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님, 뭘 축하 하시는 건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요?”송재이는 고개를 들고 서도재를 향해 차갑게 웃었다.서도재는 눈썹을 들썩거리더니 입을 열었다.“민건이는 출소하고나서 한 발짝 한 발짝 힘들게 걸어왔어요. 그러다가 어렵게 저와 손을 맞잡았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민건이에게 아주 중요해요. 제가 줄지 말지는 제 기분에 달려 있어요. 송 선생님, 민건이를 도와줄 마음이 있다면...”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재이가 벌떡 일어났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지민건을 노려보았고 순간 정적이 흘렀다.그리고는 송재이가 서도재를 향해 입을 열었다.“저는 전무님이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결코 지민건을 도울 의사가 없어요. 저는 그와 친구도 아닌 데다가 그 회사의 어떠한 업무든지 성사시킬 의무가 없어요. 오늘은 민건이가 사람을 잘못 찾았을 뿐만 아니라 전무님도 마찬가지로 사람 잘못 찾았어요!”그녀는 옆에 있던 가방을 들고 발길을 돌려 레스토랑을 떠났다.송재이는 자기가 남도까지 왔는데 또다시 이런 난처한 일에 휘말리게 될 줄은 몰랐다.그녀가 걸어 나오자마자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송재이는 누군지 짐작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하지만 상대방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모른 채 여전히 손목을 붙잡았다.“재이야, 만약 네가 날 도와 이 프로젝트를 성사시킨다면 너에게 돈을 나눠줄게. 너 지금 직업이 없잖아. 돈을 좀 벌었다고 생각하고 말이야...”“지민건, 네가 무슨 자격으로?”참다못한 송재이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골목에 서서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시간이 많이 흘러서 나는 네가 정말 변한 줄 알았어. 네가 예전에 나에게 했던 일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미안해할 줄 알았어. 하지만 너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넌 똑같은 일을 여러 번, 계속 반복하고 있어. 나를 데리고 가서 설영준과 함께 술을 마시라고 하질 않나, 이번에는 또 나를 데리고 와서 서도재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질 않나... 내가 너한테 무슨 빚이라도
박윤찬은 일 때문에 남도에 출장을 온 것이었다.그가 거래처와 맥락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더없이 친숙한 그림자가 보였다.“박 변호사님?”송재이도 의아해하며 물었다.박윤찬은 아주 놀라워했다.그는 위아래로 그녀를 한 번 훑어보고서야 입을 열었다.“남도에 오셨다고 듣긴 했지만 진짜였네요. 살이 좀 빠지신 것 같아요.”마지막 한마디는 그저 혼잣말하는 것 같았다.송재이가 떠나려 했을 때는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곳을 떠나려 하는 생각뿐이었다.하지만 지금 다른 곳에서 옛 친구를 만나니 그녀는 여전히 매우 기뻤다.박윤찬은 그날 바로 경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에 송재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돌아간 후, 로펌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저녁이 다 돼서 밥을 먹을 때에야 그는 자신이 남도에서 송재이를 만난 사실을 설영준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이튿날 오전 비는 시간에 박윤찬은 설한 그룹을 찾아갔다.설영준은 마침 글을 쓰고 있었다.박윤찬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을 때,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이렇게 큰 사무실에 설영준 혼자뿐이었지만 박윤찬은 한 번도 그가 외로워 보이고 불쌍해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설영준이 불쌍하다고?이렇게 생각한 그는 피식 웃었다.자신의 이 황당한 생각을 비웃은 것이었다.설영준이 어떻게 불쌍할 수 있겠는가?“왜 웃죠?”인기척을 듣고서야 고개를 든 설영준이 무뚝뚝하게 물었다.“아무것도 아닙니다.”박윤찬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설영준 책상 맞은편에 앉아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에 걸쳤다.“한 가지 이야기해 드릴 게 있어요. 저 이번에 남도에 가서 송 선생님을 만났어요. 예술학교에 면접을 보러 간 것 같더라고요. 보아하니 거기에서 생활하고 싶은 모양이에요. 그렇게 되면 두 사람은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걸로 돼요...”“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설영준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설영준은 박윤찬이 그에게 알려준 송재이의 근황
