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마지막 말은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뿐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설영준은 그녀에게 외투를 던져 주고 나서 고개를 돌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눈을 감았다.“출발해요.”그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묻어났다.박윤찬도 그제야 휴대폰을 내려놓았고, 여태껏 테트리스 쌓기에 집중하고 있었는지라 송재이의 옷이 비치는지 마는지 관심도 없었다.더욱이 지금은 설영준의 외투를 걸쳤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래서인지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곧이어 백미러를 통해 설영준과 송재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의 예상대로 설영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자는 척했고, 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안색이 살짝 빨갰다.송재이 역시 홧김에 현재 주소를 대충 알려주고 창밖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그동안 설영준은 송재이가 어디 사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게 되었다.이내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다.차는 어느 한 아파트 단지 앞에 멈춰 섰다.같은 공간에 한시도 머물러 있고 싶지 않은 송재이는 몸에 걸친 설영준의 외투를 던져버리고 안전벨트를 풀더니 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하지만 설영준이 그녀의 손목이 덥석 붙잡았다.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따지려는 순간, 눈살을 살짝 찌푸린 설영준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한 손에 쇼핑백을, 다른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낯익은 남자를 발견했다.송재이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그리고 설영준의 손을 뿌리치고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조금 전에 벗어놓았던 외투가 다시 어깨 위에 걸쳐졌다.입을 달싹이던 그녀가 말을 내뱉기도 전에 설영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고는 차에서 먼저 내렸다.비록 영문을 알 수 없지만 굳이 따지지는 않았고, 잠깐의 침묵을 끝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이때, 설영준이 등 뒤로 다가와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경주에서 남도까지 쫓아오다니, 송재이 씨의 매력도 참 대단하네?”말을 마치고 나서 냉소를 지으며 길 건너편을 쳐다보았다.그러
그녀의 새로운 남자친구라...물론 송재이가 설영준을 열받게 하려고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긴 했다.하지만 이미 헤어진 와중에 대체 무슨 입장으로 시시콜콜 간섭하겠는가?아직 설영준의 외투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송재이는 지민건 앞으로 걸어가 손에 든 장바구니를 건네받고는 입을 열었다.“가자.”지민건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설영준을 바라보았다.아마도 설영준 때문에 화가 나서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겼을 거라고 얼추 짐작했다.하지만 그게 뭔 대수랴?지민건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이내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설영준을 쳐다보는 눈빛이 금세 도발적으로 변했다.설영준은 감정 컨트롤에 능한 사람이다. 물론 평소에 그렇다는 게 함정이지만 오늘은 갑자기 일탈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내가 들게.”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지민건은 자연스럽게 송재이의 손에서 장바구니를 가져왔다.안에는 방금 마트에서 산 식자재가 들어있는지라 야채와 고기만 해도 꽤 무거워서 여자가 짐을 들게 할 수는 없었다.송재이는 그제야 상념에서 빠져나왔다.빠르게 상승하는 엘리베이터와 점점 커지는 안내판의 숫자를 보자 지민건을 집으로 불러들이는 다소 충동적인 결정에 후회하기 시작했다.게다가 지민건이 첫 번째 주인공이 될 거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가 한창 후회막급할 때 엘리베이터는 목적층에 도달했고, 근심 가득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때마침 오늘은 불편하니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고 핑계를 대려는 순간 입을 떼기도 전에 휴대폰이 울렸다.“재이 씨, 저예요.”전화를 받자 박윤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전화로 설영준도 그렇고 아직 식전이라 괜찮으면 집에서 같이 밥을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박윤찬이 통화할 때 설영준도 옆에 있었고, 송재이와 대화하는 내내 그의 눈치만 힐끔힐끔 살폈다.사실 너무 쪽팔리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몰염치하게 여자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으려고 한 적이 없지 않은가?비록 혼자는 아니지만 이런 부탁을 했다는 자체만
