서 대처한 덕분에 상황이 점차 호전되고 있어.”송재이는 한시름 놓았지만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해고된 직원들은... 죄가 없는 사람들이야. 최소한의 보상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설영준은 손을 내밀어 송재이의 손등을 살포시 감싸고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네 마음 이해해. 나도 이 부분에 대해 고민했고 이미 피해받은 직원들의 재취업을 돕거나 교육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지원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야. 그동안 그룹에 기여한 공로를 잊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송재이는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고마워, 영준 씨! 쉽지 않은 일인 건 알지만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니 정말 기뻐.”두 사람은 길가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한 다음 별장으로 돌아갔다.거실에 들어서자 송재이는 커튼을 살짝 열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을 감상하며 왠지 모르게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이때,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지안 씨? 웬일이에요? 우리 집에는 왜...?”송재이는 의아했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손님을 거실로 맞이했다.류지안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재이 씨, 밤늦게 찾아와서 민폐라는 걸 알지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어요.”한편, 설영준은 샤워하러 위층으로 올라갔고 거실에는 두 여자만 남았다.소파에 앉은 다음 송재이는 류지안에게 차 한
어두컴컴한 계단에 서 있는 설영준의 모습은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착잡한 눈빛은 감정을 헤아릴 수 없었고, 수건을 너무 꽉 쥔 탓에 살짝 구겨져 있었다.류지안의 말은 갑자기 불어닥친 찬바람처럼 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송재이를 향한 감정은 절대 변치 않을 거로 확신했지만, 고작 작은 돌덩이 하나에 신념이 흔들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설영준은 거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그의 시선이 송재이와 류지안에게 닿았고, 허물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두 여자를 보자 왠지 모르게 울적했다.“영준 씨?”인기척을 느낀 송재이가 그를 향해 웃으면서 손짓했다.설영준이 억지로 미소를 쥐어 짜내고 송재이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하지만 마치 누군가 손으로 심장을 움켜잡은 듯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무슨 얘기 했어?”비록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흔들리는 눈빛까지 감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류지안은 미묘한 분위기의 변화를 감지했다.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핑계를 대고 황급히 작별을 고하고는 설영준과 송재이만 남겨두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설영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송재이는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느껴졌고, 막연한 괴리감 때문에 괜스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그리고 이러한 의심과 불안을 없애줘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변명하기 시작했다.“영준 씨, 난...”그녀의 목소리는 다급함이 묻어났다.하지만 설영준은 손을 저으며 말을 끊었다.비록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안색은 낯설게 다가왔다.“굳이 설명 안 해도 돼. 난 널 믿어.”송재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불안한 나머지 회피하려는 설영준의 의도를 어찌 모르겠는가?어쩌면 진실을 알고 나서 더욱 고통스러워하거나 그녀의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귀를 닫고 있을지도 모른다.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가더니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이내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박윤찬이 괜찮은 남자라는 걸 나도 알아. 재능은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