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의 첫 전투가 패배로 끝난 뒤로 몸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더니 그걸로 소심하게 복수를 하는 게 분명했다.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극도의 피곤함에 강유리는 기절하듯 잠이 들어버렸다.도로를 밝히는 가로등의 따뜻한 조명으로도 가시지 않는 살벌한 추위의 겨울밤이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한편, 고성병원, vip 휴식실에 고정남이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있다.그리고 잠시 후, 정전 한번, 인터넷 고장 한번, 검사 장치 고장 한번.오늘따라 파란만장했던 친자 검사 결과는... 불일치였다.생물학적으로 친자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는 내용의 결과지를 훑어보던 고정남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이런저런 사고 때문에 반나절 넘게 기다렸지만 기분이 언짢지 않았던 건, 어디까지나 결과에 대한 확신이 어느 정도 있어서였다.그런데... 종이에 찍힌 결과는 고정남의 흥분된 마음에 찬물을 끼얹어버렸다.“오래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오늘은 왠지 자꾸 사고가 끊이지 않아서...”굳은 표정의 고정남의 눈치를 살피던 의사가 변명을 늘어놓았다.“전에는 이런 상황이 없었다고 했나?”이때 고정남이 고개를 번쩍 들고 그 표정에 깜짝 놀란 의사가 뒤로 살짝 한발 물러섰다.“아, 네. 정전과 인터넷 연결은 뭐 그렇다 치더라도 최첨단 설비가 이렇게 말도 안 되게 고장날 리가 없는데... 오늘은 기기 재부팅만 몇 번을 했는지...”“그게 결과에 영향을 줄 수도 잇지 않나?”“아, 그건...”의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비록 여러 가지 사고가 있긴 했지만 결과는 정확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기기는 그렇다 쳐도 샘플을 취급한 이들 전부 프로, 결과가 잘못되었을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고 의사는 확신했다.“그럴 리가 없어. 왜 강유리와 관련된 일은 전부 이렇게 틀어지는 거지. 이게 전부 우연일 리가 없어.”연신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고정남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오늘 있었던 일, 외부에 절대 유출하지 마세요.”고정남의 수행 경
한편, 경호원이 별뜻없이 뱉은 말에 공허하던 고정남의 눈동자에 다시 빛이 감돌았다.‘그래. 뭔가 문제가 있는 게 확실해. 사실 난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 그 마지막 확신이 그 정도로 중요한 건 아니잖아?’자세를 고쳐앉은 고정남이 생각을 이어갔다.‘아니지. 그러고 보니 LK쪽에서는 왜 내가 딸을 찾는 걸 그렇게 방해하는 거지? 육시준 그 자식이 무슨 자격으로...’“유강그룹에서 주최한다는 그 디자인대회는 어떻게 돼가고 있지? 강유리, 성홍주 두 사람이 아주 강하게 대립하고 있다면서? 강유리는 세마, 성홍주는 추연화를 지지한다고 들었어.”“네. 추연화와 세마가 내놓을 작품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 특히 추연화 디자이너가 선보일 작품의 홍보대사는 신영 아가씨가 아닙니까? 신영 아가씨의 신분을 공개하는 기자회견장에 보석도 함께 보여줄 예정입니다.”“...”경호원의 설명에 고정남은 미간을 찌푸리고 경호원은 말을 이어갔다.“추연화 디자이너는 회장님과 아주 각별한 사이입니다. 신영 아가씨의 신분을 밝히는 자리라면 언론사들이 잔뜩 모일 테니 이를 기회로 본 거겠죠. 실력적으로 보면 추연화 디자이너가 세마에게 밀리는 게 사실이니까요.”“우리 동생... 몇년 사이에 많이 자랐네.”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갖 수단으로 딸을 찾으려는 그를 방해하더니 정작 딸을 찾고 나니 바로 이용하기 시작하는 점까지.‘아버지와 참 닮았어.’“조치를 취할까요?”경호원이 물었다.“아니야. 동생이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주는데 받아줘야지.”사생아, 지금 다시 딸을 되찾는다 해도 그 아이에게 달릴 이 꼬리표가 신경 쓰여 그 동안 망설이고 또 망설였던 고정남이다.‘그래. 누군가 그 모욕을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성신영 그 아이가 받는 게 나을 거야. 힘을 더 쌓은 뒤 고정철의 만행을 파헤친다면... 그땐 대중들도 되찾은 사생아보다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른 고정철에게 집중하게 될 테니까.’“그래도 일단 더 이상 내가 하려는 일에 끼어들지 못하겐 해야겠어.”
