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는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설영준은 거울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송재인 그의 몸에서 풍겨오는 냄새를 맡았다.몇 달 만에 느끼는 친숙한 향기였다.한때는 허물없이 지냈던 두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서로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그녀는 자기가 이미 그와 헤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가끔 이성과 감정이 동기화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그녀는 두 발이 제자리에 굳은 듯 움직이지 않은 채 입술을 꼭 깨물었다.그저 아무 말 없이 그 자세를 유지했다.설영준은 갑자기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거울 속의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약간의 농담이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그렇게 사랑에 목마르신가요? 전 그저 당신의 전 남자 친구일 뿐이에요.”이렇게 말한 설영준은 송재이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녀를 놓아주고 몇 발짝 물러서서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이렇게 거리를 두는 걸 본 송재이의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무너져 버렸다.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이 이런 장면일 줄은 몰랐는지 송재이는 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머리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표정에 설영준은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몸을 돌려 그녀에게서 성큼성큼 멀어졌다.설영준의 미련 없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송재이는 문득 자기 마음속의 모든 갈등과 생각이 하나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 같았다.설영준으로 인해 요동쳤던 가슴이 또 한 번 요동치는 순간이었다.송재이가 돌아왔을 때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그래서 이원희는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재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더니 잠시 후에야 입을 열었다.“괜찮아.”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원희는 아무래도 그녀가 괜찮은 것 같진 않았다.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식당 앞에서 연락처를 교환했다.카톡까지 교환하고 나서 고개를 들었는데 설영준과 민효연이 가게에서 나
박윤찬은 전화로 이원희의 현재 처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들었다.이혼 소송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이원희 본인을 만나봐야 했다.다만, 요즘 박윤찬은 요즘 너무 바빠서 남도로 갈 시간이 없었다.“그렇군요...”송재이가 약간 실망한 말투로 말했다.“원희는 제 중학교 동창인데 전 원희가 이 소송에서 꼭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전화를 끊은 박윤찬은 잠깐 정신이 흐리멍덩해졌다.그들은 지금 식당이었다.화장실에서 돌아온 설영준은 박윤찬의 표정을 보고 옆에 있던 물티슈로 손을 닦으며 물었다.“재이 생각하고 있나요?”“네.”박윤찬이 대답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자기의 발언을 후회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앞에는 설영준의 싸늘한 얼굴이 보였다.박윤찬이 웃으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송 선생님께서 남도에서 자신의 중학교 친구를 만났대요. 그 친구는 이혼을 원하는 것 같은데 아마 송 선생님께서는 아는 모든 사람들 중 그녀를 도울 수 있는 건 저밖에 없다고 생각하신 듯 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간이 나면 제가 한번 가서 구체적인 상황을 알아볼게요...”“재이를 찾아서요?”설영준이 또 물었다.박윤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럴 리가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이름이... 이원희였나? 그랬던 거 같아요.”남도에 온 송재이는 줄곧 친구가 별로 없었다.출근했을 때를 제외하고 그녀는 매우 외로웠다.카톡으로 가끔 유은정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외에는 대부분 시간을 이원희와 함께 보냈다.중학교 때 절친이었는데 많은 일을 경험하고 나서 두 사람 모두 성숙해졌기에 이야기할 거리가 점점 더 많아졌다.윤수아는 비록 겨우 열두 살이지만 그래도 이젠 어엿한 소녀였다. 가끔 송재이가 이원희와 함께 식사 약속을 잡을 때면 윤수아를 데리고 나올 때도 있었다.세 명이 함께 있으면 분위기는 항상 화기애애했다.이원희는 늘 감탄했다.“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이혼하기만 하면 너도 결혼 안 하고 나도 결혼 안 하고 우리 셋이 함께 즐겁게 지내자!”송재이는 이원
