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석이 뭐라고 더 말하려는데 강미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게스트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웃는 얼굴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는 강미영의 모습은 그저 심심풀이로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어른이 아랫사람한테 관심 조로 하는 말 같기도 했다. 강미영의 말투와 물음은 소지석을 당황하게 했고 시청자들도 따라서 당황했다.“아니. 정말 모르겠어요?”“미영 언니 표정 봐요. 그저 심심해서 묻는 말 같아요. 아직 눈치 못 챈 거 아닐까요?”“어떤 팬이 소지석이 아깝다고 하더니 잘 좀 봐. 미영 언니는 아예 그런 뜻이 없어.”“지석 오빠와 유리 언니가 친구야. 미영 언니는 그저 조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너무 슬퍼. ㅠㅠ”“지석 오빠가 당황했어.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어.”“지석 오빠, 여기까지 왔는데 용감하게 고백해요.”“고백 안 하는 게 나을 듯.”댓글 창에서 또다시 갑론을박이 시작했다. 소지석에게 용감하게 고백하라고 다그치는 사람도 있었고 제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전에 소지석이 아깝다는 댓글을 반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소지석이 잠깐 당황하더니 이내 진지하게 대답했다.“있어요.”지나가는 말로 물어본 것인데 너무나도 진지하게 대답하니 강미영은 금세 흥미가 생겼다.“진짜야? 누구야? 이모가 도와줄까?”그러자 소지석은 웃으며 동문서답했다.“유리와 릴리가 누나를 연애하라고 이 프로에 출연시킨 건데 남의 연애나 돕고 있으면 되겠어요?”강미영은 이내 손을 저으며 말했다.“네가 남이야?”남자는 깊은 두 눈으로 그녀를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물었다.“그럼 누나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요?”강미영이 낮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네가 퇴직할 나이 되어보면 알 거야. 내 나이가 되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물건도 사람도 별로 많지 않아.”뜻인즉슨 없다는 것이고 그저 두 자매의 소원을 이뤄주려고 놀러 왔을 뿐이다. 오기 전에는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환상을 가졌을지 모르겠지만 정작 와보니 그런 사람은
피디가 전에 이런 유형의 예능프로를 많이 연구한 결과 생소한 사람들을 한곳에 모여놓고 열악한 환경에 처했을 때 그들의 인성이 여실히 드러났고 그에 따른 모순도 발생하면서 이런 모습이 시청 포인트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여 피디는 관찰카메라 형식의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스들의 생활을 관찰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이들이 진실한 인성을 드러낼지 아니면 서로 보듬어주면서 함께 고난을 이겨낼지가 알고 싶었다. 어떤 상황이든 볼거리가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이틀 만에 소위 인솔자인 육경서때문에 난항을 겪게 되었다.아무리 재벌 2세라고 해도 유강엔터에 소속된 연예인이기에 피디는 화를 참지 못하고 반항했고 육경서 또한 피디의 기분을 이해하지만 절대 이대로 물러설 수 없어 바로 반발했다. “반칙이 아니에요. 이건 제 별장이 아니에요.”“육씨 가문의 별장도 안 되고 친구, 친척의 것도 안 돼.”피디가 노발대발하자 육경서가 느릿느릿 말했다.“제 설명을 마저 듣고 판단하시는 게 어떻겠어요?”피디는 육경서를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체 무슨 꿍꿍인지 알아보기로 했다.“이 별장은 제 친구 친구가 방치해둔 별장이에요. 지금 여행 시즌이라 단기 임대를 하려고 하는데 제가 임대 맡은 건 아니에요. 저희 여행 경비로는 이런 별장을 임대 못 해요.”육경서는 당장 불이라도 뿜어낼듯한 피디의 모습에 재빨리 설명했다.“이 별장을 비워둔 지 꽤 오래됐기에 임대하기 전에 청소해야 한대요. 하지만 별장 안에 귀중품이 많고 집주인이 외국에 있어 업체를 불러 청소하기는 걱정이 된다고 해서 제가 이 일을 맡기로 했어요.”그 말에 피디가 육경서를 흘기며 말했다. “그래서 경서 씨가 업체를 찾아 청소를 맡기고 이곳에서 감독한다는 거야?”“아니죠. 저희가 청소해주는 대신 3일동안 무료로 사용하는 거죠. 이건 문제없잖아요?”피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네 보기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아
