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L빌라.육시준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전화를 끊는 강유리의 밥 그릇에 갈비찜 하나를 올려주었다.“둔한 사람한테는 호의를 표현할 때도 확실하게 하는 게 좋아. 자칫하다간 오해받을 수도 있으니까.”“오해 아니야. 진짜 걔 도와준 거 아닌데?”갈비찜을 한입 베어문 강유리가 물었다.“조보희에 대해 잘 아나 봐?”“개인적으로 친분은 전혀 없어. 그냥 저번에... 당신이랑 사이가 안 좋은 것 같길래 좀 알아봤지.”깔끔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강유리를 바라보며 육시준은 생각에 잠겼다.한때 두 집안은 나름 사이가 좋았었고 조보희의 아버지 조희찬 역시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격이라 강유리가 먼저 손을 내민다면 힘이 닿는 데까지 도우려 할 게 분명했다.그리고 조보희 역시 업계에서 평판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천성 자체가 나쁜 건 아니라 곁에 둘 만한 사람이기도 하고 말이다.지금 자기 편 한 사람이 아쉬운 강유리의 처지에서 굳이 그쪽 집안 사람들과 사이가 틀어져서 나쁠 게 없다는 걸 똑똑한 강유리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왜...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육시준은 뜨거운 시선을 느끼고 흠칫한다.역시나 어느새 그의 앞에 다가온 강유리가 동화속 악역으로 자주 등장하는 여우처럼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러니까 저번에 쇼핑할 때부터 날 좋아했다 이거지? 그래서 새 옷도 잔뜩 사준 거고? 어쩐지. 왜 갑자기 거금을 들여서 옷을 사주나 했어. 그런데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 미모랑 재력 빼면 딱히 볼 것도 없는데...”양볼에 손까지 얹으며 짐짓 부끄러운 척 배배 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육시준은 기가 막혔다.‘하, 가만히 보면 자뻑이 참 심해... 요즘 무슨 말만 하면 자길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같단 말이야...’특히나 예뻐서 좋다, 능력 때문에 좋다라는 대답을 뻔히 바라 듯 마지막에 강조까지 하는 강유리가 어딘가 귀여우면서도 웃겼다.‘원하는 대답을 쉽게 해줄 수야 없지...’그녀의 밥그릇을 옮겨온 육시준은 그저 담담하게 말할 뿐이었다.“밥이나 먹어
‘도도한 얼굴에서 오는 반전 매력을 노린 거라면... 확실히 충격적이긴 하겠어. 추예진 작가와는 아마 전부터 아는 사이였을 가능성이 크고...’저녁 식사를 마치고 강유리는 시나리오 파일을 추예진에게 보낸 뒤 다시 한 번 기사를 확인해 보았다.DH 쪽에서는 여전히 감감무소식.답답한 마음에 서재에서 나온 강유리는 집사 아저씨에게로 향했다.“어제 오후 cctv 영상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아, 영상은 대표님께서 오후에 이미 확인하셨습니다. 사모님 명의로 브랜드 측에 영상도 보내셨고요.”“네?”그제야 오늘 오후, 성신영이 육시준 앞에서 했던 말을 애써 넘기느라 잊었던 디테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때마침 스타인 엔터에 나타났던 것, 성신영 앞에서 바로 DH에 관한 일을 말했던 것.현장에 없었으면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는 건 아마...‘임 대표 그 사람 때문이겠지.’의아함과 함께 강유리는 1층에 있는 육시준의 서재로 향했다.“똑똑똑.”노트북을 덮은 육시준이 대답했다.“들어와.”서재로 들어간 강유리는 물컵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팔짱은 낀 채 육시준을 흘겨보았다.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없어?”남자의 눈동자가 번뜩였다.“예를 들면?”“임강준 씨, 정말 단순히 비서인 거 맞아? 뭐 다른 특별한 정체 같은 거 없어?”“특별한 정체? 내 비서면 충분히 특별한 거 맞는 거 같은데.”“하, 패션쇼 주최측에서 꼬박꼬박 임 대표님이라고 부르던데. 일개 비서가 누릴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아서.”강유리의 질문에도 육시준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LK그룹 자회사가 워낙 많잖아. 임 비서가 대표로 맡고 있는 데도 꽤 되거든. 최근엔 LK 주얼리를 인수받는 중이고. 참, 그러는 넌 디자이너 Seema랑 아는 사이야?”육시준의 해명을 들으며 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강유리는 마지막 질문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만다.“아니. 왜 그렇게 물어?”강유리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Seema 스튜디오는 올해 초에 잠정적 휴업에 들어간
