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가던 게스트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보니 신주리가 팬들과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사람무리에서 검은 그림자가 뛰쳐나오더니 순식간에 그녀를 향해 돌진해 오자 미처 반응할 겨를이 없었다. 사처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나왔다.“손에 병을 들고 있어. 뭐 하려는 거야?”제일 안쪽에 서 있던 육경서도 그가 손에 뭔가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직감적으로 좋은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은 신주리의 얼굴을 향해 의문의 액체를 뿌렸고 위험을 느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피했지만 육경서만 거의 무의식적으로 옆에 선 신주리를 와락 품으로 끌어들이고는 몸을 돌려 등으로 액체를 막았다.신주리는 그때까지 멍한 상태로 귓가에서 들려오는 힘 있는 심장박동 소리를 들었고 갑자기 남자의 몸이 흠칫하더니 ‘스읍’ 하고 호흡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주리가 고개를 돌려 바닥에 떨어진 액체를 바라보는 순간 동공이 배로 커졌고 바닥에 닿은 액체는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부식성이 상당히 강한 액체다...“피해. 황산이야.”서진태가 바로 알아채고 고함을 질렀다.육경서가 옆으로 몸을 비키긴 했지만 장소가 제한되었기에 액체가 날리면서 그의 팔뚝과 어깨에 떨어졌다. 그걸 본 서진태는 재빨리 달려와 육경서의 상처를 응급처치했고 바로 그때 신주리가 황산에 맞지 않은 것을 본 남자는 이내 품에서 과도를 꺼내더니 다시 덮쳐왔다. “신주리 나쁜 년. 내가 널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 허영심에 빠진 뻔뻔한 년. 죽여버릴 거야.”사생팬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위협했다.“...”갑자기 발생한 일이라 다들 무의식적으로 멀리 피했고 제작진이 정신을 차리고 제지하려 할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다들 심장이 철렁했고 과도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자 신주리를 품에 안은 육경서는 미처 피할 길이 없었고 서진태도 제지할 방법이 없기에 할 수 없이 물러섰다...바로 이때 가녀린 손이 뻗어오더니 사생팬의 손목을 움켜쥐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비틀어버리자 우지직하는 소리와
“경서 씨 덕분에 우리 주리가 무사해서 정말 고마워요. 그 자식이 주리 얼굴을 노린 것 같은데 너무 화가 나요.”“너무 악랄하네요. 무슨 원한이 있다고 저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요?”“서 선생님의 신속한 응급구조에 찬사를 보냅니다. 고마워요.”“미영 언니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어. 제압하는 기술로 봐서는 보통내기가 아니야.”“미영 언니 눈에서 살기를 느꼈어요. 카메라가 없었더라면 그 남자를 절대 쉽게 보내주지 않았을 것 같아요.”“미영 언니는 정당방위에요. 절대 도 넘는 행동을 하지 않았어요.”“맞아요.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누구라도 당황했을 테고 아무리 유단자라고 해도 겁이 났을 거예요. 한꺼번에 제압 못 해서 반격당하는 날이면 큰일 나요.”“...”네티즌들의 의견이 분분했고 병원 분위기도 긴장감이 고도로 달했다.유강 엔터의 여한영과 로얄 엔터의 장경선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현장으로 달려와 응급실 밖에서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렸고 피디의 얼굴빛이 상당히 흐려있었다. 지극히 일반적인 여행 예능프로가 모험 다큐가 되어버렸고 게스트뿐만 아니라 그도 덩달아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이 시각 응급실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이 육경서가 아니라 자기라면 마음이 훨씬 편했을지 모른다.응급실 문이 드디어 열리고 의사 선생님이 걸어 나오더니 문 앞에 서 있는 한 무리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이내 경쾌한 말투로 말했다.“다행히 환자가 긴팔을 입은 덕분에, 그리고 현장에서 응급처치도 빠르게 했기에 화상 면적이 크지 않고 흉터도 남지 않을 거예요.”그 말에 피디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직장에서 잘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안도했다.그뿐만 아니라 유강과 로얄의 고위층 관리자도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직장을 잃을 위기에서 벗어났다. 현장에서 제일 차분한 사람은 서진태였고 그가 말했다.“제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요. 제가 있는데 중상까지 가게 내버려두겠어요?”신주리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안하던 강미영이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돌리며 버럭 화를 냈다.“오늘 길에
