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찬은 아파트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지민건 배웅하러 간다는 것은 설영준과 송재이에게 둘만의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설영준이 한참 뒤에 내려올 줄 알았는데 10분 뒤에 바로 내려올 줄 몰랐다.“갑시다!”갑자기 뒤에서 설영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박윤찬은 뒤돌아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설영준을 쳐다보았다.“재이 씨랑 더 얘기 안 해요?”“대화가 필요하다고 한 적 있나요?”설영준은 피식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둘은 그렇게 차를 타고 이곳을 떠났다....송재이는 박윤찬에게 이원희의 연락처를 보내주었다.이원희가 이혼소송을 하겠다는데 유일하게 도울 수 있는 일은 그저 믿음직한 변호사를 소개해 주는 것이었다.박윤찬은 이원희에게 연락하여 커피숍에서 만나 상세하게 이야기하자고 했다.이원희는 미행당할까 봐 일부러 은밀한 룸을 예약했다.문이 열리고, 말라 보이는 한 젊은 남성이 반갑게 맞이했다.“안녕하세요. 혹시 의뢰인 이원희 씨 맞으시죠?”“네...”이원희는 상대가 이 정도로 젊을 줄 몰랐다.비록 똑똑해 보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사회초년생으로 보여 조금은 실망한 눈치였다.“들어오세요!”룸에서 또 다른 듬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으로 들어가자 자리에 앉아 차를 따르고 있는 한 남성이 보였다.박윤찬은 찻잔을 내려놓고 매너 있게 일어서서 이원희의 앞으로 다가가 예의를 갖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저는 박윤찬이라고 합니다.”방금 문을 열어준 사람은 박윤찬의 매니저였다.진짜 변호사를 만난 이원희는 두 눈이 반짝거렸다.분위기가 넘치고, 멋있고, 성숙한 모습에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이쪽에 앉으시죠!”...오늘 송재이는 월차를 냈다.설영준을 만난 뒤로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설영준은 남도에서 볼일을 마치면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그전에 송재이와 밥 한 끼 하고 싶었다.하지만 전화해도 받지 않았고, 문자를 보내도 답장이 없자 송재이가 출근하는 사립예술학교를 찾아갔더니 그제야 월차를
저번에 송재이 집에서 샤부샤부를 먹었을 때 설영준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이 돕고 있을 때 그저 거실에 앉아 지민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러다 지민건이 송재이한테 잘해주는 모습, 송재이의 그릇을 가져가더니 그냥 먹기만 하면 된다고 하던 모습을 그대로 보고 말았다.심지어 지민건은 대화를 이어가다 말고 송재이의 입가에 묻은 머리카락도 떼어주었다.이런 다정한 스킨십에 설영준은 심기가 불편했다.그는 복수 겸 화를 풀려고 지민건에게 카드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이대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오늘도 송재이가 아프지만 않았다면 모른 척했을 수도 있었다.설영준은 집을 아무리 뒤져봐도 해열제를 찾지 못했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방에서 생강을 꺼내 생강차를 끓여주기로 했다.물 끓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설영준은 갑자기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왜 경주에서든 남주에서든 맨날 뭘 끓여줘야 하지?’절대 주방을 드나들지 않던 설영준은 송재이와 엮인 뒤로부터...그는 끓여진 생강차에 구기자까지 넣어 안방으로 들고 갔다.“송재이, 일어나.”인내심 없는 말투였다.하지만 송재이는 너무 깊은 잠에 빠져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설영준은 그녀가 숨을 멎기라도 했을까 봐 두려운 마음에 숨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별일 없는 것을 보고 또다시 이름을 불렀다.“송재이, 일어나 이거 마셔.”송재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비몽사몽인 상태에서 어릴 때로 돌아간 꿈을 꾸었다.초등학교 4학년,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폭우가 쏟아져 친구들과 타프 밑에서 부모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송재이는 계단에 앉아 친구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결국 혼자 남게 되었다.날이 어두워지고, 퇴근하다 마주친 담임 선생님이 결국 우산을 씌워주고 직접 집까지 데려다주었다.시간이 오래 지나 잊은 줄만 알았던 그날의 일이 다시 꿈에 나타날 줄 몰랐다.송재이는 온몸이 지끈거리면서 이마와 등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몸을 뒤척이더니 계속 이 한마디