송재이는 자신이 경주를 떠난 게 지금까지 했던 선택 중에서 한 가장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설영준에 대한 미련이 여전하다고 해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가질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었다.그녀도 이 사랑을 그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퇴근한 송재이는 평소처럼 학원에서 걸어나왔다.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비는 보슬보슬 내렸고 그래서인지 분위기는 차갑고 썰렁했다.다행히도 그녀는 이날 우산을 가지고 왔었다.지붕 아래에 서서 우산을 찾으려는데 검은 벤틀리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차창 너머로 그녀는 고개를 약간 기울여 안에 앉아 있는 박윤찬을 볼 수 있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은 채로 서 있었다.‘요즘 바쁘다고 하지 않았었나? 어떻게 왔지?’그녀는 멍을 때리고 있다가 차 뒷좌석에 또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은 무심하게 자기의 태블릿 pc를 보고 있었다.설영준이었다.설영준도 같이 있다니.“송 선생님, 어디 가세요? 설 대표님께서 프로젝트 때문에 남도에 시찰하러 오셨는데 지금 막 끝났어요. 가는 길에 모셔다드릴까요?”박윤찬은 차창 밖의 송재이를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그러나 설영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박윤찬의 뒤통수를 보더니 그를 비웃는 것 같았다.송재이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날씨 때문에 택시 잡기가 좀 힘들었지만 그녀는 자기가 택시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설영준과 거리를 두기로 했으니 신경 써야지.’그녀는 박윤찬에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요, 괜찮아요. 당장 집에 가고 싶지도 않거든요... 근처를 좀 구경하고 싶으니까 먼저 가세요.”“비가 오는데 돌아다니세요? 송 선생님은 참 낭만적이네요.”설영준이 창문을 천천히 내리더니 그녀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응, 난 로맨틱한 사람이야. 비가 오니까 빗속을 좀 걷고 싶어.”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설영준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안색이 어두워진 걸 무시한
그녀를 놀리는 듯 다소 경박한 설영준의 표정을 보자 송재이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정녕 둘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잊은 걸까?그나마 사귀는 사이에는 음담패설을 늘어놓아도 농담 삼아 가볍게 넘길 수 있지만 이미 남남이 된 이상 양아치나 할 법한 멘트이지 않은가?송재이는 손을 홱 빼내더니 설영준이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두 사람은 멀찍이 떨어졌다.도로에는 차들이 오고 갔고, 머리 위로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그녀의 시선은 설영준에게 향했다.흰색 셔츠에 연그레이 울 코트를 입은 남자는 무표정일 때 시크한 분위기를 풍겼다.얼핏 봐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며, 마치 하늘 높이 떠 있는 태양처럼 차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잘생겼다.순간 송재이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고, 저도 모르게 슬픔이 밀려왔다.하필이면 격차가 이렇게 큰 사람을 좋아하게 되다니.또한, 천지 차이인 만큼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손에 잡히지도 않고 애매한 관계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일단 머릿속에 남아 있는 한 계속해서 가슴을 졸이게 했다.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아까만 해도 잔뜩 약이 오른 새끼 고양이처럼 화가 난 표정을 짓던 그녀도 갑자기 느껴지는 울적한 기분에 어깨가 축 처졌다.이내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하고 안개가 자욱한 거리를 바라보았다.설영준의 눈에 아리따운 옆모습이 들어왔다.부드러운 라인과 뽀얀 피부는 백옥을 연상케 했고, 아련한 눈빛은 외로움과 나약함이 담겨 있었다.이때, 알 수 없는 감정이 갑자기 그의 마음을 후벼팠다.송재이가 고개를 돌린 틈을 타서 설영준은 손을 들어 올렸는데 이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그녀를 품에 안고 싶지만 불가능한 상황에 갈등하는 듯싶었다.왜냐하면 아직 송재이를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당시 헤어지기로 했던 것도 밀당이 아니라 진심이었다.자신을 속이고 바람 피는 여자를 어찌 용납하겠는가?...멀지 않은 곳에 차를 대고 앉아 있는 박윤찬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자
