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집에 도착한 육시준은 정원에서 문기준의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고정남 대표가 사모님과 함께 식사한 테이블에서 빨대를 챙겨 병원에 도착한 것으로 보입니다.”이에 육시준이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어느 병원인데?”“고성그룹 산하의 DNA 감식센터입니다.”“...”육시준의 침묵에 문기준 역시 긴장하기 시작했다.솔직히 오늘 처음 고정남의 행동을 지켜볼 때까지만 해도 이 남자 혹시 변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여성이 사용했던 빨대를 몰래 챙기는 모습, 누가 봐도 정상처럼 보이진 않았으니까.하지만 고정남이 그 길로 바로 병원으로 향하는 걸 본 순간, 지금까지 육시준이 그에게 알아보라고 했던 내용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며 머릿속에 놀라운 가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앞으로 찰리와 함께 움직이도록 해. 고정남 대표가 검사결과지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이번 일을 위해 히든카드나 다름없는 프로 해커 찰리까지 동용하다니. 이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건지 알아챈 문기준의 목소리가 한결 더 무거워졌다.“알겠습니다.”통화를 마친 육시준은 잠깐 고민하다 임강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정남도 귀국한 마당에 아직도 고성그룹은 고 회장 위주로 돌아가고 있나?”‘갑자기 고성그룹에 대해 물으신다고?’흠칫하던 그가 살짝 안경테를 올리며 대답했다.“최근 고성그룹에 큰 이슈는 없는 것 같습니다. 굳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라면 되찾은 딸에 대한 기자회견과 그 자리에서 소속 디자이너가 새로운 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쯤이랄까요?”“디자이라면 추연화인가?”“네. 추연화는 워낙 고성그룹과 각별한 사이입니다. 화제성 면에서 세마를 눌러버리기 위해 특별히 이번 기회를 이용하려는 것 같습니다.”“...”그저 입을 꾹 다물고만 있는 육시준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방법이 없으니 임강준은 말을 이어갔다.“저희 LK 쥬얼리 소속의 두 디자이너도 전부 결정에 진출했습니다. 세마도 꽤 마음에 들어한다고...”“추연화가 포인트네. 고성그룹이 확 바빠지게
“이미 뉴스에 나왔으니까.”육시준이 대답했다.‘하, 내가 성홍주를 너무 과소평가했네. 그 정도로 경고하면 당분간이라도 가만히 있을 줄 알았는데. 감히 선수를 쳐? 그럼 이제 작품을 발표해도 내 입장만 난처해지게 생겼잖아...’“이게 정말 이번 대회의 메인 테마야?”육시준이 다시 한번 캐물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강유리가 고개를 들었다.“어느 쪽인 것 같아?”설계도면을 내려놓은 육시준이 뭔가 더 말하려던 그때, 뭔가 묘한 향기가 풍겨오고 육시준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강유리의 날카로운 펀치가 바로 육시준의 코 앞에서 멈췄다.“내가 이기면 그때 얘기해 줄게.”여유롭게 펀치를 피한 육시준이 어깨를 으쓱했다.“그냥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얘기해.”며칠 전 육시준과의 “난투”에서 패배한 뒤로 강유리는 시간 날 때마다 육시준에게 기습공격을 하곤 했다.뭐 그때마다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말이다.“어쭈 피해?”...그리고 5분 뒤.두 손을 완전히 뒤로 꺾이고 얼굴은 책상에 처박다시피 한 강유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육시준! 진짜 와이프한테 이렇게까지 할 거야? 그 외모로 왜 20년 동안 솔로로 살았나 했더니... 성격이 더러워서였네!”이에 육시준은 손목에 더 힘을 주며 우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응? 뭐라고?”“아아아, 아파! 이거 좀 놔봐!”“일단 질문에 대답부터 해.”“대회에 주제 같은 건 없었어! 추연화 그 자식이 내껄 베낀 거라고!”강유리의 대답에 육시준의 눈이 살짝 커졌다.추연화, 그쪽으로 뭔가 시나리오를 써볼까 했더니 이렇게 바로 소재를 던져주시네...“왜 그렇게 확신해?”“그거야...”육시준의 손목에 힘이 점점 풀리기 시작하자 이때다 싶은 생각에 강유리는 그의 다리 사이를 향해 킥을 날렸다.화들짝 놀란 육시준이 뒤로 물러서며 강유리는 드디어 자유를 얻게 되었다.“미쳤어? 얘가 얼마나 중요한데! 너, 신중하게 생각해. 남은 부부생활 행복하게 할 수 있냐가 달린 문제기도 하니까.”육시준이 이를 악물었다.
