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설영준은 도정원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재이는 괜찮아요.”도정원이 머뭇거리자 설영준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저녁에 약속 있으세요? 같이 식사 어때요? 같이... 재이 퇴근길 마중 가실래요?”이 말을 들은 도정원의 눈이 빛났다.그가 아무리 백화점에서 잘 나간다고 해도 마음속으로는 동생을 생각하고 있었다.특히 지금 도정원은 도경욱이 송재이 부녀와 만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들 가족이 만날 생각을 하니 도정원은 아주 기뻤다.그는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그래.”...해 질 무렵, 도정원과 설영준은 송재이가 근무하는 건물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송재이가 나오기 전, 설영준은 이미 그녀에게 톡을 보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송재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두 사람을 본 그녀는 깜짝 놀랐다.송재이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전무님, 영준 씨, 어쩐 일이에요?”도정원은 부드러운 눈길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오늘 마침 시간이 있어서 영준 씨랑 같이 셋이 식사 하려고요.”송재이는 설영준을 힐끗 쳐다봤다. 설영준이 보낸 톡에는 도정원과 함께라는 말이 없었다.하지만 송재이는 도정원에 대한 인상이 괜찮았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설영준은 송재이의 눈빛을 못 본 척 하고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말했다.“가자, 타.”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도착한 세 사람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송재이는 도정원에게 관심조로 물었다.“연우는 좀 어때요? 치료에...차도가 있나요?”딸 얘기가 나오자, 도정원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연우는 이미 해외에서 ABA(응용 행동 분석) 치료를 받았는데 효과가 아주 좋아요. 사회성도 좋아지고 의사소통도 아주 좋아졌어요.”이 말을 들은 송재이는 한시름 놓으며 말했다.“너무 잘됐네요. 연우는 강한 아이예요.”설영준도 입을 열었다.“자폐가 있는 아이들은 더 큰 인내심과 사랑이
설영준의 눈빛이 바뀌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 전무님,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요. 주승아의 교통사고가 진짜 사고일까요? 저는 누가 일부러 벌인 짓이 아닐까 의심스러워요.”도정원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하시죠?”설영준이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이렇게 말했다.“그때 경찰의 조사 보고서에 의문점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주승아의 동생 현아가 오래전부터 주승아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고 알고 있어요.”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설마 주현아가 사고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설영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저 제 추측일 뿐이에요. 민효연이 주승아가 죽었다는 가짜 사실을 꾸며낸 건, 한 편으로는 승아를 보호하기 위함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현아를 보호하기 위함일 수도 있어요. 현아가 법적 처벌을 받는 걸 피하기 위해서요.”도정원이 한참 동안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만약 진짜 그런 거라면, 민효연 이 여자는 참... 눈물겹네요.”...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레스토랑 입구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달빛이 비처럼 조용한 거리에 쏟아졌다.하늘은 검푸른 먹물을 풀어놓은 것 같았고 거리 양쪽에는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었다.행인들의 웃음소리, 말소리와 호객 소리가 뒤엉켜 한여름 밤의 오케스트라를 이루었다.도정원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설영준과 송재이는 천천히 길을 걸었다.송재이는 노점상을 구경하고 싶어 했고 설영준도 그녀의 말에 따랐다.송재이는 앞장서 걸으며 사슴같이 맑은 눈으로 노점상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그녀는 그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지난번에 우리 여기 왔을 때 기억나요?”설영준이 미소를 짓더니 송재이 뒤에서 나지막이 읊조렸다.“달이 버드나무 끝에 걸렸을 때, 해 질 무렵에 다시 만납시다.”송재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그 순간, 두 사람은 함께 야시장을 거닐던 추억 속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설영준이 호주머니에서