게스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한지원은 그들의 난처함을 알아채고 캐리어를 끌고 가며 말했다.“계획 짜는 건 도움 줄 수 없어도 청소는 저한테 맡기면 돼요. 제가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집에서 청소하는 게 취미거든요. 엄청나게 힐링이 돼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그녀는 게스트들이 힘들어할까 봐 위안하기 위해서이다. “저도 할 수 있어요.”한지원이 혼자 하게 내버려둘 수 없어 신주리도 가담하기로 했다.집에서 도우미 아주머니가 청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기에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감기도 낫지 않았는데 넌 빠져.”육경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말을 반박하자 신주리는 고개를 돌려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그럼 네가 할래?”그러자 육경서가 고개를 살짝 쳐들고는 말했다.“내가 못 할 것 같아? 나도 청소할 줄 알아.”그러자 신주리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관둬. 할 줄 안다고 해도 네 팬들이 마음 아파서 그 모습을 어떻게 보겠어? 우리 오빠가 왜 계획도 짜야 하고 숙박지도 찾아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해? 신주리는 왜 아무것도 안 해? 고작 감기 걸린 것 가지고 뭐가 그렇게 대단해? 이럴 것 같아.”그 말에 육경서는 어이가 없어 침묵했고 댓글 창도 침묵했다.역시 마법으로 마법을 무찌르는 것이 진리이다. 육경서 팬들의 진실한 속마음을 신주리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해버리니 그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젠장, 이 여자가 내 속마음을 읽어버렸어.”“신주리가 이렇게 말하면 내가 욕 안 할 줄 알았지? 그런데 말이야. 진짜로 못 하겠어.”“역시 철천지원수가 서로를 제일 잘 알아.”“신주리를 몇 년 동안 욕해왔고 아직 몇 년은 더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러면 내가 젠장 할 말이 없잖아.”“주리 겁내지 마. 우리가 대신 욕해줄게.”“감기 걸린 게 죄야? 나도 감기 걸리면 누워 쉬는데 주리같이 연약한 아가씨가 어떻게 버텨?”“...”두 사람의 전쟁이 다시 또 시작할 것 같아 강미영은 바로 도
대부분 시청자는 육경서가 친구에게 사기당했다고 생각했지만 육경서 열혈 팬은 오랫동안 방치한 별장이기에 정상이라고 기를 쓰고 자기 아이돌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집을 피운다고 해도 현 상황을 바꿀 수 없었다. 육경서도 혹시 바보 친구가 고의로 한 짓이 아닌지 의심되었다. “맙소사, 육 도련님 친구가 보통 부자가 아니네요. 쓰레기 처리장을 금으로 도배했네요. 덕분에 이런 곳에 입주하게 되어 영광이에요.”신주리가 고개를 쑥 들이밀고는 비아냥거리며 말했고 육경서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입 다물어. 안 그러면 너 혼자 청소시킬 거야.”신주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손을 입 가까이 가져가더니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쓱 그으며 지퍼 닫는 시늉했다....게스트들의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반면에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이는 피디는 환한 얼굴로 촬영사에게 빨리 촬영 포인트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게스트들이 호텔로 옮기겠다고 할지도 모른다.게스트들은 캐리어를 안으로 들여놓지 않고 문 앞에 둔 채로 순서대로 입장해 별장 내부를 참관했고 카메라가 찍은 곳곳마다 말 그대로 쓰레기 처리장이었다. 바닥은 먼지로 가득했고 알록달록한 많은 물건이 널브러져있었으며 자세히 보니 대부분 파티에서 사용하고 남은 물품들이었다. 주방 식탁에는 먹다 남은 배달통이 수두룩했고 거실 테이블 위에는 음료수병과 술병, 그리고 먹다 남은 과자 봉투와 말라비틀어진 과일이 놓여 있었다. 카펫에는 여러 가지 물품들이 가로세로 뻗어있었고 옆에 놓은 밀차에는 반만 먹은 케이크가 놓여있었으며 테이블과 식탁에는 케이크 크림이 잔뜩 발라져 있었다. “오랫동안 비워둔 것이 아니라 얼마 전에 파티했던 모양이야.”“우리 오빠가 친구한테 당한 것 같아. 누군가가 입주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어질러 놓은 것 같아.”“아주 잠깐 카드 정지 맞은 재벌 2세를 불쌍히 여겼던 내가 병신이야.”“나쁜 친구네.”
