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 송재이 집에서 샤부샤부를 먹었을 때 설영준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이 돕고 있을 때 그저 거실에 앉아 지민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러다 지민건이 송재이한테 잘해주는 모습, 송재이의 그릇을 가져가더니 그냥 먹기만 하면 된다고 하던 모습을 그대로 보고 말았다.심지어 지민건은 대화를 이어가다 말고 송재이의 입가에 묻은 머리카락도 떼어주었다.이런 다정한 스킨십에 설영준은 심기가 불편했다.그는 복수 겸 화를 풀려고 지민건에게 카드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이대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오늘도 송재이가 아프지만 않았다면 모른 척했을 수도 있었다.설영준은 집을 아무리 뒤져봐도 해열제를 찾지 못했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방에서 생강을 꺼내 생강차를 끓여주기로 했다.물 끓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설영준은 갑자기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왜 경주에서든 남주에서든 맨날 뭘 끓여줘야 하지?’절대 주방을 드나들지 않던 설영준은 송재이와 엮인 뒤로부터...그는 끓여진 생강차에 구기자까지 넣어 안방으로 들고 갔다.“송재이, 일어나.”인내심 없는 말투였다.하지만 송재이는 너무 깊은 잠에 빠져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설영준은 그녀가 숨을 멎기라도 했을까 봐 두려운 마음에 숨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별일 없는 것을 보고 또다시 이름을 불렀다.“송재이, 일어나 이거 마셔.”송재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비몽사몽인 상태에서 어릴 때로 돌아간 꿈을 꾸었다.초등학교 4학년,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폭우가 쏟아져 친구들과 타프 밑에서 부모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송재이는 계단에 앉아 친구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결국 혼자 남게 되었다.날이 어두워지고, 퇴근하다 마주친 담임 선생님이 결국 우산을 씌워주고 직접 집까지 데려다주었다.시간이 오래 지나 잊은 줄만 알았던 그날의 일이 다시 꿈에 나타날 줄 몰랐다.송재이는 온몸이 지끈거리면서 이마와 등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몸을 뒤척이더니 계속 이 한마디
설영준은 송재이를 꼭 끌어안고 그녀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열이 내렸는지 얼굴, 그리고 이마를 만져보았다.꿈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송재이는 계속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이 순간 설영준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이 세상에서 송재이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기라고 생각되기도 했다.‘그때 쉽게 헤어지자고 했던 거, 너무 잔인했나?’송재이는 사실 믿을 사람도 없고,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여자아이였다.그녀는 그만 설영준의 보호본능을 일으키고 말았다.그전에는 그저 잠자리만 함께하는 여자라고 생각해서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고, 별로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하지만 여자한테 마음이 뺏기기 싫다는 생각은 바뀐 적이 없었다.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저 환자를 돕는 거라고, 깨어나면 절대 이러지 않겠다고 말이다.그는 여진에게 전화해서 잠깐 볼일이 있어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 다음 날에 경주로 돌아가자고 했다.여진은 설영준이 걱정되어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설영준은 괜찮다고 말하면서 송재이가 차던진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그리고 몇 가지 업무를 당부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생강차를 마신 송재이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더운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계속 발버둥 쳤다.사실 설영준과 함께 있을 때도 이랬다.다시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끄려고 할 때, 송재이는 다시 이불을 차 던졌다.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송재이의 모습에 설영준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그는 졸리지도 않는지 한숨도 자지 않고 저녁 내내 침대 옆을 떠나지 않았다.모든 불을 끄고, 스탠등 하나만 켜놓았다.주위가 고요하고 아늑한 것이 온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았다.어느샌가 밖에서 주룩주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아침이 밝을 때까지 비는 계속 오고 있었다.빗방울이 창가를 두드리는 소리에 송재이는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다.비가 그치고, 공기 속에는 풀냄새와 흙냄새가 가득했다.휘청휘청 화장실로 향하던 송재이는 문 뒤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보지