설영준은 오랫동안 이곳에 오지 않았다. 방에 들어온 그는 불을 켰다. 안에 있는 가구의 배치는 모두 예전과 같았다.다만 예전에 비해 사람 사는 냄새가 많이 사라졌다.입구에는 여자 슬리퍼 한 켤레만 남았고 그가 늘 신던 슬리퍼는 보이지 않았다.그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송재이의 동작은 의외로 빨랐다.설영준은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들어가 그녀의 침실로 갔다.옷장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원래 그녀가 옷을 놓던 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그가 남겨두었던 몇 벌의 셔츠와 바지는 그대로였다.설영준의 시선은 자신의 옷 주위를 둘러보았다.그러자 아래 서랍에 놓인 열쇠고리가 눈에 들어왔다.그는 송재이에게 ‘설’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열쇠고리를 항상 곁에 두라고 말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경주를 떠날 때 열쇠고리를 그대로 남겨두었다.그날 밤, 송재이와 함께 야시장을 거닐던 때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이 함께 지냈던 순간들이었다.그녀는 이 ‘설’자가 달린 열쇠고리를 특히 좋아했다.그녀는 이런 열쇠고리가 흔하지 않았음에도 자기 손에 들어오게 된 건 천생연분이라고 말했다.그녀의 말에 무슨 뜻이 담겨있었는지 잘은 모르지만 설영준은 당시에 그 말을 듣는 걸 아주 좋아했다.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다음 날 그는 같은 가게 주인을 찾아내 똑같은 걸로 주문 제작했다.송재이는 ‘설’자가 씌어있는 열쇠고리를 두고 갔다.그는 두 열쇠고리를 모두 자기의 열쇠에 걸었다.‘설’ 자와 ‘송’ 자가 한데 엉겨 붙어 딸랑딸랑 맑은 소리를 냈다.최근 설한 그룹과 민여사의 회사는 프로젝트에 대해 협력하고 있었다.민여사는 남도로 가서 지역 조사를 했다.사흘 뒤 설영준도 남도로 갔다.이번 협력은 이전과 달랐다.세부 사항이나 많은 부분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초대 측은 그를 리우 호텔에 묵도록 했다.남도에 도착한 후, 여비서가 먼저 설영준을 대신하여 민여사를 만나 구체적인 사항을 설명했다.설영준은 자신의 호텔 룸에서 경주 회사의 임원
윤수아는 악보를 정리한 후, 가방을 메고 현관문으로 나갔다.이원희를 본 윤수아는 한참 동안 울먹이더니 입을 열었다.“언니, 왜 왔어?”이원희는 심호흡을 하며 대답했다.“왜긴, 네가 걱정되니까 왔지.”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송재이를 바라보았다.아까는 송재이가 수업하는 옆모습만 보았고 대부분의 관심은 교실에 앉아 있는 윤수아에게 있었다. 그녀는 인제야 송재이를 알아본 듯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송재이는 여기에서 이원희를 만날 줄 꿈에도 몰랐다.두 사람은 과거 중학교 동창으로 한때 매우 친한 사이였다.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연락은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그대로였다.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기억할 줄이야... 원래 오늘 윤수아 부모님을 부른 건 요즘 그녀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아주 재능 있는 아이인데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물어보려고 말이다.이원희는 윤수아를 복도로 불렀다.그녀의 윤수아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 말을 건넸고 그 말을 들은 윤수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걸어가다가 돌아서서 말했다.“언니, 그럼 일찍 들어오세요. 기다릴게요.”이원희는 윤수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알겠어, 기사님께서 아래에 있으니까 기사님더러 먼저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해.”보아하니 윤수아를 집에 데려다준 후, 남아서 송재이와 자세하게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니까 아마도 옛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마침 송재이도 약속이 없었기에 오랜만에 같이 밥 한 끼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그들은 태국식 레스토랑에 갔다.송재이는 구석에 앉아 똠얌꿍을 마시며 물었다.“그래서 윤수아는 네 의붓딸이야? 너 결혼했어?”방금 요리가 나오는 걸 기다리면서 이원희는 이미 윤수아랑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최근 몇 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송재이에게 말했다.송재이의 기억 속에 있는 이원희는 줄곧 조용한 여자애였다.학업 성적은 보통이지
