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준우는 고은영을 데리고 떠났다.혼자 남은 이미월의 얼굴에는 난처함이 가득했다.진승연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언니, 마음에 두지 마. 저 여자 그냥 촌년이야. 형부와는 그저 연기하는 것뿐이라고!”진승연은 고은영의 뒤를 캔 적 있다. ‘오직 성적으로 시골에서 올라온 여자가 감히 재벌 사모님이 되려고? 꿈도 야무져!’이미월은 눈물을 꾹 참았다.배준우가 갑자기 떠나자 진윤과 육범수 그리고 장선명 등 사람도 난처해졌다.육범수는 주연에게 눈빛을 보냈다.“주연아, 미월 씨 좀 챙겨”“아.”주연은 재빠르게 이미월을 위해 양갈비를 썰었다.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방문한 이미월의 행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두 사람에게 어떤 과거가 있든 지금 배준우는 이미 결혼했다.‘내가 진짜 우리 자기 때문에 봐주는 거야!’“미월 씨, 이것 좀 드세요!”주연은 양갈비를 이미월의 그릇에 담아주었다.하지만 이미월은 움직이지 않았다!그녀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문뜩 입을 열었다.“다들 저 여자 준우 와이프로 인정하는 거예요?”“미월 씨, 그렇게 말씀하면 안 되죠. 이건 우리의 인정이 필요 없어요!”참다못한 주연이 입을 열었다.이 자리에 있는 배준우의 친구들은 전에 배준우가 그녀와 함께 자주 만났던 친구들이다.그런데 오늘 배준우는 고은영과 함께 친구들을 만났고, 이것은 배준우가 고은영을 대하는 태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그리고 배준우는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이미월이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따지려고 들자 주연은 상당히 불쾌했다!!그녀는 스스로 떠났으면서 마치 모두가 그녀에게 미안한 짓을 한 것처럼 굴었다.주연의 거침없는 말에 이미월은 안색이 창백해졌다.진승연이 주연을 힐끔 보며 말했다.“그 입 다물어!”“내가 왜 입 다물어야 해? 입 다물 사람은 따로 있구먼.”주연은 콧방귀를 뀌며 이미월을 힐끔거렸다.주연이 물러서려 하지 않으니 진승연은 버럭 화가 났다.“돈도 이기게 해줬는데 사람이 어쩜 저렇게 지조가 없대? 저
차가운 두 글자는 배준우가 이미월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고은영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많이 울던데요.”사실 고은영은 어떻게 이미월을 평가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그런 장소에 무턱대고 따라오더니 심지어 눈물까지 흘렸다. 이건......배준우는 그녀를 힐끗 보며 물었다.“그래서 내가 이미월을 위로해 줬으면 좋겠어?”이 말을 내뱉는 배준우의 목소리는 아주 차가웠고 고은영은 한기를 느꼈다.고은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아니요.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 완전히 끝나건 아니네요? 이 말을 묻고 싶었어요.”“결혼이 그렇게 필요했는데, 왜 그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어요?”이미월의 태도로 보았을 때, 그녀는 전혀 배준우와 헤어지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였다.‘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래......’“그만해!”배준우의 말투는 더 차가워졌다.고은영은 배준우의 고함에 깜짝 놀랐다.‘사실대로 말했는데 왜 저렇게 화났대?’하지만 집 문제를 생각하니 그녀도 더는 배준우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됐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불쾌한 이 화제를 넘겨버리며 배준우를 위로했다.“그래요, 그만할게요. 화내지 마세요, 네?”배준우의 쌀쌀한 눈빛에 그녀는 움찔했다.‘그래, 굳이 가슴에 묻은 사람을 내가 꺼내서 뭐 하겠어. 괜히 심기나 건드렸지.’집에 돌아가는 길은 거의 저기압이었다.하원 별장에 거의 도착했을 때, 나태웅이 전화를 걸어 왔다. 배준우가 얼른 전화를 받았다.“말해.”“병원 쪽에 상황이 생겼어요!”배준우는 병원이라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인데?”고은영은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이내 가슴이 철렁했다.전화기 저편에서 나태웅이 말했다.“오진이 아니라 안지영 씨가 그렇게 요구했다고 합니다!”고은영은 얼핏 나태웅의 말을 들었다.“휴......”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이 순간 등줄기가 굳어지는 것 같았다.‘잠깐, 근데 병원 일은 왜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거지?’백 어르신의 말로는 배준우는 오진을 절대 용납