설영준이 정신을 차리고 나서 고개를 돌리자 똑같이 멍하니 송재이를 바라보고 있는 지민건을 발견했다.물론 송재이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처음이든 아니든 심기 불편한 건 사실이다.순간, 거실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샤부샤부를 먹는 동안에도 침묵이 이어졌고, 다들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밥만 먹었다.박윤찬은 과묵한 편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침울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먼저 화두를 던지고 싶었다.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송재이, 왼쪽의 설영준과 오른쪽의 지민건을 보니 각자의 고민에 빠진 듯 표정들이 사뭇 어두웠다.가시방석에 앉은 게 무슨 느낌인지 박윤찬은 처음 알게 되었다....샤부샤부만 먹고 나면 호텔로 돌아갈 줄 알았지만 설영준이 카드 게임을 하자고 먼저 제안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송재이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물론 게임에 대해 편견이 있는 게 아니라 설영준처럼 안하무인이 따로 없는 사람이 카드 게임 따위 관심을 가진다는 자체가 납득이 안 갔다.“집에 카드가 없는데...”송재이가 운을 떼자마자 설영준은 박윤찬을 흘긋 쳐다보았다.금세 눈치를 챈 박윤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차에 가서 가져올게요.”“그쪽도 같이 할 건가?”설영준은 밥 먹는 내내 지민건을 무시했고, 단지 그가 송재이를 챙기기 위해 음식을 집어줄 때만 고개를 잠깐 들고 바라보았다.따라서 지민건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진 적도 이번이 처음이었다.사실 지민건은 속으로 설영준을 무지 원망했다.하지만 정작 먼저 말을 걸어오자 저도 모르게 황송한 기분이 들었다.이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같이 해요.”옆에 있는 송재이가 눈살을 찌푸렸다.정확한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녀는 무의식중으로 거절하려고 했다.“카드가 있어도 할 줄 몰라서...”“예전에 나 대신 카드 골라준 적도 있잖아.”설영준이 느긋하게 말했다.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
송재이는 어디까지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결국은 설영준을 잊지 못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예민하게 반응했을지도 모른다.정작 상대방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이름도 딱히 미묘한 감정 변화를 담아 부른 게 아닐 수도 있었다.결국 송재이는 이런 허황한 추측을 떨쳐버리고 현재 진행 중인 카드 게임에 집중하기로 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설영준이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지민건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바보가 아닌 이상 설영준이 일부러 태클 건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그는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게임이 이어질수록 설영준에게 압살당해 옴짝달싹 못 했다.설영준의 왼쪽에 앉은 송재이가 이따금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지민건과 그를 번갈아 보았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속이 타들어 갔다. 머릿속으로는 이번 라운드만 마무리하면 어떻게든 핑계를 찾아 서둘러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설영준의 느긋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아량이 너그러운 건가? 아니면 멍청한 건가? 누가 봐도 본인에게 유리한 조건인데 나한테 기회를 주다니, 나야 뭐 고맙지만.”말을 마치고 나서 손에 든 카드를 테이블 위에 몽땅 내려놓았다.그리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지민건을 바라보았다.“경주에 있든 남도에 있든 우리 송재이 씨는 그쪽한테 관심이 없으니 꿈 깨.”지민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마치 못이라도 박힌 듯 제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고, 귓가에 오로지 설영준의 말만 메아리쳤다.‘경주에 있든 남도에 있든...’마지막 자존심마저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그동안 지위는 물론이고 몸값, 그리고 능력치도 워낙 설영준과 천지 차이라서 설령 인정할 수 없더라도 결국에는 한 수 위라고 묵인했다.자리에서 일어난 지민건은 휘청이며 중심을 잃었다.“재이야,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가볼게.”이내 허둥지둥 뒤를 돌아 현관으로 걸어가 신발을 신으려고 했다.“데려다 줄...”“앉아 있어!”송재이가 지민건을 배웅