이원희도 고민하고 있던 차였고 마침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다.그녀는 결혼하고 나서부터 줄곧 가정주부로 일하고 있었다.경주에서 남도로 이사한 뒤로는 거의 남편과 아이들이었고 그녀 삶의 중심이었고 친구를 사귈 시간도 별로 없었다.이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지도 벌써 몇 달째였음에도 이원희는 줄곧 걱정거리를 마음속에 숨겼다.하지만 사실, 그녀는 상담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었다.이원희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말을 이어 나갔다.“나는 농촌 출신이라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는데 부모님들과 친척에게 결혼을 재촉당했어.”“나도 사실 어릴 때부터 내가 일찍 결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어.”“그래서 원래 거부감이 없었지만 몇 명의 상대를 만나도 별로였어.”“그러다가 지금 남편을 만났어. 나보다 열 몇 살이나 많았지만 여러 조건이 다 좋았어.”“무엇보다 결혼하기 전과 금방 결혼했을 때에는 내 말을 잘 들어줬었거든.”여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그럼 지금은? 널 잘 대해주지 않아?”“얼마 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가 나를 아내로 맞이하려는 이유는 그저 젊고 깨끗한 아가씨를 찾아서 그들의 집안의 대를 잇고 싶어서야.”“그가 전처와 이혼한 이유도 마찬가지야. 수아를 낳고 나서 연달아 두 명이나 임신했는데 임신 중에 성별을 검사해 보니까 남자애가 아니어서 두들겨 맞았대. 2번이나 말이야...”남편의 전처에게 일어났던 일이지만 같은 여자인 이원희는 그렇게 말 하면서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그 여자가 이혼을 강요받았을 때는 이미 몸이 많이 상한 뒤였어. 앞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윤씨 가문에서 전처에게 돈을 쥐어주고는 돌려보냈어.”“재이야, 나 너무 무서워...”“뭐가 무서워?”“나도 그 여자처럼 될까 봐...”이원희의 이런 말을 들은 송재이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고 그녀는 이원희의 붉어진 눈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가 이런 처지일 줄은 몰랐다.그
송재이는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설영준은 거울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송재인 그의 몸에서 풍겨오는 냄새를 맡았다.몇 달 만에 느끼는 친숙한 향기였다.한때는 허물없이 지냈던 두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서로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그녀는 자기가 이미 그와 헤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가끔 이성과 감정이 동기화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그녀는 두 발이 제자리에 굳은 듯 움직이지 않은 채 입술을 꼭 깨물었다.그저 아무 말 없이 그 자세를 유지했다.설영준은 갑자기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거울 속의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약간의 농담이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그렇게 사랑에 목마르신가요? 전 그저 당신의 전 남자 친구일 뿐이에요.”이렇게 말한 설영준은 송재이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녀를 놓아주고 몇 발짝 물러서서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이렇게 거리를 두는 걸 본 송재이의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무너져 버렸다.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이 이런 장면일 줄은 몰랐는지 송재이는 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머리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표정에 설영준은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몸을 돌려 그녀에게서 성큼성큼 멀어졌다.설영준의 미련 없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송재이는 문득 자기 마음속의 모든 갈등과 생각이 하나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 같았다.설영준으로 인해 요동쳤던 가슴이 또 한 번 요동치는 순간이었다.송재이가 돌아왔을 때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그래서 이원희는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재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더니 잠시 후에야 입을 열었다.“괜찮아.”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원희는 아무래도 그녀가 괜찮은 것 같진 않았다.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식당 앞에서 연락처를 교환했다.카톡까지 교환하고 나서 고개를 들었는데 설영준과 민효연이 가게에서 나