한편, 진짜 강유리의 싸움실력을 확인한 육시준은 나름 꽤 놀란 상태였다.그리고 저번 레이싱 사건 때도 봐주는 건 상대를 존중하는 게 아니라며 극히 분노하던 모습도 떠올랐다.‘부부사이에도 승부욕을 불을 태우는 스타일이었나...’방금 전 난투로 살짝 흐트러진 옷 사이로 육시준의 매력적인 쇄골라인이 그대로 드러났다.“그래, 내가 졌다.”“졌다고?”“그래, 내가 졌어. 이제 어떻게 할 거야?”육시준의 큰 손이 강유리의 얇은 허리를 감싸 쥐었다.풀썩.강유리가 자연스럽게 육시준 위로 쓰러지고...얇은 섬유 사이로 느껴지는 뜨거운 손바닥의 온기가 허리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야릇한 자세까지, 강유리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하지만 겉으론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어여쁜 아녀자를 보쌈하여 납치한 산적 두목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오늘은 이 자세로 하는걸로. 어때?”그녀의 말에 육시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이런 혜택이 있을 줄 알았다면 좀 더 빨리 져줄 걸 그랬다.얇은 허리를 감싸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긴 키스가 시작되었다.살을 에는 칼바람이 부는 차가운 날씨와 달리 후끈 달아오른 서재의 온도 때문에 창문에 얇은 안개가 드리웠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지칠대로 지친 강유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큼, 절대 내가 먼저 지친 거 아니야. 아까 싸우느라 힘, 힘을 너무 많이 빼서 그래.”성관계에서까지 주도권을 차지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강유리를 품에 끌어안은 육시준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그래, 그래. 그런데... 추연화가 네 아이디어를 표절했다고 했잖아. 왜 그렇게 확신해?”“하, 이렇게 바로 일 얘기로 넘어가는 거야?”“그럼 뭐? 아까 하던 거 계속해?”화들짝 놀란 강유리가 육시준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쓰지만 헛수고에 불과했다.“그래, 일 얘기하자 일. 내가 기막힌 영감이 떠올랐... 읍!”남은 말은 결국 폭풍 같은 키스에 휘말려 사라 져버렸다.그렇게 그날 밤, 서재의 조명은 새벽
침대에서의 첫 전투가 패배로 끝난 뒤로 몸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더니 그걸로 소심하게 복수를 하는 게 분명했다.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극도의 피곤함에 강유리는 기절하듯 잠이 들어버렸다.도로를 밝히는 가로등의 따뜻한 조명으로도 가시지 않는 살벌한 추위의 겨울밤이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한편, 고성병원, vip 휴식실에 고정남이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있다.그리고 잠시 후, 정전 한번, 인터넷 고장 한번, 검사 장치 고장 한번.오늘따라 파란만장했던 친자 검사 결과는... 불일치였다.생물학적으로 친자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는 내용의 결과지를 훑어보던 고정남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이런저런 사고 때문에 반나절 넘게 기다렸지만 기분이 언짢지 않았던 건, 어디까지나 결과에 대한 확신이 어느 정도 있어서였다.그런데... 종이에 찍힌 결과는 고정남의 흥분된 마음에 찬물을 끼얹어버렸다.“오래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오늘은 왠지 자꾸 사고가 끊이지 않아서...”굳은 표정의 고정남의 눈치를 살피던 의사가 변명을 늘어놓았다.“전에는 이런 상황이 없었다고 했나?”이때 고정남이 고개를 번쩍 들고 그 표정에 깜짝 놀란 의사가 뒤로 살짝 한발 물러섰다.“아, 네. 정전과 인터넷 연결은 뭐 그렇다 치더라도 최첨단 설비가 이렇게 말도 안 되게 고장날 리가 없는데... 오늘은 기기 재부팅만 몇 번을 했는지...”“그게 결과에 영향을 줄 수도 잇지 않나?”“아, 그건...”의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비록 여러 가지 사고가 있긴 했지만 결과는 정확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기기는 그렇다 쳐도 샘플을 취급한 이들 전부 프로, 결과가 잘못되었을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고 의사는 확신했다.“그럴 리가 없어. 왜 강유리와 관련된 일은 전부 이렇게 틀어지는 거지. 이게 전부 우연일 리가 없어.”연신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고정남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오늘 있었던 일, 외부에 절대 유출하지 마세요.”고정남의 수행 경
