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를 달리고 있는 차 안에서 무현은 운전하고 있었고 강유리는 뒷좌석이 앉아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무현이 만든 보고서이기에 이해가 안 되는 곳이 있으면 강유리는 가끔 무현한테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계속 한결같았다.“ 뒤쪽을 보시면 해석이 있을 겁니다.”“ 이 보고서를 자세히 보긴 했어?”강유리는 보고서를 옆좌석에 놓고는 갑자기 물었다.무현은 멈칫하더니 ‘네’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강유리는 눈을 감고 뒤로 몸을 기댔다.“ 잘됐네. 그럼 내용을 간략해서 말해봐. 윤시준은 네가 정보분석이랑 총괄을 잘한다고 했었는데.”이 말인즉, 네 말 안 믿으니까 한번 보여줘 봐. 라는 것이였다.무현은 이 말에 기분이 안 좋은 듯했다. 차 안의 온도마저 차가워진 것만 같았다.지금까지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심지어 육 회장마저도.경호원이라서 그런지 말없이 있을 때는 존재감이 하나도 없다가도 화를 내니 갑자기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네. 썩은 표정으로 기계처럼 공손한 태도로 대답하는 모습보다는 낫다.“ 왜? 어려워? 그럼 넌 할 줄 아는 게 뭐야? 길옆에 차 세우고 내려.”강유리는 그의 불만을 눈치채지 못한 듯이 차가운 태도로 그를 명령했다.전엔 낯을 가려서 웃는 얼굴로 예의 바르게 그를 대한 강유리라서 무현은 그녀가 얼굴이 반반한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줄 알았었다.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눈치를 주면서 명령하니 무현은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백미러로 뒤를 보니 차분한 얼굴로 위압을 풍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육시준이랑 비슷했다.그는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결국은 자기가 졌다는 듯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몇 년 전까지만해도 영업 상황이 괜찮았었는데 근 2, 3년간 갑자기 수익이 떨어지면서 유강그룹의 주문을 빼고는 다른 주문이 별로 들어오지 않습니다.”회사가 팔리고 난 후에는 더욱더 업무가 없었다.새로 온 회장이 소식을 막고 회사 내부를 정비하는 듯했지만 그런건 또 아니였다. 할 일은
요즘 강유리를 경호하며 제일 많이 드나들었던 장소가 유강엔터였다.그가 하는 일이라곤 그녀를 위해 가방 들어주고 운전하고 감시카메라처럼 제자리에서 꼼짝도 없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후 육시준한테 보고하는 것이다.솔직히 말하면 아주 지루하다.이래 봬도 예전엔 육시준의 보안팀 팀장으로 육시준의 신변 보호뿐만 아니라 상업 기밀 파일도 지키던 사람이었는데.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업계에서도 최고들 밖에 없었다.지금은 고작 이 여자의 개인비서처럼 이런 잡일들을 하고 있다니. 재능 낭비인 것이 분명하다.이 며칠간 순간마다 육시준이 명령을 취소하여 다시 원래 자리로 복귀시키길 꿈꾸고 있었는데 이 말을 강유리한테서 들으니 솔깃하면서도 이상하기도 했다.지금 날 떠보는 건가?“ 괜찮습니다. 육 회장님의 명령을 모두 따르겠습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물음에 대답했다.강유리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래? 하지만 자네 요즘 일하는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진 않네.”“…”“네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명령을 받았으면 해야 할 일을 잘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아니면 육 회장이 자네한테 명을 내릴 때마다 이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하나 말해줘야겠어?”“…”육 회장이 맡겼던 일들은 확실히 모두 중요한 일들이었다. 그리하여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육 회장이 이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고 잘 완수하려고 노력했었다.육 회장의 명령에 의문을 가졌던 건 처음이였다.문제점을 인지하고 나니 무현의 태도는 많이 공손해졌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향후 명령에 잘 따르겠습니다.”강유리는 눈치백단인 무현에 아주 만족하듯이 웃었다.“그래. 그러면 내가 내리는 첫 번째 명령은 바로, 육 회장한테 내 스케줄 일체로 보고하지 않는 거야.”그는 잘 알고 있다. 이건 분명 육 회장의 명령이 아닐 거라는걸.그가 알고 있는 육시준은 소유욕은 심하지만, 그녀의 결정을 더욱 존중하는 편이다.자기한테 많이 의지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고나서 육시준은 더이상 그녀
