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강유리의 표정은 오히려 더 밝아졌다.“뭐야? 지금 질투하는 거야?”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고개를 홱 돌린 모습, 육시준이 삐질 때와 비슷한 얼굴이었으니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하, 질투? 내가 왜?”비록 추예진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평소의 시니컬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목소리는 훨씬 누그러진 지 오래였다.역시, 가끔은 세게 나가는 것보다 유한 방법이 더 잘 먹힐 때도 있구나를 되뇌이며 강유리는 해명을 이어갔다.“나도 스타인에 있는 내 사람들 다 데리고 오고 싶지. 하지만 나한테도 시간이라는 게 필요해. 신주리는... 마음의 문이 촬영을 앞두고 있잖아. 어떻게든 여자 조연 배우 구색은 맞춰야 할 거 아니야.”긴 말을 늘여놓는 강유리의 요지는 단 하나, 적당한 기회를 엿보고 있다였다.이에 추예진이 그녀를 흘겨보았다.“그러니까 지금이 날 너희 회사로 스카우트해 갈 기회라 이 말이야?”“그게 아니라...”강유리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추예진은 다시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사고 터졌을 때는 연락 한 번 없다가. 이제 좀 급해졌나 보지? 내 생각을 다 해주는 걸 보면?”“이모한테 혼날까 봐 그런 거지...”이때 날카로운 클락센 소리가 두 사람은 대화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강유리와 추예진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신호등이 바뀌었던 것이다.차 안은 다시 적막에 잠겼다.강유리도 거의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애초에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걸 잘하는 타입도 아니고 자기 약한 면까지 드러내며 애교까지 부렸는데 꿈쩍도 하지 않으니 더 이상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힘이 쭉 빠졌다.“시나리오나 보여줘.”차량이 건물 앞에 멈춰서고 추예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갑작스러운 희소식에 강유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정말?”핸들에 손을 얹은 채 뭔가를 생각하던 추예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내가 널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어. 내가 총각본을 맡았다는 기사 아직 안 터졌잖아. 다 널 위해서였다는 거 모르겠니
코를 훌쩍인 강유리가 차가운 얼굴로 추예진의 품에서 벗어났다.“그래? 흠, 그럼 허락한 거다? 비서한테 얘기해서 시나리오 보낼 테니까 잘 읽어봐. 이틀 안에 답 주고.”“...”방금 전까지 온갖 불쌍한 척은 다 할 때는 언제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강유리의 모습에 추예진은 몰래 이를 갈았다.‘내가 이 계집애를 그냥...’그렇게 성공적인 협상을 마치고 추예진은 스타인 엔터 건물로 들어가고 강유리는 하석훈이 그녀를 데리러 오길 기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잠시 후, 그녀 앞에 나타난 건 하석훈이 아닌 익숙한 레드 마샬라티였다.차에서 내린 성신영이 득달같이 달려왔다.“강유리! 너 뭐야? 여긴 왜 또 온 건데. 또 천강 오빠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이게 미쳤나. 미친개가 따로 없네.’ “미쳤어? 이쪽 거리가 다 임천강 거야?”같잖다는 표정으로 눈을 흘기는 강유리의 모습에 성신영은 잔뜩 경계의 날을 세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패션쇼장에서 있었던 악몽이 다시 떠오르며 성신영은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강유리, 넌 뭐가 그렇게 잘 났는데.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 듯한 그 눈빛 정말 마음에 안 들어. 그래놓고 내가 원하는 건 다 빼앗아가버리잖아.”강유리를 한참 동안 죽어라 노려보던 성신영이 피식 웃더니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그 드라마 때문에 온 거지? 네가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린 이 드라마 끝까지 진행할 거야. 정 못 참겠으면 소송이라도 걸어보든지. 뭐, 그럴 여력이 있을진 모르겠지만.”말을 하면 할 수록 성신영은 점점 의기양양해져갔다.“유강엔터... 투자자들도 다 발 빼고 있다면서? 회사가 간당간당하니까 우리 드라마 걸고 넘어지겠다는 거지? 죽을 날만 받아둔 영감 하나 무서워서 우리가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어?”강유리의 약점만을 콕콕 찌르는 날카로운 말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의연했다.귀국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면 화를 내고 슬퍼했을지도 모르겠다. 성홍주의 편애, 임천강의