이때까지도 송재이는 설영준과 도정원이 함께 서지훈을 대응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그렇기에 설한 그룹의 주가가 갑자기 폭락하고 이 주가 폭락이 제민그룹과 관련 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녀는 며칠 전에 도정원과 같이 식사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았는데 왜 갑자기 사이가 틀어진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는 학교 밖 복도에 앉아서 설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발신음이 두 번 정도 울리자 바로 연결되었다.송재이는 걱정과 조급함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나 뉴스 봤어!”설영준은 당연히 송재이가 본 뉴스가 무엇인지 알았다.전화 반대편의 설영준의 목소리는 아주 평온했다.“재이 씨, 걱정하지 마. 주가가 오르내리는 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야. 설한 그룹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야.”송재이가 미간을 찌푸리고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하지만 뉴스에서 제민 그룹 때문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된 거야? 파트너 관계 아니었어?”설영준이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재이 씨, 벌써 잊었어? 지난번 백화점에서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이라고 했잖아.”송재이는 그의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채고는 물었다.“영준 씨, 혹시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혹시 전무님이랑 둘이 무슨 계획을 짜고 있는 건 아니지?”단번에 알아맞히다니. 설영준은 조금 놀랐다. 송재이가 이렇게 똑똑할 줄이야.그의 침묵에 송재이는 자신의 추측에 더 확신이 생겼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말투는 훨씬 차분했다.“둘이 진짜 손잡은 거야?”설영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 생각이 맞아. 근데 서지훈이 몰래 도 전무님을 이용해서 설한 그룹을 공격하려고 했어. 도정원의 독립성과 우리 사이의 신뢰를 얕잡아 본 거지.”송재이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어떡할 거야? 이런 게임은 너무 위험해. 진짜 모험하려는 거야?”설영준이 단호하게
서지훈이 몸을 돌려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도재야, 마침 잘 왔어. 우리는 방금 설한 그룹에 공격을 진행해서 주가가 내려갔어. 도 씨... 그러니까 제민 그룹의 도정원이 ‘공매도’를 한 결과이기도 하지.”“언제 도정원까지 엮으셨어요?”서도재가 보기에 도정원 같은 사람은 그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인물이었다.그런데 서지훈이 도정원을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도정원을 설득해 우리를 돕게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와 봐!”서지훈은 말로 설명하는 대신 서도재에게 손을 저었다.서도재가 컴퓨터 앞으로 와서 주식 그래프를 봤다.“‘공매도’요? 그러면 우리 수익이 꽤 높겠네요?”서지훈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지. 이번 기회에 ‘지렛대’를 이용해서 투자 효과를 확대했어. 설한 그룹 주가가 계속 내려간다면 우리 수익은 더 커질 거야.”“그럼 계속 ‘공매도’를 강화해야 하지 않을까요? 상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죽여버려야죠!”서지훈이 손을 저으며 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 말했다.“조급해 하지 마, 도재야. 비즈니스는 전쟁과 같아서 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최적의 시기를 기다려야 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관망’이야. 설한 그룹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자고.”서도재는 다급하게 말했다.“하지만 아버지, 만약 저희가 지금 움직이지 않다가 저 녀석들이 역공격하면 어떡해요?”서지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이미 ‘함정’을 준비했어. 사람들 시켜서 설한 그룹의 재무제표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을 퍼트렸으니, 내부에서는 아마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거야.”옆에서 듣고 있던 서도재는 경외의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아버지, 역시 대단하세요!”서지훈은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가서 창밖의 풍경을 보며 자신 있게 말했다.“도재야. 기억해.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신력과 계략이야. 우리는 상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서 그들이 알아서 실수하도록 해야 해.”하지만 이 당당함은 오래