한편, 경호원이 별뜻없이 뱉은 말에 공허하던 고정남의 눈동자에 다시 빛이 감돌았다.‘그래. 뭔가 문제가 있는 게 확실해. 사실 난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 그 마지막 확신이 그 정도로 중요한 건 아니잖아?’자세를 고쳐앉은 고정남이 생각을 이어갔다.‘아니지. 그러고 보니 LK쪽에서는 왜 내가 딸을 찾는 걸 그렇게 방해하는 거지? 육시준 그 자식이 무슨 자격으로...’“유강그룹에서 주최한다는 그 디자인대회는 어떻게 돼가고 있지? 강유리, 성홍주 두 사람이 아주 강하게 대립하고 있다면서? 강유리는 세마, 성홍주는 추연화를 지지한다고 들었어.”“네. 추연화와 세마가 내놓을 작품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 특히 추연화 디자이너가 선보일 작품의 홍보대사는 신영 아가씨가 아닙니까? 신영 아가씨의 신분을 공개하는 기자회견장에 보석도 함께 보여줄 예정입니다.”“...”경호원의 설명에 고정남은 미간을 찌푸리고 경호원은 말을 이어갔다.“추연화 디자이너는 회장님과 아주 각별한 사이입니다. 신영 아가씨의 신분을 밝히는 자리라면 언론사들이 잔뜩 모일 테니 이를 기회로 본 거겠죠. 실력적으로 보면 추연화 디자이너가 세마에게 밀리는 게 사실이니까요.”“우리 동생... 몇년 사이에 많이 자랐네.”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갖 수단으로 딸을 찾으려는 그를 방해하더니 정작 딸을 찾고 나니 바로 이용하기 시작하는 점까지.‘아버지와 참 닮았어.’“조치를 취할까요?”경호원이 물었다.“아니야. 동생이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주는데 받아줘야지.”사생아, 지금 다시 딸을 되찾는다 해도 그 아이에게 달릴 이 꼬리표가 신경 쓰여 그 동안 망설이고 또 망설였던 고정남이다.‘그래. 누군가 그 모욕을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성신영 그 아이가 받는 게 나을 거야. 힘을 더 쌓은 뒤 고정철의 만행을 파헤친다면... 그땐 대중들도 되찾은 사생아보다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른 고정철에게 집중하게 될 테니까.’“그래도 일단 더 이상 내가 하려는 일에 끼어들지 못하겐 해야겠어.”
“그래. 우리 집으로 와. 나 오늘 회사 안 나갈 예정이니까.”“그래.”통화를 마치고 크게 기지개를 켜던 강유리는 어느새 문 앞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육시준을 발견했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바로 차가운 표정으로 돌변했다.“회사 안 나갔어? 언제 들어온 거야? 왜 노크는 안 해?”“아침은 네가 좋아하는 계란찜이야. 내가 아주머니한테 부탁했어.”이에 육시준은 동문서답으로 응했다.계란찜? 방금 전까지 아침 생각이 전혀 없었던 그녀인데 어느새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다른 반찬도 네가 좋아하는 걸로 준비해 달라고 했으니까 얼른 일어나서 밥부터 먹어. 일 얘기는 천천히 하고.”어느새 옷장까지 다가온 육시준이 옷을 꺼내 강유리에게 건네주더니 무덤덤하게 물었다.“뭐, 내가 도와줘?”이에 겨우 조금 풀렸던 강유리의 표정이 다시 확 어두워졌다.“싫어! 나가! 당신이랑 하룻동안 절교할 거니까.”이불로 몸을 꽁꽁 둘러싸 맨 강유리가 소리쳤다.“하루는 너무 길지 않아? 조금 있다가 친구도 온다면서? 우리 사이가 너무 냉랭하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어느새 어물쩡 침대맡에 앉은 육시준이 강유리를 달래기 시작했다.‘그런가...’습관처럼 손톱을 뜯던 강유리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안돼! 지금 저 페이스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내 친구가 오든 말든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 회사 안 가?”“안 갈 거야. 추연화가 네 작품을 표절했다는 사실에 굉장히 큰 관심이 가서 말이야.”“...”‘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아주 한번 물면 끝까지 놓지를 않아요.’“추연화의 작품 출시 여부가 LK쥬얼리와도 관련이 있나 보지?”강유리의 질문에 육시준은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뭐 LK에 영향이 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육시준이 더 관심을 가지는 건 이것이 고성그룹을 상대할 좋은 패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추연화는 어디까지나 고성그룹 사람이야. 추연화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건 고성그룹 쪽이겠지. 육경원이 갑자기
