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거울 앞에 서서 심호흡하고는 애써 미소를 지었고 설영준이 들어오자 눈을 마주치며 부드럽게 말했다. “물이 뜨거워서 델 뻔했는데 괜찮아졌어.”설영준은 송재이의 빨개진 눈가를 쳐다보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송재이를 품에 끌어안고 한참을 다독여 주었다. 설영준한테 안긴 송재이는 온기와 심장박동을 느끼며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영준 씨, 정말 노력했는데도 아기가 찾아오지 않으니까 너무 불안해. 하는 일마다 손에 안 잡히고 우울해져서...”설영준은 송재이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다정하게 말했다.“재이야,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언젠가는 될 거고 당장 안 생겨도 난 당신 곁에 항상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송재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다음날, 도정원과 도경욱이 송재이를 보러 남도로 왔고 송재이는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알고 보니 도정원이 남도에서 송재이 명의로 된 아파트를 구매했던 것이다. 도정원은 송재이의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갔고 두 사람은 함께 집으로 향했다.송재이는 서재로 들어가 도경욱과 마주 앉았고 햇빛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책상에 비췄다. 송재이는 불안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찻잔을 움켜쥐었고 차갑게 식은 차만큼이나 송재이의 마음에도 칼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송재이는 자상한 미소를 짓는 도경욱을 바라보며 고민을 털어놓았다.“아빠, 저는 영준 씨를 닮은 아기를 낳고 싶은데...”송재이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썼지만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도경욱은 손을 내젓더니 입을 열었다.“재이야, 이 세상에는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주 드물단다. 너랑 영준이의 미래와 행복은 아기한테 달린 것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잖아.”도경욱의 목소리는 심금을 울릴 만큼 단단하고 차분했다. 송재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이걸로 영준 씨랑 멀어지게 될까 봐 두려워요.”송재이는
도경욱과 송재이는 차에서 내려 캐리어를 들고 공항으로 들어갔다. 느긋하게 걷던 송재이는 설영준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심호흡한 뒤에야 받았다.“영준 씨,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어. 아빠가 파리 출장 가는데 나도 바람 쐬러 같이 가려고 공항에 왔어.”설영준은 침묵하더니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갑자기 파리라니... 재이야, 우리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이겨내기로 했잖아.”송재이가 부드럽게 대답했다.“영준 씨, 며칠 후면 돌아올 거야. 내가 피곤해 보였는지 아빠가 같이 가서 좀 쉬다가 오자고 하더라고.”설영준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아저씨의 마음은 알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래. 내가 어떻게 당신 혼자 해외로 보내?”송재이는 피식 웃었다.“영준 씨, 나 괜찮아. 아빠도 있고 아빠랑 일하시는 분들도 같이 가거든.”설영준은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알아, 아는데... 그냥 당신이 걱정돼.”설영준은 송재이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아기를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었기에 갑자기 해외로 놀러 간다는 말이 달갑지 않았다. 설영준이 투정을 부리려 할 때, 도경욱이 전화를 건네받고는 담담하게 말했다.“영준아, 나야. 네가 재이를 생각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내가 곁에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여행 간 김에 푹 쉬다가 오면 두 사람한테도 좋을 거야.”설영준은 도경욱의 목소리를 듣더니 공손하게 대답했다.“아저씨,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재이한테 도움이 된다면 저야 너무 좋죠.”도경욱이 미소를 지었다.“이해해 줘서 고마워. 영준아, 재이랑 돌아가면 연락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전화를 끊은 뒤, 설영준은 만감이 교차했다. 송재이가 걱정되었지만 지나친 관심은 곧 집착이 되는 법이었다. 도경욱의 말대로 송재이가 여행하면서 기분이 나아지면 두 사람한테도 좋지만 설영준은 서운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파리에 있는 동안 송재이와 도경욱은 경치 좋은 곳을 둘러보며 이국적인 분위기를
이때 도경욱이 입을 열었다.“카를로스 씨, 이것도 인연인데 재이랑 같이 사진 한 장 찍어줄까요? 파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게 너무 신기해서요.”카를로스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송재이를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송재이 씨와 다시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낭만의 도시 파이에서 사진 한 장 남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송재이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당황했지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사진 찍어요.”도경욱은 휴대폰을 꺼냈고 카를로스와 송재이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말했다.“자, 여기 보세요. 두 사람 좀 더 붙어 서고 웃어볼게요! 지금 표정 아주 좋아요.”송재이와 카를로스는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이 섰고 두 사람은 카메라를 보며 웃었다. 도경욱은 이 아름다운 장면을 찍었고 이 사진을 누군가에게 보내려고 마음먹었다.“사진 잘 나왔네. 재이야, 아빠 잘 찍었지?”송재이는 휴대폰을 건네받고는 사진을 보더니 밝게 웃었다.“역시 우리 아빠는 최고예요. 고마워요, 아빠!”도경욱은 이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고 설영준만 볼 수 있게 설정해 두었다. 오묘한 심리 게임이 시작되었다. 바다 건너편의 설영준은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고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설영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사진 속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재이가 또 카를로스랑 마주쳤다고?’두 사람은 친구가 아닌 더 깊은 관계처럼 보였고 애틋한 분위기에 질투 난 설영준은 불안한지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설영준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고 안절부절못했다.