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강유리를 경호하며 제일 많이 드나들었던 장소가 유강엔터였다.그가 하는 일이라곤 그녀를 위해 가방 들어주고 운전하고 감시카메라처럼 제자리에서 꼼짝도 없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후 육시준한테 보고하는 것이다.솔직히 말하면 아주 지루하다.이래 봬도 예전엔 육시준의 보안팀 팀장으로 육시준의 신변 보호뿐만 아니라 상업 기밀 파일도 지키던 사람이었는데.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업계에서도 최고들 밖에 없었다.지금은 고작 이 여자의 개인비서처럼 이런 잡일들을 하고 있다니. 재능 낭비인 것이 분명하다.이 며칠간 순간마다 육시준이 명령을 취소하여 다시 원래 자리로 복귀시키길 꿈꾸고 있었는데 이 말을 강유리한테서 들으니 솔깃하면서도 이상하기도 했다.지금 날 떠보는 건가?“ 괜찮습니다. 육 회장님의 명령을 모두 따르겠습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물음에 대답했다.강유리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래? 하지만 자네 요즘 일하는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진 않네.”“…”“네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명령을 받았으면 해야 할 일을 잘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아니면 육 회장이 자네한테 명을 내릴 때마다 이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하나 말해줘야겠어?”“…”육 회장이 맡겼던 일들은 확실히 모두 중요한 일들이었다. 그리하여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육 회장이 이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고 잘 완수하려고 노력했었다.육 회장의 명령에 의문을 가졌던 건 처음이였다.문제점을 인지하고 나니 무현의 태도는 많이 공손해졌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향후 명령에 잘 따르겠습니다.”강유리는 눈치백단인 무현에 아주 만족하듯이 웃었다.“그래. 그러면 내가 내리는 첫 번째 명령은 바로, 육 회장한테 내 스케줄 일체로 보고하지 않는 거야.”그는 잘 알고 있다. 이건 분명 육 회장의 명령이 아닐 거라는걸.그가 알고 있는 육시준은 소유욕은 심하지만, 그녀의 결정을 더욱 존중하는 편이다.자기한테 많이 의지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고나서 육시준은 더이상 그녀
그저 업무 태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강유리의 상상을 훨씬 더 초월했다.“대표님, 오늘 운 터지셨는데요? 저 월급 다 날리게 생겼습니다!”“이 대리, 지금 쥐꼬리만한 월급이 아까워? 우리 대표님이 알아서 회장님 라인 태워주실 텐데 뭐가 걱정이야.”“그러니까. 우리 양 대표님 덕분에 투자금도 쑥쑥 들어오고. 뭐가 걱정이야?”“아,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대표님, 죄송합니다!”문을 등진 채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던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계속해. 다음 달부터 다들 월급 200만원 씩 인상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노는 거야, 오늘!”“감사합니다, 대표님!”이 모습을 바라보는 강유리는 기가 막혀 헛웃음이 터져나올 지경이었다.‘알짜배기 계열사니 믿음직한 사람을 대표로 뒀을 줄 알았는데. 겨우 이거예요, 아버지? 업무 시간에 그것도 회사에서 도박이라니... 게다가 직원들은 회사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것도 모르는 눈치고...’“양건휘 대표님? 저도 끼어주시죠?”맑은 목소리가 사무실의 어수선함을 깨트리고 모두의 시선이 문쪽으로 쏠렸다.누구나 돌아볼 법한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캐주얼하고 수수한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완벽한 몸매에 남자들의 눈동자에는 묘한 욕망이 사무실의 홍일점인 이하정 대리의 얼굴에는 질투가 스쳤다.“뭐예요? 대표 사무실에 이렇게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거예요?”이하정의 질타에 양건휘가 다급하게 일어섰다.“여, 여긴 무슨 일로...”양건휘를 따라 일어선 직원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고 유일하게 이하정만은 여전히 탐탁치 않다는 눈빛으로 강유리를 훑어보고 있었다.“대표님과 아는 사이에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함부로 쳐들어오는 건 예의가 아니죠. 경비는 어떻게 뚫고 들어온 거예요?”“하, 이 회사에 경비원도 있었나요?”이하정의 날카로운 질문에 강유리는 헛웃음을 터트렸다.이때 직원들 중 한 명이 잔뜩 굳은 양건휘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대표님, 요즘 만나는 애인분이십니까? 저런 스타일 좋아하시는 줄 몰랐네요
