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봐도 크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하지현도 애를 꽤 먹었기에 엄연히 따지면 쌍방 폭력인 셈이다.송재이가 다른 생각에 빠진 찰나 유은정이 문득 화제를 돌리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재이야, 물론 설 대표님이 너한테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거겠지만 상대방이 먼저 헤어지자고 하지 않는 이상 나중에 네가 먼저 실수라도 한다면 워낙 가차 없는 성격이라 오히려 본인 걱정을 더 해야 할 것 같은데?”어쨌거나 무자비한 수단과 한 치의 속마음도 알기 힘든 남자를 매일같이 마주해야 한다는 자체만으로 마음이 조마조마하기 마련이다.송재이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한참이 지나서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미 헤어졌어.”“뭐?”유은정이 깜짝 놀라며 한참 뒤에야 물었다.“왜?”지금까지 수다를 떨다가 그제야 설영준과 헤어진 일을 얘기하다니? 송재이의 인내심에 혀를 내두르는 순간이었다.결국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못 이겨 결국은 오서희가 찾아왔다고 얘기해 주었다.처음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유은정도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점차 똥 씹은 듯 떨떠름했다.“설 대표 그렇게 안 봤는데 일 처리가 아주 형편없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첫사랑 대타를 운운하고 있지?”유은정은 멈칫하더니 무언가를 떠올린 듯 다시 말을 이어갔다.“근데 사실 맞아? 그 아줌마가 너희 둘을 헤어지게 하려고 일부러 지어낸 건 아닐까?”송재이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윤찬 씨한테 물어봤어. 심지어 윤찬 씨도 내가 정아현이라는 여자와 눈이 똑 닮았대.”오서희는 거짓말할 가능성이 크지만 박윤찬의 됨됨이는 믿고 있는 송재이였다.당시 그보다 더 실감 나는 반응은 없었을 테니까.“헤어지자고 했더니 알겠대?”유은정이 다시 물었다.송재이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생각해보면 애초에 그 사람은 내 몸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고, 설령 날 좋아하는 건 아닌지 싶어도 고작 여자를 꼬시는 수단에
유은정이 올린 내용을 문예슬은 오후가 되어서야 확인했다.이내 하트까지 누른 송재이의 댓글을 보게 되었다.[나중에 돌아오면 다시 양꼬치에 한 잔해.]유은정이 대댓글을 남겼다.[좋아!]문예슬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둘이 따로 만난 건가? 왜 그녀에게는 비밀로 했지?왠지 모르게 삼총사 무리에서 따돌림당한 느낌이 문득 들었다.둘이 훨씬 더 친해 보였고, 그녀는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문예슬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실 속으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심지어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마저 얼핏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된 이상 무슨 짓을 하든 망설일 필요가 없을 테니까.방현수는 최근에 수심이 가득했다. 다음 달이면 해외 지사로 발령이 나는데 남들은 승진한다고 하지만 자신은 정반대였다.이번 사건은 회사에서 우스갯거리로 전락하기도 했다.결국 문예슬과 한잔하기로 해서 그동안의 서러움을 털어놓았다.그녀는 시종일관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일관했다.이내 술자리가 길어지며 저도 모르게 비밀까지 술술 얘기해주었다.어느 날 방현수는 우연을 가장한 만남 차원에서 일부러 송재이의 아파트에 찾아갔는데 예상외로 진짜 마주쳤고, 심지어 집까지 데려다줬다고 했다.그리고 단둘이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나쁜 마음을 먹은 적도 있지만 금세 정신을 차렸다는 해프닝이었다.이유는 송재이가 본인이 차마 건드릴 수 있는 여자가 아니며, 설영준과 라이벌은커녕 겸상할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에 대해 뻔했다는 것이다.그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다.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한들 설영준의 마수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괜스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방현수의 말을 들으며 문예슬은 속으로 몰래 기억하고 있었다.나중에 이 사건을 한껏 부풀려서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었다.설영준과 복잡 미묘한 관계인 상대방은 늘 그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마침 문예슬은 이러한 사이를 이용해 알게 모르게 설영준의 귀에 흘러 들어가게 했다.물론 그 사람이 전달한 내용은 방현수가 송재이를 데려