그저 업무 태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강유리의 상상을 훨씬 더 초월했다.“대표님, 오늘 운 터지셨는데요? 저 월급 다 날리게 생겼습니다!”“이 대리, 지금 쥐꼬리만한 월급이 아까워? 우리 대표님이 알아서 회장님 라인 태워주실 텐데 뭐가 걱정이야.”“그러니까. 우리 양 대표님 덕분에 투자금도 쑥쑥 들어오고. 뭐가 걱정이야?”“아,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대표님, 죄송합니다!”문을 등진 채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던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계속해. 다음 달부터 다들 월급 200만원 씩 인상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노는 거야, 오늘!”“감사합니다, 대표님!”이 모습을 바라보는 강유리는 기가 막혀 헛웃음이 터져나올 지경이었다.‘알짜배기 계열사니 믿음직한 사람을 대표로 뒀을 줄 알았는데. 겨우 이거예요, 아버지? 업무 시간에 그것도 회사에서 도박이라니... 게다가 직원들은 회사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것도 모르는 눈치고...’“양건휘 대표님? 저도 끼어주시죠?”맑은 목소리가 사무실의 어수선함을 깨트리고 모두의 시선이 문쪽으로 쏠렸다.누구나 돌아볼 법한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캐주얼하고 수수한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완벽한 몸매에 남자들의 눈동자에는 묘한 욕망이 사무실의 홍일점인 이하정 대리의 얼굴에는 질투가 스쳤다.“뭐예요? 대표 사무실에 이렇게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거예요?”이하정의 질타에 양건휘가 다급하게 일어섰다.“여, 여긴 무슨 일로...”양건휘를 따라 일어선 직원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고 유일하게 이하정만은 여전히 탐탁치 않다는 눈빛으로 강유리를 훑어보고 있었다.“대표님과 아는 사이에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함부로 쳐들어오는 건 예의가 아니죠. 경비는 어떻게 뚫고 들어온 거예요?”“하, 이 회사에 경비원도 있었나요?”이하정의 날카로운 질문에 강유리는 헛웃음을 터트렸다.이때 직원들 중 한 명이 잔뜩 굳은 양건휘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대표님, 요즘 만나는 애인분이십니까? 저런 스타일 좋아하시는 줄 몰랐네요
강유리는 입꼬리를 치켜올리더니, 그 두 사람을 보고는 갑자기 눈빛이 차가워졌다. 양건휘는 마음속으로 한없이 괴로웠다. 방금 출근 시간에 도박한 것이 들켰다면 이런 오해가 또다시 되풀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호통이 나오기도 전에 강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유강그룹 계열사에서 이런 분위기로 일하는지는 꿈에도 몰랐네요. 양 대표님께서 말씀해 주시죠. 제가 누군지.”강유리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고, 누가 봐도 화가 난 상태였다. 양건휘는 강유리의 말을 듣고 심장이 입 밖에 나올 듯 긴장해서는 재빨리 그녀를 소개했다.“이분이 바로 성 회장님의 따님이시고, 유강그룹 큰 아가씨셔.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거야? 함부로 농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했고, 그저 그곳에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강유리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볼 기분이 아니어서 몇 걸음 걸어가더니 명령을 내렸다.“양 대표 빼고 다른 사람은 다 나가요. 나갈 때 문 닫고요.”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금 도박했거나 구경하는 사람들은 일제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양 대표만이 그 자리에 서 있었고, 그는 크게 심호흡하고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유리 아가씨, 오늘 큰 프로젝트 하나를 따내서 기분이 좋았어요. 그저 모여서 축하하려는 것뿐이었습니다.”강유리는 의자에 앉아 책상에 있던 서류들을 뒤적이더니 입을 열었다.“아까 그 네 명은 어느 부문이죠? 월급도 엄청 많던데요?”양건휘는 당황한 말투로 버벅대며 대답했다.“다 이번 프로젝트를 성사한 일등 공신들입니다. 월급을 올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강유리는 그의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서류들을 뒤적일 뿐이었다. 사무실 안은 어찌나 조용한지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사각사각 들렸다.강유리는 또 사무실 컴퓨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무엇인가 찾아보려 했다. 양건휘가 다가가 보려고 해도 그녀 옆의 건장한 경호원 때문에 감히 근처에 갈 수도 없