설영준은 송재이를 꼭 끌어안고 그녀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열이 내렸는지 얼굴, 그리고 이마를 만져보았다.꿈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송재이는 계속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이 순간 설영준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이 세상에서 송재이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기라고 생각되기도 했다.‘그때 쉽게 헤어지자고 했던 거, 너무 잔인했나?’송재이는 사실 믿을 사람도 없고,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여자아이였다.그녀는 그만 설영준의 보호본능을 일으키고 말았다.그전에는 그저 잠자리만 함께하는 여자라고 생각해서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고, 별로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하지만 여자한테 마음이 뺏기기 싫다는 생각은 바뀐 적이 없었다.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저 환자를 돕는 거라고, 깨어나면 절대 이러지 않겠다고 말이다.그는 여진에게 전화해서 잠깐 볼일이 있어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 다음 날에 경주로 돌아가자고 했다.여진은 설영준이 걱정되어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설영준은 괜찮다고 말하면서 송재이가 차던진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그리고 몇 가지 업무를 당부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생강차를 마신 송재이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더운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계속 발버둥 쳤다.사실 설영준과 함께 있을 때도 이랬다.다시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끄려고 할 때, 송재이는 다시 이불을 차 던졌다.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송재이의 모습에 설영준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그는 졸리지도 않는지 한숨도 자지 않고 저녁 내내 침대 옆을 떠나지 않았다.모든 불을 끄고, 스탠등 하나만 켜놓았다.주위가 고요하고 아늑한 것이 온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았다.어느샌가 밖에서 주룩주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아침이 밝을 때까지 비는 계속 오고 있었다.빗방울이 창가를 두드리는 소리에 송재이는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다.비가 그치고, 공기 속에는 풀냄새와 흙냄새가 가득했다.휘청휘청 화장실로 향하던 송재이는 문 뒤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보지
송재이는 그가 이렇게 오해할 줄 알았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계속 하던 말을 했다.“난 옛날 일이 반복되는 게 싫어...”이제 겨우 옛날 감정에서 빠져나왔는데 지민건을 견제하는 모습, 남도에 다시 나타나 온밤 아픈 자신을 돌봐주는 이런 모습 때문에 다시 그에게 빠져들까 봐 두려웠다.누군가의 대체품이 되기도 싫었고, 희망에서 절망으로 떨어질 때의 감정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설영준은 컨트롤하기도, 파악하기도 어려운 사람이었다.설영준이 차갑게 쳐다보자 송재이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송재이는 머리가 부스스하긴 했지만 생얼이 유난히 뽀얗고 예뻤다.하지만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한 듯한 두려움과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하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는 상처였다.“그러니까 내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봐도 모른 척하라는 거지?”“응...”말투에서 분노를 느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깔끔하게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끔 보여주는 다정한 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제발 나한테 잘해주지 마!’쿵!설영준은 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갔다.송재이는 그가 화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뒤돌아 거실 소파로 가서 앉은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오늘로써 설영준과의 인연이 끝인 것을 알고 있었다.온밤 보살핌을 받았지만 결국엔 쫓아낸 식이 되어버렸다.자존심이 강한 설영준은 다시는 송재이를 찾지 않을 수도 있었다....설영준이 떠나고, 이원희가 전화와서 같이 밥 먹자고 했다.박윤찬이 이원희의 이혼소송을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송재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박윤찬과 같은 유명 변호사를 만날 일도 없었다.이원희는 송재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기 위해 유명 레스토랑을 예약했다.오늘은 윤수아도 함께 했다.주말이라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윤수아의 나이는 12살, 이원희와 10살 차이였다. 비록 법적으로는 모녀 사이였지만 멀리서 보면 자매와도 같았다.송재이는 메뉴를 연구하고 있는 이 둘을 멀리서
