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의 진료 기록지를 받은 오서희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이내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애를 썼지만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마치 손에 들고 있는 진료 기록지가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듯싶었다.무미건조한 의학 용어들을 빠르게 훑어보던 그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지고 착잡하게 변했다.진료 기록지는 송재이의 건강 상태를 보여줬을뿐더러 어머니로서 가장 예민한 곳을 소리 없이 건드리기도 했다.그녀는 이루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앞으로 고난을 겪게 될지도 모르는 송재이를 향한 동정심과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 있는 아들에 대한 우려가 교차했다.특히 전통이 뿌리 깊은 사회에서 이런 소식은 어느 가족에게나 큰 타격이 된다는 것을 오서희는 잘 알고 있다.이내 뒤죽박죽 한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송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제 송재이는 오서희의 연락을 받고도 딱히 놀라지 않았다.오서희가 설영준의 친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예전보다 한결 편해졌다.송재이는 오서희가 만나자는 말에 흔쾌히 응했다.두 사람은 조용한 카페에서 보기로 했다.오서희는 송재이를 만나자마자 대뜸 진료 기록지를 던져 주었다.송재이는 흠칫 놀랐고, 이를 보는 순간 이번 만남의 목적이 대충 짐작이 갔다.이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고,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진료 기록지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둔 상처를 무자비하게 도려냈다.그리고 진료 기록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체질상 불임이라는 결론이 떡하니 나타났다.지난번 유산한 이후로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데 그녀에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 것과 마찬가지였다.순간, 눈앞에 흐려지면서 기억이 마치 해일처럼 밀려왔다.얼굴도 모르는 아이, 그리고 아픈 기억들이 또다시 그녀를 덮쳤다.날카롭게 번뜩이는 오서희의 싸늘한 눈빛은 송재이의 모든 약점과 비밀을 꿰뚫어 보는 듯싶었다.이내 차분하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단호한
송재이는 머리가 어지러운 나머지 손으로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꽉 움켜쥐었고 침착함을 되찾으려고 애를 썼다.오서희의 말은 마치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듯싶었다.흔들리는 눈빛은 무력감과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설영준과 만나면서 이렇게 혹독한 시련을 맞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오서희는 시종일관 쌀쌀맞은 표정을 지었고, 단호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말했다.“물론 쉽지 않은 일이죠. 나도 이해해요. 하지만 영준은 설씨 가문의 외동아들로서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책임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송재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살짝 갈라져 있었다.“책임감이 막중하다는 걸 알지만... 전 영준 씨를 진짜 사랑해요...”오서희는 한숨을 내쉬더니 한풀 꺾인 어조로 대답했다.“송 선생님의 마음을 의심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만약 정말 영준이 잘 되기를 바라고 사랑한다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미래를 위해서 희생할 줄 알아야 해요.”송재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공포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설영준과 함께할 수 있는지를 결정짓는 열쇠가 자기 몸 상태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이내 마음속으로는 의혹과 의문으로 가득했다. 하필이면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질 수 없는 가혹한 운명을 타고나다니!오서희가 말을 이어갔다.“물론 괴롭겠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송 선생님이 상처를 입게 될뿐더러 영준도 끝없는 분쟁에 휘말리게 될 거예요. 두 사람 모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송재이는 숨이 턱 막혔다. 마치 깊은 심연 속에 빠진 듯 질식할 것 같았다.비록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흘러내리지 않도록 억지로 참았다.물론 오서희의 말이 매정하게 들리는 건 사실이지만 일리는 있었다.설영준을 사랑하지만 현실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듯싶었다.한편, 송재이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절규하고 있었다. 그
송재이는 절망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머리가 지끈했다. 하지만 설영준이 설씨 가문 독자로서 가문의 기대와 책임을 혼자 짊어졌다는 것을 송재이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설영준의 미래는 가문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고 오로지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할 수 없었다.카페를 나선 송재이는 넋이 나간 채 방황했고 찻길로 걸어가다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던 택시에 치일 뻔했다. 아찔한 순간 송재이를 인도로 끌어준 건 다름 아닌 이원희였다. 이원희는 송재이와 친하게 지내면서 관심해 주고 친절을 베풀었다. 이원희는 낯빛이 창백하고 초점을 잃은 송재이를 부축하며 다급히 물었다.“재이 씨, 왜 위험하게 이러고 있었어요!”송재이는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아봤지만 결국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이원희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고는 근처 백화점으로 들어가서 조용한 곳을 찾아 앉았다.이원희가 송재이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고 겨우 진정한 송재이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원희 씨, 저... 영준 씨를 보내줘야 할 것 같아요.”이원희는 적잖이 놀랐고 보내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눈치챘다. 그러고는 잔뜩 움츠러든 송재이를 다독이며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천천히 얘기해 봐요.”송재이는 오서희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과 자신의 고민을 전부 알려주었다. 설영준이 책임져야 할 것들, 이 감정의 깊이 그리고 난처한 입장까지 모조리 말하자 이원희는 송재이를 꼭 안아주며 위로해 주었다.때때로 인생의 중요한 선택은 다른 사람이 대신 해줄 수 없기에 이원희는 송재이를 격려해 주고 응원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이원희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난 재이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영준 씨를 많이 사랑하는 건 알지만 재이 씨를 더 사랑해 줘요. 사랑해서 보내준다는 말도 있잖아요.”송재이가 눈시울을 붉히더니 이원희의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고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씩 풀려갔다. 송재이는 떨