이 일은 갑자기 일어났다.백 어르신이 간 뒤로 고은영은 이 일이 이미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배준우가 진단서를 작성한 의사를 해고하라고 할 줄이야.나태웅이 곧 안지영을 찾을 거라는 생각에 고은영은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하지만 배준우의 아우라에 눌려 그녀는 찌그러진 깡통처럼 감히 움직일 수도 없었다.고은영이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배준우는 더 차갑게 다그쳤다.“말해!”“모, 몰라요!”고은영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았다.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이 뭐 있겠는가? 어떤 말을 해도 잘못이 될 텐데.그렇다면 유일한 방법은 바로...... 도피하는 것!하지만 배준우는 그녀에게 도피할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스륵!”성냥이 적린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배준우는 지금 애써 화를 참고 있었고, 고은영은 당장에라도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배준우가 물었다.“모른다고?”이 네 글자에 담긴 기세는 마치 지옥에서 온 사탄과 같아서 그녀는 저도 몰래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다.하지만 배준우의 아우라에 눌린 그녀는 감히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고은영, 너 이렇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어?!”‘겁이 많은 데다가 거짓말까지?’배준우의 말투에 제대로 놀란 고은영은 울먹이며 말했다.“나 진짜 몰라요. 나 실장님 시켜서 지영이한테 물어보라고 하세요!”고은영은 머리가 복잡해졌다.하지만 확실한 건, 안지영이 그리 쉽게 인정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하여 그녀는 혹시라도 두 사람의 말이 달라질까 봐 말을 아꼈다. 그렇게 되면 정말 끝장이다.배준우는 예리하게 그녀를 노려봤다.고은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을 서로 꼭 잡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정말 모르는데.”차에는 온통 숨 막히는 압박감뿐이다.고은영은 더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그녀를 바라보는 배준우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으며, 고은영은 그 싸늘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은영은 배준우가 오늘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로 생각해 어떻게 안지영과
“배 안 불렀어요.”고은영은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단연 양고기 통구이였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입맛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고은영의 말에 진씨 아주머니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럼, 대표님은요?”진씨 아주머니가 물었다.배준우의 말에 고은영은 머리를 쿠션에 박고 말했다.“안 와요.”‘옛사랑 찾으러 갔어요.’배준우의 옛사랑을 생각하면 고은영은 어이가 없었다.‘대표님의 안목으로 어떻게 이미월 같은 여자와 사랑했을까? 너무 질척대잖아!’진씨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국수 말아 드릴까요?”“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국수를 좋아한다. 게다가 국수도 맛있게 잘 말았다. 하지만 배준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가장 자부했던 요리 솜씨를 배준우는 부인했다.진씨 아주머니는 부엌에 들어갔다.고은영은 얼른 휴대폰을 들어 안지영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갑자기 나태웅의 말이 떠올랐다.안지영은 지금 아마 나태웅의 사무실에 있을 것이다.생각하던 그녀는 메시지를 보내보기로 했다.“지영아?”답장은 오지 않았다.안 봐도 훤했다, 지금 그녀는 나태웅의 사무실에 있다.지금 이 순간 동영그룹.안지영은 나태웅을 바라보며 저도 몰래 등을 곧추세웠다.“나 실장님 할 말이 뭐예요? 저 이렇게 나와 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월급 차감 당해요.”말을 끝낸 안지영이 그제야 반응했다.‘내가 왜 나 실장님을 두려워해야지? 비록 나 실장님은 비서실 실장이지만 난 마케팅 부서잖아. 내 직속 상사도 아닌데.’나태웅은 안지영에게 쌀쌀한 눈빛을 보냈다.그녀는 비록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지만, 나태웅의 쌀쌀한 시선에 저도 몰래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퉁!”나태웅은 휴대폰을 사무용 책상에 던졌다.그러더니 음성 녹음을 들려주었다.“안지영 씨가 시켰습니다!”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자세히 들은 안지영은 등을 곧추세우더니 순간 온몸이 나른해졌다.‘아니지?
