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슬이 자리를 떠난 후 송재이와 문성호 사이의 분위기는 조금 미묘해졌다.문성호의 시선에는 흥미가 가득했고 손에 든 와인잔을 살짝 흔들며 자주 송재이에게 눈길을 보냈다.송재이는 문성호의 시선을 느꼈지만 별로 개의치 않고 그저 조용히 앉아 문예슬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흘러가도 문예슬이 돌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그때, 식당 매니저가 우연히 두 사람의 테이블을 지나갔다.그는 여진의 친구로 송재이와 설영준의 열애설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식당 매니저는 송재이를 보자마자 곧바로 송재이를 알아보았다.송재이와 문성호 사이의 상호작용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마음속에서 약간의 경계심이 일어났다.식당 매니저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 상황에 개입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망설였지만 그의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의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식당 매니저는 송재이와 문성호의 사진을 몰래 찍은 후 신속하게 여진에게 사진을 전송하고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송재이 씨가 어떤 남자와 아치스 식당에 있는 걸 봤어.]송재이는 이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송재이는 문정 그룹이 어떤 제안을 하든 자신과 설영준은 그런 속셈이 있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얼마 후, 문예슬이 약간 서두른 듯이 자리로 돌아왔다.문예슬은 송재이의 냉담한 태도와 식당 매니저의 이상한 반응을 눈치챘지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송재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씨 남매에게 예의 있게 작별 인사를 했다. “문 아가씨, 문 선생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른 일정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야겠어요. 제안하신 협력에 관해서는 설영준 씨에게 잘 전달하겠습니다.”문성호는 끝까지 미소를 지으며 송재이를 배웅했다. 송재이가 떠나자, 문성호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오빠, 송재이가… 그렇게 할까요?”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문성호는 이미 냉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후 아무 말
갑자기 이름이 불린 여진은 급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설영준은 여진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았다.“왜 그래요?”설영준이 다시 물었다.여진은 회의실을 한 번 둘러보고는 억지 미소를 띠며 말했다.“대표님,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누가 봐도 그런 것 같지 않았다.“휴대폰 줘 봐요. 내가 직접 보게.”여진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설영준의 눈빛에 못 이겨 휴대폰을 건넸다.휴대폰을 건네받은 설영준의 시선이 화면 속 사진으로 향했고, 송재이가 낯선 남성과 함께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지만,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았다.설영준은 여진에게 휴대폰을 돌려주고는 담담히 말했다.“회의 계속하죠.”휴대폰을 건네받은 여진은 뭐라 더 말하지 못하고 급히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회의는 계속 진행되었다.이어서 다른 부하직원이 일어서서 시장 분석 관련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대표님, 최신 시장조사에 따르면 경쟁사의 신제품은 초기의 시장 침투율을 달성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저희에게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디지털 마케팅과 SNS의 투자를 늘려 저희 제품의 시장점유율을 높일 것을 제안합니다.”보고를 들은 설영준은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여러분의 제안은 아주 훌륭합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예산배분, 목표 고객과 기대하는 ROI 등 더 구체적인 실행 계획입니다.”부하직원은 설영준에게서 풍기는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다.그는 더 신중하게 대답했다.“대표님, 저희는 이미 자세한 마케팅 전략을 작성했습니다. 목표 고객을 명확히 하고, 빅 데이터 분석을 이용해 광고 투입 효율을 높이고 콘텐츠 마케팅을 통해 브랜드 영향력을 높일 것입니다. 회의 후에 자세한 실행 계획과 예산 보고서를 제출하겠습니다.”설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운 검처럼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노려보았다.“좋아요. 다음 번 회의에서도 여러분들의 진행 상황을 들
송재이가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왔다.설영준과 문성호가 창가에 서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비록 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유난히 경직되어 보였다.설영준은 계단을 등지고 서서 문성호와의 대화에 몰입한 것 같았다.그는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문 대표님, 문정 그룹의 계략은 이미 다 눈치챘습니다. 저의 개인 생활에 지장을 주어 상업적인 목표를 달성하려는 수법은 너무 저급한 거 아닌가요.”순간 문성호의 표정이 바뀌었지만,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는 대답했다.“설 대표,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네요.”설영준이 냉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뒤에서 수작 부리는 거 제가 모를 거로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재이 씨를 이용해서 저를 억누르려는 유치한 계략은 저한테 안 통합니다. 괜히 헛된 망상 하지 마시고 회사 사업에나 집중하세요.”말을 마친 설영준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그의 시선은 거실을 가로질러 2층 난간 뒤에 있던 송재이에게 향했다.그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는 그녀에게 내려오라고 손짓했다.송재이는 잠깐 멈칫했지만, 계단을 내려가서 설영준 옆에 섰다.송재이를 본 문성호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그는 송재이가 갑자기 나타날 줄 생각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설영준이 이렇게 눈앞에서 문정그룹의 계략을 들추어낼 줄은 더 생각지 못했다.문성호는 어제 레스토랑에서 처음 송재이를 보았지만, 괜히 그녀 앞에서 망신당하고 싶지 않아서 모른 체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설영준은 그런 문성호의 난처함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그의 시선은 송재이 한 사람에게만 멈춰있었다.“재이 씨, 깼어요. 이분은 문성호 씨에요. 두 분이 처음 본 사이도 아니니까...”설영준 옆에 서 있던 송재이는 좀 긴장했다.설영준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이미 어젯밤 일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다. 송재이는 좀 놀라기도 했지만 동시에 걱정스럽기도 했다.설영준이 고개를 돌려서 예리한 눈으로 문성호를 보며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문 대표님, 경고 할게요. 비즈니