한 도시에 대한 감정은 기분의 변화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경주에서 20년 동안 살아온 송재이는 곰곰이 따져보면 아직 미지의 세상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동안 워낙 다양한 일들이 벌어져서 딱히 감개무량할 시간도 없었다. 어쩌면 최근에 헤어져서 그런지 몰라도 실연하고 나니 괜스레 감성적으로 변해 별것도 아닌 일에 마음이 흔들리고는 했다.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회식이 있는 밤, 송재이는 간만에 술을 몇 잔 마셨다.창가 자리에 앉은 그녀는 술잔이 오고 가는 옆 테이블과 달리 홀로 고개를 들고 손에 든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창밖으로 북적이는 거리를 내려다보았다.레스토랑은 호수 뷰로 유명했고, 저녁이면 유람선을 타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바글바글했다.사람들의 얼굴에는 전부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하지만 분위기가 화기애애할수록 그녀의 외로움이 더욱 돋보이는 듯싶었다.어쩌면 이때부터 관둘지 말지 고민했을지도 모른다.갑자기 경주를 떠나려는 마음이 굴뚝 같았고, 20년 인생사에 수많은 이야기가 펼쳐진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다.비록 그녀는 즉흥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점점 확신이 드는 이상 결코 질질 끌지 않았다.이내 단장님을 찾아서 개인 면담을 신청했고, 그녀가 악단을 떠난다고 했을 때 깜짝 놀라며 제대로 고민하고 내린 결론이 맞냐고 몇 번이고 확인했다.송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다른 도시에서도 한번 살아보고 싶어요. 한곳에 너무 오래 있어서 그런지 조금 지겹네요.”단장은 입맛 벙긋하더니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동안 네가 악단에서 맹활약을 펼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수석으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쉽네. 어쨌거나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 생각이 있기 나름이니 말을 꺼낸 이상 허락해줄 수밖에 없을 것 같군. 오후에 인사팀에 찾아가서 퇴사 수속하거라.”송재이는 이미 마음을 굳게 먹었다.그녀가 결정한 일이라면 일반 사람은 설득할 수가 없다.다행히 단장이 붙잡지 않아서 한시름 놓았다.퇴사 수속은 금세 끝났다.그리고 수속
서유리는 설영준에 관한 업계 뉴스에서 여진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스포트라이트와 마이크가 모두 설영준에게 향할 때 그는 눈에 띄지 않은 구석에서 자리를 지켰다.딱 떨어지는 슈트와 딱딱하게 굳은 얼굴, 설령 업계 거물과 비교한다고 한들 어디 하나 꿀리지 않았다.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기억력이 너무 뛰어나도 문제였다.이때,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그녀는 통화하는 여진의 모습을 발견했다.누가 봐도 오피스룩 차림에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그는 아랍 거래처 사장님을 모셔다 주고 돌아가는 길에 설영준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이내 전화로 업무 얘기를 주고받았다.통화를 마치고 나서 뒤를 돌아서는 순간 등 뒤에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누구...?”흠칫 놀란 여진은 상대방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서유리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곧이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설 대표님께서 왜 송재이 씨랑 헤어졌죠?”순간 넋을 잃은 여진은 곧바로 페이스를 되찾았다.“송 선생님이랑 아는 사이인가요?”“전 직장 동료예요.”서유리가 대답했다.“전...이요?”여진이 요점을 잽싸게 포착했다.서유리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머릿속에는 송재이와 밥을 먹던 저녁, 설영준을 언급했을 때 씁쓸함이 언뜻 스쳐 지나간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사실 그동안 설 대표님에 대한 이미지가 꽤 좋았거든요. 다른 재벌 2세와 다르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여자를 쉽게 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의 착각에 불과했죠. 대표님에게 관계를 끊어내는 건 밥 먹듯 쉬웠고, 송재이 씨만 불쌍하게 상처만 가득한 이곳을 떠나게 되는 신세라니... 남자란, 참.”서유리는 자기 할 말만 마치고 뒤돌아서 떠났다.여진은 어리둥절했다.하지만 송재이와 관련된 일인 이상 대충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서유리가 몇 걸음 못 가서 여진에게 따라 잡혔다.“저기요, 잠시만...”“저기라니? 서유리라는 이름이
