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고 성씨 집안 사람들은 강씨 집안에 돈을 요구할 생각이었으나, 얼마 들어있지도 않은 세뱃돈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원래대로라면 마음을 가라앉힌 후 성신영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지만 바로 다음날 성신영을 바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성신영이 그들을 찾아온 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집을 돌려달라고 협박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래도 성신영은 친절히 그들에게 고급 호텔을 예약해 주었다. 호텔은 딱 하루만 예약이 되어 있었고, 장기 식권도 없어서 왕씨 집안 사람들이 불만을 표시하자 육경원이 불같이 화를 냈다. 육경원은 왕씨 집안 사람들과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며 상의도 없이 바로 사람을 불러 왕씨 집안 사람들을 내쫓아 버렸다. 왕씨 집안 사람들은 욕을 하며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시 쫓겨나고 말았고, 별장촌의 블랙리스트에 이름까지 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던 성신영이 왕소영에게 호텔을 예약해 하루를 묵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날 밤, 누군가는 걱정에 쉽게 잠에 들 수 없었고, 다른 누군가는 더더욱 잠에 들 수 없었다. 고정남은 한참을 주차장에 서있다가 결국 차에 올라타 공항으로 달려갔다.공항으로 가는 길에 고정남은 전화를 몇 통이나 했다.자신의 모든 인맥을 활용해 오늘 밤 출발하는 전용기 중 육씨 집안의 전용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고정남은 그날 밤의 모든 비행기 출발 시간을 늦췄다. 고정남은 이제 강씨 집안의 그 딸이 자신이 찾던 사람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고, 육시준 그 자식은 여전히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육시준이 비행 일정을 알려준 걸 보면 그도 자신을 도와주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고정남은 자신이 시간에 맞춰 공항에 도착할 수 있다면 다시 한번 그녀를 만날 수 있으며, 자신이 고의로 그녀를 기다리지 않은 게 아니라 이번 손님이 정말 중요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할 생각이었다. 고정남이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오늘 육시준이
육청수의 무례한 태도에 화가 날 법도 했지만 강미영은 애초에 그의 태도를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기에 조금도 불쾌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저 방금 육청수가 했던 말에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사람을 만날 시간은 없는데 절 조사하실 시간은 있으셨나 봐요.”육청수의 얼굴색이 조금 변했다. “….”“요즘 저희를 그렇게 조사하고 다니신다기에 저희한테 관심이 정말 많으신 줄 알았죠. 제가 잘못 생각했나 보네요.” 강미영이 육청수의 얼굴색이 변한 건 보이지도 않는 듯 말을 이었다. 그때 육청수가 꼬투리를 잡았다. “저희?”강미영이 웃었다. “네. 저 혼자 송씨 집안 사람들을 만난 건 아니니까요. 벌써 다 알고 계신 거 아니었어요?”육청수가 대답 없이 진중한 얼굴로 강미영을 바라보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강미영은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이 없는지 천천히 물을 한 입 마신 후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르더니 음식을 주문했다. 테이블 간 간격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사생활이 보장되는 곳이었지만 점심시간에도 사람이 많지 않아 너무 조용한 탓에 옆 테이블의 이야기가 다 들릴 정도였다. 육청수는 옆 테이블에 범상치 않은 외모의 남자가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그곳에 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육청수는 그저 강미영이 주문을 마친 뒤에도 말을 이어가지 않아 답답해하며 물었다. “혼자가 아니라면 누구랑 갔지?”“당연히 바론이죠. 오늘은 처리할 일이 많아서 도저히 시간을 못 내는 바람에 저만 왔어요, 양해 부탁드릴게요.”말투만 우아하고 예의가 발랐을 뿐, 실상은 방금 육청수가 강미영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조금도 온화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 말을 들은 육청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물었다. “그럼 오늘은 고작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나를 불러냈단 말이냐?”강미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한테 호기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당연히 직접 찾아뵈어야죠. 만나게 될 사람들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어 있으니 그렇