설영준은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눌렀고 고민 끝에 송재이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연결음이 몇 번 울리고 난 뒤, 송재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영준 씨, 무슨 일로 전화했어? 나 지금 밖에서 재밌게 놀고 있거든.”설영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재이야, 요즘 잘 지내? 파리 음식은 입에 맞고?”송재이는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송재이는 설영준이 질투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일부러 짓궂은 장난을 쳤다. 송재이는 잔뜩 신이 난 채 말했다.“영준 씨, 지금 질투하는 거야? 젠틀하고 다정한 카를로스 덕분에 좋은 시간 보내고 있었거든.”설영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솟구쳐 오르는 화를 억눌렀다.“내가 당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그 사람이랑 같이 있었어? 나 속 터지는 꼴 보고 싶어?”송재이는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어머, 날 걱정했구나. 난 또 영준 씨가 일만 하느라 나를 잊어버린 줄 알았지.”설영준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더는 참을 수 없었다.“재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네가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 건 죽기보다도 더 싫어. 특히 카를로스는 더 싫다고!”송재이는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장난기를 거두었다.“미안해, 내가 장난이 심했어. 거리 둘 테니까 날 믿어줘.”두 사람이 대화하는 도중에 도경욱이 갑자기 전화를 빼앗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영준아, 나야. 우리 할 얘기가 남은 것 같은데.”설영준은 바짝 긴장한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아저씨, 잘 지내셨어요?”그러고는 직설적으로 도경욱에게 물었다.“재이랑 카를로스가 같이 찍은 사진을 왜 인스타그램에 올리셨는지 여쭙고 싶었어요. 아저씨가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도경욱이 침묵하자 설영준은 마른침을 삼켰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아저씨, 저는 재이가 걱정되어서 그래요. 재이가 상처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도경욱은 날이 선 말투로 대답했다.“영준아, 내가 내 딸 하나 제대로 보살펴 주지 못할 것 같아? 재이는 네 화풀이 대상이 아니야. 재이가 간만에 편하게 쉬는데 이참에 좀 내버려둬.”설영준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아저씨.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도경욱이 차갑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설씨 가문 사모님께 앞으로 아기를 가지는 일로 더는 재이를 힘들게 하지 말아 달라고 전해줘. 누구도 재이의 미래와 행복에 간섭할 자격이 없어.”설영준은 도경욱이
세 날 뒤, 송재이와 도경욱은 남도로 돌아왔다. 설영준이 직접 공항으로 마중 나갔고 입꼬리에 귀에 걸려있었다. 송재이가 귀국함으로써 설영준의 마음에 새로운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송재이는 또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고 상사의 칭찬을 한 몸에 받으며 연출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완벽한 연출을 위해 악착같이 연습했고 가끔 연습실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설영준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출장 갔고 두 사람은 자기 전에 꼭 영상 통화하자고 약속했었다. 떨어져 있으면서 애틋한 감정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설영준이 송재이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한참이 지나도 받지 않았다. 걱정된 설영준은 연거푸 전화를 걸었고 몇 번의 시도 끝에야 송재이가 전화를 받았다.영상통화가 연결되자 설영준은 송재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발견했다.“재이야,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송재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영준 씨, 나 열나는 것 같아. 팔에 힘이 안 들어가네.”설영준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당신 지금 어디야? 내가 갈게.”송재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영준 씨, 나 괜찮아. 다른 분이 의사를 부르러 갔고 난 연습실에서 기다리는 중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설영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신이 아픈데 나라도 당신 곁에 있어야지. 지금 갈 테니까 기다려.”송재이는 미소를 지으며 설영준을 말렸다.“처리할 업무도 많을 텐데 그러지 않아도 돼. 여기에 의사 선생님이랑 동료들도 있으니 걱정하지 마.”불안해진 설영준은 전화를 끊은 뒤 곧바로 박윤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윤찬은 설영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두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설영준이 얼마나 불안하고 조급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송재이는 호텔 방에서 휴식을 취했고 잠깐 눈 붙인 사이에 누군가 전화를 걸어왔다. 송재이가 힘겹게 전화를 받자 박윤찬의 목소리가 들렸다.“재이 씨, 저 박윤찬이에요. 영준 씨가 저한테 직접 재이 씨를 만
박윤찬은 송재이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더니 피곤했는지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고요한 방에 갑자기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송재이는 고열에 시달렸고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겨우 침대에서 내려온 송재이는 휘청거리며 거실로 나가 박윤찬을 찾았다.“윤찬 씨,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요...”얼굴이 창백한 송재이는 목소리마저 떨려왔고 이마에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 모습을 본 박윤찬은 재빨리 일어나더니 다급히 물었다.“재이 씨, 괜찮아요? 같이 병원으로 가요!”송재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윤찬은 송재이를 부축해서 밖으로 나갔고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했다. 병원에 도착한 뒤, 박윤찬은 송재이를 휠체어에 앉히고는 응급실로 향했고 복도의 코너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다.“아!”부딪힌 사람은 문예슬의 비서 김소희였다. 최근 들어 실수가 잦아지고 업무 시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사퇴 위기에 놓여있었다. 마음이 급한 박윤찬은 송재이를 제외하고는 다른 것에 신경 쓰지 못했기에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다.