이원희가 건넨 위로와 격려 속에서 송재이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재이는 절망스럽고 포기하고 싶은 상황에서 충동적으로 이별을 고하고 싶지 않았다. 오서희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지만 사랑을 위해 한 번 더 용기 내려고 했다.집에 돌아온 송재이는 오서희가 했던 말을 뒤로 하고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설영준이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놓고 촛불에 불을 붙인 뒤, 두 사람은 낭만적인 만찬을 즐겼다.청순한 원피스를 입은 송재이는 설영준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함께 산책하러 나가자고 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가로수길을 걷는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송재이는 설영준의 팔을 꼭 끌어안았고 설레는 마음을 감추려고 일부러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설영준은 달빛에 비친 송재이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재이야, 오늘 밤 달이 유난히 더 예쁜 것 같아. 꼭 너처럼 말이야.”송재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영준 씨, 당신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다 좋아.”두 사람은 조용히 걸었고 맞잡은 두 손에서 서로의 온기가 느껴져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실감 나게 해주었다. 이때 설영준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재이야, 요즘 힘들었지? 내가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해.”송재이는 설영준의 손을 꽉 잡고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영준 씨랑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우리 지금처럼 사랑한다면 어떤 시련이 와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어.”설영준은 멈춰서더니 송재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당신은 나의 자랑이기도 하지만 나의 유일한 약점이야. 앞으로 내가 더 잘해주고 당신이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줄게.”집으로 돌아온 송재이는 클래식 음악을 틀고는 설영준과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았다. 송재이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싶었고 설영준 어깨에 기대 입을 열었다.“영준 씨,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당신 편이야.”송재이의 진심이 느껴졌는지 설영준은 미소를 지으며 송재이의 손을 꽉 잡았다. 두 사람은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송재이
송재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거울 앞에 서서 심호흡하고는 애써 미소를 지었고 설영준이 들어오자 눈을 마주치며 부드럽게 말했다. “물이 뜨거워서 델 뻔했는데 괜찮아졌어.”설영준은 송재이의 빨개진 눈가를 쳐다보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송재이를 품에 끌어안고 한참을 다독여 주었다. 설영준한테 안긴 송재이는 온기와 심장박동을 느끼며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영준 씨, 정말 노력했는데도 아기가 찾아오지 않으니까 너무 불안해. 하는 일마다 손에 안 잡히고 우울해져서...”설영준은 송재이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다정하게 말했다.“재이야,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언젠가는 될 거고 당장 안 생겨도 난 당신 곁에 항상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송재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다음날, 도정원과 도경욱이 송재이를 보러 남도로 왔고 송재이는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알고 보니 도정원이 남도에서 송재이 명의로 된 아파트를 구매했던 것이다. 도정원은 송재이의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갔고 두 사람은 함께 집으로 향했다.송재이는 서재로 들어가 도경욱과 마주 앉았고 햇빛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책상에 비췄다. 송재이는 불안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찻잔을 움켜쥐었고 차갑게 식은 차만큼이나 송재이의 마음에도 칼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송재이는 자상한 미소를 짓는 도경욱을 바라보며 고민을 털어놓았다.“아빠, 저는 영준 씨를 닮은 아기를 낳고 싶은데...”송재이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썼지만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도경욱은 손을 내젓더니 입을 열었다.“재이야, 이 세상에는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주 드물단다. 너랑 영준이의 미래와 행복은 아기한테 달린 것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잖아.”도경욱의 목소리는 심금을 울릴 만큼 단단하고 차분했다. 송재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이걸로 영준 씨랑 멀어지게 될까 봐 두려워요.”송재이는
