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원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은영은 교도소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조보은이 그녀와의 만남을 요구했다고 한다.“전 만나고 싶지 않은데요.”“고은영 씨 어머니십니다. 그러니 한 번 만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상대는 아주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고은영은 굳이 상대하기 싫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언제부터인가 그녀는 누군가 조보은을 그녀의 어머니라고 칭하는 것이 소름 끼칠 정도로 싫어졌다.게다가 ‘만나야 할 필요가 있다’ 라는 말은 그녀의 신경을 더욱 자극했다.하여 그녀는 상대가 누구든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서정우도 이젠 고은지를 설득하기 힘들었는지 고은영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자꾸만 걸려 오는 전화에 고은영은 서정우의 번호를 아예 차단해 버렸지만 그러면 상대는 또 다른 번호로 연락했었다.혹시 배준우 앞에서 서정우에게 연락이 올까 봐 고은영은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뭐 하는 짓이야?!”서정우가 말했다.“누나.”전화기 저편의 서정우는 전과 다른 애원하는 말투로 그녀를 불렀다.물론, 고은영이 그의 요구를 거절하면 그는 바로 얼굴을 바꿀 것이다.고은영이 말했다.“만약 조보은 그 여자나 돈 때문이라면 아예 말도 꺼내지 마!”“그게 아니라 누나. 엄마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보증금을 내야 풀어 준다잖아.”서정우는 조보은을 만났었다.조보은은 당연히 고은지를 다치게 하지 않았다고 했다.하지만 조사를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걸려서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나오고 싶었다.고은영이 말했다.“그럼 네가 내면 되잖아.”“내가 돈이 어딨어? 200만 원이래..”“나도 없어.”“강성에 믿을 사람이 누나밖에 없어. 아빠도 왔는데 우리 지금 지하통로에서 지낸단 말이야. 살 곳도 없다고...”서준호가 왔다고?조보은이 서준호와 새로운 가정을 만든 뒤, 서준호는 한 번도 고은지와 고은영을 받아준 적이 없었다.그렇기에 고은지는 그들과 생활하면서 한 번도 서준호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오히려 학생인 고은
‘엄마는 어쩌다 이런 딸을 둘이나 낳았대?’서정우의 질책에 고은영은 쌀쌀맞게 웃었다.“말 똑바로 해. 네 엄마고 네 아빠야!”“......”“사내자식이 부모가 필요한 돈도 못 내놓는 주제에 얻다 대고 이래라 저래라야? 뻔뻔스럽게.”고은영의 말투에는 온통 서정우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득 찼다.조보은은 고은영와 고은지에게 엄마도 아니다.하지만 조보은과 서준호는 서정우를 극진히 아끼며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이젠 너 혼자 알아서 해.”고은영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고은영의 말에 전화기 저편의 서정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고은영이 전화를 끊으려는데 서정우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시간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 아직 학생이야.”“나 학생 때도 집에서 한 푼도 받아본 적 없어! 나한테는 시간 줬었어?”시간?서정우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고은영은 화를 내며 말했다.“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된 자식인지, 역겨워 죽겠네 진짜. 너 이제 철 들어야 할 때야. 제발 정신 좀 차려!”그러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서준호가 내 아빠라고? 이 자식은 어떻게 이토록 뻔뻔스러운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있지?!’그녀는 고은지도 더는 그들의 일에 손을 떼기로 했으니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정말 골치 아파질 게 분명했다. 심지어 서준호도 돌아으니!만약 이 시기에 조보은이 보석되어 교도소에서 나온다면 두 자매를 어떻게 해칠지 아무도 모른다.그리고 조보은이 정말 고은지에게 칼을 휘둘렀는지 고은영은 아직도 사실을 알 수 없지만 고은지가 그렇다니 그렇게 믿기로 했다.하원 별장.진씨 아주머니는 이미 점심을 다 차려놓고 그녀를 기다렸다.그녀가 돌아오자 진씨 아주머니는 반갑게 맞이했다.“작은 사모님 오셨어요? 대표님은 서재에 계십니다.”“그러면 제가 불러올게요.”고은영은 슬리퍼를 갈아신고 몸을 소독한 후 손을 씻었다.진씨 아주머니는 두 사람의 사이가 이렇게 좋은 걸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진씨 아주