그녀의 앞에 있는 지민건은 환한 미소를 지었고, 마치 몸 위로 내리쬐는 햇살처럼 따스하면서 훈훈한 느낌이 들었다.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그의 모습은 개과천선한 듯싶었다.지민건이 한 달 일찍 출소한 건 사실이며, 경주를 떠나 하성에 장착했다.원래는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감옥을 다녀온 기록이 있어 녹록지 않았다.다행히 본가에 집이 있는데 단지 오랫동안 비워뒀을 뿐이다.경주에서 사업이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는 심지어 까먹기도 했다.이제 인생의 바닥을 찍고 나니 이 집이 마지막 지푸라기가 될 줄은 몰랐다.그리고 잽싸게 팔아서 현금화했다. 비록 6천만 원밖에 안 되는 금액이지만 현재의 그에게 창업 자금으로 충분했다.지민건은 하성에서 자그마한 무역 회사를 설립해 바닥부터 시작했다.예전에 사업했던 경험을 토대로 실적을 차근차근 쌓아 나갔다.이번에 남도를 찾은 것도 사실 업무 때문이었다.원래 과거와 깔끔하게 이별하려고 했으나 낯선 도시에서 송재이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송재이는 남도 길거리 노포에서 지민건의 얘기를 잠자코 들어주었다.둘은 비빔국수를 먹으며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었다.“난 살면서 잘못한 짓이 참 많은데, 그중에서도 너한테 제일 미안했어.”지민건은 갑자기 화제를 돌리더니 송재이를 바라보았다.“주현아와 손을 잡고 아이를 낙태시킨 일은 회상할 때마다 죄책감이 들어. 어쩌면 사람을 죽여놓고 초상을 치러 주는 격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믿거나 말거나 미안한 건 사실이야.”아량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어찌 살인자를 용서하겠는가? 물론 그녀도 마찬가지였고, 변수가 있다고 하면 세월의 흐름과 경험의 축적, 옥살이 중 고난을 겪으면서 한풀 꺾인 지민건의 모습을 마주하니 이제는 훌훌 털어버려도 될 것 같았다.굳이 따지자면 털어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잊으라고 강요하는 셈이다.그동안의 나쁜 기억을 잊어야만 과거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법이다.송재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미 잃어버린 건 사과한다고 해서 되찾을
“전무님, 뭘 축하 하시는 건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요?”송재이는 고개를 들고 서도재를 향해 차갑게 웃었다.서도재는 눈썹을 들썩거리더니 입을 열었다.“민건이는 출소하고나서 한 발짝 한 발짝 힘들게 걸어왔어요. 그러다가 어렵게 저와 손을 맞잡았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민건이에게 아주 중요해요. 제가 줄지 말지는 제 기분에 달려 있어요. 송 선생님, 민건이를 도와줄 마음이 있다면...”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재이가 벌떡 일어났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지민건을 노려보았고 순간 정적이 흘렀다.그리고는 송재이가 서도재를 향해 입을 열었다.“저는 전무님이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결코 지민건을 도울 의사가 없어요. 저는 그와 친구도 아닌 데다가 그 회사의 어떠한 업무든지 성사시킬 의무가 없어요. 오늘은 민건이가 사람을 잘못 찾았을 뿐만 아니라 전무님도 마찬가지로 사람 잘못 찾았어요!”그녀는 옆에 있던 가방을 들고 발길을 돌려 레스토랑을 떠났다.송재이는 자기가 남도까지 왔는데 또다시 이런 난처한 일에 휘말리게 될 줄은 몰랐다.그녀가 걸어 나오자마자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송재이는 누군지 짐작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하지만 상대방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모른 채 여전히 손목을 붙잡았다.“재이야, 만약 네가 날 도와 이 프로젝트를 성사시킨다면 너에게 돈을 나눠줄게. 너 지금 직업이 없잖아. 돈을 좀 벌었다고 생각하고 말이야...”“지민건, 네가 무슨 자격으로?”참다못한 송재이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골목에 서서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시간이 많이 흘러서 나는 네가 정말 변한 줄 알았어. 네가 예전에 나에게 했던 일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미안해할 줄 알았어. 하지만 너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넌 똑같은 일을 여러 번, 계속 반복하고 있어. 나를 데리고 가서 설영준과 함께 술을 마시라고 하질 않나, 이번에는 또 나를 데리고 와서 서도재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질 않나... 내가 너한테 무슨 빚이라도