송재이는 정하현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설영준의 전 여자친구라 단번에 얼굴을 익혔다.정아현도 오서희와 설동준의 결혼기념일 파티에서 송재이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그 사진 속에서는 설영준이 그윽하게 송재이를 쳐다보고 있었다.여자는 감각적인 동물이라 눈빛 하나만으로도 느끼는 바가 많았다.심지어 송재이는 이목구비가 또렷한 사람이라 한 번 보고 잊혀질 얼굴이 아니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몇 초 동안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다.정아현과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송재이가 먼저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지만 정아현이 이쪽으로 걸어왔다.하지만 이렇게 조심스럽게 물어볼 줄은 몰랐다.“혹시 송재이 씨 맞으세요?”송재이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의아한 표정으로 정아현을 쳐다보았다.정아현은 억지 미소를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송재이의 옆에 앉았다.간단한 인사를 주고받고, 정아현이 또 송재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정아현이라고 해요. 전에 경주에서 도영이한테 피아노를 가르쳐주던 선생님 맞죠?”송재이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그저 사진에서 보던 모습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사진 속 정아현은 차마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도도해 보였지만 실물은 말괄량이 같은 것이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송재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아현이 머쓱한지 머리를 긁으면서 또 물었다.“죄송한데 송재이 씨, 혹시 민효연 씨를 아세요?”‘민효연?’민효연은 경주에서 이름난 슈퍼우먼이었다.“왜요? 그쪽도 민 사모님이랑 아는 사이에요?”“그분 혹시 설영준 씨랑 아직 연락하고 지내세요?”정아현이 또 묻자 송재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늘 사이가 좋았어요. 그분 따님이랑 하마터면 결혼할 뻔했는데 파혼했어도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어요. 사적에서도 만나고 업무적으로도 만나고...”송재이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아현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그래요. 천천히 드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그러더니 다급하게 이곳을 떠났다.그녀의 모습
분명 입은 웃고 있었지만 차가운 눈빛에 민효연은 그만 소름이 끼치고 말았다.전 여자친구라고 소개할 줄은 설영준도 생각하지 못했다.4날 전, 남도.설영준이 송재이 집에서 나오던 그날, 현관 입구.열이 내린 송재이는 갑자기 사람이 바뀌더니 자기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화가 난 설영준은 문을 걷어차고 나가려다 송재이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다.“난 누군가의 대체품이 되기 싫어. 난 너의 전 여자친구가 아니라 송재이라고.”대체품?무슨 말인지 모르는 설영준은 뒤돌아 물어보고 싶었지만 송재이가 이미 뒤돌아선 상태였다.송재이는 괴로운 표정으로 울음을 참으면서 말했다.“송재이는 나 하나뿐이야. 누군가의 대체품이 아니라고.”복잡미묘한 심정으로 경주로 돌아온 설영준은 그제야 누군가 송재이에게 정아현을 언급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과연 누구일까?몇 날 며칠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엔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이 순간 설영준은 민효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상대는 연장자였지만 분위기만 봤을 때 설영준이 압도적이었다.늘 멘탈이 강하던 민효연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설 대표, 왜 나를 의심하는 거야? 난 그런 호박씨나 까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야.”설영준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더니 냉랭하게 물었다.“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아현이를 언급한 사람이 사장님이세요?”“아니라고!”민효연은 아주 신속히 대답했다.그녀는 자세를 고쳐잡더니 말했다.“송 선생님이 갑자기 경주를 떠날 줄은 나도 몰랐어. 설 대표, 설마 내가 중간에서 이간질했다고 의심하는 거야? 정말 내가 그랬다면 인제 와서 이럴 필요는 없잖아?”맞는 말이기도 했다.주현아와 정략결혼이 잡혔을 때도 송재이를 해고하지 않았던 그녀였다.만약 정말 정아현과의 일을 말하고 싶었다면 지금까지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면 민효연이 아니라 누구일까?설영준은 또 다른 사람이 생각났다.그 사람은 바로 박윤찬이었다....민효연은 업무 얘기가 끝나고
