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찬의 조언을 듣고 나서 송재이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며칠 후 경주에서 돌아온 설영준은 퇴근 시간에 맞춰 송재이를 픽업하러 학교까지 찾아갔다.차는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조수석에 앉아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의 풍경에서 시선을 돌린 송재이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그러다 결국 용기를 내어 나지막이 물었다.“영준 씨, 설한 그룹은 요즘 괜찮아? 시장이 매우 불안정하다고 들었어.”설영준이 진지한 눈빛으로 송재이를 바라보았다.“재이야, 회사도 나도 걱정해줘서 고마워. 최근에 시장이 안 좋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여러 가지 대책을 세워서 대처한 덕분에 상황이 점차 호전되고 있어.”송재이는 한시름 놓았지만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해고된 직원들은... 죄가 없는 사람들이야. 최소한의 보상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설영준은 손을 내밀어 송재이의 손등을 살포시 감싸고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네 마음 이해해. 나도 이 부분에 대해 고민했고 이미 피해받은 직원들의 재취업을 돕거나 교육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지원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야. 그동안 그룹에 기여한 공로를 잊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송재이는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고마워, 영준 씨! 쉽지 않은 일인 건 알지만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니 정말 기뻐.”두 사람은 길가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한 다음 별장으로 돌아갔다.거실에 들어서자 송재이는 커튼을 살짝 열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을 감상하며 왠지 모르게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이때,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지안 씨? 웬일이에요? 우리 집에는 왜...?”송재이는 의아했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손님을 거실로 맞이했다.류지안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재이 씨, 밤늦게 찾아와서 민폐라는 걸 알지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어요.”한편, 설영준은 샤워하러 위층으로 올라갔고 거실에는 두 여자만 남았다.소파에 앉은 다음 송재이는 류지안에게 차 한
어두컴컴한 계단에 서 있는 설영준의 모습은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착잡한 눈빛은 감정을 헤아릴 수 없었고, 수건을 너무 꽉 쥔 탓에 살짝 구겨져 있었다.류지안의 말은 갑자기 불어닥친 찬바람처럼 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송재이를 향한 감정은 절대 변치 않을 거로 확신했지만, 고작 작은 돌덩이 하나에 신념이 흔들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설영준은 거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그의 시선이 송재이와 류지안에게 닿았고, 허물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두 여자를 보자 왠지 모르게 울적했다.“영준 씨?”인기척을 느낀 송재이가 그를 향해 웃으면서 손짓했다.설영준이 억지로 미소를 쥐어 짜내고 송재이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하지만 마치 누군가 손으로 심장을 움켜잡은 듯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무슨 얘기 했어?”비록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흔들리는 눈빛까지 감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류지안은 미묘한 분위기의 변화를 감지했다.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핑계를 대고 황급히 작별을 고하고는 설영준과 송재이만 남겨두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설영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송재이는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느껴졌고, 막연한 괴리감 때문에 괜스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그리고 이러한 의심과 불안을 없애줘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변명하기 시작했다.“영준 씨, 난...”그녀의 목소리는 다급함이 묻어났다.하지만 설영준은 손을 저으며 말을 끊었다.비록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안색은 낯설게 다가왔다.“굳이 설명 안 해도 돼. 난 널 믿어.”송재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불안한 나머지 회피하려는 설영준의 의도를 어찌 모르겠는가?어쩌면 진실을 알고 나서 더욱 고통스러워하거나 그녀의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귀를 닫고 있을지도 모른다.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가더니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이내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박윤찬이 괜찮은 남자라는 걸 나도 알아. 재능은
송재이의 진료 기록지를 받은 오서희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이내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애를 썼지만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마치 손에 들고 있는 진료 기록지가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듯싶었다.무미건조한 의학 용어들을 빠르게 훑어보던 그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지고 착잡하게 변했다.진료 기록지는 송재이의 건강 상태를 보여줬을뿐더러 어머니로서 가장 예민한 곳을 소리 없이 건드리기도 했다.그녀는 이루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앞으로 고난을 겪게 될지도 모르는 송재이를 향한 동정심과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 있는 아들에 대한 우려가 교차했다.특히 전통이 뿌리 깊은 사회에서 이런 소식은 어느 가족에게나 큰 타격이 된다는 것을 오서희는 잘 알고 있다.이내 뒤죽박죽 한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송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제 송재이는 오서희의 연락을 받고도 딱히 놀라지 않았다.오서희가 설영준의 친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예전보다 한결 편해졌다.송재이는 오서희가 만나자는 말에 흔쾌히 응했다.두 사람은 조용한 카페에서 보기로 했다.오서희는 송재이를 만나자마자 대뜸 진료 기록지를 던져 주었다.송재이는 흠칫 놀랐고, 이를 보는 순간 이번 만남의 목적이 대충 짐작이 갔다.이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고,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진료 기록지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둔 상처를 무자비하게 도려냈다.그리고 진료 기록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체질상 불임이라는 결론이 떡하니 나타났다.지난번 유산한 이후로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데 그녀에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 것과 마찬가지였다.순간, 눈앞에 흐려지면서 기억이 마치 해일처럼 밀려왔다.얼굴도 모르는 아이, 그리고 아픈 기억들이 또다시 그녀를 덮쳤다.날카롭게 번뜩이는 오서희의 싸늘한 눈빛은 송재이의 모든 약점과 비밀을 꿰뚫어 보는 듯싶었다.이내 차분하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단호한