박윤찬은 전화로 이원희의 현재 처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들었다.이혼 소송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이원희 본인을 만나봐야 했다.다만, 요즘 박윤찬은 요즘 너무 바빠서 남도로 갈 시간이 없었다.“그렇군요...”송재이가 약간 실망한 말투로 말했다.“원희는 제 중학교 동창인데 전 원희가 이 소송에서 꼭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전화를 끊은 박윤찬은 잠깐 정신이 흐리멍덩해졌다.그들은 지금 식당이었다.화장실에서 돌아온 설영준은 박윤찬의 표정을 보고 옆에 있던 물티슈로 손을 닦으며 물었다.“재이 생각하고 있나요?”“네.”박윤찬이 대답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자기의 발언을 후회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앞에는 설영준의 싸늘한 얼굴이 보였다.박윤찬이 웃으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송 선생님께서 남도에서 자신의 중학교 친구를 만났대요. 그 친구는 이혼을 원하는 것 같은데 아마 송 선생님께서는 아는 모든 사람들 중 그녀를 도울 수 있는 건 저밖에 없다고 생각하신 듯 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간이 나면 제가 한번 가서 구체적인 상황을 알아볼게요...”“재이를 찾아서요?”설영준이 또 물었다.박윤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럴 리가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이름이... 이원희였나? 그랬던 거 같아요.”남도에 온 송재이는 줄곧 친구가 별로 없었다.출근했을 때를 제외하고 그녀는 매우 외로웠다.카톡으로 가끔 유은정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외에는 대부분 시간을 이원희와 함께 보냈다.중학교 때 절친이었는데 많은 일을 경험하고 나서 두 사람 모두 성숙해졌기에 이야기할 거리가 점점 더 많아졌다.윤수아는 비록 겨우 열두 살이지만 그래도 이젠 어엿한 소녀였다. 가끔 송재이가 이원희와 함께 식사 약속을 잡을 때면 윤수아를 데리고 나올 때도 있었다.세 명이 함께 있으면 분위기는 항상 화기애애했다.이원희는 늘 감탄했다.“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이혼하기만 하면 너도 결혼 안 하고 나도 결혼 안 하고 우리 셋이 함께 즐겁게 지내자!”송재이는 이원
송재이는 자신이 경주를 떠난 게 지금까지 했던 선택 중에서 한 가장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설영준에 대한 미련이 여전하다고 해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가질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었다.그녀도 이 사랑을 그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퇴근한 송재이는 평소처럼 학원에서 걸어나왔다.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비는 보슬보슬 내렸고 그래서인지 분위기는 차갑고 썰렁했다.다행히도 그녀는 이날 우산을 가지고 왔었다.지붕 아래에 서서 우산을 찾으려는데 검은 벤틀리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차창 너머로 그녀는 고개를 약간 기울여 안에 앉아 있는 박윤찬을 볼 수 있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은 채로 서 있었다.‘요즘 바쁘다고 하지 않았었나? 어떻게 왔지?’그녀는 멍을 때리고 있다가 차 뒷좌석에 또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은 무심하게 자기의 태블릿 pc를 보고 있었다.설영준이었다.설영준도 같이 있다니.“송 선생님, 어디 가세요? 설 대표님께서 프로젝트 때문에 남도에 시찰하러 오셨는데 지금 막 끝났어요. 가는 길에 모셔다드릴까요?”박윤찬은 차창 밖의 송재이를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그러나 설영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박윤찬의 뒤통수를 보더니 그를 비웃는 것 같았다.송재이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날씨 때문에 택시 잡기가 좀 힘들었지만 그녀는 자기가 택시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설영준과 거리를 두기로 했으니 신경 써야지.’그녀는 박윤찬에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요, 괜찮아요. 당장 집에 가고 싶지도 않거든요... 근처를 좀 구경하고 싶으니까 먼저 가세요.”“비가 오는데 돌아다니세요? 송 선생님은 참 낭만적이네요.”설영준이 창문을 천천히 내리더니 그녀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응, 난 로맨틱한 사람이야. 비가 오니까 빗속을 좀 걷고 싶어.”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설영준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안색이 어두워진 걸 무시한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