서지훈의 사무실은 긴장되고 무거운 분위기로 가득했다.그의 눈은 컴퓨터 화면의 주식 그래프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화면 속 설한 그룹의 주가는 놀라운 속도로 상승하고 있었다.그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의아함이 가득했다.이때,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서도재가 걱정스러움과 화가 가득한 표정으로 걸어와서 물었다.“아버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우리 계획은 완벽했잖아요? 근데 왜 갑자기 설한 그룹의 주가가 폭등한 거죠?”서지훈이 몸을 돌렸다. 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그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도재야, 주식시장은 예측하기가 어려워. 아무리 완벽한 계획이라도 예상 밖의 상황을 마주할 수 있어.”서도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문제점을 꼬집었다.“아버지, 혹시 설영준이랑 도영준한테 속으신 거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이미 이 모든 걸 계획했던 거 아니에요?”서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믿지 않았다.“그럴 리 없어. 우리 손에는 아직 도경욱이 가장 신경 쓰는 게 남아있잖아. 쉽게 우리를 배신하지는 못할 거야.”두 사람 중 서도재가 좀 더 이성적이었다.“아버지, 결과는 이미 명백하잖아요. 설한과 제민 그룹의 합작 프로젝트 성명은 이미 발표되었고 주가도 큰 폭으로 오르고 있어요.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해요.”서지훈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는 다시 한번 주식 시장 그래프를 쳐다봤고 화면 속 숫자는 마치 그의 무지와 탐욕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그는 그제야 자기가 어쩌면 설영준과 도정원이 만든 함정에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서도재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우리 빨리 조치해야 해요. 안 그러면 우리 손실이 훨씬 커질 거예요. 우리 빨리 다시 계획을 세워야 해요.”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들 부자가 설영준과 도정원이 만든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에 분이 풀리지 않았다.특히 연지수와 설영준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뉴스도 있었다.비록 서지훈과 연지수가 지금은 헤어졌지만, 한때 설영준과 삼각관계였을지도 모른다는
송재이는 서도재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그와 단둘이 같이 밥 먹는 건 너무 위험해 보였다.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서도재가 갑자기 그녀 앞으로 와서 얼굴을 보며 말했다.“연지수 그 여자가 설영준이랑 잤다는 기사도 떴었어요. 비록 바로 지워지기는 했지만, 설마 진짜 설영준이 재이 씨한테 잘못한 일이 없다고 믿어요? 사실 혼자 억울하게 당 할 필요 없어요. 연지수랑도 그렇고 그런 사이인데 굳이 혼자 지조를 지킬 필요가 있나요?”서도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재이가 얼른 뒷걸음질 쳤다.만약 조금 전에는 단순 경계심이었다면 지금 다시 서도재를 보니 피해야 할 역병처럼 느껴졌다.하지만 송재이는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했다.그녀는 서도재의 눈을 보며 피식 웃었다.“그래서요? 전무님이랑 따로 만나서 영준 씨한테 복수라도 하라는 뜻인가요? 전 그렇게 유치하지 않아요. 그리고 전 영준 씨와 연지수의 사이를 의심하지도 않아요.”이렇게 오랫동안 만났는데 그녀가 어떻게 설영준에게 이 정도의 신뢰조차 없겠는가?서도재의 이간질은 비열한 감이 없지 않았다.서도재는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영준과 송재이 사이의 감정이 아주 좋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달갑지 않았다.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송재이의 눈을 보며 말했다.“영준이 형과의 관계가 그렇게 견고하면 나랑 밥 한 끼 먹는다고 무너지진 않겠죠? 더군다나 전 서지원에 관한 비밀도 알고 있는데 말이죠.”송재이와 설영준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고 느낀 그는 코스를 바꾸어 다시 “서지원”얘기로 돌아왔다.송재이가 거부할 수 없는 이유는 서지원뿐이었다....송재이는 서도재와 함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주변 환경은 조용하고 우아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도무지 가라앉지 못했다.식탁 앞에 앉은 송재이는 눈앞의 음식이 끌리지 않았다.그녀의 정신은 전부 서도재가 말할 서지원의 비밀에 집중되어 있었다.송재이는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전무님, 도대체 서지원