육청수는 괜히 더 말했다간 본인에게도 좋을 게 없을 것이라는 걸 깨닫고 더 이상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이 여자는 신분은 낮을지언정 말싸움 실력은 낮지 않았다. 육청수는 앞으로 이 여자에게 시간을 쏟지 않기로, 그리고 강씨 집안의 일에 수를 쓰지도 않기로 했다. 그저 결혼식 날 이들이 무엇을 가지고 일을 벌일지 보고 싶었다. 밥맛이 없어진 육청수는 할 말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가던 육청수가 고개를 돌려 옆 테이블을 바라보자 그곳엔 옆모습만 봐도 누구라도 눈을 뗄 수 없을 것 같은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육청수는 마음이 심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시선을 돌리더니 그곳에서 멀어졌다. 육청수가 떠나고 난 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켜 강미영의 반대편에 앉았다.식당 종업원이 아무 반응이 없는 강미영을 보고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식기를 다시 세팅해 주었다. 분위기가 우울해지자 강미영이 바론 공작의 차갑고 불쾌하다는 얼굴을 보며 물었다. “육 어르신이 각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잖아, 이미 조사까지 했으면서 굳이 화낼 이유가 있어?”바론 공작이 차갑게 대꾸했다. “육씨 집안에 어른이 없다는 거짓말을 하니까…”“나이만 어른이 아니라 진짜 어른을 뜻하는 거잖아.” 강미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실제로 육시준이 육씨 집안에 더 이상 어른이 없다라고 말한 것은 육시준도 육청수를 집안의 어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의 결혼은 육시준만 강유리의 곁에 서준다면 큰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집안 배경, 이익 관계 같은 것들은 중요하기도, 전혀 중요하지 않기도 한 것이라는 것을 강미영도 뒤늦게 깨달았다. 두 사람의 마음이 맞아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앞으로 달려 나간다면 그 무엇도 둘 사이를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다만 둘 중 하나라도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 관계의 끝은 오직 비극일 것이다. 바론 공작 역시 그것을 모르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
바론 공작의 기대치는 단 한 번도 낮아진 적이 없었다.다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커졌기 때문이다.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 장악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장악하고 강유리의 행복을 위해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싶을 뿐이다.“처음부터 장악할 수 없는 일들도 있는 법이야.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가 내린 결정이 잘못이었을 수도 있어.”강미영은 나지막이 의미심장하게 속삭였고 바론 공작은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뭐?”이에 강미영은 한숨을 쉬며 말머리를 돌렸다.“가자. 이제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이야.”강민영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숨기라고 한 강학도는 바로 이런 결정적인 중요한 시기에서 착오가 생기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였다.여러 해 동안 준비해 왔는데,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모든 걸 망치게 할 수는 없었다.빚은 언제든지 돌려받아야 하지만, 아직은 그때가 아니었다.설날의 기쁨이 지나고 나서 밀려오는 적막함은 여느 때와 달리 더없이 짙었다.강유리는 집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휴식하고 나서야 겨우 살짝 기운을 차렸다.그것도 업무에 관해 걸려 온 전화로 강제로 말이다.구원 쪽의 계약서는 이미 체결했고 합작 홍보 방안에 대한 서류도 보내왔는데, 아직 답장을 얻지 못했다.관련 담당자는 내내 답장을 얻지 못하자, 행여나 업무상의 차질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며 위로 보고했다.결국 관련 브랜드 담당자이자 강유리와 직접 계약을 맺은 사람으로부터 직접 전화가 걸려 왔다.“강 대표님, 지난번 합작에 대해서 혹시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라도 있습니까?”이에 강유리는 망연하기 그지없었다.“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요? 그런 거 없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담당자는 머뭇거리며 다시 운을 떼기 시작했다.“그럼, 그 합작 홍보 방안에 대해서 이번 주 내로 답장 주시겠습니까? 요즘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고 듣긴했는데, 행여나 방해되는 건 아닌지 해서 조심스럽게 연락드리는 바입니다. 하지만 요즘에 홍보해야 해서......”강유리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재빠르게