그의 따뜻한 숨결이 고은영의 차가운 볼에 닿았다. 이 긴장감이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웬지 모를 야릿한 기분이 솟아났다.배준우의 품에서 배준우의 예리한 눈빛을 마주 보자니, 고은영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대, 대표님.”“너 혹시 어렸을 때부터 용산에서 살았어?”“네, 나 용산 사람이잖아요. 왜요?”“안 그래 보여.”배준우는 진지하게 말했다.용산이 얼마나 가난한 곳인지 배준우는 알고 있다. 용산은 황량하기 짝이 없는 산골이었기에 산은 높고 길은 먼데다가 산에는 풀 한 포기도 자라지 않았다.전에 어머니를 보러 한 번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났던 그곳 사람들은 모두 피부색이 어두웠다.그런데 고은영은 왜 이렇게 하얗고 말랑한거지?“......”고은영은 배준우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배준우가 용산에 가본 적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다들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배준우는 그제야 그녀를 풀어줬다.고은영은 벌떡 일어나 말했다.“밥.. 밥 드세요.”“많이 배고파?”그 말을 할 때, 배준우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쳐다보았다.배준우의 다정한 눈빛에 고은영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다급히 몸을 움직이며 말했다.“네, 배고파요..!”말을 끝낸 그녀는 쪼르르 서재 밖으로 달려 나갔다.아래층에서 식사 준비를 하던 진씨 아주머니는 토끼처럼 뛰어다니는 고은영을 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 뒤로는 배준우가 따라 나오며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는 고은영을 향해 말했다.“조심 좀 해!”엄숙한 그의 목소리에 고은영은 즉시 발걸음을 늦추었다.하지만 속도 차이가 갑자기 나다보니 그녀는 하마터면 계단을 구를뻔했다.진씨 아주머니와 배준우는 순간 깜짝 놀랐고 배준우는 더는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식탁에서.입덧이 지났는지 고은영은 식욕이 좋아졌다.게다가 그녀는 고기를 엄청 좋아한다.배준우는 고기를 우걱우걱 먹는 그녀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그녀는 아련한 표정으로 배준우를 향해 물었다.“설마 지금 내가 많이 먹는다고 돈 아까워서 그래요..?”그녀의 물음에 배준우와 진 씨 아주머니는 모두 할 말을 잃었다.이건 대체 무슨 소리?진 씨 아주머니는 어이없다는 듯 고은영을 바라보았다.아무리 봐도 고은영은 먹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어 보였다.배준우의 빛나는 비주얼 앞에서, 음식이 다 뭐란 말인가?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고은영은 냉큼 야채 한 젓가락을 집어 입에 넣으며 구시렁거렸다.“나 이제 야채도 먹어요!”배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갑게 그녀를 흘겨보았고 그 눈빛에 고은영은 더는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배준우는 얼마 먹지도 않고 배가 불렀다. 이때 마침 전화가 울렸고, 배준우는 전화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진 씨 아주머니는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이고, 작은 사모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대표님이 설마 돈 아까워서 그러겠어요?”그깟 고깃값이 얼마나 든다고?그녀가 온 며칠 동안 진 씨 아주머니는 매일 장을 보며 고기도 많이 샀긴 했지만, 고작 20만 원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배준우는 20만원 이라는 작은 돈에는 아예 개념이 없을 정도로 부자다. 고은영은 입을 삐죽였다.“고기 먹는다고 뭐라 하잖아요.”그녀는 서러운 듯 말했다.워낙 고기를 좋아하지 않던 그녀는 어렵사리 고기에 맛을 들였는데 배준우에게 핀잔을 듣다니!진 씨 아주머니는 고은영의 말에 머리가 더 아팠다.“대표님은 작은 사모님 건강을 생각해서 그러시는 거에요.”“......”“고기와 야채 골고루 드셔야죠.”“정말 그럴까요?”고은영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진씨 아주머니를 바라보았고, 진 씨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작은 사모님을 속이기야 하겠어요?”“.. 알겠어요.”“보세요. 그 말에 대표님 화나셨잖아요. 이따가 대표님 좀 달래드리세요.”고은영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자 진 씨 아주머니는 얼른 그녀를 부추겼다.하지만 배준우를 달래라는 말에 고은영은 눈앞이 아찔해
배준우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이리 와!”차가운 세 글자에 고은영은 감히 대꾸도 못 하고 삐그덕거리며 배준우에게 다가갔다.배준우는 그녀의 팔을 확 당기더니 자기 다리에 앉혔다.깜짝 놀란 고은영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다행히 참았다.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배준우는 점점 그녀에게 이런 행동을 하기 즐겼다.“대표님.”배준우가 말했다.“몸무게가 늘었어.”“......”‘아까 과식 사건 아직도 안 풀린 거야?’하지만 배준우의 이 말은 마치 고은영에게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게다가 배준우가 원하지 않는 아이, 만약 한시라도 빨리 처리하지 않는다면..... 