송재이가 차갑게 서도재를 바라봤다.그녀의 눈은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전무님, 지금 이러시는 거 좀 우스워요. 회중시계 하나로 절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틀리셨어요.”서도재는 깜짝 놀랐다.송재이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그 회중시계 산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시계, 지금 영준 씨가 가지고 있어요. 이런 비열한 수단은 저한테 아무런 소용도 없어요.”서도재가 갑자기 흥분하더니 송재이의 팔을 잡아당기고 말했다.“송재이, 네가 이겼다고 착각하지 마! 나 아직 안 쓴 카드 있어!”송재이는 서도재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서도재, 이거 놔! 이럴수록 너만 더 비참해 보일 뿐이야!”서도재는 이성을 잃은 듯 송이재를 벽으로 밀어붙이며 말했다.“너 가지 마!”송재이의 마음속에 화가 치밀어 올라서 있는 힘껏 서도재를 밀쳤다.“서도재, 야 이 미친놈아! 안 놓으면 경찰 부를 거야!”송재이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그녀는 온 힘을 다해서 서도재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그녀는 주먹으로 서도재의 가슴을 꾹 밀며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했다.“이거 놔, 서도재!”송재이의 목소리에는 견결함과 분노로 가득 찼다.서도채는 비록 표정은 아주 흥분했지만, 그의 행동은 놀랍도록 냉정했다. 마치 잘 준비된 연기를 보는 것 같았다.“송재이, 진짜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로 생각해?”서도재의 목소리는 낮고 위협적이었다.송재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집중력을 서도재에게서 벗어나는 일에만 집중했다.결국, 그녀는 기회를 찾아서 서도재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꺼져!”송재이는 서도재를 밀쳐내는 동시에 룸 밖으로 뛰어나갔다.서도재는 곧장 뒤따라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사라지는 송재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그의 표정은 흥분에서 냉정함으로 바뀌었고 곧이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이게 끝이라고 생각해? 송재이, 게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야.”서도재가 음모로 가득 찬 눈빛으로 혼잣말했다.송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경찰 취조실 안, 송재이가 차가운 의자에 앉아 있었다.눈앞에는 야속한 자료 더미와 엄숙한 경찰 얼굴뿐이었다.그녀는 금지품을 소지한 혐의로 잡혀 왔다.하지만 이 모든 건 황당하고 불공평했다.송재이의 마음은 절망감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취조실의 문이 열렸다.설영준이 단호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들어왔다.그의 출현은 마치 한 줄기 빛처럼 송재이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구치소의 작은 접견실 안에 설영준과 송재이가 두꺼운 유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송재이는 눈가가 빨개져 있었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많이 걱정했지?”설영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그는 자신을 통제하려고 노력했다.전화기 너머로 설영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니. 난 네가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걸 믿으니까.”송재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영준 씨, 나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지금 혐의는 다 터무니없는 거야...”“알아. 난 너 믿어.”설영준이 전화를 꼭 쥐고 단호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며 말했다.“너 혼자 싸우는 거 아니야. 내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네 결백 증명할게.”송재이가 있는 힘껏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하지만 지금 증거들은... 다 나한테 불리해.”설영준이 그녀의 말을 끊고 말했다.“증거는 걱정하지 마. 우리 팀원들이 지금 너한테 유리한 증거를 찾고 있어. CCTV 보면서 목격자를 찾고 있어. 경찰의 수사 프로세스도 다시 한번 심사할 예정이야. 증거만 충분하다면 네 혐의점을 모두 뒤집을 수 있어.”송재이가 깊이 숨을 들이쉬면서 감정을 억누르려고 노력했다.“영준 씨, 나 너무 무서워. 만약 내 결백을 증명하지 못하면 난...”설영준이 다시 그녀의 말을 끊고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그런 ‘만약’은 없어. 약속할게. 우린 진실을 찾을 것이고 넌 이곳에서 나갈 거야. 그 누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