강유리, 육시준 모두 생각과 다른 말을 뱉자니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고 두 사람의 대화는 어색하게 끝나버렸다.“크흠, 그건 그렇고... DH 쪽에 cctv 영상 보냈다면서? 고마워. 그리고 성신영 앞에서 내 편 들어준 것도 고맙고.”“미안. 내가 더 빨리 제대로 처리했어야 하는 건데.”“그게 왜 당신 탓이야. 그쪽에서 이렇게까지 나올 줄 알았나? 그리고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게!”이미 계획을 다 세워둔 강유리가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육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이번 사건은 온전히 DH 직원의 건방짐으로 인해 벌어진 일. 하지만 대헌그룹 김대헌 회장의 체면을 봐서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게 좋겠다 싶어 강유리의 명의로 영상을 보낸 것이었다.이쪽의 성의를 고맙게 여겨 대헌 쪽에서 깔끔하게 사과를 하고 강유리의 마음이 풀린다면 더 이상 따지지 않겠지만 그게 아니라면...‘지금까지 친분을 뒤엎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따지고 들어야겠지.’강유리가 육시준의 무릎 위에 앉은 채 대화를 이어가다보니 분위기는 점점 더 애매해졌다.따뜻한 분위기의 조명이 육시준의 조각 같은 이목구비 라인을 더 반짝이게 만드는데다 서로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에 강유리의 얼굴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큼, 새삼스럽지만 참... 잘생겼단 말이야.’강유리가 조심스럽게 그를 훑어보던 그때, 책상 위에 놓인 물컵을 바라보던 육시준이 피식 웃었다.“이젠 믹스커피 타주는 것도 귀찮나 보지? 겨우 깡 생수?”애매한 분위기가 담긴 목소리에 강유리의 가슴은 더 빠르게 콩닥이기 시작했다.“그... 그건 내가 마시려고 가지고 온 건데?”“하, 그러니까 날 위해서 물 한 잔도 안 따라오셨다?”“큼...”‘현모양처 노릇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고. 평생 이어가지 못할 바에야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서로에게 낫지 않겠어?’“내 모든게 다 당신 건데 뭘 그렇게 따져...”강유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컵을 건넸다.“모든게 다 내 거라고?”의미심장한 목소리. 이 남
다음 날.오랜만에 늦잠을 깨운 건 전화벨 소리였다.부스스 눈을 뜬 강유리가 대충 수락키를 누르고 수화기 저편에서는 상담원 특유의 친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강유리 씨, 안녕하세요. DH패션 본부 담당직원입니다. 저희 측 실수 때문에 불쾌함을 느끼셨다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의 의미로 저희 사측에서 VIP 회원카드 혜택에 대해 설명해 드리려 하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아직 잠이 덜 깬 강유리가 웅얼댔다.“회원카드요?”“네.”그리고 저쪽에서는 강유리가 이 제안에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했는지 시키지도 않은 소개 멘트를 이어가고...강유리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이게 DH가 제안하는 최종 솔루션인가요?”따발총처럼 쏟아내는 말에 머리가 지끈거릴 무렵, 강유리가 문득 물었다.아직 잠이 덜 깬터라 목소리에 힘이 축 빠져서인지 직원은 더 강한 태도로 나갔다.“네. 저희 측에서 해드릴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입니다.”‘이것들이 아침부터 짜증 나게...’눈을 질끈 감은 강유리가 화를 꾹꾹 누른다.“그러니까 공식적인 사과는 못 하시겠다?”“죄송합니다. 저희 측 실수로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보상은 이 정도로 밖에 못 해드릴 것 같습니다.”“제가 공개 사과를 원한다면요?”“...”저쪽에서도 당황한 듯 한참을 침묵하다 다시 말을 이어갔다.“강유리 고객님, 저희 DH 패션의 직원들은 전부 전문적인 교육을 거치고 현장에 투입됩니다. 몇 분뿐인 영상만으로 100% 저희 측 잘못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강유리 고객님이야말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저희 DH패션을 비하하신 탓에 지금 저희 측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해도 되는 상황이라 이 말씀입니다.”친절하지만 강경한 게다가 은근한 협박까지 담겨있는 말투였다.“하, 제 말은 패션쇼장에 있는 사람들만 들었고 CCTV 영상도 외부에 유출하지 않고 귀사 측에만 전송했습니다. 그런데 손실이라뇨? 정말 손실을 입는 게 뭔지 보여드릴까요?”이 마지막으로 강유리는 바로 전화를