문성호가 교활한 눈빛을 번뜩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설 대표, 이 일에 대해 해명을 좀 할게요. 저희는 그저 협력 기회를 찾으려는 의도뿐이었어요. 만약 이 과정에서 설 대표를 불쾌하게 한 일이 있었다면 사과할게요. 앞으로 절대로 이런 오해는 없을 거라고 약속할게요.”설영준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그는 낮지만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문 대표님, 대표님의 성의는 높게 평가하지만, 성의는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문정 그룹이 편법이 아닌 정당하고 투명한 방법으로 비즈니스 교류를 진행하기를 바랍니다.”문성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지만,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고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저희 문정 그룹도 꾸준히 공정하고 투명한 비즈니스 환경을 찾고 있습니다. 저희는 양측의 신뢰를 다시 쌓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것입니다.”설영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말투는 여전히 단호했다.“그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기를 바랍니다. 재이 씨는 제 마지노선입니다. 더 이상 재이 씨에 대한 그 어떤 부당한 행위도 없기를 바랍니다.”문성호가 설영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설 대표, 알겠어요. 지금 하신 말씀은 회사 임원들한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모든 행동은 업계 최고 기준에 부합할 것을 약속드리죠.”말을 마친 그는 송재이를 힐끗 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시종일관 체통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송재이는 떠나가는 그에게 눈인사를 건넸다.그녀는 문성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어느새 설영준이 그녀의 뒤에 와서 유유히 말했다.“나간 지가 언젠데 아직도 보고 있어?”설영준의 말을 들은 송재이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귀찮은 듯 그를 힐끗 보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설영준이 앞장서서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그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조금 전까지도 송재이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던 화가 많이 사라졌다.송재이는 복잡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고 눈
설영준은 송재이가 화를 낼 것을 예상했지만, 송재이과 냉전을 하는 일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줄은 몰랐다.회사로 돌아온 후에도 설영준은 겉으로는 침착하게 업무를 처리했다.하지만 회사 직원들은 곧 이내 평소와 다른 묘한 기운을 감지했다.직원들은 서로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평소 침착하고 자제력 있는 대표를 자극하지 않으려 조심했다.넓은 사무실 안에서 설영준은 책상 뒤에 앉아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가 설영준의 혼란스러운 생각을 간신히 끊어 냈다. “들어오세요.”지금 여진의 신세는 그야말로 호랑이의 옆을 지키는 기분이었다. 회사 전체가 오늘 설영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도 대표님이 오셨습니다.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여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설영준은 짧게 대답하며 고개조차도 들지 않았다.“네.”설영준은 옆에 있던 서류를 들고 빠르게 사무실을 나섰다.여진 옆을 지나갈 때 마치 바람이 지나가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여진은 꼼짝도 못하고 설영준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회의실에서.도 대표는 손에든 정교한 만년필을 가볍게 돌리며 테이블 위의 협력 계획서를 바라보고 있었다.문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어 설영준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설 대표님, 오셨군요.”도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 바르게 손을 내밀었다.설영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도 대표와 악수를 나눈 후 자리에 앉았다. 설영준의 시선은 계획서에 머물렀지만, 설영준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도 대표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설영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선 미세한 조급함이 느껴졌다.도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초기 시장 조사를 바탕으로 목표 시장의 잠재 성장률은 7%로 예상됩니다. 우리의 투자 수익률은 25% 이상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시장 경쟁 상황과 잠재적 위험 요소도 고려해야 합니다.”설영준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설영준