배준우는 아마 그녀를 이 세상과 영원히 작별시킬 것이다.고은영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화제를 돌렸다.“이미월 씨한테 걸려 온 전화에요?”이 질문을 할 때, 고은영의 안색은 굳어졌다.‘젠장, 내가 왜 이런 걸 물었지?’역시나 그녀의 질문이 끝나기 바쁘게 배준우의 눈빛은 바로 차가워졌다.고은영은 당장이라도 자기 뺨을 갈기고 싶은 마음이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런게 아니에요.”“뭐가 일부러가 아니야?”“그게......”고은영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감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하지만 배준우는 전혀 봐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더 무거운 말투로 그녀를 다그쳤다.“말해!”“신경 쓰지 말아야 하는데 죄송해요.”아까 말투는 다소 배준우를 신경 쓰는 말투다.그녀는 두 사람의 혼전 계약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배준우를 상관할 자격이 전혀 없다.“지금 나 신경 쓴 거야?”배준우는 그녀의 턱을 덥석 부여잡았다.강제로 머리를 쳐든 그 순간, 고은영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그녀는 입을 삐죽이며 서러운 듯 말했다.“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앞으론 절대 안 그럴게요.”하지만 그녀의 말에 배준우의 눈빛은 더 차갑게 변했다.고은영은 정말 돌을 들어 자기 발을 찍은 격이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나 신경 쓰고 싶어?”“잘못했어요!
배준우의 이 행동은 고은영을 더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녀는 배준우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배준우는 싸늘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너 이제 사람들 앞에서 배 씨 가문 사모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할 거야. 이미월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어. 그렇다면 넌 이젠 뭘 해야하지?”뭘 해야지?이게......고은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만약 두 사람이 정상적인 부부라면......다른 여자에게서 자기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면 와이프로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그건 바로 협박?‘설마 나한테 자기 첫사랑한테 협박하라는 거야?!’고은영은 복잡한 표정으로 배준우를 바라보았으며, 그녀는 이 상황이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하지만 배준우는 그녀에게 휴대폰을 강제로 넘겨주었다.고은영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지금 설마 이미월 씨한테 겁을 주라는 말인가요?”“네 생각엔?”배준우의 더 엄격해진 말투에 고은영은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을 것 같았다.‘아무리 이미월이 얄미워도 대표님 옛사랑인데. 근데 대표님 왜 이러시지...... 설마 일부러 그러시는 걸까? 전에 떠난 걸 복수하려고?’여기까지 생각한 고은영은 바로 배준우를 말렸다.“아니요. 그렇게 되면 두 분은 다시 돌아갈 수 없어요.”무슨 상황인지 고은영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은영은......만약 남자가 다른 여자를 이용해 자기에게 겁을 준다면 영원히 상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배준우의 눈빛이 굳어지자 고은영은 심장이 더 조여왔다.“바로 실시할게요!”‘그래 본인이 괜찮다는 데, 뭐.”그녀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휴대폰을 받아 들고 이미월의 번호를 적었다.휴대폰을 돌려줄 때, 고은영은 참다못해 물었다.“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하면 될까요?”“뭐?”“그니까 얼마나 겁주면 될까요?”“네 남편을 귀찮게 구는데 어느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해?”“......”‘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 정도? 근데 정말 그렇게 하면 이미월 씨는......’“정말 괜찮겠어요?”고은영은 노파심에 재차 확인했다.‘아