여러 사람의 설득으로 육경서는 강제로 입원하게 되었고 정작 본인은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모두의 걱정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육경서는 솔직히 많이 놀란 상태였지만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니 그제야 진정되었는데 또 갑자기 입원하라고 했다...VIP 병실. 육경서는 억지로 밝은 웃음을 지으며 걱정해 주는 사람들을 바래고 나서보니 병상 옆에 신주리만 남았고 그러자 이내 울상이 되어 긴장한 말투로 물었다.“주리야. 솔직하게 말해 줘. 혹시 내가 곧 죽어?”신주리는 그때까지도 아까 전의 악몽에서 완전히 헤쳐나오지 못했기에 어정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러자 육경서는 더욱 당황해하며 물었다.“주리야. 왜 그래? 네 눈빛이 무서워.”신주리는 입술을 깨물고 한참 생각하더니 입을 열고 물었다.“왜 나를 막아줬어?”육경서가 흠칫하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무슨 헛소리야? 내가 너와 제일 가깝게 있었는데 나 말고 누가 널 막아주겠어?”신주리가 말했다.“만일 다른 사람이라도 막아줄 거야?”그 말에 육경서의 눈빛이 깊어지더니 갑자기 할 말을 잃었는지 침묵했다.그는 그녀가 왜 이렇게 묻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아무튼 정말 고마워. 다행히 경미한 화상이라고 하니 한시름 놨어. 그런데 장 부장님과 여 이사님이 걱정된다고 이틀 입원해서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어.”신주리는 깊이 숨을 들이쉬더니 육경서의 물음에 대답했다. 신주리의 말투는 온화했고 차분했으며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해버리는 평소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하지만 육경서는 왠지지 이런 신주리가 낯설게 느껴졌고 그와 아웅다웅하며 다툴 때가 훨씬 진실되게 느껴졌다.육경서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지면서 한마디 툭 뱉었다.“나도 모르겠어.”신주리는 실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의 말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육경서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진지하게 말했다.“다른 사람이라도 내가 그렇게 할지 모르겠어. 사람은 위험한 상황에 빠지면
육경서가 신주리의 싸늘한 태도에도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다.“네가 그날 밤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 침묵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 그날 일은 두 사람 모두 취한 상태였기에 술 깨고 나서 네가 혹시 후회했는데 내가 자꾸 끈질기게 물으면 내가 너무 자존심 상하잖아.”그러자 신주리는 눈이 휘둥그레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 나한테 물었어? 그리고 또 언제 끈질기게 물었어?’지나가는 말처럼 휘리릭 묻고 나서 신주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화제로 넘긴 사람이 누군데?그리고 신주리는 육경서가 두 사람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바로 그 자리서 이별 통보를 내릴 줄 몰랐다.신주리가 입을 열고 뭐라고 말하려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대로 침묵했다. 육경서도 더는 말이 없었고 오랫동안 침묵하면서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병실 안은 순간 미묘한 정적이 흘렀고 병상에 앉은 신주리는 그가 다시 입을 열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신주리는 육경서에게 할 말이 더 남았을 것으로 생각했고 자기 속내를 여실히 보여줬으니 그도 그에 따른 태도 표시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육경서가 먼저 이별 통보를 했고 오해인 것이 밝혀졌으면 그가 직접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참 동안 기다려도 육경서가 말이 없자 신주리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옆에 놓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까이에 있으면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핸드폰을 보니 매니저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있었고 병원 문 앞까지 왔다고 했다.“뭐 먹고 싶어? 매니저가 오면서 사다 주겠대.”육경서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자기야, 나한테 한가지 생각이 있어.”그날 밤 육경서가 취해서 부른 호칭에 신주리는 갑자기 핸드폰을 쥔 손을 꽉 움켜쥐더니 눈까풀을 파르르 떨면서 이내 고개를 들어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건 오해였으니 내가 그 말을 철회하면 안 될까?”육경서는