아침 식사 시간 후, 도희 부부와 신주리 그리고 이런 가십거리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육경서까지 차례로 강유리의 집을 방문했다.컴퓨터를 켜던 강유리가 짜증스런 눈길로 육경서를 힐끗 바라보았다.“도련님은 왜 오셨어요? 오늘 안 바쁘세요?”어차피 신주리와의 관계도 이미 들켰겠다, 육경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아직 휴가 중이잖아요 저. 주리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졸졸 따라가야죠.”자연스레 허리에 감은 손을 내려다보며 경고의 시선을 보내는 신주리를 향해 찡긋 미소를 지은 육경서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형수님은 우리 엄마, 아빠 스파이나 마찬가지야. 우리가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할 거 아니야. 협조 좀 하지?”하지만 신주리는 불편해서 죽겠다는 얼굴로 손을 걷어냈다.“친구 앞에서까지 연기하려니까 불편해서 그러지.”“그럼 연기라고 생각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야?”육경서의 속삭임에 화들짝 놀란 신주리가 고개를 돌렸다.‘뭐지? 왜 심장이 뛰고 난리야. 볼도 조금 뜨거워진 것 같고. 설마... 나 어디 아픈가?’“두 사람 그만 좀 하죠. 나 두 사람 팬인데 자꾸 이런 모습 보여줄 거예요?”“에이.”이에 육경서가 특유의 넉살좋은 미소를 지었다.“좋아하는 연예인 사생활 정도는 존중해 줘야죠? 그런데 알렉스 씨가 내 팬인 줄은 몰랐네. 나 남자 팬 별로 없는데.”“누가 육경서 씨 팬이랍니까? 전 신주리 씨 팬입니다. 항상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죠.”그러자 신주리는 알렉스를 흘겨보다 도희에게 속삭였다.“뭐야. 네 남편이 날 딸이라고 생각한대. 이거 족보 꼬이는 거 아니야?”“워낙 꼰대라서 그래. 아주 집에서도 아빠보다 잔소리가 더 많아요.”도희는 이미 익숙해진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됐고. 일 얘기부터 하자. 추연화, 뭔가 이상하다는 거 언제부터 발견한 거야? 알렉스 말론 추연화는 한 번도 네 사무실에 들어간 적 없다던데.”한편, 컴퓨터 앞에 앉아 신주리와 육경서의 투닥거림을 바라보던 강유리는 육시준과 시선이 마주친
“자기야, 진정 좀 해.”잔뜩 흥분한 얼굴로 벌떡 일어선 도희를 다시 앉히게 한 알렉스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이때,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육시준이 입을 열었다.“추연화와 오랜 시간 동안 라이벌 관계였으니 그쪽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라이벌이라뇨! 실력 차이가 이렇게 심한데 라이벌은 무슨!”도희가 또다시 발끈했다.“그래요? 라이벌이라고 칭할 수준도 안 된다면 뭐가 그렇게 걱정인 거죠?”“...”“추연화는 몰래 세마의 컨셉을 엿보았고 감시카메라 기록을 지웠어요. 굉장히 초조하고 조심스러웠다는 걸 의미하죠. 그런데 그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왜 두 번째 시도를 했을까요? 아마... 한 번 본 거로는 부족했기 때문이겠죠?”“맞아.”강유리도 육시준의 의견에 동조했다.“추연화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잖아? 그리고 내 컨셉은 대충 엿보는 걸로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두 결과물이 동시에 대중 앞에 드러난 순간, 누가 누굴 베낀 건지, 다들 알게 될 겁니다. 대중들 눈이 옹이구멍은 아니니까요.”두 사람의 설명을 들을수록 도희의 눈은 점점 더 커다래져만 갔다.“미리 네 컨셉을 얘기한 것도 경고한 거나 마찬가지였네? 괜히 일 키우지 말라고.”“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추연화, 고성그룹 쪽 사람이야. 괜히 안 좋게 엮여서 좋을 게 없으니까.”하지만 육시준은 그녀의 말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런 걱정을 해. 내가 너한테 했던 말 잊은 거야?”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하라고. 영원히 네 편이 되어주겠다고 말했는데. 아직도 그가 못미더운가 싶어 조금 섭섭했다.역시나 그의 생각을 읽은 강유리가 육시준의 무릎을 어루만졌다.“당신은 육경원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하잖아. 괜히 나까지 일 키울 거 있어?”‘뭐지? 내가 그렇게 약해 보였나? 육경원이 나한테 꽤 위협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그녀의 의도와 달리 육시준은 진지한 반성을 시작했다.“형수님, 형이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