강유리는 입꼬리를 치켜올리더니, 그 두 사람을 보고는 갑자기 눈빛이 차가워졌다. 양건휘는 마음속으로 한없이 괴로웠다. 방금 출근 시간에 도박한 것이 들켰다면 이런 오해가 또다시 되풀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호통이 나오기도 전에 강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유강그룹 계열사에서 이런 분위기로 일하는지는 꿈에도 몰랐네요. 양 대표님께서 말씀해 주시죠. 제가 누군지.”강유리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고, 누가 봐도 화가 난 상태였다. 양건휘는 강유리의 말을 듣고 심장이 입 밖에 나올 듯 긴장해서는 재빨리 그녀를 소개했다.“이분이 바로 성 회장님의 따님이시고, 유강그룹 큰 아가씨셔.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거야? 함부로 농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했고, 그저 그곳에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강유리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볼 기분이 아니어서 몇 걸음 걸어가더니 명령을 내렸다.“양 대표 빼고 다른 사람은 다 나가요. 나갈 때 문 닫고요.”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금 도박했거나 구경하는 사람들은 일제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양 대표만이 그 자리에 서 있었고, 그는 크게 심호흡하고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유리 아가씨, 오늘 큰 프로젝트 하나를 따내서 기분이 좋았어요. 그저 모여서 축하하려는 것뿐이었습니다.”강유리는 의자에 앉아 책상에 있던 서류들을 뒤적이더니 입을 열었다.“아까 그 네 명은 어느 부문이죠? 월급도 엄청 많던데요?”양건휘는 당황한 말투로 버벅대며 대답했다.“다 이번 프로젝트를 성사한 일등 공신들입니다. 월급을 올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강유리는 그의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서류들을 뒤적일 뿐이었다. 사무실 안은 어찌나 조용한지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사각사각 들렸다.강유리는 또 사무실 컴퓨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무엇인가 찾아보려 했다. 양건휘가 다가가 보려고 해도 그녀 옆의 건장한 경호원 때문에 감히 근처에 갈 수도 없
모든 약 명칭을 기록한 자료는 그대로 있었다. 그녀가 찾고 싶은 그 두 가지만 빼고. 강유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이게 다예요?”양건휘는 강유리의 표정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또 신속하게 대답했다.“그럼요! 다 여기 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강유리는 모니터를 보다가 시선을 양건휘의 얼굴로 옮겼고,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강유리는 오늘 들이닥친 것이 상대방이 미처 손쓸 새도 없이 뒤통수를 때릴 작정이었는데, 역시 한발 늦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성홍주가 안심하고 양건휘를 남겨두었다는 것은 그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고, 그저 짊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양건휘는 지금 또 그녀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눈치였다.‘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 회장님이 자료를 옮긴 걸까? 아니면 양 대표가? 양 대표 머리로는 못 할 일인 것 같은데? 누구랑 한통속이 되어서 작당 모의를 하는 건가……’그녀는 마우스를 내려놓고 사무실 의자에 기대어 앉아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양 대표, 상업 기밀을 팔아넘기는 죄를 지으면 몇 년 감옥에서 썩는지 알고 계세요?”양건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얼굴색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을 뻔했다. 그의 야심이 큰 데 비해 걸맞은 능력이 없었다.얼마 전 누군가 그를 찾아와 이 회사는 이미 성홍주가 버린 카드기에 앞으로 그의 생활이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는 처음에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본사와 연락이 되지 않자 점점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바로 이때, 상대방이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었다……“아가씨, 방금 하신 말씀 무슨 뜻입니까?”“알아들으셨을 거라고 믿어요.” 강유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고, 두 눈동자는 그를 응시하는 것이 그에게 소리 없는 억압을 가하는 듯했다.“내가 여기 온 이상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오지 않았겠습니까? 미리 상황을 알고 온 것인데 시치미를 떼는 겁니까? 나한