김소희는 어깨를 매만지며 화내려 하는데 박윤찬을 보고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저 사람 송재이잖아? 무슨 일로 여기까지...”김소희는 문예슬이 송재이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걸 알기에 문예슬한테 잘 보이면 사퇴 당할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여겼고 조용히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박윤찬과 송재이가 혹여나 눈치챌까 봐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기회를 엿보았다. 이때 박윤찬은 응급실 앞까지 도착했고 의사와 간호사가 송재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박윤찬은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고 있었다.김소희는 박윤찬이 세심하게 송재이를 보살피는 모습, 응급실로 들여보낸 뒤의 불안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긴박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과 표정이 박윤찬의 마음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 김소희는 이 영상을 문예슬에게 전송했다.이런 ‘특급 정보’는 문예슬의 인정을 받을 기회였다. 한편, 문정 그룹의 회의실에서 문예슬과 문성호
응급실에서 한창 구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송재이의 상태는 점점 회복되었고 열이 내렸으며 심박수와 호흡도 안정되었다. 박윤찬은 응급실에서 나온 의사의 말을 듣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김소희는 구석에서 이 광경을 몰래 관찰하고 있었다. 문예슬의 인정을 받기 위해 송재이를 감시했고 승진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히죽 웃다가 문예슬이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지 못한 후과에 두려워하기도 했다.한편, 문정 그룹 회의실.회의를 끝마친 뒤, 문예슬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성호한테 말했다.“오빠,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문성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문예슬은 회의실을 나서면서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이 영상을 손에 넣은 한, 중요한 시점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병원 내부는 조용했고 간호사의 발걸음 소리와 환자의 기침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박윤찬은 응급실 밖의 의자에 앉아서 설영준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송재이를 걱정하는 설영준한테 부담을 줄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박윤찬은 설영준이 송재이의 상황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휴대폰을 꺼냈지만 배터리가 다 나간 상태였다. 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송재이는 응급실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졌다. 꿈속에서 설영준과 행복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고 송재이는 미소를 지었다. 이때 갑자기 음습하게 돌변하더니 주현아와 지민건이 송재이의 아기를 마구 괴롭히는 장면이 나타났다. 절망과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송재이는 식은땀을 흘렸다. 거친 호흡과 함께 악몽에서 깨어났고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침대맡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송재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박윤찬이었다. 송재이는 이럴 때 친구가 곁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여겼고 더는 외롭지 않았다.박윤찬이 다급히 물었다.“재이 씨, 괜찮아요? 불편한 곳은 없어요?”송재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악몽을 꿨어요.”박윤찬이 잔에 물을 떠 오며 위로해
설영준은 심호흡하고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송재이와 박윤찬이 함께하면서 설영준을 불안하게 했던 순간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설영준은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고 남도로 돌아가는 일정을 배정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류지안 생각이 났다.한편, 박윤찬은 병원 의자에 앉아 응급실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송재이의 상태를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응급실에 오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책했다.박윤찬은 송재이 곁에 설영준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감정의 끈을 놓지 못했다.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발신자는 설영준이었다. 설영준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윤찬 씨, 재이 좀 어때요?”박윤찬이 고개를 숙이고는 대답했다.“안정을 취한 상태지만 의사 선생님이 계속 지켜봐야 한다더라고요.”설영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일 남도로 돌아갈 거예요. 재이 곁에 제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박윤찬은 설영준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설영준이 얼마나 송재이를 사랑하는지 깨달았다.“영준 씨가 올 때까지 제가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전화를 끊은 뒤, 박윤찬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설영준이 돌아오면 송재이를 직접 보살펴 주지 못할 것이고 미묘한 신경전도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송재이가 하루빨리 낫는 것이다.침대에 누워있던 송재이는 머리가 점점 맑아지는 것 같았다. 박윤찬이 건네준 잔을 꼭 쥐고는 미소를 지었다. 박윤찬한테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웠다.박윤찬의 표정에서 송재이에 대한 감정이 드러났기에 송재이는 설영준의 여자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때 류지안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잠에서 금방 깬 송재이는 류지안을 보더니 눈을 비비고는 다시 크게 떴다. 흐릿했던 초점이 확대되면서 류지안과 마주하게 된 송재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류지안 씨,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송재이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고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류지안은 침대맡으로 다가가 송재이를 눕히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