이 예리하고 쌀쌀맞은 반문은 안지영의 멘탈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버티며 평온하게 말했다.“당연히 문제없죠.”“그래?”‘문제없다고? 말도 잘하네. 이 여자는 입이 무거운 거야, 아니면 사태의 엄중성을 모르는 거야?’“다시 한번 말하는데, 그 진단서의 확진자는 고은영 씨야.”나태웅은 아까보다 더 날카롭게 말했다.“은영이 맞아요. 근데 제가 잘못 적었어요.”나태웅은 안지영에게 예리한 눈빛을 보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그 눈빛에 안지영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힘들었지만 애써 정신을 부여잡고 말했다.“우리 아빠가 그렇게 결혼을 강요하세요. 그래서 병원에 전화했는데, 이름을 잘못말했지 뭐예요? 의사 선생님이 아마 그래서 헷갈리셨나 봐요.”안지영은 진지하게 헛소리를 내뱉었다.나태웅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물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그의 시큰둥한 태도는 마치 안지영에게 ‘내가 그 개소리를 믿을 것 같아?’라는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안지영은 제대로 놀랐다.아무리 나태웅은 그녀의 직속 상사가 아니니 두려워할 것 없다고 자기를 설득해 보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는 것 같다.나태웅은 너무 철저한 사람이다. 그녀는 나태웅이 계속 이 일을 캐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결혼을 강요해서 암 진단을 받으려 했다가 거절당했다고?”“그러니까요. 암이라고 하면 결혼할 필요가 없잖아요.”안지영의 목소리는 점점 더 기어들어 갔다.거짓말을 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나태웅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런데도 회사는 계속 나오게 하시네?”“당연히 그만두라고 하시죠. 그런데 저한테 시간 많이 없으니 우리 아빠도 어쩔 수 없이 제 말 들어주시는 거예요.”나태웅은 어이가 없었다.안지영은 빨리 이 화제를 끝맺고 싶었지만 나태웅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차를 부순 건 이 이유 때문이야?”나태웅이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분명 질문인 것 같지만, 그의 어조는 이미 확신한 어조이다.그 말에 안지영은 더 놀랐다.그녀는 숨을 깊게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당연히 안 된다.입 밖에 내던진 말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면 이전에 말한 모든 것을 완전히 부인하는 격이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더 불필요한 상황을 만들 것이다.곰곰이 생각하던 안지영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해요, 다 사실이에요.”“그러니까, 고은영 씨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네? 맞아?”‘맞기는 개뿔.’안지영은 미칠 것 같았다.나태웅의 예리한 눈빛에 그녀는 고개를 저을 수도, 끄덕일 수도 없었다.결국 어금니를 깨물고 이렇게 말했다.“은영이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한 말은 다 사실이에요.”안지영은 고은영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모른다. 어쩌면 나태웅이 고은영을 미끼로 안지영에게 덫을 놓은 것일지도.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바로 끝까지 버텨 상대에게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이렇게 안지영은 또 한 번 거짓말이라는 어두운 길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갔다.하원 별장.진씨 아주머니의 요리 솜씨는 깜짝 놀랄 정도였다.고은영은 처음으로 누군가 국수를 이렇게 맛있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와, 아주 맛있어요!”이제 한 젓가락을 먹었는데 저도 몰래 감탄이 나왔다.‘그래, 대표님과의 결혼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게 바로 이 요리야.’식탁에는 매일 맛있는 음식이 차려졌고, 스스로 움직일 필요도 없다.진씨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이에요.”“정말 너무 맛있어요.”고은영이 또 한번 말했다.두 사람은 오늘 배준우가 집에 들어오지 않을 줄 알았다.하지만 고은영이 국수를 절반 먹었을 즈음, 이미월을 만나러 갔던 배준우가 갑자기 돌아왔다.시간을 계산해 보았지만 이제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데려다 주기만 했다고? 그럴리가! 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데려다 줄 수 있어?’고은영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국수를 먹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 배준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점심 배불리