송재이는 그가 이렇게 오해할 줄 알았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계속 하던 말을 했다.“난 옛날 일이 반복되는 게 싫어...”이제 겨우 옛날 감정에서 빠져나왔는데 지민건을 견제하는 모습, 남도에 다시 나타나 온밤 아픈 자신을 돌봐주는 이런 모습 때문에 다시 그에게 빠져들까 봐 두려웠다.누군가의 대체품이 되기도 싫었고, 희망에서 절망으로 떨어질 때의 감정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설영준은 컨트롤하기도, 파악하기도 어려운 사람이었다.설영준이 차갑게 쳐다보자 송재이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송재이는 머리가 부스스하긴 했지만 생얼이 유난히 뽀얗고 예뻤다.하지만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한 듯한 두려움과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하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는 상처였다.“그러니까 내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봐도 모른 척하라는 거지?”“응...”말투에서 분노를 느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깔끔하게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끔 보여주는 다정한 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제발 나한테 잘해주지 마!’쿵!설영준은 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갔다.송재이는 그가 화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뒤돌아 거실 소파로 가서 앉은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오늘로써 설영준과의 인연이 끝인 것을 알고 있었다.온밤 보살핌을 받았지만 결국엔 쫓아낸 식이 되어버렸다.자존심이 강한 설영준은 다시는 송재이를 찾지 않을 수도 있었다....설영준이 떠나고, 이원희가 전화와서 같이 밥 먹자고 했다.박윤찬이 이원희의 이혼소송을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송재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박윤찬과 같은 유명 변호사를 만날 일도 없었다.이원희는 송재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기 위해 유명 레스토랑을 예약했다.오늘은 윤수아도 함께 했다.주말이라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윤수아의 나이는 12살, 이원희와 10살 차이였다. 비록 법적으로는 모녀 사이였지만 멀리서 보면 자매와도 같았다.송재이는 메뉴를 연구하고 있는 이 둘을 멀리서
송재이는 정하현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설영준의 전 여자친구라 단번에 얼굴을 익혔다.정아현도 오서희와 설동준의 결혼기념일 파티에서 송재이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그 사진 속에서는 설영준이 그윽하게 송재이를 쳐다보고 있었다.여자는 감각적인 동물이라 눈빛 하나만으로도 느끼는 바가 많았다.심지어 송재이는 이목구비가 또렷한 사람이라 한 번 보고 잊혀질 얼굴이 아니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몇 초 동안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다.정아현과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송재이가 먼저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지만 정아현이 이쪽으로 걸어왔다.하지만 이렇게 조심스럽게 물어볼 줄은 몰랐다.“혹시 송재이 씨 맞으세요?”송재이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의아한 표정으로 정아현을 쳐다보았다.정아현은 억지 미소를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송재이의 옆에 앉았다.간단한 인사를 주고받고, 정아현이 또 송재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정아현이라고 해요. 전에 경주에서 도영이한테 피아노를 가르쳐주던 선생님 맞죠?”송재이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그저 사진에서 보던 모습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사진 속 정아현은 차마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도도해 보였지만 실물은 말괄량이 같은 것이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송재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아현이 머쓱한지 머리를 긁으면서 또 물었다.“죄송한데 송재이 씨, 혹시 민효연 씨를 아세요?”‘민효연?’민효연은 경주에서 이름난 슈퍼우먼이었다.“왜요? 그쪽도 민 사모님이랑 아는 사이에요?”“그분 혹시 설영준 씨랑 아직 연락하고 지내세요?”정아현이 또 묻자 송재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늘 사이가 좋았어요. 그분 따님이랑 하마터면 결혼할 뻔했는데 파혼했어도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어요. 사적에서도 만나고 업무적으로도 만나고...”송재이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아현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그래요. 천천히 드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그러더니 다급하게 이곳을 떠났다.그녀의 모습