30분 후.강유리가 나와보니 들어올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프런트는 이미 유니폼으로 깔끔하게 갈아입은 상태였고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이 적극적이고도 신중한 사람들을 보면서 강유리는 오늘 여기 처음 들어 왔을 때 본 모든 것이 착각이라는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프런트 직원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강유리는 그들을 보면서 차가운 웃음을 짓고는 밖으로 나갔다.차 안.강유리가 꽤 오랜 시간 기다린 후에야 경호원이 왔다. 그가 차 문을 열고 차에 타면서 바로 상황을 보고했다.“방금 제가 공장에 가봤더니 처리하지 못한 쓰레기며 자료들이며 가득했습니다. 찾으시던 두 가지 약물은 생산 구역에서 모두 깨끗하게 치운 상태였습니다.”강유리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예상하던 바야. 그쪽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들였는데 그렇게 쉽게 찾게 뒀을 리가 없지.”“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종류의 처방 약을 삽니다. 특히 노동자들은 천성이 아끼는 것을 좋아하니까 이런 약들을 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어요.”“???”그녀가 그에게 무슨 소득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불룩한 비닐봉지를 내밀더니 대답했다.“직원 숙소에서 찾았는데, 찾으시는 게 맞나요?”“정말 잘했어! 월급 올려 줘야겠어! 정말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니까!”“......” 그는 다재다능한 인재로서 이런 업무 능력을 갖추는 건 기본이었다. 평소 해오던 임무를 완성한것뿐이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칭찬을 받았다는 생각에 그는 괜히 쑥스러워하며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임무를 완성하면 앞당겨 돌아가십니까?”강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비닐 주머니 속의 약통을 뒤적거리다가 필요한 그 두 종류의 약을 찾아내고는 무심코 대답했다.“아니. 먼저 물건을 이혁 씨한테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잠시 후, 그녀가 갑자기 설명을 덧붙였다.“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하지만 반짝이는 눈동자에서는 위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육시준의 눈은 더 깊어졌고, 시선은 더 흐릿해졌다. 그는 흐릿해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눈빛으로 보는 건 날 초대하는 거라고 이해해도 될까?”“……”강유리는 그의 말에 정신이 혼미해졌고, 빠져들어 갈 것만 같은 그의 눈동자에 그녀는 어안이 벙했다. 그녀는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있었는데, 이내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그의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육시준은 그의 미소를 보고 뭔가 잘못된 것을 직감했지만, 이미 늦었다.“철퍼덕!”물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고, 깔끔한 옷차림에 조금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육시준이 수영장물에 첨벙 빠졌다. 그런 그를 보며 강유리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맞아! 같이 물놀이하려고 초대한 거나 다름없지?”육시준은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는데, 그의 미모는 치명적이었다. 그는 강유리한테 가까이 다가가서 몸을 밀착시켰다. 강유리는 그런 육시준을 보며 어쩔 줄 몰라서 버벅거렸다.“날 먼저 건드렸잖아! 장난치지 마!”애써 강한 척하는 강유리를 보며 육시준은 씩 웃더니 목소리를 깔며 대답했다.“그럼. 당연히 장난 아니지.”강유리가 말을 이어가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들어 올리고는 힘 있는 팔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는 바람에 강유리는 두 손을 무의식적으로 그의 어깨에 얹었다. 목덜미가 당겨지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와 입맞춤했다. 한여름 저녁, 하늘가에는 주황빛 노을이 드리웠고, 조용하고 낭만이 가득한 수영장은 단둘이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키스가 끝난 후 강유리는 의식이 몽롱한 상태로 육시준의 따스한 목소리를 들었다.“일은 잘 안되고 있는 거야?”강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왜 그렇게 묻는 건데?”“아니, 호텔에 물어보니까 저녁도 안 먹고 술 마시고 있다길래……”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분했지만 분명 강유리를 걱정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혼자 술을 마