도경욱과 송재이는 차에서 내려 캐리어를 들고 공항으로 들어갔다. 느긋하게 걷던 송재이는 설영준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심호흡한 뒤에야 받았다.“영준 씨,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어. 아빠가 파리 출장 가는데 나도 바람 쐬러 같이 가려고 공항에 왔어.”설영준은 침묵하더니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갑자기 파리라니... 재이야, 우리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이겨내기로 했잖아.”송재이가 부드럽게 대답했다.“영준 씨, 며칠 후면 돌아올 거야. 내가 피곤해 보였는지 아빠가 같이 가서 좀 쉬다가 오자고 하더라고.”설영준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아저씨의 마음은 알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래. 내가 어떻게 당신 혼자 해외로 보내?”송재이는 피식 웃었다.“영준 씨, 나 괜찮아. 아빠도 있고 아빠랑 일하시는 분들도 같이 가거든.”설영준은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알아, 아는데... 그냥 당신이 걱정돼.”설영준은 송재이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아기를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었기에 갑자기 해외로 놀러 간다는 말이 달갑지 않았다. 설영준이 투정을 부리려 할 때, 도경욱이 전화를 건네받고는 담담하게 말했다.“영준아, 나야. 네가 재이를 생각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내가 곁에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여행 간 김에 푹 쉬다가 오면 두 사람한테도 좋을 거야.”설영준은 도경욱의 목소리를 듣더니 공손하게 대답했다.“아저씨,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재이한테 도움이 된다면 저야 너무 좋죠.”도경욱이 미소를 지었다.“이해해 줘서 고마워. 영준아, 재이랑 돌아가면 연락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전화를 끊은 뒤, 설영준은 만감이 교차했다. 송재이가 걱정되었지만 지나친 관심은 곧 집착이 되는 법이었다. 도경욱의 말대로 송재이가 여행하면서 기분이 나아지면 두 사람한테도 좋지만 설영준은 서운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파리에 있는 동안 송재이와 도경욱은 경치 좋은 곳을 둘러보며 이국적인 분위기를
이때 도경욱이 입을 열었다.“카를로스 씨, 이것도 인연인데 재이랑 같이 사진 한 장 찍어줄까요? 파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게 너무 신기해서요.”카를로스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송재이를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송재이 씨와 다시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낭만의 도시 파이에서 사진 한 장 남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송재이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당황했지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사진 찍어요.”도경욱은 휴대폰을 꺼냈고 카를로스와 송재이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말했다.“자, 여기 보세요. 두 사람 좀 더 붙어 서고 웃어볼게요! 지금 표정 아주 좋아요.”송재이와 카를로스는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이 섰고 두 사람은 카메라를 보며 웃었다. 도경욱은 이 아름다운 장면을 찍었고 이 사진을 누군가에게 보내려고 마음먹었다.“사진 잘 나왔네. 재이야, 아빠 잘 찍었지?”송재이는 휴대폰을 건네받고는 사진을 보더니 밝게 웃었다.“역시 우리 아빠는 최고예요. 고마워요, 아빠!”도경욱은 이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고 설영준만 볼 수 있게 설정해 두었다. 오묘한 심리 게임이 시작되었다. 바다 건너편의 설영준은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고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설영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사진 속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재이가 또 카를로스랑 마주쳤다고?’두 사람은 친구가 아닌 더 깊은 관계처럼 보였고 애틋한 분위기에 질투 난 설영준은 불안한지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설영준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고 안절부절못했다.설영준은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눌렀고 고민 끝에 송재이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연결음이 몇 번 울리고 난 뒤, 송재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영준 씨, 무슨 일로 전화했어? 나 지금 밖에서 재밌게 놀고 있거든.”설영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재이야, 요즘 잘 지내? 파리 음식은 입에 맞고?”송재이는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송재이는 설영준이 질투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일부러 짓궂은 장난을 쳤다. 송재이는 잔뜩 신이 난 채 말했다.“영준 씨, 지금 질투하는 거야? 젠틀하고 다정한 카를로스 덕분에 좋은 시간 보내고 있었거든.”설영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솟구쳐 오르는 화를 억눌렀다.“내가 당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그 사람이랑 같이 있었어? 나 속 터지는 꼴 보고 싶어?”송재이는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어머, 날 걱정했구나. 난 또 영준 씨가 일만 하느라 나를 잊어버린 줄 알았지.”설영준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더는 참을 수 없었다.“재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네가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 건 죽기보다도 더 싫어. 특히 카를로스는 더 싫다고!”송재이는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장난기를 거두었다.“미안해, 내가 장난이 심했어. 거리 둘 테니까 날 믿어줘.”두 사람이 대화하는 도중에 도경욱이 갑자기 전화를 빼앗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영준아, 나야. 우리 할 얘기가 남은 것 같은데.”설영준은 바짝 긴장한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아저씨, 잘 지내셨어요?”그러고는 직설적으로 도경욱에게 물었다.“재이랑 카를로스가 같이 찍은 사진을 왜 인스타그램에 올리셨는지 여쭙고 싶었어요. 아저씨가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도경욱이 침묵하자 설영준은 마른침을 삼켰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아저씨, 저는 재이가 걱정되어서 그래요. 재이가 상처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도경욱은 날이 선 말투로 대답했다.“영준아, 내가 내 딸 하나 제대로 보살펴 주지 못할 것 같아? 재이는 네 화풀이 대상이 아니야. 재이가 간만에 편하게 쉬는데 이참에 좀 내버려둬.”설영준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아저씨.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도경욱이 차갑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설씨 가문 사모님께 앞으로 아기를 가지는 일로 더는 재이를 힘들게 하지 말아 달라고 전해줘. 누구도 재이의 미래와 행복에 간섭할 자격이 없어.”설영준은 도경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