분명 입은 웃고 있었지만 차가운 눈빛에 민효연은 그만 소름이 끼치고 말았다.전 여자친구라고 소개할 줄은 설영준도 생각하지 못했다.4날 전, 남도.설영준이 송재이 집에서 나오던 그날, 현관 입구.열이 내린 송재이는 갑자기 사람이 바뀌더니 자기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화가 난 설영준은 문을 걷어차고 나가려다 송재이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다.“난 누군가의 대체품이 되기 싫어. 난 너의 전 여자친구가 아니라 송재이라고.”대체품?무슨 말인지 모르는 설영준은 뒤돌아 물어보고 싶었지만 송재이가 이미 뒤돌아선 상태였다.송재이는 괴로운 표정으로 울음을 참으면서 말했다.“송재이는 나 하나뿐이야. 누군가의 대체품이 아니라고.”복잡미묘한 심정으로 경주로 돌아온 설영준은 그제야 누군가 송재이에게 정아현을 언급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과연 누구일까?몇 날 며칠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엔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이 순간 설영준은 민효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상대는 연장자였지만 분위기만 봤을 때 설영준이 압도적이었다.늘 멘탈이 강하던 민효연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설 대표, 왜 나를 의심하는 거야? 난 그런 호박씨나 까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야.”설영준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더니 냉랭하게 물었다.“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아현이를 언급한 사람이 사장님이세요?”“아니라고!”민효연은 아주 신속히 대답했다.그녀는 자세를 고쳐잡더니 말했다.“송 선생님이 갑자기 경주를 떠날 줄은 나도 몰랐어. 설 대표, 설마 내가 중간에서 이간질했다고 의심하는 거야? 정말 내가 그랬다면 인제 와서 이럴 필요는 없잖아?”맞는 말이기도 했다.주현아와 정략결혼이 잡혔을 때도 송재이를 해고하지 않았던 그녀였다.만약 정말 정아현과의 일을 말하고 싶었다면 지금까지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면 민효연이 아니라 누구일까?설영준은 또 다른 사람이 생각났다.그 사람은 바로 박윤찬이었다....민효연은 업무 얘기가 끝나고
주승아는 아직 살아있었다.이 사실을 주치의, 간호사 외에 민효연밖에 모르고 있었다.주정명, 주현아도 아직 주승아가 죽었다고 믿고 있었다.민효연이 모든 사람을 속이고 주승아가 죽은 것으로 꾸몄던 것은 사실 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병실에 누워있는 주승아는 아직도 젊어 보였다.그저 건강했을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산소호흡기를 하고 조용히 누워있는 모습은 마치 자고있는 것만 같았다.엄마인 민효인의 눈에는 그저 자고있는 것처럼 보였다.민효연은 침대 옆에 앉아 주승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손톱이 길어진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서랍에서 손톱깎이를 꺼냈다.그녀는 딸의 손톱을 깎아주면서 말했다.“난 내 두 딸이 한 남자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싫어. 결국 한 명은 병실에 누워있고, 한 명은 외국으로 떠났네? 난 이 나이에 왜 이렇게 고독하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우리 모두 이렇게 불행한데 그 새끼는 왜 저렇게 행복한 거지? 걱정하지 마. 엄마가 그 새끼 불행하게 만들어 줄게.”...설영준이 남도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지민건도 서주로 돌아갔다.송재이는 저번 그 일이 있은 뒤로 지민건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다.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 어느 하루 거울을 보다 얼굴에 여드름 같은 것이 난 것을 발견했다.병원에 가서 보였더니 의사 선생님은 별문제 없다고 했다.하지만 그래도 보기에는 흉측했다.송재이는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보더니 우울해져 한동안 집에만 있기로 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은 한 발짝도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맨날 집에서 배달이나 시켜 먹고, 심심하면 책을 보거나 영화를 감상했다.네 날 뒤, 얼굴이 조금 나아지자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하고 밖에 나가서 상쾌한 공기를 마셔보기로 했다.그런데 내려가자마자 지민건을 만날 줄 몰랐다.정말 다시 찾아올 줄 몰랐다.송재이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일부러 피해 가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꽁꽁 싸맸다고 해도 지민건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송재이...”손