“그래. 우리 집으로 와. 나 오늘 회사 안 나갈 예정이니까.”“그래.”통화를 마치고 크게 기지개를 켜던 강유리는 어느새 문 앞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육시준을 발견했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바로 차가운 표정으로 돌변했다.“회사 안 나갔어? 언제 들어온 거야? 왜 노크는 안 해?”“아침은 네가 좋아하는 계란찜이야. 내가 아주머니한테 부탁했어.”이에 육시준은 동문서답으로 응했다.계란찜? 방금 전까지 아침 생각이 전혀 없었던 그녀인데 어느새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다른 반찬도 네가 좋아하는 걸로 준비해 달라고 했으니까 얼른 일어나서 밥부터 먹어. 일 얘기는 천천히 하고.”어느새 옷장까지 다가온 육시준이 옷을 꺼내 강유리에게 건네주더니 무덤덤하게 물었다.“뭐, 내가 도와줘?”이에 겨우 조금 풀렸던 강유리의 표정이 다시 확 어두워졌다.“싫어! 나가! 당신이랑 하룻동안 절교할 거니까.”이불로 몸을 꽁꽁 둘러싸 맨 강유리가 소리쳤다.“하루는 너무 길지 않아? 조금 있다가 친구도 온다면서? 우리 사이가 너무 냉랭하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어느새 어물쩡 침대맡에 앉은 육시준이 강유리를 달래기 시작했다.‘그런가...’습관처럼 손톱을 뜯던 강유리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안돼! 지금 저 페이스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내 친구가 오든 말든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 회사 안 가?”“안 갈 거야. 추연화가 네 작품을 표절했다는 사실에 굉장히 큰 관심이 가서 말이야.”“...”‘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아주 한번 물면 끝까지 놓지를 않아요.’“추연화의 작품 출시 여부가 LK쥬얼리와도 관련이 있나 보지?”강유리의 질문에 육시준은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뭐 LK에 영향이 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육시준이 더 관심을 가지는 건 이것이 고성그룹을 상대할 좋은 패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추연화는 어디까지나 고성그룹 사람이야. 추연화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건 고성그룹 쪽이겠지. 육경원이 갑자기
아침 식사 시간 후, 도희 부부와 신주리 그리고 이런 가십거리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육경서까지 차례로 강유리의 집을 방문했다.컴퓨터를 켜던 강유리가 짜증스런 눈길로 육경서를 힐끗 바라보았다.“도련님은 왜 오셨어요? 오늘 안 바쁘세요?”어차피 신주리와의 관계도 이미 들켰겠다, 육경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아직 휴가 중이잖아요 저. 주리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졸졸 따라가야죠.”자연스레 허리에 감은 손을 내려다보며 경고의 시선을 보내는 신주리를 향해 찡긋 미소를 지은 육경서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형수님은 우리 엄마, 아빠 스파이나 마찬가지야. 우리가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할 거 아니야. 협조 좀 하지?”하지만 신주리는 불편해서 죽겠다는 얼굴로 손을 걷어냈다.“친구 앞에서까지 연기하려니까 불편해서 그러지.”“그럼 연기라고 생각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야?”육경서의 속삭임에 화들짝 놀란 신주리가 고개를 돌렸다.‘뭐지? 왜 심장이 뛰고 난리야. 볼도 조금 뜨거워진 것 같고. 설마... 나 어디 아픈가?’“두 사람 그만 좀 하죠. 나 두 사람 팬인데 자꾸 이런 모습 보여줄 거예요?”“에이.”이에 육경서가 특유의 넉살좋은 미소를 지었다.“좋아하는 연예인 사생활 정도는 존중해 줘야죠? 그런데 알렉스 씨가 내 팬인 줄은 몰랐네. 나 남자 팬 별로 없는데.”“누가 육경서 씨 팬이랍니까? 전 신주리 씨 팬입니다. 항상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죠.”그러자 신주리는 알렉스를 흘겨보다 도희에게 속삭였다.“뭐야. 네 남편이 날 딸이라고 생각한대. 이거 족보 꼬이는 거 아니야?”“워낙 꼰대라서 그래. 아주 집에서도 아빠보다 잔소리가 더 많아요.”도희는 이미 익숙해진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됐고. 일 얘기부터 하자. 추연화, 뭔가 이상하다는 거 언제부터 발견한 거야? 알렉스 말론 추연화는 한 번도 네 사무실에 들어간 적 없다던데.”한편, 컴퓨터 앞에 앉아 신주리와 육경서의 투닥거림을 바라보던 강유리는 육시준과 시선이 마주친