이미월이 아무 말도 안하자 정원희가 이어서 말했다.“내가 보기엔 준우가 승연이한테 화난 게 아니라 승연이를 이용해 너한테 복수하는 것 같애!”정원희는 말할수록 화가 났다.그녀들의 이번 북성 행이 진 씨 가문에 큰 재난을 가져왔기 때문이다.전에 이미월이 강성을 떠날 때 그녀는 그녀와 배준우는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다.더군다나 지금 그는 이미 결혼까지 한 상탠데, 이렇게 계속 매달리면...여자로서 이런 행동을 하는 건 그다지 보기 좋은 일이 아니다. 정원희의 말에 이미월의 얼굴은 창백해졌다.“제, 제가 미안해요!”배준우가 정말로 복수하기 위해 진승연을 이용하는 걸까?만약 진짜로 그렇다면, 그녀와 배준우 사이는......?아니, 그럴 리가 없어!이미월은 자신과 배준우의 사이가 완전히 끝났다고 믿지 않았다. 예전에 사이가 그렇게 좋았었는데.그와 고은영 관계는 그저 합의된 관계일 뿐이야!이미월은 배준우의 모든 행동이 자신을 화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전에 그녀가 말없이 떠났던 것에 대한 복수.“지금 사과한다고 뭐가 달라져? 배준우를 멈추게 할 방법부터 먼저 찾아야 할거 아니야!”정원희는 흥분해서 말했다.지금 진 씨 가문이 큰 파국을 맞았는데, 사과한다고 뭐가 달라질까?이런 사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정원희의 흥분한 모습에 이미월은 더욱 숨이 막혔다.“큰 엄마.”"네가 어떤 방법을 쓰든 이 일 반드시 잘 처리해 놔. 안 그러면 그땐 내가 뭘 어떻게 하든 날 원망하지 마!”정원희는 하찮은 듯한 눈으로 이미월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하긴, 이전에 정원희는 이미월의 어머니마저 하찮게 생각했다.예전에 이미월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이혼을 했고, 이미월의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따라 외국으로 떠났다.외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 줄 알았는데 두 번째 가정마저 파탄이 났고, 이미월의 어머니는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그것이 이미월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정원희는 처음에는 이미월을 이뻐하고 가여워했다. 온전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고은영이란 소리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이미월은 순간적으로 이를 악물었다.그동안 참았던 모든 감정들이 지금, 이 순간 완전히 무너진것만 같았다. 전화에 대고 고은영에게 욕설을 퍼부을 수 없는 자신이 한스럽게 느껴졌다.정원희는 그녀의 손등에 손을 얹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정원희의 날카로운 눈빛에 이미월은 순간 정신을 차렸고, 정원희는 그녀를 보며 소리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이미월에게 지금 고은영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는 신호였다.이미월은 내키진 않았지만 억지로 화를 참으며 말했다.“무슨 일 있어요? 고은영 씨?”“저를 사모님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월 씨?”매우 차가운 말투였다.이미월에게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이미 하얗게 질려있던 이미월의 얼굴이 고은영의 말에 더욱 굳어졌다.숨이 막혔고 눈시울이 빨개졌다.“네, 사모님.”이를 악물며 말했다.사모님?얼마나 가소로운 호칭인가! 만약 그때 그녀가 외국으로 떠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그 자리는 그녀의 것일 것이다. 이미월은 마음속으로 화가 치밀었다. 고은영에게서 배준우를 뺏어오지 못한 게 한스럽게 느껴졌다.전화기 너머의 고은영도 이미월이 이를 악물며 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조금 뭔가 켕기는 느낌이었다...배준우가 이렇게까지 하라곤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고은영은 말을 다 뱉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는 말했다.“별일 아니고, 앞으로 내 남편한테 그만 매달렸으면 좋겠어요. 우린 이미 결혼했고, 이미월씨랑 제 남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이젠 다 지난 일이니까, 인제 그만 포기해요.”“그렇게 못 하겠다면요?”이미월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다 지난 일이니 배준우를 그만 포기하라고?!이미월의 살기 가득한 말투에 고은영도 살짝 긴장됐다.“이미월 씨에 대한 제 남편 태도, 잘 봤잖아요. 포기 안 하면 어쩔 건데요?”“......”“아니면,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결국 진호영이 다가가서 말했다.“할머니, 지금 이 장소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진윤과 진정훈이 오늘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두 사람이 오지 않은 이유도 명백했다.진성택이 두 사람을 너무 크게 실망시켰기 때문이다.진유경은 진호영이 진윤과 진정훈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면서 더욱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호영 오빠, 진윤 오빠랑 정훈 오빠한테 연락해주면 안 돼요? 적어도 아버지 보내드리는 길은 보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은영이도요... 아버지는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잖아요.”“그만 떠들어.”진유경이 말을 마치자마자 진호영이 싸늘하게 얘기했다.다른 건 몰라도 이 상황에서 고은영의 얘기를 꺼내다니.진호영은 진유경에게서 이례 없는 메스꺼움을 느꼈다.진유경은 진호영의 반응에 멍해졌다.하지만 사람들의 화제는 이미 고은영으로 넘어가 버렸다.다들 고은영을 불효녀라고, 은혜도 모르는 매정한 여자라고 욕했다.진호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진유경을 노려보며 얘기했다.