박윤찬은 아파트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지민건 배웅하러 간다는 것은 설영준과 송재이에게 둘만의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설영준이 한참 뒤에 내려올 줄 알았는데 10분 뒤에 바로 내려올 줄 몰랐다.“갑시다!”갑자기 뒤에서 설영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박윤찬은 뒤돌아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설영준을 쳐다보았다.“재이 씨랑 더 얘기 안 해요?”“대화가 필요하다고 한 적 있나요?”설영준은 피식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둘은 그렇게 차를 타고 이곳을 떠났다....송재이는 박윤찬에게 이원희의 연락처를 보내주었다.이원희가 이혼소송을 하겠다는데 유일하게 도울 수 있는 일은 그저 믿음직한 변호사를 소개해 주는 것이었다.박윤찬은 이원희에게 연락하여 커피숍에서 만나 상세하게 이야기하자고 했다.이원희는 미행당할까 봐 일부러 은밀한 룸을 예약했다.문이 열리고, 말라 보이는 한 젊은 남성이 반갑게 맞이했다.“안녕하세요. 혹시 의뢰인 이원희 씨 맞으시죠?”“네...”이원희는 상대가 이 정도로 젊을 줄 몰랐다.비록 똑똑해 보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사회초년생으로 보여 조금은 실망한 눈치였다.“들어오세요!”룸에서 또 다른 듬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으로 들어가자 자리에 앉아 차를 따르고 있는 한 남성이 보였다.박윤찬은 찻잔을 내려놓고 매너 있게 일어서서 이원희의 앞으로 다가가 예의를 갖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저는 박윤찬이라고 합니다.”방금 문을 열어준 사람은 박윤찬의 매니저였다.진짜 변호사를 만난 이원희는 두 눈이 반짝거렸다.분위기가 넘치고, 멋있고, 성숙한 모습에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이쪽에 앉으시죠!”...오늘 송재이는 월차를 냈다.설영준을 만난 뒤로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설영준은 남도에서 볼일을 마치면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그전에 송재이와 밥 한 끼 하고 싶었다.하지만 전화해도 받지 않았고, 문자를 보내도 답장이 없자 송재이가 출근하는 사립예술학교를 찾아갔더니 그제야 월차를
저번에 송재이 집에서 샤부샤부를 먹었을 때 설영준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이 돕고 있을 때 그저 거실에 앉아 지민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러다 지민건이 송재이한테 잘해주는 모습, 송재이의 그릇을 가져가더니 그냥 먹기만 하면 된다고 하던 모습을 그대로 보고 말았다.심지어 지민건은 대화를 이어가다 말고 송재이의 입가에 묻은 머리카락도 떼어주었다.이런 다정한 스킨십에 설영준은 심기가 불편했다.그는 복수 겸 화를 풀려고 지민건에게 카드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이대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오늘도 송재이가 아프지만 않았다면 모른 척했을 수도 있었다.설영준은 집을 아무리 뒤져봐도 해열제를 찾지 못했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방에서 생강을 꺼내 생강차를 끓여주기로 했다.물 끓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설영준은 갑자기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왜 경주에서든 남주에서든 맨날 뭘 끓여줘야 하지?’절대 주방을 드나들지 않던 설영준은 송재이와 엮인 뒤로부터...그는 끓여진 생강차에 구기자까지 넣어 안방으로 들고 갔다.“송재이, 일어나.”인내심 없는 말투였다.하지만 송재이는 너무 깊은 잠에 빠져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설영준은 그녀가 숨을 멎기라도 했을까 봐 두려운 마음에 숨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별일 없는 것을 보고 또다시 이름을 불렀다.“송재이, 일어나 이거 마셔.”송재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비몽사몽인 상태에서 어릴 때로 돌아간 꿈을 꾸었다.초등학교 4학년,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폭우가 쏟아져 친구들과 타프 밑에서 부모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송재이는 계단에 앉아 친구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결국 혼자 남게 되었다.날이 어두워지고, 퇴근하다 마주친 담임 선생님이 결국 우산을 씌워주고 직접 집까지 데려다주었다.시간이 오래 지나 잊은 줄만 알았던 그날의 일이 다시 꿈에 나타날 줄 몰랐다.송재이는 온몸이 지끈거리면서 이마와 등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몸을 뒤척이더니 계속 이 한마디