신주리가 입을 삐죽거리더니 말했다.“방귀 낀 놈이 성 낸다더니 이건 무차별 공격인가?”그러자 육경서는 대범하게 승인하면서 말했다.“알면 날 건드리지 마.”그러더니 신주리가 쥐고 있던 걸레를 확 낚아채 대야에 던지고는 대야를 들고 다른 곳으로 향하면서 말했다.“가서 병이나 정리해. 내가 닦을게.”신주리는 육경서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더니 손에 묻은 물기를 털고 병을 줍기 시작했다.댓글 창에는 커플 팬들의 응원 소리가 자지러지면서 육경서에 대한 찬양이 끝없이 쏟아졌다....육경서의 친구가 비록 장난치긴 했지만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고 청소할 범위도 그렇게 넓지 않았다.하지만 가사에 익숙지 않은 게스트들은 기어이 30분을 넘겨서야 겨우 끝냈고 시계를 보니 한시가 넘었다.게스트들이 많이 힘들었는지 밖에 나가기를 거부했고 하는 수 없이 육경서는 거금을 들여 배달을 시켜 점심을 먹고 나서 방을 배정하기 시작했다.“1층과 2층에 각 네 개의 침실이 있어요. 제 생각에는 성별대로 나누면 편하고 좋을 것 같아요.”하지만 육경서의 제의가 당장에서 바로 부결되었다. 프로에 관심이 전혀 없는 심수정이 괜히 시비를 걸었다.“대학교 기숙사도 아니고 왜 성별대로 나누어야 해? 총각, 이건 연애 예능프로야.”그 말에 육경서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맞는 말씀인 것 같아요. 그럼 아래위층에 각각...”“각자 마음에 드는 방을 선택해서 쓰라고 하면 되잖아.”심수정이 말했다.“그렇게 해요. 그럼 선배님들 먼저 선택하시고 저와 주리는 나중에 선택할게요.”육경서는 자각적으로 자기와 주리 이외의 게스트들을 선배로 통칭했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쿠션을 안고 있던 신주리는 어쩌다 육경서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고 소지석도 이 제안이 마음에 드는지 강미영 측을 바라보며 물었다 “미영 누나는 1층이 좋아요? 아니면 2층이 좋아요?”“제가 2층 서재 옆에 딸린 방을 쓸게요. 잠귀가 밝아서 조용한 걸 좋아해요.”강미영은 거절하지 않고 맨 처음 순서로 제일
넋이 나간 듯 소파에 앉아 있던 신주리는 자기 이름이 들리자 이내 말했다.“전 괜찮...”뒷말을 맺기도 전에 심수정이 계속해 말했다.“제가 주리와 함께 1층에 있을게요.”“...그러셔도 되고요.”“그럼 저도 1층 할게요. 주리와 함께요.”심수정 말에 육경서도 덩달아 말하자 신주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뻔뻔해. 누가 너와 함께하겠다고 했어?”신주리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육경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옆방을 쓰겠다고 했지 내가 언제 너와 같은 방을 쓰겠다고 했어?”신주리는 눈을 땡그라니 뜨더니 몸을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내 말이 그거야. 왜 하필 내 옆방이냐고? 누가 너와 함께 1층에 있고 싶다고 했어?”이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대전이 일어나기 십상이다.그러자 주상현이 생각할 틈도 없이 얼른 2층에 남은 마지막 방을 차지했다.“2층 안방이 비었으니 제가 써도 괜찮겠죠?”그러자 서진태가 이내 멍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아직 선택하지 않았어.’잠깐 늦게 선택하는 바람에 두 꼬맹이와 함께 1층 방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하하하, 어르신들은 이 두 사람과 가까이하는 게 싫은가 봐. 너무 시끄러워.”“서 선생님의 유감스런운 표정 어떡할 거야?”“주상현 씨는 이 커플이 싸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이러는 게 이상해.”“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수정 언니가 2층 방을 양보한 것도 이상해요.”“일부러 주상현한테 양보한 것 같은데...”“다들 연애하러 왔는데 수정 언니는 중매 서러 온 것 같아요.”“수정 언니가 강미영하고 담판하러 온 것 아닌가요? 우리 주경이 일도 해결하지 못하고 친구가 된 건가?”“어떤 사람 팬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으면 해. 아무리 친엄마라고 해도 뒤치다꺼리를 반드시 해줘야 한다는 법은 없어.”“맞아요. 단순히 놀러 왔을 수도 있잖아요.”“...”방 배정이 끝내고 나서 다들 잠깐 방으로 들어가 쉬면서 기력을 보충하고는 저녁에 여행지