“너 때문에 은영이는 집에 돌아오지도 못했어.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다고? 도대체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거야? 네 눈은 장식이야?”예뻐한 적이 있었나?한 번도 없었다.진성택이 고은영에게 조금이라도 잘해줬다면 고은영이 진씨 가문 문턱을 넘어보지 못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 그게 아니라...”“아버지는 남은 주식을 모두 너한테 남겨줬어. 하지만 친딸인 은영이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잖아. 그런데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하셨다고?”진호영이 모든 것을 까밝히자 진유경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호영 오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진유경은 더욱 크게 울먹이면서 눈물을 흘렸다.진유경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진호영은 진유경의 편이었는데 지금은 왜...‘이게 다 고은영 때문이야! 대체 무슨 수로 꼬드겼기에 오빠들이 다 고은영의 편을 들어주는 거냐고!’“왜 이러냐고? 우리 어머니가 은영이에게 남겨준
이윽고 고은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진호영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고은영이 진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진호영과 고은영은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진호영은 보통 직접 찾아와서 문제를 얘기하는 편이기에 전화를 잘 걸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진호영이 전화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고은영은 잘 알고 있었다.진윤에게 전화하자마자 또 고은영에게 전화하다니.고은영이 전화를 받기도 전에 진윤이 고은영의 전화를 빼앗아갔다.“오빠...”진윤은 바로 전화를 꺼버렸다.“꺼버리면 어떡해요. 혹시 언니가 전화라도 하면...”“걱정하지 마. 네 언니는 너한테 연락하지 않을 거야.”“...”그렇다고 해도 마음대로 핸드폰을 꺼버리는 건 좀...게다가 고은지가 정말 무슨 일이 생겨서 고은영을 찾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진윤은 자연스럽게 고은영의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돌려주지 않았다.“오빠.”“오늘은 나한테 집중해.”그 말투는 아주 강압적이었다.“...”마치 그동안 진윤에게 신경 써주지 않아 삐진 것만 같았다.하지만 고은영도 어쩔 수 없었다.고희주와 고은지에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말이다.사실 고은영도 알고 있었다. 고은지는 고은영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고희주의 일 때문에 고은지는 언제든지 화를 낼 수 있었다.“그래요.”“...”“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너한테 뭘 좀 사주려고.”“...”사준다고?고은영은 진윤의 목적을 알 수 없었다.진성택이 죽었다.장례식에 안 가는 건 이해가 되지만 굳이 고은영을 데리고 나와 쇼핑을 하는 목적은 뭘까.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그때 윤설의 전화가 걸려왔다.진윤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정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그런 진윤을 보면서 고은영은 진윤이 참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다.진윤과 비교하면 나태현은 정신병이 틀림없었다....진성택은 오늘 화장하게 된다.김영희, 진유경과 진호영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진윤과 진정훈은 결국
숨을 깊게 내쉰 나태현이 얘기했다.“량천옥이 나씨 가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 지금...”“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배준우가 나태현의 말을 끊었다.그때 나씨 가문 내부는 부글부글 끓었었다. 게다가 량천옥을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다.나태현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갔고 나태현의 어머니도 그 시기에 돌아갔다.그 모든 모순의 시작은 량천옥이었다.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씨 가문은 여전히 량천옥과 원한이 있었다.다들 그저 그 원함을 꾹 참고 있었는데 고은지가 나타났다.량천옥의 딸이면서 나태현의 딸 엄마인 고은지 때문에 나씨 가문과 량천옥의 전쟁이 다시금 시작되었다.“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요.”우정과 사랑 중에서 배준우는 당연히 사랑이었다.게다가 이번 일에는 나씨 가문에서 숨기는 것이 너무 많았다.또 나태현이 회사의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보니 프로젝트가 위험했다.