설영준은 하루 종일 우울함에 잠겨 있었다.퇴근 후, 설영준은 곧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고 오랜만에 헬스 복싱 장으로 차를 돌렸다.복싱장 사장은 설영준의 학교 선배였다. 설영준이 도착했을 때 사장은 자리에 없었다.그러나 카운터에 있던 여직원은 설영준을 알아보았고 오랜만에 설영준의 방문에 조금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설영준은 이곳의 VIP 회원이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그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그날 저녁, 복싱 장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중 쿤이라는 트레이너는 예전에 설영준과 자주 복싱을 함께했던 인물이었다.“영준 씨, 오랜만입니다.”쿤은 설영준을 보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의 굳은 얼굴을 보자마자 설영준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바로 눈치 챘다.“누가 당신을 건드렸나요?”설영준은 쿤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설영준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말했다.“오늘은 그냥 복싱을 하고 싶어요.”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설영준이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는 것을 말이다.쿤은 더 묻지 않고 설영준을 복싱 샌드백 구역으로 안내했다.쿤이 물었다.“편하게 하세요. 같이 연습할까요?”설영준은 고개를 저었다. 설영준이 원하는 것은 스파링 상대가 아니라 복싱을 통해 마음속의 울분을 쏟아 내는 것이었다.설영준은 샌드백 앞에 서서 간단히 몸을 풀고 갑자기 강한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다. 쿵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쿤은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았다.설영준의 동작은 점점 빨라졌고 힘도 강해졌다. 설영준의 매 펀치마다 샌드백이 흔들리며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마치 모든 불만과 분노를 주먹에 실어 내는 듯했다.설영준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설영준의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지만 멈출 생각은 없었다.설영준의 머릿속에는 송재이와의 기억들이 끊임없이 떠올랐고 그때마다 설영준의 마음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박히는 듯했다.“영준 씨, 잠시 쉬는 게 어때요?”쿤이 참다
쿤은 설영준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지금 영준 씨 모습 보면, 모르는 사람은 여자 친구한테 차였다고 생각하겠어요.”설영준은 쿤을 흘겨보며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쿤 씨,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겁니까?”쿤은 억울하다는 듯 손을 흔들며 변명했다. “아니에요. 단지 영준 씨를 걱정하는 거예요.”설영준은 쿤을 곁눈질로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쿤은 설영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마치 경험에서 나온 조언처럼 말했다.“여자는 말이에요. 예쁜 말을 좋아하죠...아니면, 가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걸 더 좋아해요.”설영준은 더 찌푸린 눈썹 사이를 더욱 좁히며, 쿤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리고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원래는 체육관에서 기분을 풀려고 했지만, 설영준은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설영준은 들고 있던 물병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준 씨, 어디 가세요?”쿤은 설영준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설영준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집에 가요!”설영준이 집에 돌아왔을 때, 송재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송재이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설영준이 돌아온 것을 알았지만, 일어날 생각은 없었다.아침의 냉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기에 송재이는 설영준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잠을 더 자려고 눈을 감았지만, 갑작스럽게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송재이는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송재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설영준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설영준의 익숙한 향기가 가까워지자 송재이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피했다.설영준은 송재이의 반응을 눈치 채고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안 자고 있었네?”송재이는 설영준이 약간 놀리는 듯 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것 같았다.마치 안 자면서 왜 자는 척해라고 묻는 것 같았다.송재이는 입술을 꽉 깨 물었고 지금은 설영준과 말하고 싶지 않았다.문성호와의 일로 인해서 송재이는 설영준이 자신을
“왜 거절하는 거야?”설영준이 다시 입을 열자 송재이는 설영준의 목소리에서 확연히 차가움을 느꼈다.송재이는 침묵을 지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송재이의 침묵이 오히려 설영준의 불안감을 더욱 자극했다. 재이가 등을 돌린 채 대답하지 않는 모습은 설영준의 신경을 계속 건드렸다.설영준은 태연한 척 하려 했다.송재이가 계속해서 대답하지 않자 설영준은 점점 더 불안해하며 계속 물었다.“넌 내 아이를 낳아 줄 생각이 없는 거야?”송재이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설영준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고 가까이 다가가 송재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중, 순간적으로 멈칫했다.설영준은 송재이가 우는 모습을 예상치 못했다.몇 초간 멍하니 서 있던 설영준은 손을 뻗어 송재이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무슨 일이야?”설영준의 물음과 동시에 송재이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송재이가 울기 시작하자 설연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영준이 다시 물으려던 찰나, 송재이는 이미 설영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아이…우리에게 아이가 없었어? 너 잊었어? 우리가 아이가 없었단 걸?”그 아이를 낙태한 이후, 송재이는 수없이 꿈속에서 그 아이를 보았다. 그러나 그 일은 송재이에게 너무나 큰 상처여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송재이에게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아픔이었다.설영준과 다시 아이를 갖는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었다.오히려 송재이는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더욱 깊은 고통을 느꼈다.그 실수는 송재이에게 너무나 명백했지만, 송재이는 그것을 되돌릴 수 없었다.송재이가 자신의 품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설영준의 마음도 점점 무거워졌다.아이, 그 아이…설영준은 갑자기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설영준의 팔은 무의식적으로 송재이를 감싸 안으며 위로를 전하려 했다.설연준의 마음도 이상하게 무거워졌다.세상에 한 번도 나오지 못한 그 아이는 마치 무거운 바위처럼 설영준의 가슴에 얹혀 있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설영준은 그 아이가 단순히 태어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