“자기야, 진정 좀 해.”잔뜩 흥분한 얼굴로 벌떡 일어선 도희를 다시 앉히게 한 알렉스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이때,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육시준이 입을 열었다.“추연화와 오랜 시간 동안 라이벌 관계였으니 그쪽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라이벌이라뇨! 실력 차이가 이렇게 심한데 라이벌은 무슨!”도희가 또다시 발끈했다.“그래요? 라이벌이라고 칭할 수준도 안 된다면 뭐가 그렇게 걱정인 거죠?”“...”“추연화는 몰래 세마의 컨셉을 엿보았고 감시카메라 기록을 지웠어요. 굉장히 초조하고 조심스러웠다는 걸 의미하죠. 그런데 그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왜 두 번째 시도를 했을까요? 아마... 한 번 본 거로는 부족했기 때문이겠죠?”“맞아.”강유리도 육시준의 의견에 동조했다.“추연화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잖아? 그리고 내 컨셉은 대충 엿보는 걸로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두 결과물이 동시에 대중 앞에 드러난 순간, 누가 누굴 베낀 건지, 다들 알게 될 겁니다. 대중들 눈이 옹이구멍은 아니니까요.”두 사람의 설명을 들을수록 도희의 눈은 점점 더 커다래져만 갔다.“미리 네 컨셉을 얘기한 것도 경고한 거나 마찬가지였네? 괜히 일 키우지 말라고.”“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추연화, 고성그룹 쪽 사람이야. 괜히 안 좋게 엮여서 좋을 게 없으니까.”하지만 육시준은 그녀의 말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런 걱정을 해. 내가 너한테 했던 말 잊은 거야?”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하라고. 영원히 네 편이 되어주겠다고 말했는데. 아직도 그가 못미더운가 싶어 조금 섭섭했다.역시나 그의 생각을 읽은 강유리가 육시준의 무릎을 어루만졌다.“당신은 육경원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하잖아. 괜히 나까지 일 키울 거 있어?”‘뭐지? 내가 그렇게 약해 보였나? 육경원이 나한테 꽤 위협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그녀의 의도와 달리 육시준은 진지한 반성을 시작했다.“형수님, 형이
이렇게 부정적인 여론으로 파다한 건 고정남의 은밀한 작업 덕분이기도 했다.한편, 고씨 집안사람들은 고주영을 위로하는 중이었다.“세마? 하,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없어서야 원. 됐어. 그딴 홍보모델 안 하면 그만이야.”우아한 자세로 차를 마시던 차한숙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엄마, 세마가 그딴은 아니죠. 쥬얼리 쪽에선 톱인데.”고우신이 눈치 없이 찬물을 끼얹자 차한숙의 목소리는 더 날카로워졌다.“넌 오빠란 애가 동생 위로는 못해줄 망정. 너 누구 편이야?”“아, 네네. 아주 뭐든 다 내 잘못이지. 그냥 닥치고 있을게요.”“그렇게 대단한 곳이면 네가 좀 어떻게 해봐. 너 친구들 많잖아. 도대체 왜 우리 주영이가 떨어진 건지 이유라도 알아보라고!”“...”한편, 차분한 얼굴로 앉아있던 고주영은 괜한 불똥이 고우신에게로 튀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엄마, 그만하세요. 어차피 다른 스케줄 때문에 시간 빼기도 힘들었는데. 잘됐죠 뭐.”“그러니까요. 언니 정도면 더 좋은 브랜드 엠버더서도 할 수 있는걸요 뭘.”고주영 옆에 앉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성신영 역시 한 마디 끼어들었다.그런데... 성신영의 목소리는 오히려 차한숙의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고 말았다.“네가 뭔데 우리 얘기에 끼어들어!”“...”“신주리 따위 때문에 우리 주영이가 처음 거절을 당했어. 겨우 너 정도 레벨밖에 안 되는 연예인한테 우리 주영이가 밀렸다고! 그러니까 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어?”“엄마.”고우신이 차한숙을 바라보았다.성신영이 아니꼬운 마음이야 백번 이해하지만 이건 말이 좀 심하다는 생각이었다.“시끄러! 팔이 밖으로 굽어도 유분수지. 넌 네 편, 남의 편이 누군지 구분도 못 해?”“아니, 그게 아니라...”“아니, 얘는 울긴 왜 울어? 아침부터 재수 없게!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런 널 우리 고씨 집안 핏줄이라고 인정해야 한다니... 기가 막혀서 원.”“사모님... 제 존재가 모두에게 큰 민폐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게... 제