나태현은 화가 나서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 소리를 들은 배준우는 핸드폰을 소파에 툭 던졌다....다른 한편.고은영과 진윤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진윤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나씨 가문과 엮인 프로젝트를 모두 엎어버리라고 명령했다.옆에 있는 고은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걱정했다. 진윤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화하려고 할 때 고은영이 진윤의 손을 잡았다.“오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나씨 가문이 밉긴 하지만 진윤의 일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진윤이 계약을 많이 해지할수록 진윤에게 영향이 더 클 테니까 말이다.진윤은 본인을 걱정해주는 고은영을 보면서 마음이 누그러졌다.부드러운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진윤이 얘기했다.“다 필요 없는 것들이야. 나태현은 지금 당장 귀국해야 해.”그 말을 들은 고은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머릿속에는 병원에 있는 고은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은지는 나태현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눈치채고 얘기했다.“지금 나태현과 량천옥이 해외에서 서로 죽이고 난리가 났어. 만
화가 난 나태범을 보면서 집사는 안절부절못했다.“지금 상황이 조금 복잡합니다.”생각하던 집사가 말을 이었다.“게다가 진씨 가문 쪽도 걱정해야 합니다.”“진씨 가문? 거기는 왜.”나태현과 량천옥이 싸우는 것만으로도 나태범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이러다가는 정말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게다가 배씨 가문에서 계약까지 해지했지...이러다가는 그룹이 파산될지도 몰랐다.“배준우 씨 아내가 진윤 씨와 진정훈 씨의 친여동생입니다. 그러니 이 세 사람 다 그 고은지 씨의 동생을 위해 움직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나태범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저 진씨 가문에서 친딸을 찾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성택이 친딸보다 양딸을 더욱 아낀다는 것까지 말이다.배준우가 고은영과 결혼할 때 강성의 사람들은 배준우가 많이 아깝다고 생각했다.일반적인 신분으로는 배준우의 옆에 설 수 없으니까 말이다.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은영이 진짜 진씨 가문의 친딸이었다.나태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이튿날 아침.고은영이 아침을 다 먹자마자 진윤이 도착했다.그리고 조카를 위한 선물도 가득 가져왔다.고용인들이 진윤이 가져온 물건을 보관해주었다.약간 붉어진 고은영의 눈가를 보면서, 진윤이 배준우한테 물었다.“어젯밤 계속 운 거예요?”배준우도 머리가 약간 아팠다.“제대로 자지 못했어요.”진윤이 다가가서 고은영을 마주 보더니 고은영이 입고 있는 귀여운 잠옷으로 눈을 돌렸다.배준우는 정말 딸을 키우는 것처럼 고은영을 보호해주는 것만 같았다.고은영은 원래도 키가 작은 편이어서 배준우와 함께 있을 때면 아주 작아보였다.“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 하자.”“정말 나가야 해요?”고은영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고은영은 병원에 가서 고은지를 보고 싶었다.고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진작 알아차렸다는 듯이 얘기했다.“병원 쪽에는 내가 사람들을 깔아놨어. 무슨 일 없을 거야. 가자.”진윤의 말을 들은
하지만 진윤이 내일 고은영을 데리고 나가는 것의 목적을 떠올리면 고은영은 어쩔 수 없었다.“당연한 거 아닌가요?”진윤이 당당하게 얘기한 후 전화를 끊었다.배준우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더니 고은영을 쳐다보았다.“이미 다 들었지?”“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진성택은 사망했다.진정훈은 고은영이 장례식에 올 것인지 안 올 것인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하지만 진윤은 장례식에 가지 말고 나가서 쇼핑하자고 했다.그것도 웃으면서 말이다.“넌 어떻게 하고 싶어?”“안 가도 돼요?”고은영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웃으면서 쇼핑해야 한다니. 고은영에게 있어서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배준우도 짐작하고 있었다.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배준우가 얘기했다.“아마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쇼핑이 최종 목적이 아닐 거야.”“위로하는 거예요?”진윤은 배준우더러 고은영을 잘 위로해주라고 했다.“위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네 큰형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하는 말이야. 