물론 마지막 말은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뿐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설영준은 그녀에게 외투를 던져 주고 나서 고개를 돌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눈을 감았다.“출발해요.”그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묻어났다.박윤찬도 그제야 휴대폰을 내려놓았고, 여태껏 테트리스 쌓기에 집중하고 있었는지라 송재이의 옷이 비치는지 마는지 관심도 없었다.더욱이 지금은 설영준의 외투를 걸쳤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래서인지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곧이어 백미러를 통해 설영준과 송재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의 예상대로 설영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자는 척했고, 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안색이 살짝 빨갰다.송재이 역시 홧김에 현재 주소를 대충 알려주고 창밖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그동안 설영준은 송재이가 어디 사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게 되었다.이내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다.차는 어느 한 아파트 단지 앞에 멈춰 섰다.같은 공간에 한시도 머물러 있고 싶지 않은 송재이는 몸에 걸친 설영준의 외투를 던져버리고 안전벨트를 풀더니 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하지만 설영준이 그녀의 손목이 덥석 붙잡았다.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따지려는 순간, 눈살을 살짝 찌푸린 설영준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한 손에 쇼핑백을, 다른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낯익은 남자를 발견했다.송재이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그리고 설영준의 손을 뿌리치고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조금 전에 벗어놓았던 외투가 다시 어깨 위에 걸쳐졌다.입을 달싹이던 그녀가 말을 내뱉기도 전에 설영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고는 차에서 먼저 내렸다.비록 영문을 알 수 없지만 굳이 따지지는 않았고, 잠깐의 침묵을 끝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이때, 설영준이 등 뒤로 다가와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경주에서 남도까지 쫓아오다니, 송재이 씨의 매력도 참 대단하네?”말을 마치고 나서 냉소를 지으며 길 건너편을 쳐다보았다.그러
그녀의 새로운 남자친구라...물론 송재이가 설영준을 열받게 하려고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긴 했다.하지만 이미 헤어진 와중에 대체 무슨 입장으로 시시콜콜 간섭하겠는가?아직 설영준의 외투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송재이는 지민건 앞으로 걸어가 손에 든 장바구니를 건네받고는 입을 열었다.“가자.”지민건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설영준을 바라보았다.아마도 설영준 때문에 화가 나서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겼을 거라고 얼추 짐작했다.하지만 그게 뭔 대수랴?지민건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이내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설영준을 쳐다보는 눈빛이 금세 도발적으로 변했다.설영준은 감정 컨트롤에 능한 사람이다. 물론 평소에 그렇다는 게 함정이지만 오늘은 갑자기 일탈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내가 들게.”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지민건은 자연스럽게 송재이의 손에서 장바구니를 가져왔다.안에는 방금 마트에서 산 식자재가 들어있는지라 야채와 고기만 해도 꽤 무거워서 여자가 짐을 들게 할 수는 없었다.송재이는 그제야 상념에서 빠져나왔다.빠르게 상승하는 엘리베이터와 점점 커지는 안내판의 숫자를 보자 지민건을 집으로 불러들이는 다소 충동적인 결정에 후회하기 시작했다.게다가 지민건이 첫 번째 주인공이 될 거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가 한창 후회막급할 때 엘리베이터는 목적층에 도달했고, 근심 가득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때마침 오늘은 불편하니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고 핑계를 대려는 순간 입을 떼기도 전에 휴대폰이 울렸다.“재이 씨, 저예요.”전화를 받자 박윤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전화로 설영준도 그렇고 아직 식전이라 괜찮으면 집에서 같이 밥을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박윤찬이 통화할 때 설영준도 옆에 있었고, 송재이와 대화하는 내내 그의 눈치만 힐끔힐끔 살폈다.사실 너무 쪽팔리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몰염치하게 여자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으려고 한 적이 없지 않은가?비록 혼자는 아니지만 이런 부탁을 했다는 자체만