“......”여전히 아름다운 차한숙의 얼굴이 어느새 증오로 가득찼다.과거의 그 일은 분명 그녀도 피해자였다. 그런데 고정남이 무슨 자격으로 이제 와서 그녀의 인성에 대해 평가질을 하는 걸까?‘여자 한 명 찾겠다고 20년 동안 집에 한번 들어오지도 않고 이제 그 여자가 낳은 더러운 핏줄까지 내 집에 들여놓은 것도 기가 차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당신... 설마 내가 당신 와이프라는 이 타이틀을 지키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거야?”“맞잖아. 이제 와서 아닌 척이야?”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는 고정남과 차한숙 사이에 죽음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고우신, 고주영 두 남매 역시 꽤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부모님 사이가 안 좋다는 거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재벌 사이의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는 의례 그렇게 지내는 것이거니 했었다.그런데... 두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니 둘은 자기가 생각한것 보다 꽤 더 큰 악연으로 엮여있는 듯 싶었다.“아빠, 그만하세요. 엄마도 정말 나쁜 마음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건 아닐 거예요.”자리에서 일어선 고우신이 어떻게든 중재를 해보려 애썼다.그제야 울음을 멈춘 성신영 역시 고우신의 편을 들었다.“그러니까요, 아빠. 화내지 마세요... 제가 떳떳하지 못한 딸이라는 건, 저도 알아요. 솔직히 사모님 입장에서 절 때리셔도 전 할 말 없습니다.”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리는 성신영의 모습은 가련한 신데렐라의 모습 그 자체였다.그리고 그녀의 말에서 바로 포인트를 캐치한 고정남이 미간을 찌푸렸다.“설마... 때리기까지 했어?”차한숙의 차가운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성신영은 잔뜩 겁 먹은 얼굴로 움츠러들었다.“아니요. 그럴 리가요. 사모님께서 저한테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요...”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성신영의 손은 어느새 손목 부위를 가리고 있었다.성큼성큼 다가간 고정남이 성신영의 손목을 홱 낚아채고 손목에 난 상처가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이게 뭐야?”상처를 확인한 순간, 고정남은 물론이고 차한숙 역시 눈이
한편, 멍하니 서 있는 차한숙의 시선은 여전히 성신영의 가녀린 손목을 향해 있었다.비록 다정한 말 한마디 안 해준 건 사실이었지만 맹세코 몸에 손을 댄 적은 없었다.그리고 당황한 척하지만 묘한 제스처로 암시를 주던 성신영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고정남에게 어떻게든 자기가 학대를 받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고 싶었겠지. 내 딸의 CF를 위해 일부러 손에 상처를 낸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길 바랐던 거야. 하, 이딴 수작에 넘어가? 하긴, 고정남 당신은 애초에 날 겨우 그런 여자로 보고 있을 테니까. 추악한 내 말보다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가 낳은 금지옥엽 딸의 말을 믿고 싶겠지.”모든 실마리가 밝혀지고 나니 화가 나긴커녕 오히려 이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다.자리에서 일어선 차한숙이 처음 듣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어머, 그러게 조심 좀 하지 그랬어. 치료 잘 받아. CF 촬영 열심히 해야지.”“...”분명 너무나 친절한 말투였지만 성신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차한숙까지 자리를 뜨고 식탁 앞에는 어느새 고우신 남매와, 성신영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여전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성신영은 이번엔 두 남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어떡해요. 아빠가 오해를 하신 것 같아요.”“후...”이에 고우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두 분 문제니까 두 분이 알아서 하시겠지. 너도 아빠 화 풀리면 제대로 해명하고.”‘누가 들어도 오해할 만한 말이었어. 왜 하필 그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한 걸까?’“손목은 도대체 어쩌다 다친 거야?”“아, 그게...”성신영이 손목을 감싸 쥐었다.“며칠 전에... 너무 배가 고파서... 야식 좀 끓여먹으려다가... 데었어요.”“아주머니한테 부탁하지 그랬어.”고우신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주머니도 주무시는 것 같고... 아주머니가 사모님 사람인 거 저도 다 아는데. 괜히 부탁드렸다가 사모님한테 더... 미움받게 될까 봐...”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식탁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듣기엔 충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