단순하게 쇼핑하는 게 목적일 리 없어.”배준우가 확신하면서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배준우는 허락하는 고은영을 보면서 한숨을 돌렸다.그리고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얘기했다.“걱정하지 마. 다 지나갈 거야.”“나씨 가문 쪽은...”거기까지 말한 고은영은 고개를 들고 배준우를 쳐다보았다.고희주의 일로 마음 아팠지만 배준우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배준우는 고은영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고은영에게 짧게 키스한 배준우가 이어서 얘기했다.“나씨 가문과 협업하는 프로젝트 두 개가 있었는데 이미 계약을 해지했어.”“주주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고은영이 걱정하면서 물었다.“그 두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서 다들 발을 빼는 분위기야. 아마도 량천옥 씨가 한 일 같은데.”그래서 배준우도 큰 문제 없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다.지나간 일에 대해 배준우는 뭐라고 할 수 없
진정훈이 전화를 건 것은 진정훈에게도 계획이 있어서였다.“진유경을 조심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진유경에게 남긴 주식이 있는데 꼭 되찾아올 겁니다.”진유경이라...진정훈은 진유경이 왜 계속 고은영을 끌어내리려는지 깨달았다.그건 바로 진유경이 아직 자기 위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니 이제라도 제대로 알게 해줘야 했다.배준우는 진정훈의 말을 알아듣고 얘기했다.“네. 알겠습니다.”“장례식은 와도 되고 안 와도 괜찮다고 전해줘요.”“네.”진정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은영의 뜻을 존중해주었다.하지만 장례식에 고은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 뻔했다.“장례식은 언제입니까.”“이틀 뒤입니다.”“알겠습니다.”이틀 뒤라니. 생각보다 장례를 서두르는 모습에 배준우는 약간 의아했다.진정훈은 그저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그래서 그동안 배준우가 고은영을 잘 지켜줄 수 있도록 전화를 건 것이다....진정훈과의 통화를 마치고 배준우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데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이번에는 진정훈이 아닌 진윤이 걸어온 전화였다.배준우는 고은영을 안고 소파에 앉았다. 영원히 고은영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처럼 고은영을 꼭 안고 있었다.“여보세요.”배준우는 진윤을 존경하는 편이었다.진윤은 정말 가문의 도움 없이 지금 그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다.“은영이는요? 연락이 안 돼서.”“기분이 안 좋아요. 무슨 일이죠?”“왜 기분이 안 좋은 거죠?”“고은지 씨한테 일이 좀 생겨서... 컨디션이 좋지 않아요.”고은지의 상황을 전해 들은 진윤은 머리가 아팠다.지금 고은영에게는 모든 일이 설상가상이었다.“내일 오전 아홉 시에 내가 데리러 간다고 전해줘요.”“내일이요?”“네.”진윤이 대답했다.배준우는 진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진윤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씨 가문이 얼마나 엉망인지 광고할 셈이었다.진윤이 진성택의 장례식에도 나서지 않고 친여동생인 고은영을 데리고 밖에서 돌아다닌다면...“어디로 갈 겁
그 처참한 울음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진호영과 진정훈은 갑자기 심장이 내려앉았다.두 사람이 달려가 보니 병실의 문은 반쯤 열려있었다. 김영희는 눈물을 흘리면서 진성택을 껴안고 있었고 진유경도 진성택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침대 위의 진성택은 이미 눈을 감았다.의사와 간호사들도 두 사람의 소리를 듣고 얼른 달려왔다.5분 후. 의사는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안타깝게도 환자분은 이미 숨을 거두셨습니다.”“아버지... 제발 눈 좀 떠봐요! 이대로 가지 마요! 안 돼요!”진유경이 눈물범벅으로 얘기했다.김영희도 눈물을 훔치면서 얘기했다.“성택아, 이렇게 우리를 두고 가면 어떡하니! 나와 유경이는 어떻게 해...”“그러게요, 아버지. 저랑 할머니는 아버지뿐이에요. 제발 가지 마요. 눈 좀 떠보세요.”두 사람은 그렇게 울면서 밖을 흘깃거렸다.진호영이 다가가려고 할 때 진정훈이 진호영의 손목을 잡았다.진호영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진정훈을 쳐다보았다.진성택의 사망에 진호영도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하지만 진정훈의 얼굴에는 슬픔보다도 짜증이 더욱 많았다.진성택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하지만 김영희와 진유경의 뻔한 연기를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혔다.진성택은 진유경을 평생 아껴왔지만 진정훈에게 있어서 진유경은 아무것도 아니다.진호영은 그런 진정훈을 보고 약간 정신을 차렸다. 진호영은 증오심이 가득 묻은 두 눈으로 진유경을 쳐다보았다.진유경이 눈물을 흘리는 건 진성택의 죽음 때문이 아니다.진성택의 죽음으로 인해 전에 누리던 것을 누리지 못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진성택은 죽기 직전까지도 진유경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보고 있었다. 진유경이 남은 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도록 말이다.하지만 결국 아무도 진유경을 받아주지 않았다.진유경은 양딸인 데다가 진윤과 진정훈에게서 호감을 사지 못했기에 다른 가문에서는 진유경과 혼사를 맺고 싶지 않아 했다.유일하게 진유경을 받아들이는 허씨 가문은 진유경이 싫어했다.이젠 진