강유리는 전화를 끊자마자 도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잘 만났어. 그리고 결혼식은 고씨 가문과 아무런 관련도 없을 거야. 구원 쪽에서 홍보 방안에 대해 뭐라고 그랬어?”도희는 멈칫거리더니 즉시 목청을 높였다.“대박! 이제야 내 질문에 답장하는 거야?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 만약 이번에 얘기도 제대로 되지 않고 공작님께서도 돌아오지 않으셨다면 우리 둘째 삼촌한테 부탁해서 널 시집보내달라고 할아버지하고 얘기까지 해 놓았어. 우리 도씨 가문은 영원히 네 친정으로 지켜줄 거니 그런 줄 알아.”이에 강유리는 눈꼬리를 실룩거리며 감동한 외에 살짝 어이가 없기도 했다.“됐거든.”그냥 간단하게 결혼하는 것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오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절차에 지나지 않기에 별다른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왜 다들 내 손 잡고 날 보내려고 하는 거지......’“근데 왜 이제야 답장하는 거야? 너 나한테 속이는 거 있지? 안 되겠어. 내가 지금 갈게.”도희는 시름이 놓지 않아 당장 강유리를 찾으러 가려고 하며 전화까지 끊으려고 했다.그러자 강유리는 다급히 도희를 불렀다.“잠깐만! 일단 홍보 방안부터 보내 주면 안 돼?”결혼보다 합작이 더욱 중요한 일이니 더는 미루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도희는 몇 초간 멈칫거리고 나서 간단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별다른 특이한 점은 없어. 그냥 네 결혼식 끝나고 나서 레드브라이드 예매와 같이 출시하는 거야. 근데 난 결혼식이 좋은 홍보 기회일 거 같아서 가능하다면 결혼식 당일에 하고 싶어.”그러나 만약 고씨 가문에서 시집을 간다면 성신영에게 이목이 쏠릴 것이 불 보듯 뻔하다.게다가 성신영은 LK 주얼리 새 제품 “골든”을 착용하고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그때가 되면 아마 성신영에게 밀려 홍보 효과가 그다지 좋지 않을 수도 있다.강유리는 사색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해도 될 거 같아. 네 생각대로 하고 얼른 답장해 드려.”그 말에 도희는
그들의 방안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강 대표님 결혼식에서 발표한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언론사들도 초청할 것입니까?”이에 도희는 확실하게 대답했다.“물론입니다.”담당자는 잠시 멈칫거리더니 자기 의사를 밝혔다.“좋은 기회라는 점은 저도 잘 알고 있지만, 온라인에 적지 않은 스캔들이 돌고 있습니다. 강 대표님께서 고씨 가문 아가씨와 한 날에 식을 올린다고......”뒤에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다들 명확히 알고 있다.친 딸과 의붓딸의 대우는 분명히 다를 것이고 강유리는 그날에 분명히 성신영의 들러리가 될 것이다.남편 될 사람이 아무리 육시준이라고 한들, 홍보 효과는 아마 좋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생각이 들었다.“같은 날에 식을 올리는 건 사실이지만, 고씨 가문과 그 어떠한 관계도 없습니다. 공인이었던 성신영 씨의 인품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죠? 이런 방식으로 남을 짓밟는 건 지금껏 자주 사용해 왔던 성신영 씨의 수단에 불과합니다.”고희는 간들간들한 목소리로 설명했다.그러자 상대방은 몇 초 동안 망설이며 조심스러워했다.“알겠습니다. 우리 측에서도 좀 생각해 봐도 되겠습니까?”성신영의 인품에 대해서 그들도 똑똑히 알고 있다.만약 고씨 가문이라는 빽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성신영과 합작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들은 강유리의 수단에 대해서도 명확히 알고 있다.스타인 엔터를 가장 좋은 사례로 들 수 있다.그때 스타인 엔터는 강유리의 맹렬하고 신속한 스카우트에 자기를 배신한 남자 친구를 땅바닥까지 떨어지게 하였다.지금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여론은 육시준이 뒤에서 받쳐 주고 있으며 요언을 물리칠 수 있다.그래서 고씨 가문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설명에 지켜보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도희는 그들의 우려를 잘 알고 있어 더는 말하지 않았다.“그렇게 하세요.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강 대표님께 뜻을 잘 전달하겠습니다. 직접 나서서 그 우려를 물려 쳤으면 좋겠네요.”......강유리는 전화를 끊고 나서 바로