모든 약 명칭을 기록한 자료는 그대로 있었다. 그녀가 찾고 싶은 그 두 가지만 빼고. 강유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이게 다예요?”양건휘는 강유리의 표정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또 신속하게 대답했다.“그럼요! 다 여기 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강유리는 모니터를 보다가 시선을 양건휘의 얼굴로 옮겼고,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강유리는 오늘 들이닥친 것이 상대방이 미처 손쓸 새도 없이 뒤통수를 때릴 작정이었는데, 역시 한발 늦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성홍주가 안심하고 양건휘를 남겨두었다는 것은 그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고, 그저 짊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양건휘는 지금 또 그녀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눈치였다.‘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 회장님이 자료를 옮긴 걸까? 아니면 양 대표가? 양 대표 머리로는 못 할 일인 것 같은데? 누구랑 한통속이 되어서 작당 모의를 하는 건가……’그녀는 마우스를 내려놓고 사무실 의자에 기대어 앉아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양 대표, 상업 기밀을 팔아넘기는 죄를 지으면 몇 년 감옥에서 썩는지 알고 계세요?”양건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얼굴색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을 뻔했다. 그의 야심이 큰 데 비해 걸맞은 능력이 없었다.얼마 전 누군가 그를 찾아와 이 회사는 이미 성홍주가 버린 카드기에 앞으로 그의 생활이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는 처음에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본사와 연락이 되지 않자 점점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바로 이때, 상대방이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었다……“아가씨, 방금 하신 말씀 무슨 뜻입니까?”“알아들으셨을 거라고 믿어요.” 강유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고, 두 눈동자는 그를 응시하는 것이 그에게 소리 없는 억압을 가하는 듯했다.“내가 여기 온 이상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오지 않았겠습니까? 미리 상황을 알고 온 것인데 시치미를 떼는 겁니까? 나한
30분 후.강유리가 나와보니 들어올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프런트는 이미 유니폼으로 깔끔하게 갈아입은 상태였고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이 적극적이고도 신중한 사람들을 보면서 강유리는 오늘 여기 처음 들어 왔을 때 본 모든 것이 착각이라는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프런트 직원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강유리는 그들을 보면서 차가운 웃음을 짓고는 밖으로 나갔다.차 안.강유리가 꽤 오랜 시간 기다린 후에야 경호원이 왔다. 그가 차 문을 열고 차에 타면서 바로 상황을 보고했다.“방금 제가 공장에 가봤더니 처리하지 못한 쓰레기며 자료들이며 가득했습니다. 찾으시던 두 가지 약물은 생산 구역에서 모두 깨끗하게 치운 상태였습니다.”강유리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예상하던 바야. 그쪽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들였는데 그렇게 쉽게 찾게 뒀을 리가 없지.”“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종류의 처방 약을 삽니다. 특히 노동자들은 천성이 아끼는 것을 좋아하니까 이런 약들을 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어요.”“???”그녀가 그에게 무슨 소득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불룩한 비닐봉지를 내밀더니 대답했다.“직원 숙소에서 찾았는데, 찾으시는 게 맞나요?”“정말 잘했어! 월급 올려 줘야겠어! 정말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니까!”“......” 그는 다재다능한 인재로서 이런 업무 능력을 갖추는 건 기본이었다. 평소 해오던 임무를 완성한것뿐이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칭찬을 받았다는 생각에 그는 괜히 쑥스러워하며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임무를 완성하면 앞당겨 돌아가십니까?”강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비닐 주머니 속의 약통을 뒤적거리다가 필요한 그 두 종류의 약을 찾아내고는 무심코 대답했다.“아니. 먼저 물건을 이혁 씨한테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잠시 후, 그녀가 갑자기 설명을 덧붙였다.“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하지만 반짝이는 눈동자에서는 위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육시준의 눈은 더 깊어졌고, 시선은 더 흐릿해졌다. 그는 흐릿해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눈빛으로 보는 건 날 초대하는 거라고 이해해도 될까?”