설영준은 송재이를 꼭 끌어안고 그녀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열이 내렸는지 얼굴, 그리고 이마를 만져보았다.꿈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송재이는 계속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이 순간 설영준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이 세상에서 송재이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기라고 생각되기도 했다.‘그때 쉽게 헤어지자고 했던 거, 너무 잔인했나?’송재이는 사실 믿을 사람도 없고,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여자아이였다.그녀는 그만 설영준의 보호본능을 일으키고 말았다.그전에는 그저 잠자리만 함께하는 여자라고 생각해서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고, 별로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하지만 여자한테 마음이 뺏기기 싫다는 생각은 바뀐 적이 없었다.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저 환자를 돕는 거라고, 깨어나면 절대 이러지 않겠다고 말이다.그는 여진에게 전화해서 잠깐 볼일이 있어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 다음 날에 경주로 돌아가자고 했다.여진은 설영준이 걱정되어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설영준은 괜찮다고 말하면서 송재이가 차던진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그리고 몇 가지 업무를 당부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생강차를 마신 송재이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더운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계속 발버둥 쳤다.사실 설영준과 함께 있을 때도 이랬다.다시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끄려고 할 때, 송재이는 다시 이불을 차 던졌다.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송재이의 모습에 설영준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그는 졸리지도 않는지 한숨도 자지 않고 저녁 내내 침대 옆을 떠나지 않았다.모든 불을 끄고, 스탠등 하나만 켜놓았다.주위가 고요하고 아늑한 것이 온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았다.어느샌가 밖에서 주룩주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아침이 밝을 때까지 비는 계속 오고 있었다.빗방울이 창가를 두드리는 소리에 송재이는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다.비가 그치고, 공기 속에는 풀냄새와 흙냄새가 가득했다.휘청휘청 화장실로 향하던 송재이는 문 뒤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보지
송재이는 그가 이렇게 오해할 줄 알았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계속 하던 말을 했다.“난 옛날 일이 반복되는 게 싫어...”이제 겨우 옛날 감정에서 빠져나왔는데 지민건을 견제하는 모습, 남도에 다시 나타나 온밤 아픈 자신을 돌봐주는 이런 모습 때문에 다시 그에게 빠져들까 봐 두려웠다.누군가의 대체품이 되기도 싫었고, 희망에서 절망으로 떨어질 때의 감정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설영준은 컨트롤하기도, 파악하기도 어려운 사람이었다.설영준이 차갑게 쳐다보자 송재이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송재이는 머리가 부스스하긴 했지만 생얼이 유난히 뽀얗고 예뻤다.하지만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한 듯한 두려움과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하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는 상처였다.“그러니까 내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봐도 모른 척하라는 거지?”“응...”말투에서 분노를 느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깔끔하게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끔 보여주는 다정한 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제발 나한테 잘해주지 마!’쿵!설영준은 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갔다.송재이는 그가 화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뒤돌아 거실 소파로 가서 앉은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오늘로써 설영준과의 인연이 끝인 것을 알고 있었다.온밤 보살핌을 받았지만 결국엔 쫓아낸 식이 되어버렸다.자존심이 강한 설영준은 다시는 송재이를 찾지 않을 수도 있었다....설영준이 떠나고, 이원희가 전화와서 같이 밥 먹자고 했다.박윤찬이 이원희의 이혼소송을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송재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박윤찬과 같은 유명 변호사를 만날 일도 없었다.이원희는 송재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기 위해 유명 레스토랑을 예약했다.오늘은 윤수아도 함께 했다.주말이라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윤수아의 나이는 12살, 이원희와 10살 차이였다. 비록 법적으로는 모녀 사이였지만 멀리서 보면 자매와도 같았다.송재이는 메뉴를 연구하고 있는 이 둘을 멀리서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