하지만 성신영이 히스테리를 부리든 말든 강유리는 단호하게 돌아섰다.“거기 서!”비록 꼴 사납게 넘어지긴 했지만 육체적인 충격 덕분에 성신영 역시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아니야. 아까 인터뷰 분위기가 안 좋긴 했지만... 유강엔터와 뭘 하겠다는 말은 없었어. 어디서 허세야...’“강유리, 네가 뱉은 말 다 책임질 자신있어? DH를 끌어들이겠다고? 누구 마음대로? 그쪽에서 그렇게 해준대?”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아하게 일어선 성신영이 옆에 서 있는 육시준을 훑어보았다.“형부, 다른 건 몰라도 얼굴 하나는 참 괜찮단 말이야. 언니가 좋아할만 해. 그런데... 형부가 3년 전 일을 알아도 그렇게 네 편을 들어줄까?”성유리의 말에 고개를 돌린 강유리가 눈썹을 치켜세웠다.“형부, 엔터 사업이라곤 전에 손도 안 대본 언니가 이쪽으로 왜 그렇게 인맥이 많은지 궁금하지 않아요? 아, 3년 전에... 남자 때문에 철창살이까지 할 뻔했던 건 아세요? 그래서 3년 동안 도피유학 떠났던 거잖아요.”“성신영!”3년 전 일을 언급하니 강유리도 표정이 어두워졌다.“아, 형부 아직 모르셨구나. 아, 나도 참 입이 방정이라니까.”가식적인 미소를 지운 성신영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경고했다.“강유리, 내 사진... 유출하기만 해봐. 나 혼자는 안 죽어. 내가 자폭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때 그 일 다 까밝힐 거니까 각오해.”노골적인 협박에 강유리는 저도 모르게 육시준을 바라보았다.다른 사람 시선 따위 이제 신경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는데 당연하게도 육시준의 눈치를 살피는 자신의 모습에 강유리 본인도 놀라웠다.한편, 시종 차가운 표정으로 가만히 있던 육시준이 뜬금없이 한 마디 내뱉었다.“그 드레스... 눈에 익네요.”드레스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성신영이 피식 웃었다.“이거 DH 시즌 신상인데요.”“저번 달에 JH 빌라로 이사오고 나서 드레스룸 전체를DH 브랜드로 꾸미셨죠?”“네.”“제 기억이 맞다면 그날 브랜드 측에 연락하고 나서 관계자가 30분도 안 돼
‘하여간 말이 안 통해요.’강유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육시준에게 또 물었다.“그런데 당신이 여긴 무슨 일이야? 뭐 근처에 볼일이라도 있었나 봐?”“너 데리러 온 거야.”하지만 다음 순간, 옆통수가 따뜻해질 정도로 느껴지는 은근한 시선에 육시준은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아이쿠, 가뜩이나 자뻑모드신데 이런 말까지 하면 더 난리나겠네.’역시나 그의 말에 강유리의 미소는 더 밝아졌다.어젯밤 흘러가듯 했던 말을 기억하다니.강유리가 육시준의 손을 덥석 잡고 그는 어색하게 손길을 피해 핸들을 잡았지만 강유리는 포기란 없다는 듯 그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그만 좀 해. 운전 중이잖아.”“쳇, 저번에는 운전 중에도 잡게 내버려뒀으면서?”어떻게든 오른손을 끌어낸 강유리는 손깍지까지 끼곤 어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아까... 성신영이 한 말들...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내 말 믿어줄 수 있어?”“믿어.”“...”너무나도 확고한 말투에 오히려 강유리는 당황스러웠다.“왜? 아니, 이렇게 쉽게 믿는다고?”‘전 남친한테 그렇게나 질투심을 느끼는 남자가... 이 경우에는 바로 믿는다고? 난 또 한동안 힘들게 설득해야 하는 건가 걱정했더니...’“첫날밤 긴장한 꼴을 보면... 딱히 남자 후리고 다닌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서.”담담하지만 어딘가 모를 장난기가 담겨있는 육시준의 목소리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 강유리는 잡고 있던 깍지를 후다닥 풀었다.“그럼 당신은? 여자 몇 명이나 만나봤는데?”이에 이번엔 육시준이 다시 그녀의 손을 지긋이 잡았다.“뭘 꼭 여러 명 만나 봐야 하나? 요즘엔 여러 가지 자료들도 있고...”“하!”‘여러 가지 자료?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프로젝트 시장 조사라도 하는 줄 알겠어? 저렇게 점잖은 목소리로... 못 하는 말이 없어...’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려버렸지만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그녀의 마음도 점점 안정이 되어갔다.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으로 기사를 확인해 보니 조보희의