이 여자의 마음은 돌멩이처럼 단단했고 그가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자비라곤 전혀 없었다.육경서는 화상을 입은 곳이 어깨가 아닌 구멍이 숭숭 난 자기 가슴인 것 같았다. 자기 속내를 보여주지 않은 것은 거절당하면 자존심이 상할까 바였지만 정작 용기 내 고백한 뒤 거절당하니 자존심이 상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헤어지자고 하지 말았을걸...이럴 줄 알았더라면 흥분하지 말았을걸...이럴 줄 알았더라면 자존심을 버렸을걸...“협조해 주는 게 좋겠어. 그냥 소식은 뭐고 나쁜 소식이 뭔지 빨리 물어봐 줘.”신주리는 육경서의 기분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가 얻어낸 소식을 공유하려고 했다. 그러자 육경서는 마치 AI와도 같이 전혀 감정이 목소리로 물었다.“그래서 그냥 소식이 뭐야?”신주리가 답했다. “제작팀에서 네가 다친 것을 보상해 주기 위해 여행 경비를 올려주겠대.”육경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도 양심은 있네. 그럼 나쁜 소식은 뭔데?”“나쁜 소식이라면 경비가 많든 적든 우리와 상관이 없게 됐어. 촬영 접고 병원에서 살아야 해.”오랜 침묵 끝에 육경서는 가출한 정신을 부여잡으며 물었다.“요 며칠 동안의 예산만 올려준 거야?”신주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런 것 같아.”그러자 육경서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핸드폰 줘 봐.”갑작스러운 소식에 육경서는 자기가 다쳤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손을 뻗으려다 상처를 건드리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스읍’ 하고 호흡을 집어삼켰다.“조심해.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 크게 움직이면 안 돼.”신주리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긴장한 눈빛으로 그의 팔을 바라보았다. 육경서는 눈앞에서 알른거리는 신주리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병원으로 이송할 때 그녀의 걱정스러워하던 표정이 떠오르면서 저도 모르게 물었다.“병원으로 오는 길에 줄곧 내 어깨를 바라보고 있던데 그때 무슨 생각 했어?”오는 길에 신주리가
상대방 목소리가 갑자기 진지해졌다.“의사는? 그래서 내가 아까 전면 검사를 받아보자고 했잖아.”“그것과 상관없이 피디님이 이제부터의 스케줄은 예산을 올린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심장이 둔기에 맞은 것처럼 아파요.”피디는 갑작스러운 육경서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더니 육경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들어보니 첫 번째 스케줄만 경비를 올리고 그 뒤로는 없다면서요?”피디는 순간 육경서가 자기와 협상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경서 씨. 이렇게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우리 프로의 최대 볼거리가 게스트들이 힘을 합쳐 곤란을 헤쳐 나가는 것인데 나도 사실 경비를 이렇게까지 타이트하게 할 생각은 없어. 그저 게스트들의 임기응변 능력을 단련시키고 싶을 뿐이야.”“전 단련 받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저 여자 친구와 재밌게 여행하고 싶어요. 만일 다음 스케줄도 이렇게 빡빡하게 굴 거라면 우리 둘은 하차할게요.”그 말에 신주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신주리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협상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감히 피디를 협박해?’하긴 뭐 이 프로에 출연하게 된 것도 릴리한테 속아 온 것이다. 현재 이 프로의 인기 담당이 육경서와 신주리이니 충분히 제작진과 조건을 흥정할 자격이 있다.그리고 프로그램이 사고 난 시점에 두 사람이 하차한다고 하면 엄청나게 많은 유언비어를 낳게 될 것이다.예를 들어 제작진이 안전한 촬영 환경을 마련하지 않았기에 신주리와 육경서가 화가 나서 하차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러면 다른 팬들도 자기 아이돌의 안전을 걱정할 것이다. 이건 뒷말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두 사람이 제작진에게 책임을 추궁할까 봐 겁이 났다.“이건 프로그램을 위해서인데 왜 나를 입장이 난처하게 만들어?”피디는 울상이 된 얼굴로 회사에 책임을 떠넘겼다.