육경서는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너무 창피해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들어가고 싶었다.“요즘 커플들은 이렇게 연애해요?”한지원은 진짜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주상현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연애를 참 재밌게 하네요.”“주리 감기 다 나은 것 같아. 싸움에서 승리했어. ”“그래. 남자 대장부가 굽힐 줄도 알아야 해.”서진태와 소지석도 연달아 말했다. 댓글 창의 반응도 이들과 비슷했고 다들 두 사람의 행동이 지나치게 유치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다른 의견도 섞여 있었다.“두 사람이 자꾸 싸운다고 그렇게 질색하더니 왜 커플의 사적인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래요?”“이게 사적인 얘기에요? 반경 5미터 안팎에 있던 사람들이 육경서의 소박한 찬사를 다 들었을 거예요.”“지출계획으로 화제를 시작했으니 다들 신경 쓰고 들었겠지.”“경서 오빠 말투를 들어서는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야.”“...”비록 입장이 난처했지만 롤모델인 소지석의 말에 육경서는 적지 않게 위안이 되었고 주머니 상황 탓에 악당에게 머리를 숙이는 건 대국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니 갑자기 자긍심이 생기면서 당당히 어깨를 펴고 물었다.“빨리 말해 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듣고 있는데 얼렁뚱땅할 생각 하지 마.”여기까지 말하자 모든 사람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신주리를 바라보았다.인솔자가 있기에 그의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되지만 다들 생각 없는 사람이 아닌지라 어느 정도의 팀워크가 있었고 어려움에 봉착하면 함께 대책을 강구하기도 했다.“골동품 시장에 대해 내가 연구를 해봤는데 그곳에서 천만 이상 소비하면 해성의 모든 여행지의 티켓이 무료라고 했어. 쇼핑하는 비용은 제작진이 부담한다고 했으니 그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나머지 돈으로 우리가 하루 세 끼 식당에서 밥을 안 먹는다고 해도 여전히 부족해. 지금 우리는 별장에 살고 있고 가전 기구가 갖춰져있으니 우리 직접 밥해 먹는 건 어때?”아주 좋은 생각이었고 이러면 입장권은 쉽게 해결할 수 있으나 식사는...“어떻게 매일
앞서가던 게스트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보니 신주리가 팬들과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사람무리에서 검은 그림자가 뛰쳐나오더니 순식간에 그녀를 향해 돌진해 오자 미처 반응할 겨를이 없었다. 사처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나왔다.“손에 병을 들고 있어. 뭐 하려는 거야?”제일 안쪽에 서 있던 육경서도 그가 손에 뭔가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직감적으로 좋은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은 신주리의 얼굴을 향해 의문의 액체를 뿌렸고 위험을 느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피했지만 육경서만 거의 무의식적으로 옆에 선 신주리를 와락 품으로 끌어들이고는 몸을 돌려 등으로 액체를 막았다.신주리는 그때까지 멍한 상태로 귓가에서 들려오는 힘 있는 심장박동 소리를 들었고 갑자기 남자의 몸이 흠칫하더니 ‘스읍’ 하고 호흡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주리가 고개를 돌려 바닥에 떨어진 액체를 바라보는 순간 동공이 배로 커졌고 바닥에 닿은 액체는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부식성이 상당히 강한 액체다...“피해. 황산이야.”서진태가 바로 알아채고 고함을 질렀다.육경서가 옆으로 몸을 비키긴 했지만 장소가 제한되었기에 액체가 날리면서 그의 팔뚝과 어깨에 떨어졌다. 그걸 본 서진태는 재빨리 달려와 육경서의 상처를 응급처치했고 바로 그때 신주리가 황산에 맞지 않은 것을 본 남자는 이내 품에서 과도를 꺼내더니 다시 덮쳐왔다. “신주리 나쁜 년. 내가 널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 허영심에 빠진 뻔뻔한 년. 죽여버릴 거야.”사생팬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위협했다.“...”갑자기 발생한 일이라 다들 무의식적으로 멀리 피했고 제작진이 정신을 차리고 제지하려 할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다들 심장이 철렁했고 과도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자 신주리를 품에 안은 육경서는 미처 피할 길이 없었고 서진태도 제지할 방법이 없기에 할 수 없이 물러섰다...바로 이때 가녀린 손이 뻗어오더니 사생팬의 손목을 움켜쥐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비틀어버리자 우지직하는 소리와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