조보희가 온갖 악을 쓰던 그때, 라이브 채널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그녀에 관해 이런 저런 나쁜 이슈가 터질 때마다 그녀는 모기 같은 목소리로 위로를 건네며 라이브 방송은 잠깐 쉬는 게 어떠냐며 제안하고 했다.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한 조보희는 수락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저쪽 말을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알겠어! 당분간 라방 안 하면 될 거 아니야! 너까지 짜증 나게 이럴 거야!”“...”이에 한동안 정적이 일고 한참 뒤에야 매니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게요, 언니... 대표님이 물으셔서요. 정말 강유리 대표님과 사이가 안 좋으신 건가요?”저번, 조보희가 병원에서 켠 라방이 반응이 좋아 매니저는 강유리와 브이로그식으로 영상을 찍어 올리는 게 어떠냐며 제안했었지만 강유리와 안 친하다고 단칼에 거절했었다.그래서 그쪽에 관한 얘기는 끝난 건 줄 알았는데 또 왜...“언니?”“사이 안 좋아! 내가 걔랑 같은 화면에 나올 일은 없으니까 대표 그 자식한테 꿈 깨라고 전해!”조보희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근데... 방금 전에 강유리 대표가 SNS에 언니를 두둔하는 글을 올렸는데... 진짜 사이 안 좋으신 거 맞아요?”대중의 조롱을 받는 사람의 편을 든다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 막역한 사이에서도 망설여질만한데 강유리가...?“지금 SNS 확인 좀 해보세요.”조보희가 귀를 의심하며 휴대폰을 켜고 역시나 강유리의 포스팅을 공유한 링크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결과물이 어떠하든 스타일리스트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정성이 담긴 작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개인의 취향이 아니란 이유로 무분별하게 비난하는 건 멈춰주세요. 그리고 제가 볼 땐 나름 귀엽던데요.”사람들은 강유리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며 그녀의 편을 들어댔지만 조보희는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걔도 분명 날 비웃고 있을 텐데 왜? 도대체 왜...?’하지만 의아함보다 왠지 모르는 흥분감이 그녀의 심장을 콩닥거리게
“아, 다른 대표님들도 모셔봤는데 소화기관 쪽이 안 좋으신 분들은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시더라고요.”어색하게 화두를 돌린 아주머니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국을 떠 강유리에게 건넸다.국 그릇을 받아든 강유리가 의아한 눈빛으로 육시준을 바라보았다.“평소에 소화 잘 안 되고 그래? 속도 쓰리고?”“알면서 뭘 물어?”육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되묻자 강유리는 눈이 더 동그래졌다.“한 이불 덮고 살면서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하, 말을 해줘야 알지. 내가 뭐 의사도 아니고. 낯빛만 봐도 병명이 촤르륵 나오고 그러나 뭐?’고개를 푹 숙인 강유리는 애꿎은 국만 연거푸 들이키고 숟가락과 그릇이 닿는 소리가 조용한 식탁에 유난히 챙챙 울려 퍼졌다.한편,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아주머니는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다 이대로 스르륵 나가면 괜히 더 오해를 살 것 같아 은근 한 마디 덧붙였다.“사모님께서는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내일은 사모님 취향대로 준비할게요.”곰곰히 생각하던 강유리가 대답했다.“요즘 매운게 그렇게 당기더라고요. 내일은 훠궈 어때?”강유리가 육시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아주머니의 눈빛에 담긴 걱정을 눈치챈 육시준이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와이프 먹고 싶다는 거 한끼 정도야. 충분히 먹을 수 있지.”“우리 맵찔이 괜찮겠어?”그녀의 비아냥거림에 수저를 들던 육시준의 손길이 멈칫했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서 은근한 경고의 빛이 흘러나왔다.“아, 장난. 장난이야.”위험을 감지한 강유리가 바로 한 마디 덧붙였다.부부가 티격태격 말싸움을 시작하자 아주머니도 이때다 싶어 슬그머니 집을 나섰다.어색한 분위기속에서 식사는 이어지고 무슨 말을 하면 분위기를 풀 수 있을까 싶어 머리를 굴리던 그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낯선 번호. 강유리가 미간을 찌푸렸다.“여보세요?”“강유리! 네가 이런다고 내가 네, 감사합니다 인사라도 할 줄 알았어? 사람 우습게 보지 마!”수화기 저편에서 분노에 가득 찬