육경서는 그런 피디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 엄포를 놓았다.“제작자가 저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만일 계속 이렇게 할 거라면 제가 퇴원하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피디는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주리 씨, 이번은 정말 사고야. 다음 스케줄부터는 모든 일정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계획할 것이며 게스트들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 있어.”신주리는 전혀 자기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2부는 야외탐험이다 보니 1부보다 훨씬 더 위험할 거예요. 그러면 거의 매일 사건 사고가 발생할 텐데 저희는 못 하겠어요.”신주리는 어떻게라도 설득해 보려고 노력하는 피디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냉랭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육경서가 처음에는 신주리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야외 탐험이기에 1부보다 위험계수가 훨씬 높다...“정말 하차하려고?”육경서가 묻자 신주리는 멈칫하더니 말했다. “속아서 온 거니까 지금 도망가기 제일 좋은 기회야. 인지도도 상승했고 우리만 제작진을 욕하지 않으면 무사하게 끝까지 촬영할 수 있어.”끝까지 무사히 촬영할 수는 있겠지만 절대 지금의 인지도를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필경 두 사람의 팬덤이 어마어마한 존재니까.“난 하차 안 할 거야. 그냥 하고 싶어.”육경서가 불만을 터뜨리며 반박하자 신주리는 살짝 눈꼬리를 끌어올리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그래 그럼. 만일 피디가 다시 전화로 설득하려 하면 그렇게 전할게.”그러자 육경서가 소리를 높이며 말했다.“안 돼. 너도 계속 해야 해. 나와 함께 출연해.”“내가 왜?”그 말에 육경서는 말문이 턱 막히면서 몇 초 동안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불쌍한 표정으로 자기 팔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지금 환자인데 넌 내가 혼자서 촬영하는 게 걱정되지 않아? 넌 전혀 가슴이 아프지 않아? 조금 전에 말했던 내가 장애인이 되면 한평생 날 책임지겠다고 했던 말이 전부 가짜지?”“아니...”“넌 정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무정한 여자야. 네가 이렇게 지독한 줄 알았더라면 널 구해주지 말았어야 하는데. 황산에 이 예쁜 얼굴이 다 녹아버려 네
그러면 아주 오랫동안 신주리를 만날 수 없게 된다...육경서는 절대 이 점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억지로라도 신주리를 이 프로에 출연시키고 싶었다.“넌 욕 먹는 게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난 두려워. 오늘 내 사생팬이었다면 내일에는 네 사생팬이 달려들어 내 목숨을 따갈지도 몰라.”신주리가 매우 이성적으로 분석하자 육경서도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지도 않아. 확률적으로 따지면 이번에 너를 덮쳤으면 다음에는 나야. 우리 둘의 팬덤이 비슷하잖아. 그러면 이런 일은 골고루 당하게 돼 있어.”육경서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신주리는 반박할 수 없었고 한참 생각하고 나서 배달통 뚜껑을 열더니 숟가락을 그의 손에 쥐여주면서 말했다.“먼저 죽부터 먹어. 다른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한바탕 난리법석을 치르고 나니 이미 새벽이 되었다. 해성은 주야 기온 차가 크고 게다가 오늘 기온이 워낙 낮았기에 밤이 되자 갑자기 추워졌다. 죽에서 풍겨오는 향긋한 냄새가 식욕을 불러일으켰지만 육경서는 숟가락을 받지 않고 눈을 내리깔고는 다친 오른팔을 내려다보면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됐어. 안 먹을래. 의사 선생님이 조용히 누워서 큰 동작을 하지 말라고 했어. 비록 지금 배가 아주 고프지만 상처가 덧나면 입원 시간이 길어질 뿐만 아니라 너한테 폐만 끼치게 되잖아.”신주리는 육경서의 말에 힘껏 노려보더니 죽을 한 숟가락 푹 떠서 그의 입에 밀어 넣는 것으로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육경서가 처음에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입을 벌린 채 한 손으로 부랴부랴 부채질하며 떠넣은 죽을 식히고는 어렵게 삼켰다.“뜨거워 죽는 줄 알았어. 남편 죽일 거야?”죽이 그렇게 뜨거울 줄 생각 못했기에 신주리는 약간 미안했지만 육경서의 마지막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함부로 말하면 굶겨 죽일테야.”말은 비록 그렇게 했지만 얼른 일어나 컵에 물을 따라 그의 멀쩡한 왼손에 쥐여주면서 말했다.“찬물이야. 입에 물고 있어.”육경서는 신주리 말대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