송재이는 머리가 어지러운 나머지 손으로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꽉 움켜쥐었고 침착함을 되찾으려고 애를 썼다.오서희의 말은 마치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듯싶었다.흔들리는 눈빛은 무력감과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설영준과 만나면서 이렇게 혹독한 시련을 맞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오서희는 시종일관 쌀쌀맞은 표정을 지었고, 단호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말했다.“물론 쉽지 않은 일이죠. 나도 이해해요. 하지만 영준은 설씨 가문의 외동아들로서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책임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송재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살짝 갈라져 있었다.“책임감이 막중하다는 걸 알지만... 전 영준 씨를 진짜 사랑해요...”오서희는 한숨을 내쉬더니 한풀 꺾인 어조로 대답했다.“송 선생님의 마음을 의심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만약 정말 영준이 잘 되기를 바라고 사랑한다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미래를 위해서 희생할 줄 알아야 해요.”송재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공포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설영준과 함께할 수 있는지를 결정짓는 열쇠가 자기 몸 상태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이내 마음속으로는 의혹과 의문으로 가득했다. 하필이면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질 수 없는 가혹한 운명을 타고나다니!오서희가 말을 이어갔다.“물론 괴롭겠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송 선생님이 상처를 입게 될뿐더러 영준도 끝없는 분쟁에 휘말리게 될 거예요. 두 사람 모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송재이는 숨이 턱 막혔다. 마치 깊은 심연 속에 빠진 듯 질식할 것 같았다.비록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흘러내리지 않도록 억지로 참았다.물론 오서희의 말이 매정하게 들리는 건 사실이지만 일리는 있었다.설영준을 사랑하지만 현실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듯싶었다.한편, 송재이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절규하고 있었다. 그
송재이는 절망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머리가 지끈했다. 하지만 설영준이 설씨 가문 독자로서 가문의 기대와 책임을 혼자 짊어졌다는 것을 송재이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설영준의 미래는 가문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고 오로지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할 수 없었다.카페를 나선 송재이는 넋이 나간 채 방황했고 찻길로 걸어가다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던 택시에 치일 뻔했다. 아찔한 순간 송재이를 인도로 끌어준 건 다름 아닌 이원희였다. 이원희는 송재이와 친하게 지내면서 관심해 주고 친절을 베풀었다. 이원희는 낯빛이 창백하고 초점을 잃은 송재이를 부축하며 다급히 물었다.“재이 씨, 왜 위험하게 이러고 있었어요!”송재이는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아봤지만 결국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이원희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고는 근처 백화점으로 들어가서 조용한 곳을 찾아 앉았다.이원희가 송재이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고 겨우 진정한 송재이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원희 씨, 저... 영준 씨를 보내줘야 할 것 같아요.”이원희는 적잖이 놀랐고 보내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눈치챘다. 그러고는 잔뜩 움츠러든 송재이를 다독이며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천천히 얘기해 봐요.”송재이는 오서희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과 자신의 고민을 전부 알려주었다. 설영준이 책임져야 할 것들, 이 감정의 깊이 그리고 난처한 입장까지 모조리 말하자 이원희는 송재이를 꼭 안아주며 위로해 주었다.때때로 인생의 중요한 선택은 다른 사람이 대신 해줄 수 없기에 이원희는 송재이를 격려해 주고 응원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이원희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난 재이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영준 씨를 많이 사랑하는 건 알지만 재이 씨를 더 사랑해 줘요. 사랑해서 보내준다는 말도 있잖아요.”송재이가 눈시울을 붉히더니 이원희의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고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씩 풀려갔다. 송재이는 떨