뜨거운 키스가 끝난 뒤에야 육시준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밥 먹고 나서 어떤 상황인지 얘기해 봐. 내가 분석해 줄게.”“……”저녁 식사 시간.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그저 자세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저 그가 저녁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육시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강유리는 오후에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경호원 진짜 대단하던데? 아니면 내가 이렇게까지 빨리 찾을 수는 없었을 거야. 이혁 씨한테 물어보니까 처방전을 따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고. 완제품 약이 있어도 성분을 연구하면 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그럼 빨리 돌아가야 하는 거야?”강유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내가 빨리 돌아가기를 바라는 거야?” 육시준은 포크를 내려놓더니 우아하게 티슈로 입을 가볍게 닦았다.“내일 오전에 스케줄 없어. 새 영화가 나왔다던데, 같이 보러 가자.”그의 말투는 그녀에게 영화를 보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회의에 참석하라고 통보하는 것 같이 성의가 없었다. 강유리는 괘씸해서 그의 데이트 신청을 거부했다.“아쉽지만 나 내일 오전 약속 있어.”“할 일 다 끝낸 거 아니었어?”육시준은 약속이 있다는 그녀의 말에 의아했다. 강유리는 그의 말에 발끈해서 소리쳤다.“공적인 일을 다 끝냈어도 다른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 여보 때문에 여기 남는 것도 아닌데!”육시준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서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진짜?”강유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진짜지!”육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입을 오므리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강유리는 정말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확실히 내일 오전 약속이 있었다. 바로 양건휘 손에서 약을 사 간 사람과의 약속이었다. 그녀는 양건휘 친구라고 속이고 약이 더 있으니 필요하지 않겠냐고 미끼를 던졌다. 상대방은 완전히 응답한 상태도 아니었고 거절하지도 않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여보랑 영화 보러 갈 걸 그랬네. 오전 내내 시간 낭비한 건 둘째 치고 비위까지 상했잖아?’펜트하우스 스위트 룸.육시준은 거실에 앉아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특별히 오전 일정을 미루고 호텔 근처에 있는 영화관을 통째로 빌렸다. 강유리가 그저 귀엽게 애교를 부리며 튕기는 줄 알았는데 아침 일찍 옷을 차려입고 풀메이크업까지 하고 나가는 그녀를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그는 조용한 거실에 앉아 태블릿을 들고 한참을 망설이더니 마침내 프로젝트 자료를 클릭했다. 때맞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고, 그는 발신자 이름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전화를 받았다.“형, 통화 괜찮아요?”전화를 건 사람은 육경원이었고 꽤 부드러운 척 가식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육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말해.”육경원은 조금 망설이는 듯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기분 별로인 것 같네요? 형수님이랑 싸우기라도 했어요?”육시준은 기분이 상해 미간을 한껏 찌푸리더니 인내심이 바닥 나 당장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형수님이랑 잘 지내세요. 형 첫사랑이니까?”“……”전화를 끊으려던 육시준의 손은 분노에 덜덜 떨렸다. 그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 지 육경원은 계속 조잘댔다.“여자들은 감정에 약해요. 갈대 같다고 하잖아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임천강도 이번엔 만반에 준비를 했겠지만, 형수님은 늘 이지적이고 지혜로운 분이시니까……”육시준의 눈에는 살기가 돌았고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던 그는 단호하고도 차갑게 전화를 끊어버렸다.한편, 육경원은 끊긴 전화를 보면서 흥미로운 듯 눈꼬리가 위로 한껏 올라갔다.‘형님이 분수와 체면을 잃은 건 정말이지 처음 보네? 정말 재밌어.’그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성신영의 청초하고도 작은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이번 일은 네가 정말 잘 해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