전화를 끊은 강유리는 지금까지 낯선 번호로만 떠있던 조보희의 번호를 “찡찡이”라고 저장해 주었다.그래도 조보희와 통화를 하고 나니 DH 측의 무례한 태도 때문에 언짢아진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기분이었다.어쩌면 육시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조보희처럼 눈치가 무딘 사람에게는 돌직구를 날리는 게 더 좋을지도. 게다가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면 조보희가 나쁜 것만은 아니니 굳이 나쁘게 지낼 이유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약 20분 뒤,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레드 스포츠카가 JL빌라에 들어섰다.그리고 차에서 내린 조보희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보물 보자에 여자 희, 보물처럼 귀한 여자아이라는 이름답게 조보희는 평생 호의호식하면서 살아왔지만 별장이라 해도 될만큼 화려한 저택 앞에서 서니 지금까지 자신이 누려왔던 부가 하찮게 느껴질 정도였다.게다가 커다란 정원을 채운 고가의 식물들, 곳곳에 고급스러운 취향이 묻어나는 우아한 인테리어까지...별천지가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어 한참을 둘러보고 있던 그때, 홈웨어 차림의 강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야, 강유리! 너희 남편 설마... LK그룹 대표야?”“그런 거 아니야...”“이 펜트하우스, LK그룹 대표 소유잖아.”“그게...”강유리는 최대한 간결한 말로 어떻게 이 집을 사게 되었는지 설명했지만 조보희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조보희가 또 한 마디 덧붙이려 했지만 강유리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이번 일 이대로 넘어가도 괜찮겠어? 복수든 반격이든 뭐든 하고 싶지 않아? DH가 너한테 공개적으로 사과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하지만 조보희는 핸드백을 소파에 휙 던져버리곤 입을 삐죽 내밀었다.“에이전시 쪽에서는 나더러 좀 쉬래. 너, 나 가지고 또 무슨 장난질 칠 거면 관두는 게 좋을 거야.”‘도대체 집까지 왜 부른 거야. 자기가 얼마나 잘 사나 자랑하려고? 참나, 앞으로 거지라고 놀리진 못하겠네.’이때 아주머니가 다가왔다.“사모님, 아침 준비 다 됐습니다.”좀 더
“거짓말!”조보희가 고개를 홱 돌렸다.“네가 아무 꿍꿍이도 없이 날 도울 리가 없잖아! 날 집까지 불러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분명 뭔가 있어.”예전이었다면 순진하게 옳다구나 싶어 강유리를 전적으로 믿었겠지만 몇 번이나 당하고 나니 조보희가 아무리 단순하다 해도 의심부터 들 수밖에 없었다.그녀를 향한 의심 가득한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유리 역시 어깨를 으쓱했다.“믿든지 말든지.”하지만 그녀의 태도에 조보희는 더 기가 막혔다.‘하, 이제 나 같은 거 속이는 데는 거짓말도 필요없다는 거야?’눈이 터져라 강유리를 노려보았지만 상대가 가만히 있으니 조보희 기세도 한풀 꺾이고...한참을 꾸물거리던 그녀가 문득 물었다.“그런데... 왜 날 도와주는 거야? 성신영 그 계집애 대신 나한테 복수해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왜?”“학교 다닐 때... 너 맨날 그랬잖아! 동생 괴롭힌다고 나한테 맨날 뭐라고 했으면서!”“...”조보희의 말에 쉴새 없이 움직이던 강유리의 젓가락이 멈칫했다.처음 집에 왔을 때의 성신영은 결코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 워낙 조용하고 낯을 가려 파티에서도 한창 구석에만 박혀있는 것이 일상이었고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온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성신영이 죽을만큼 싫었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한테까지 괴롭힘을 받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이복동생이라도... 내 동생은 나만 괴롭힐 수 있어.’그래서 사람들이 성신영에게 비아냥거릴 때마다 항상 앞에 나섰던 강유리였다.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면 막역한 친자매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원만하게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말이 맞는 말이었나 보다.3년 전,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스캔들, 강유리가 하마터면 구속까지 될 뻔했던 사건은 완벽한 성신영의 함정이었다.비록 인생에 빨간줄 긋는 것은 막았지만 좁다면 좁은 이 바닥에서 강유리는 어느새 오만방자하고 방탕한 내놓은 자식이 되어있었고 성신영은 착하고 사랑스러운 딸 아이가 되어있