이원희가 건넨 위로와 격려 속에서 송재이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재이는 절망스럽고 포기하고 싶은 상황에서 충동적으로 이별을 고하고 싶지 않았다. 오서희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지만 사랑을 위해 한 번 더 용기 내려고 했다.집에 돌아온 송재이는 오서희가 했던 말을 뒤로 하고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설영준이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놓고 촛불에 불을 붙인 뒤, 두 사람은 낭만적인 만찬을 즐겼다.청순한 원피스를 입은 송재이는 설영준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함께 산책하러 나가자고 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가로수길을 걷는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송재이는 설영준의 팔을 꼭 끌어안았고 설레는 마음을 감추려고 일부러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설영준은 달빛에 비친 송재이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재이야, 오늘 밤 달이 유난히 더 예쁜 것 같아. 꼭 너처럼 말이야.”송재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영준 씨, 당신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다 좋아.”두 사람은 조용히 걸었고 맞잡은 두 손에서 서로의 온기가 느껴져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실감 나게 해주었다. 이때 설영준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재이야, 요즘 힘들었지? 내가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해.”송재이는 설영준의 손을 꽉 잡고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영준 씨랑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우리 지금처럼 사랑한다면 어떤 시련이 와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어.”설영준은 멈춰서더니 송재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당신은 나의 자랑이기도 하지만 나의 유일한 약점이야. 앞으로 내가 더 잘해주고 당신이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줄게.”집으로 돌아온 송재이는 클래식 음악을 틀고는 설영준과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았다. 송재이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싶었고 설영준 어깨에 기대 입을 열었다.“영준 씨,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당신 편이야.”송재이의 진심이 느껴졌는지 설영준은 미소를 지으며 송재이의 손을 꽉 잡았다. 두 사람은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송재이
송재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거울 앞에 서서 심호흡하고는 애써 미소를 지었고 설영준이 들어오자 눈을 마주치며 부드럽게 말했다. “물이 뜨거워서 델 뻔했는데 괜찮아졌어.”설영준은 송재이의 빨개진 눈가를 쳐다보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송재이를 품에 끌어안고 한참을 다독여 주었다. 설영준한테 안긴 송재이는 온기와 심장박동을 느끼며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영준 씨, 정말 노력했는데도 아기가 찾아오지 않으니까 너무 불안해. 하는 일마다 손에 안 잡히고 우울해져서...”설영준은 송재이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다정하게 말했다.“재이야,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언젠가는 될 거고 당장 안 생겨도 난 당신 곁에 항상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송재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다음날, 도정원과 도경욱이 송재이를 보러 남도로 왔고 송재이는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알고 보니 도정원이 남도에서 송재이 명의로 된 아파트를 구매했던 것이다. 도정원은 송재이의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갔고 두 사람은 함께 집으로 향했다.송재이는 서재로 들어가 도경욱과 마주 앉았고 햇빛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책상에 비췄다. 송재이는 불안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찻잔을 움켜쥐었고 차갑게 식은 차만큼이나 송재이의 마음에도 칼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송재이는 자상한 미소를 짓는 도경욱을 바라보며 고민을 털어놓았다.“아빠, 저는 영준 씨를 닮은 아기를 낳고 싶은데...”송재이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썼지만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도경욱은 손을 내젓더니 입을 열었다.“재이야, 이 세상에는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주 드물단다. 너랑 영준이의 미래와 행복은 아기한테 달린 것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잖아.”도경욱의 목소리는 심금을 울릴 만큼 단단하고 차분했다. 송재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이걸로 영준 씨랑 멀어지게 될까 봐 두려워요.”송재이는
도경욱과 송재이는 차에서 내려 캐리어를 들고 공항으로 들어갔다. 느긋하게 걷던 송재이는 설영준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심호흡한 뒤에야 받았다.“영준 씨,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어. 아빠가 파리 출장 가는데 나도 바람 쐬러 같이 가려고 공항에 왔어.”설영준은 침묵하더니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갑자기 파리라니... 재이야, 우리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이겨내기로 했잖아.”송재이가 부드럽게 대답했다.“영준 씨, 며칠 후면 돌아올 거야. 내가 피곤해 보였는지 아빠가 같이 가서 좀 쉬다가 오자고 하더라고.”설영준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아저씨의 마음은 알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래. 내가 어떻게 당신 혼자 해외로 보내?”송재이는 피식 웃었다.“영준 씨, 나 괜찮아. 아빠도 있고 아빠랑 일하시는 분들도 같이 가거든.”설영준은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알아, 아는데... 그냥 당신이 걱정돼.”설영준은 송재이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아기를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었기에 갑자기 해외로 놀러 간다는 말이 달갑지 않았다. 설영준이 투정을 부리려 할 때, 도경욱이 전화를 건네받고는 담담하게 말했다.“영준아, 나야. 네가 재이를 생각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내가 곁에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여행 간 김에 푹 쉬다가 오면 두 사람한테도 좋을 거야.”설영준은 도경욱의 목소리를 듣더니 공손하게 대답했다.“아저씨,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재이한테 도움이 된다면 저야 너무 좋죠.”도경욱이 미소를 지었다.“이해해 줘서 고마워. 영준아, 재이랑 돌아가면 연락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전화를 끊은 뒤, 설영준은 만감이 교차했다. 송재이가 걱정되었지만 지나친 관심은 곧 집착이 되는 법이었다. 도경욱의 말대로 송재이가 여행하면서 기분이 나아지면 두 사람한테도 좋지만 설영준은 서운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파리에 있는 동안 송재이와 도경욱은 경치 좋은 곳을 둘러보며 이국적인 분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