송재이가 서유리에게서 온 영상통화 요청을 보았다.남도에 온 이후로 둘의 연락은 카카오톡으로만 간간이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고, 영상통화는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그녀의 손가락이 미끄러져 수락 버튼을 눌렀고, 화면에 곧 서유리의 모습이 나타났다.“재이 씨, 오랜만이에요!” 서유리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명랑했지만 얼굴에 띤 미소는 다소 억지스러워 보였다.“무슨 일이에요?”송재이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송재이, 대걸레가 어디 있어?”멀지 않은 욕실에서 갑자기 지민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제서야 송재이는 그가 허락도 없이 집에 들어와 욕실에서 배수구를 뚫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지금 바닥은 온통 물바다였고 그는 대걸레를 찾고 있었다.송재이는 화가 났지만, 여전히 휴대폰을 들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욕실 바닥이 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배수구는 뚫렸지만 일 처리가 영 깔끔하지 못했다!지민건은 평소에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이라 이런 집안일은 원래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송재이는 문득 오래전, 그녀와 설영준이 경주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에 살 때 설영준이 전구를 갈아준 일이 떠올랐다.비즈니스 세계에서 냉철하게 결단을 내리던 대표가 정작 양복을 벗고 셔츠 소매를 걷어올려 탄탄한 팔뚝을 드러내고 의자에 올라가 전구를 갈 때는 꽤나 솜씨 있어 보였다는 게 놀라웠다.이 순간 송재이는 생각했다. 만약 오늘 이 일을 설영준이 했다면 지민건보다 훨씬 더 능숙했을 거라고.“나가. 네 도움 필요 없어!”송재이는 본래 지민건이 무단으로 들어온 것에 대해 화가 나 있었는데, 이제 그가 욕실을 엉망으로 만든 것을 보고 그에게 말하는 어조도 좋지 않았다.하지만 지민건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미 다 뚫었어. 대걸레가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 내가 깨끗이 닦아줄게...”송재이와 지민건의 대화는 한 마디도 빠짐없이 전화기 너머의 서유리의 눈과 귀에 들어갔다.휴대폰 화면을 통해 서유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송재이는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서유리가 자신과 설영준의 관계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당시 설영준이 송재이와 헤어질 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마도 그는 그녀를 떨쳐내고 싶어 안달이 났던 것 같았다.나중에 그가 남도에 온 것도 일 때문이었고, 포커 테이블에서 지민건에게 보인 공격적인 태도는 그저 그의 본성에 내재된 소유욕일 뿐이었다.하지만 이런 것들을 서유리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됐어요. 난 남도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정말 좋아요.”이곳에서 송재이는 새 직장을 구하고, 새 친구들을 사귀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했다. 그녀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서유리는 송재이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두 사람은 전화로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눴다.송재이의 주의는 온통 서유리에게 쏠려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뒤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지민건이 TV 선반 옆 봉제인형들 사이에 몰래 숨겨진 카메라를 설치한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송재이가 서유리와 통화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자, 지민건이 부엌에서 면 두 그릇을 들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대체 뭘 하려는 거야?”송재이는 지쳐 보였다. 지민건이 왜 이렇게 계속해서 그녀 앞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아직 병이 다 나은 게 아니잖아. 널 돌보는 게 당연하지.”지민건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며 끓인 면을 식탁에 올려놓고 아주 당당하게 먹기 시작했다.식탁 위치는 TV 선반과 마주 보고 있었다. 송재이는 지금 자신과 지민건이 함께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히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송재이는 지민건이 점점 더 되바라진다고 느꼈고, 마침내 참을 수 없어 그의 앞으로 가서 그의 손에서 젓가락을 거칠게 빼앗았다.“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 부를 거야. 내가 들어오라고 했어? 배수구 뚫으라고 했어? 내 부엌을 쓰라고 했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