고은영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왔을 때 진정훈과 진호영이 돌아왔다.두 사람은 고은영을 보고 다가와 물었다.“은영아, 뭐라고 하셨어?”진정훈이 먼저 물었다. 진호영은 어두워진 고은영의 표정을 보면서 감히 물을 수 없었다.고은영은 진정훈을 보고 또다시 진호영을 쳐다보았다.지금 고은영의 표정은 진호영이 고은영을 끌고 올 때보다 더욱 어두웠다.“나한테 진유경을 부탁한다고 하셨어.”“...”“...”두 사람은 고은영의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굳어버렸다. 진정훈은 싸늘한 눈으로 진호영을 쳐다보았다.“중요한 얘기라는 게, 저런 거였어?”고은영에게 진유경을 맡기는 것. 그게 죽기 직전에 하고 싶은 말이었다니.어떻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지? 진호영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진호영은 고은영을 보면서 얘기했다.“미안해. 난 아버지가 그런 일로 널 부를 줄 몰랐어.”고은영은 진호영의 사과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진정훈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그리고 진유경에게 주식을 남겨주었으니 진유경의 주식을 정훈 오빠한테 빼앗기지 않게 챙겨주라고 했어.”“...”“...”두 사람은 또 그대로 얼어붙었다.정말 진유경 때문에 고은영을 부른 것이었다니.도대체 얼마나 진유경을 아끼기에 죽기 직전에도 친딸을 불러 양딸을 맡기려 하는 것인지, 두 사람은 알 수가 없었다.고은영은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먼저 갈게.”“그래. 잘 가.”진정훈이 고개를 저으면서 얘기했다.고은영은 그대로 떠났다.진씨 가문에 아무 기대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마음이 공허하고 적적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진호영은 떠나는 고은영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 아파했다.진정훈이 진호영을 보면서 말했다.“이제야 안 거야?”“난 전혀 몰랐어... 아버지가 진유경의 일로 은영이를 부른 걸 알았다면 은영이를 불러오지 않았을 거야.”진호영은 정말 후회했다.진호영은 그저 고은영이 진성택의 친딸이니까... 친딸에게 해줄 말이 있을 줄 알고 데려온 것인데.결국 진성택은 모든 것을 진유경에게
거기까지 들은 고은영의 표정은 잿빛이 되었다.진성택도 그걸 알아차리고 잠시 말을 끊었다.그리고 어두워진 고은영의 눈을 보면서 이어서 얘기했다.“나도 일이 이 지경이 될 줄은 몰랐다만. 하지만 은영아, 난 정말 유경이가 걱정돼. 그러니 네가 유경이를 잘 챙겨줘. 그럴 수 있지?”진성택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고은영을 되찾아온 다음부터 진성택은 고은영 앞에서 진유경을 잘 챙겨주라는 말을 했다.죽기 전까지도 말이다.“나한테 부탁하는 거예요, 준우 씨한테 부탁하는 거예요?”그 말투는 아주 차가웠다.전에 김영희가 진유경을 데리고 배준우를 찾아왔을 때도 고은영은 그저 묵묵히 참았다.하지만 진성택이 또 이런 말을 꺼내다니.뭘 어떻게 챙겨주라는 건지.고은영이 무슨 능력으로 챙겨주라는 건지.“은영아, 그게 아니라...”진성택이 말을 더듬었다.고은영은 손을 빼내고 얘기했다.“뭐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진유경이 걱정되면 데려가면 되잖아요. 죽어서도 계속 돌봐주면 되겠네요.”“...”고은영의 말을 들은 진성택은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내 말을 오해한 것 같은데... 배준우한테 도움을 청하는 건 아니야.”“...”“전에 정훈이 뭐라고 해서 네 엄마가 남겨준 주식을 너와 유경이한테 나눠줬잖아. 정훈이가 유경이 몫을 빼앗아가지 않게 잘 좀 챙겨줘.”고은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화가 끓어올랐다.죽기 직전까지도, 진성택은 진유경을 걱정하고 있었다.하지만 고은영은 그 정도로 마음 약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아무리 고은영이 나약해 보이고 연약해 보여도 마음만은 단단한 사람이었다.“제가 그래야 할 이유를 모르겠네요. 그리고 정훈 오빠가 진유경의 주식을 빼앗을까 봐 걱정하시는데... 그건 원래 진유경 몫이 아니었어요. 결국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될 거예요.”진성택이 진유경에게 주식을 남겨뒀을 줄은 몰랐다.진정훈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고은영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은영아, 잠깐만...”진성택은 밖으로 나가려는 고은영을 보면서 마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