설영준이 정신을 차리고 나서 고개를 돌리자 똑같이 멍하니 송재이를 바라보고 있는 지민건을 발견했다.물론 송재이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처음이든 아니든 심기 불편한 건 사실이다.순간, 거실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샤부샤부를 먹는 동안에도 침묵이 이어졌고, 다들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밥만 먹었다.박윤찬은 과묵한 편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침울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먼저 화두를 던지고 싶었다.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송재이, 왼쪽의 설영준과 오른쪽의 지민건을 보니 각자의 고민에 빠진 듯 표정들이 사뭇 어두웠다.가시방석에 앉은 게 무슨 느낌인지 박윤찬은 처음 알게 되었다....샤부샤부만 먹고 나면 호텔로 돌아갈 줄 알았지만 설영준이 카드 게임을 하자고 먼저 제안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송재이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물론 게임에 대해 편견이 있는 게 아니라 설영준처럼 안하무인이 따로 없는 사람이 카드 게임 따위 관심을 가진다는 자체가 납득이 안 갔다.“집에 카드가 없는데...”송재이가 운을 떼자마자 설영준은 박윤찬을 흘긋 쳐다보았다.금세 눈치를 챈 박윤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차에 가서 가져올게요.”“그쪽도 같이 할 건가?”설영준은 밥 먹는 내내 지민건을 무시했고, 단지 그가 송재이를 챙기기 위해 음식을 집어줄 때만 고개를 잠깐 들고 바라보았다.따라서 지민건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진 적도 이번이 처음이었다.사실 지민건은 속으로 설영준을 무지 원망했다.하지만 정작 먼저 말을 걸어오자 저도 모르게 황송한 기분이 들었다.이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같이 해요.”옆에 있는 송재이가 눈살을 찌푸렸다.정확한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녀는 무의식중으로 거절하려고 했다.“카드가 있어도 할 줄 몰라서...”“예전에 나 대신 카드 골라준 적도 있잖아.”설영준이 느긋하게 말했다.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
송재이는 어디까지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결국은 설영준을 잊지 못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예민하게 반응했을지도 모른다.정작 상대방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이름도 딱히 미묘한 감정 변화를 담아 부른 게 아닐 수도 있었다.결국 송재이는 이런 허황한 추측을 떨쳐버리고 현재 진행 중인 카드 게임에 집중하기로 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설영준이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지민건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바보가 아닌 이상 설영준이 일부러 태클 건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그는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게임이 이어질수록 설영준에게 압살당해 옴짝달싹 못 했다.설영준의 왼쪽에 앉은 송재이가 이따금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지민건과 그를 번갈아 보았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속이 타들어 갔다. 머릿속으로는 이번 라운드만 마무리하면 어떻게든 핑계를 찾아 서둘러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설영준의 느긋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아량이 너그러운 건가? 아니면 멍청한 건가? 누가 봐도 본인에게 유리한 조건인데 나한테 기회를 주다니, 나야 뭐 고맙지만.”말을 마치고 나서 손에 든 카드를 테이블 위에 몽땅 내려놓았다.그리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지민건을 바라보았다.“경주에 있든 남도에 있든 우리 송재이 씨는 그쪽한테 관심이 없으니 꿈 깨.”지민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마치 못이라도 박힌 듯 제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고, 귓가에 오로지 설영준의 말만 메아리쳤다.‘경주에 있든 남도에 있든...’마지막 자존심마저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그동안 지위는 물론이고 몸값, 그리고 능력치도 워낙 설영준과 천지 차이라서 설령 인정할 수 없더라도 결국에는 한 수 위라고 묵인했다.자리에서 일어난 지민건은 휘청이며 중심을 잃었다.“재이야,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가볼게.”이내 허둥지둥 뒤를 돌아 현관으로 걸어가 신발을 신으려고 했다.“데려다 줄...”“앉아 있어!”송재이가 지민건을 배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