주승아는 아직 살아있었다.이 사실을 주치의, 간호사 외에 민효연밖에 모르고 있었다.주정명, 주현아도 아직 주승아가 죽었다고 믿고 있었다.민효연이 모든 사람을 속이고 주승아가 죽은 것으로 꾸몄던 것은 사실 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병실에 누워있는 주승아는 아직도 젊어 보였다.그저 건강했을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산소호흡기를 하고 조용히 누워있는 모습은 마치 자고있는 것만 같았다.엄마인 민효인의 눈에는 그저 자고있는 것처럼 보였다.민효연은 침대 옆에 앉아 주승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손톱이 길어진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서랍에서 손톱깎이를 꺼냈다.그녀는 딸의 손톱을 깎아주면서 말했다.“난 내 두 딸이 한 남자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싫어. 결국 한 명은 병실에 누워있고, 한 명은 외국으로 떠났네? 난 이 나이에 왜 이렇게 고독하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우리 모두 이렇게 불행한데 그 새끼는 왜 저렇게 행복한 거지? 걱정하지 마. 엄마가 그 새끼 불행하게 만들어 줄게.”...설영준이 남도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지민건도 서주로 돌아갔다.송재이는 저번 그 일이 있은 뒤로 지민건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다.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 어느 하루 거울을 보다 얼굴에 여드름 같은 것이 난 것을 발견했다.병원에 가서 보였더니 의사 선생님은 별문제 없다고 했다.하지만 그래도 보기에는 흉측했다.송재이는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보더니 우울해져 한동안 집에만 있기로 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은 한 발짝도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맨날 집에서 배달이나 시켜 먹고, 심심하면 책을 보거나 영화를 감상했다.네 날 뒤, 얼굴이 조금 나아지자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하고 밖에 나가서 상쾌한 공기를 마셔보기로 했다.그런데 내려가자마자 지민건을 만날 줄 몰랐다.정말 다시 찾아올 줄 몰랐다.송재이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일부러 피해 가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꽁꽁 싸맸다고 해도 지민건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송재이...”손
송재이가 서유리에게서 온 영상통화 요청을 보았다.남도에 온 이후로 둘의 연락은 카카오톡으로만 간간이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고, 영상통화는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그녀의 손가락이 미끄러져 수락 버튼을 눌렀고, 화면에 곧 서유리의 모습이 나타났다.“재이 씨, 오랜만이에요!” 서유리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명랑했지만 얼굴에 띤 미소는 다소 억지스러워 보였다.“무슨 일이에요?”송재이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송재이, 대걸레가 어디 있어?”멀지 않은 욕실에서 갑자기 지민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제서야 송재이는 그가 허락도 없이 집에 들어와 욕실에서 배수구를 뚫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지금 바닥은 온통 물바다였고 그는 대걸레를 찾고 있었다.송재이는 화가 났지만, 여전히 휴대폰을 들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욕실 바닥이 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배수구는 뚫렸지만 일 처리가 영 깔끔하지 못했다!지민건은 평소에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이라 이런 집안일은 원래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송재이는 문득 오래전, 그녀와 설영준이 경주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에 살 때 설영준이 전구를 갈아준 일이 떠올랐다.비즈니스 세계에서 냉철하게 결단을 내리던 대표가 정작 양복을 벗고 셔츠 소매를 걷어올려 탄탄한 팔뚝을 드러내고 의자에 올라가 전구를 갈 때는 꽤나 솜씨 있어 보였다는 게 놀라웠다.이 순간 송재이는 생각했다. 만약 오늘 이 일을 설영준이 했다면 지민건보다 훨씬 더 능숙했을 거라고.“나가. 네 도움 필요 없어!”송재이는 본래 지민건이 무단으로 들어온 것에 대해 화가 나 있었는데, 이제 그가 욕실을 엉망으로 만든 것을 보고 그에게 말하는 어조도 좋지 않았다.하지만 지민건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미 다 뚫었어. 대걸레가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 내가 깨끗이 닦아줄게...”송재이와 지민건의 대화는 한 마디도 빠짐없이 전화기 너머의 서유리의 눈과 귀에 들어갔다.휴대폰 화면을 통해 서유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