육시준은 순간 말 문이 턱 막혀 버렸다.차 키를 들었다고 해서 꼭 자기를 찾으러 온다는 보장이 없다고 생각하며 별로 미덥지도 않았다.그러나 오늘 강유리의 기분이 좋은 것을 보아 깊이 따지려고 하지 않았다.“술집에 갈 필요 없어. 요즘 그럴 시간도 없었을 거야.”그러자 강유리는 의문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좀만 기다려. 이따가 집에 오면 직접 물어봐봐.”육시준은 멈칫거리더니 덧붙여 말했다.“그리고 그렇게 천진난만한 어린 소녀는 아니야.”단순하고 천진한 어린 소녀가 낯선 나라에서 인맥이 그 정도로 넓은 리가 없기 때문이다.만약 릴리 뒤에 사람을 붙이지 않았더라면, 은밀한 그 일을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강유리는 눈썹을 들썩이며 문득 강민영의 묘지에서 돌아온 그날에 그들이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그때 육시준은 릴리는 아주 단순하며 강미영은 보호를 잘했다고 그랬었다.근데 이제야 그 뒤에 숨겨진 대단한 일을 발견한 듯하다.강유리는 육시준의 말을 믿고 차 키를 내려놓았지만, 요즘 릴리가 무엇을 하고 다녔는지, 육시준은 왜 갑자기 릴리에 대해 인상이 바꾸게 되었는지 참지 못해 캐묻기 시작했다.하지만 육시준은 덤덤하게 강유리를 풀어 주고는 대답하지 않고 냉정하게 침실로 올라갔다.그러자 강유리는 입을 삐죽거리며 치사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샤워를 마치고 육시준은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아래층으로 내려오자 테블릿에 대고 정신없이 클릭을 하고 있는 강유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진지한 모습은 요즘 슬픔에 잠겨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때와 사뭇 달랐다.육시준은 그윽한 눈빛으로 강유리를 바라보며 이러는 것도 좋다며 생각했다.“자기야, 여기 와봐.”강유리는 고개를 들어 육시준을 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그러자 육시준은 강유리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태블릿 화면을 보았다.“웨딩드레스 보고 있어?”“구원과 합작하고 있잖아. 그쪽에서 지금 컬래버 해서 홍보하고 싶다고 하는데, 괜찮다면 결혼식 웨딩드레스 그쪽 브랜드로 바꾸고 싶어.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며 강유리는 침을 삼키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육시준에게 뜨거운 키스를 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그 찰나 도어락이 울렸다.“띠-”이윽고 익숙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문 앞에서 울려 퍼졌다.“이 타이밍에 너무 눈치 없이 돌아온 건 아니지?” “......”강유리는 육시준의 가슴에 반쯤 기대어 몹시나 야릇한 자세를 하고 있었고 이 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들어 대경실색한 모습으로 바라보았다.이러한 장면을 연출하게끔 한 장본인은 지금 문 앞에 서서 빙그레 웃고 있지만, 두 눈에는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조롱의 빛도 아른거렸다.어색하기 그지없는 사람은 강유리와 육시준이고 릴리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외할아버지 댁으로 보낼 걸 그랬어.’‘외할아버지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귀까지 발개졌지만, 강유리는 침착한 척을 했다.그러고 나서 아주 자연스럽게 육시준의 몸 위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우리 게임하고 있었어. 너무 달리 생각하지 마.”“무슨 게임인데? 사랑의 게임?”“……”‘이런 악마 같은 계집애.’강유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릴리를 바라보며 계속 더 설명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싱글인 젊은 여자아이가 어쩌면 유부녀보다 더욱 뻔뻔할 수 있을지 하는 의문도 들었다.이때 육시준도 자리에서 일어나 강유리의 옷을 손수 정리해 주었다.이윽고 육시준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마침 잘 왔어. 저녁부터 먹자. 먹고 나서 우리하고 얘기 좀 해.”그 말에 릴리의 두 눈은 살짝 번쩍였고 불편해지기 시작했다.“짐 챙기러 온 거야. 외할아버지한테 가서 며칠 동안 지낼 생각이야. 여기에 있으면, 두 사람 다 불편하잖아.”“그래. 근데 얘기다 끝내고 가.”“……”릴리는 마침내 완전히 주눅 들어 버렸다.이에 강유리는 눈썹을 살짝 들썩이며 먹이 사슬 가장자리의 압박이 아닌가 싶었다.해외에서 각별히 수렴한 모습으로 지낸 것은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인제 국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