박윤찬은 일 때문에 남도에 출장을 온 것이었다.그가 거래처와 맥락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더없이 친숙한 그림자가 보였다.“박 변호사님?”송재이도 의아해하며 물었다.박윤찬은 아주 놀라워했다.그는 위아래로 그녀를 한 번 훑어보고서야 입을 열었다.“남도에 오셨다고 듣긴 했지만 진짜였네요. 살이 좀 빠지신 것 같아요.”마지막 한마디는 그저 혼잣말하는 것 같았다.송재이가 떠나려 했을 때는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곳을 떠나려 하는 생각뿐이었다.하지만 지금 다른 곳에서 옛 친구를 만나니 그녀는 여전히 매우 기뻤다.박윤찬은 그날 바로 경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에 송재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돌아간 후, 로펌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저녁이 다 돼서 밥을 먹을 때에야 그는 자신이 남도에서 송재이를 만난 사실을 설영준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이튿날 오전 비는 시간에 박윤찬은 설한 그룹을 찾아갔다.설영준은 마침 글을 쓰고 있었다.박윤찬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을 때,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이렇게 큰 사무실에 설영준 혼자뿐이었지만 박윤찬은 한 번도 그가 외로워 보이고 불쌍해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설영준이 불쌍하다고?이렇게 생각한 그는 피식 웃었다.자신의 이 황당한 생각을 비웃은 것이었다.설영준이 어떻게 불쌍할 수 있겠는가?“왜 웃죠?”인기척을 듣고서야 고개를 든 설영준이 무뚝뚝하게 물었다.“아무것도 아닙니다.”박윤찬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설영준 책상 맞은편에 앉아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에 걸쳤다.“한 가지 이야기해 드릴 게 있어요. 저 이번에 남도에 가서 송 선생님을 만났어요. 예술학교에 면접을 보러 간 것 같더라고요. 보아하니 거기에서 생활하고 싶은 모양이에요. 그렇게 되면 두 사람은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걸로 돼요...”“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설영준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설영준은 박윤찬이 그에게 알려준 송재이의 근황
설영준은 오랫동안 이곳에 오지 않았다. 방에 들어온 그는 불을 켰다. 안에 있는 가구의 배치는 모두 예전과 같았다.다만 예전에 비해 사람 사는 냄새가 많이 사라졌다.입구에는 여자 슬리퍼 한 켤레만 남았고 그가 늘 신던 슬리퍼는 보이지 않았다.그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송재이의 동작은 의외로 빨랐다.설영준은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들어가 그녀의 침실로 갔다.옷장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원래 그녀가 옷을 놓던 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그가 남겨두었던 몇 벌의 셔츠와 바지는 그대로였다.설영준의 시선은 자신의 옷 주위를 둘러보았다.그러자 아래 서랍에 놓인 열쇠고리가 눈에 들어왔다.그는 송재이에게 ‘설’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열쇠고리를 항상 곁에 두라고 말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경주를 떠날 때 열쇠고리를 그대로 남겨두었다.그날 밤, 송재이와 함께 야시장을 거닐던 때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이 함께 지냈던 순간들이었다.그녀는 이 ‘설’자가 달린 열쇠고리를 특히 좋아했다.그녀는 이런 열쇠고리가 흔하지 않았음에도 자기 손에 들어오게 된 건 천생연분이라고 말했다.그녀의 말에 무슨 뜻이 담겨있었는지 잘은 모르지만 설영준은 당시에 그 말을 듣는 걸 아주 좋아했다.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다음 날 그는 같은 가게 주인을 찾아내 똑같은 걸로 주문 제작했다.송재이는 ‘설’자가 씌어있는 열쇠고리를 두고 갔다.그는 두 열쇠고리를 모두 자기의 열쇠에 걸었다.‘설’ 자와 ‘송’ 자가 한데 엉겨 붙어 딸랑딸랑 맑은 소리를 냈다.최근 설한 그룹과 민여사의 회사는 프로젝트에 대해 협력하고 있었다.민여사는 남도로 가서 지역 조사를 했다.사흘 뒤 설영준도 남도로 갔다.이번 협력은 이전과 달랐다.세부 사항이나 많은 부분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초대 측은 그를 리우 호텔에 묵도록 했다.남도에 도착한 후, 여비서가 먼저 설영준을 대신하여 민여사를 만나 구체적인 사항을 설명했다.설영준은 자신의 호텔 룸에서 경주 회사의 임원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