말로는 꿍얼대면서도 뭔가 아쉬운 듯 조보희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뭔데. 뭐 또 할 말 있어?”하지만 다른 뭔가에 정신이 팔린 조보희는 그녀의 짜증 섞인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듯했다.‘저건... 데이오 신상이잖아. 전 세계에 10벌밖에 없다는 드레스... 내가 구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매진이던데... 여기에 있을 줄이야.’“저 원피스 나한테 잘 어울릴 거 같은데?”“...”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던 강유리의 시야에 핑크색 원피스가 들어왔다.‘하, 핑키한 게 조보희 스타일에 어울리긴 하네.’“에휴, 챙겨서 가.”“오케이.”강유리의 마음이 바뀔까 걱정됐던 건지 후다닥 원피스를 챙긴 조보희가 타다닥 옷방을 나섰다.물론... 잠시 후 피팅을 해보고 나선 사이즈가 안 맞는 걸 발견하고 절망감에 잠겼지만 말이다.‘허, 저 계집애 왜 이렇게 말랐어. 짜증 나. 오늘부터 폭풍 다이어트다.’그 뒤로도 조보희는 강유리의 옷방에서 한참을 기웃댔고 이왕 부른 김에 빈 손으로 보내는 건 아닌 것 같아 액세서리와 가방까지 골라주었다.자기 마음에 꼭 드는 러블리 스타일로 코디를 마친 조보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다 흰색 하이힐로 눈길을 돌렸다.“이 구두는...”“야, 네가 무슨 신데렐라 언니니? 우리 두 사람 사이즈 안 맞잖아. 억지로 구겨넣지 말고 그냥 포기해.”‘쳇, 한 치수 정도는 괜찮은데... 됐다. 이 정도 후려갔으면 만족해야지 뭐.’그러면서도 옷방을 쭉 둘러보던 조보희가 벽 위에 달린 버튼을 꾹 눌렀다.스르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나타나고 깜짝 놀란 조보희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다시 앞으로 다가갔다.“하, 엘리베이터를 뭐 이렇게 숨겨뒀대? 누가 보면 지하실이라도 있는 줄 알겠어?”‘그러게... 나도 몰랐어...’“그런데 왜 옷방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거야? 어디로 통하는 건데?”조보희가 손가락으로 앞쪽을 콕콕 찔렀다.“남편 서재로 통하는 것 같은데. 그냥 가만히 있어.”“참나, 안 들어가! 그럼 지하는? 아, LK그룹
하지만 아주머니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으니...그녀가 모시는 사모님은 결코 순진하고 친절하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괜찮아요. 그 동안 제가 했던 짓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죠 뭐.”“보상이요?”“네.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어렸을 때 쟤를 좀 괴롭혔던 것 같아요, 제가.”‘아, 그런 거였나?’그리고 그녀도 모르는 사이 옷방에 생긴 엘리베이터 버튼에 대한 생각을 미처 할 새도 없이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하석훈에게서 걸려온 전화.역시 라이벌 브랜드답게 데이오 쪽에서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전화를 끊고 보니 그녀가 데이오 쪽에 보냈던 CCTV 영상이 어느새 SNS에서 일파만파 퍼지고 있었다.“정말 DH 직원이라고? 표정 왜 저러냐?”“조작 아니야?”“데이오 측에서 유출한 건데 조작은 아닐 듯. 조작이면 바로 소송감이잖아.”“그런데 어느 재벌집 사모님이지? 도대체 한 번에 옷을 몇 벌 사는 거야...”한편 LK그룹.역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육시준이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LK 소유 모든 백화점에 오늘 부로 DH 브랜드는 전부 철수시키라고 해.”“김 회장님과 친분도 있으신데 이렇게 바로 결정을 내리시는 건 좀 이르지 않을까요?”임강준이 의아한 듯 물었다.“그 알량한 친분마저 없었으면 진작 이렇게 했을 거야.”“알겠습니다.”한편, LK그룹의 공식 성명은 어떻게든 발버둥치려던 DH에게 청천벽력이나 마찬가지였다.DH본부 회의실.김 회장의 손자, 김찬욱 대표가 기획안을 던져버렸다.“영상, 어제 우리 측에 먼저 보냈다면서. 하루 종일 연구한 솔루션이 겨우 이겁니까?”“저희도 그쪽에서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LK 쪽에서 뭐가 모자라서 VIP 카드 한 장에 넘어갑니까? 다들 정신 안 차려요!”김찬욱의 불호령에 다들 고개를 푹 숙였다.‘LK그룹 쪽 사람인 줄 알았으면 그렇게 안 했죠...’두 눈을 질끈 감은 김찬욱이 물었다.“사고 친 직원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안하린 씨는 대표님 사촌누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