JL빌라.육시준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전화를 끊는 강유리의 밥 그릇에 갈비찜 하나를 올려주었다.“둔한 사람한테는 호의를 표현할 때도 확실하게 하는 게 좋아. 자칫하다간 오해받을 수도 있으니까.”“오해 아니야. 진짜 걔 도와준 거 아닌데?”갈비찜을 한입 베어문 강유리가 물었다.“조보희에 대해 잘 아나 봐?”“개인적으로 친분은 전혀 없어. 그냥 저번에... 당신이랑 사이가 안 좋은 것 같길래 좀 알아봤지.”깔끔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강유리를 바라보며 육시준은 생각에 잠겼다.한때 두 집안은 나름 사이가 좋았었고 조보희의 아버지 조희찬 역시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격이라 강유리가 먼저 손을 내민다면 힘이 닿는 데까지 도우려 할 게 분명했다.그리고 조보희 역시 업계에서 평판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천성 자체가 나쁜 건 아니라 곁에 둘 만한 사람이기도 하고 말이다.지금 자기 편 한 사람이 아쉬운 강유리의 처지에서 굳이 그쪽 집안 사람들과 사이가 틀어져서 나쁠 게 없다는 걸 똑똑한 강유리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왜...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육시준은 뜨거운 시선을 느끼고 흠칫한다.역시나 어느새 그의 앞에 다가온 강유리가 동화속 악역으로 자주 등장하는 여우처럼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러니까 저번에 쇼핑할 때부터 날 좋아했다 이거지? 그래서 새 옷도 잔뜩 사준 거고? 어쩐지. 왜 갑자기 거금을 들여서 옷을 사주나 했어. 그런데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 미모랑 재력 빼면 딱히 볼 것도 없는데...”양볼에 손까지 얹으며 짐짓 부끄러운 척 배배 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육시준은 기가 막혔다.‘하, 가만히 보면 자뻑이 참 심해... 요즘 무슨 말만 하면 자길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같단 말이야...’특히나 예뻐서 좋다, 능력 때문에 좋다라는 대답을 뻔히 바라 듯 마지막에 강조까지 하는 강유리가 어딘가 귀여우면서도 웃겼다.‘원하는 대답을 쉽게 해줄 수야 없지...’그녀의 밥그릇을 옮겨온 육시준은 그저 담담하게 말할 뿐이었다.“밥이나 먹어
‘도도한 얼굴에서 오는 반전 매력을 노린 거라면... 확실히 충격적이긴 하겠어. 추예진 작가와는 아마 전부터 아는 사이였을 가능성이 크고...’저녁 식사를 마치고 강유리는 시나리오 파일을 추예진에게 보낸 뒤 다시 한 번 기사를 확인해 보았다.DH 쪽에서는 여전히 감감무소식.답답한 마음에 서재에서 나온 강유리는 집사 아저씨에게로 향했다.“어제 오후 cctv 영상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아, 영상은 대표님께서 오후에 이미 확인하셨습니다. 사모님 명의로 브랜드 측에 영상도 보내셨고요.”“네?”그제야 오늘 오후, 성신영이 육시준 앞에서 했던 말을 애써 넘기느라 잊었던 디테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때마침 스타인 엔터에 나타났던 것, 성신영 앞에서 바로 DH에 관한 일을 말했던 것.현장에 없었으면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는 건 아마...‘임 대표 그 사람 때문이겠지.’의아함과 함께 강유리는 1층에 있는 육시준의 서재로 향했다.“똑똑똑.”노트북을 덮은 육시준이 대답했다.“들어와.”서재로 들어간 강유리는 물컵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팔짱은 낀 채 육시준을 흘겨보았다.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없어?”남자의 눈동자가 번뜩였다.“예를 들면?”“임강준 씨, 정말 단순히 비서인 거 맞아? 뭐 다른 특별한 정체 같은 거 없어?”“특별한 정체? 내 비서면 충분히 특별한 거 맞는 거 같은데.”“하, 패션쇼 주최측에서 꼬박꼬박 임 대표님이라고 부르던데. 일개 비서가 누릴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아서.”강유리의 질문에도 육시준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LK그룹 자회사가 워낙 많잖아. 임 비서가 대표로 맡고 있는 데도 꽤 되거든. 최근엔 LK 주얼리를 인수받는 중이고. 참, 그러는 넌 디자이너 Seema랑 아는 사이야?”육시준의 해명을 들으며 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강유리는 마지막 질문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만다.“아니. 왜 그렇게 물어?”강유리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Seema 스튜디오는 올해 초에 잠정적 휴업에 들어간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