“……”강유리는 그의 말에 정신이 혼미해졌고, 빠져들어 갈 것만 같은 그의 눈동자에 그녀는 어안이 벙했다. 그녀는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있었는데, 이내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그의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육시준은 그의 미소를 보고 뭔가 잘못된 것을 직감했지만, 이미 늦었다.“철퍼덕!”물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고, 깔끔한 옷차림에 조금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육시준이 수영장물에 첨벙 빠졌다. 그런 그를 보며 강유리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맞아! 같이 물놀이하려고 초대한 거나 다름없지?”육시준은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는데, 그의 미모는 치명적이었다. 그는 강유리한테 가까이 다가가서 몸을 밀착시켰다. 강유리는 그런 육시준을 보며 어쩔 줄 몰라서 버벅거렸다.“날 먼저 건드렸잖아! 장난치지 마!”애써 강한 척하는 강유리를 보며 육시준은 씩 웃더니 목소리를 깔며 대답했다.“그럼. 당연히 장난 아니지.”강유리가 말을 이어가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들어 올리고는 힘 있는 팔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는 바람에 강유리는 두 손을 무의식적으로 그의 어깨에 얹었다. 목덜미가 당겨지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와 입맞춤했다. 한여름 저녁, 하늘가에는 주황빛 노을이 드리웠고, 조용하고 낭만이 가득한 수영장은 단둘이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키스가 끝난 후 강유리는 의식이 몽롱한 상태로 육시준의 따스한 목소리를 들었다.“일은 잘 안되고 있는 거야?”강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왜 그렇게 묻는 건데?”“아니, 호텔에 물어보니까 저녁도 안 먹고 술 마시고 있다길래……”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분했지만 분명 강유리를 걱정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혼자 술을 마
뜨거운 키스가 끝난 뒤에야 육시준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밥 먹고 나서 어떤 상황인지 얘기해 봐. 내가 분석해 줄게.”“……”저녁 식사 시간.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그저 자세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저 그가 저녁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육시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강유리는 오후에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경호원 진짜 대단하던데? 아니면 내가 이렇게까지 빨리 찾을 수는 없었을 거야. 이혁 씨한테 물어보니까 처방전을 따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고. 완제품 약이 있어도 성분을 연구하면 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그럼 빨리 돌아가야 하는 거야?”강유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내가 빨리 돌아가기를 바라는 거야?” 육시준은 포크를 내려놓더니 우아하게 티슈로 입을 가볍게 닦았다.“내일 오전에 스케줄 없어. 새 영화가 나왔다던데, 같이 보러 가자.”그의 말투는 그녀에게 영화를 보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회의에 참석하라고 통보하는 것 같이 성의가 없었다. 강유리는 괘씸해서 그의 데이트 신청을 거부했다.“아쉽지만 나 내일 오전 약속 있어.”“할 일 다 끝낸 거 아니었어?”육시준은 약속이 있다는 그녀의 말에 의아했다. 강유리는 그의 말에 발끈해서 소리쳤다.“공적인 일을 다 끝냈어도 다른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 여보 때문에 여기 남는 것도 아닌데!”육시준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서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진짜?”강유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진짜지!”육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입을 오므리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강유리는 정말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확실히 내일 오전 약속이 있었다. 바로 양건휘 손에서 약을 사 간 사람과의 약속이었다. 그녀는 양건휘 친구라고 속이고 약이 더 있으니 필요하지 않겠냐고 미끼를 던졌다. 상대방은 완전히 응답한 상태도 아니었고 거절하지도 않았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