하지만 생각해 보니 안지영의 멘탈은 누구보다 강하다.그녀는 순식간에 걱정이 사라졌다.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안지영에게서 답장이 왔다.“나 이미 한 번 죽었다.”고은영은 다급히 답장을 보냈다.“나 실장님이 정말 널 찾았어?”“넌 알고 있으면서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안지영은 이 세상에 더는 미련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고은영의 일은 곧 탄로 날 것이다.비록 오늘은 일단 지나갔지만.하지만 나태웅과 배준우는 계속 그녀들을 주시하고 있기에 그들은 반드시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그럴 상황이 아니었어. 나 실장님이 바로 대표님에게 연락이 왔다니까.”당시 배준우의 억압적인 눈빛에 그녀는 감히 움직일 수도 없었다.그러니 안지영에게 알릴 기회는 더더욱 없었다.안지영이 말했다.“우리 곧 끝장이야!”비록 얼굴을 보며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이 순간 고은영은 그녀의 새파랗게 질린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오늘은 정말 너무 놀랐다.모든 것이 갑작스러웠다.고은영은 위층을 힐끗 보았다. 배준우는 서재로 들어간 후 나오지 않았으니 아마도 랜선 미팅 중인 것 같다.그녀는 다급히 휴대폰을 품에 안고 방으로 들어가 안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안지영은 바로 받았다.“은영아, 우리 그냥 도망가자.”그들이 진실을 완전히 알아버리기 전에 도망가는 것이 어쩌면 최선일지도 모른다.“내가 너랑? 도망을?”고은영은 깜짝 놀랐다.‘어떻게?’“나 알아. 너 집 아까워서 그러지.”집 얘기만 나오면 그녀들은 속상했다.안지영은 독한 아버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쳐도 고은영은 작은 집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정말 한 푼의 돈은 영웅도 죽게 만든다.고은영은 어쩔 바를 몰랐다.“나 대표님과 아직 부부야. 어떻게 도망가?”안지영은 이걸 잊고 있었다.맞다!지금은 간단한 집 문제가 아니다. 고은영은 결혼에 묶여있다.어딜 가든 배준우가 신고만 하면 전 국민이 함께 그녀를 찾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조용한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고은영은 안
“너 요즘 특히 조심해야 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알겠지?”안지영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그녀는 혹시라도 고은영의 언행이 배준우의 의심을 사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그럼 내 배 속의 아이는 어떡하지?”안지영은 침묵했다.아이의 말에 그녀는 죽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맞다, 아이가 있었지.’“너, 대표님 좀 떠보긴 했어?”“아니, 무서워서.”‘...... 무섭다니, 그럼 어떡해야 하지?’‘짧은 시간에 어쩌다 이렇게 많은 번거로운 상황이 생겼을까?’안지영은 답답한 마음에 울고 싶었다.아이를 지우자니 그럴 용기가 없었다.그렇다고 배준우를 떠보자니 그의 예리한 성격에 반드시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그렇게 되면 배준우는 사실을 캐려고 할 것이고, 그녀는 끝장날 것이다.안지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고은영도 울먹였다.“어떡해? 더는 미룰 수 없어!”의사의 말로는 아이를 지우려면 빨리 지워야 한다고 했다.아니면 수술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어떡하지?어떻게 하든 안씨 집안이 화를 입게 된다. 만약 안진섭이 알게 된다면, 안지영은......“너 오늘 대표님 슬쩍 떠봐.”곰곰이 생각하던 안지영이 말했다.배준우는 내일 출장을 가는데 만약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기회를 타서 지우면 된다.당장은 이것 말고는 더 좋은 방법이 없는 것 같다.“나 무서워!”“고은영, 너 정신 차려. 너 지금 임신 중이야. 내가 아니라 너라고!”안지영은 미칠 것 같았다.이 일은 안지영과도 얽히고설켜 있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녀는 고은영을 위해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안지영은 원래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지만 안진섭은 그녀를 굶겨 죽이겠다고 협박했다.안지영도 마음이 초조했다.“그래, 그렇게 해볼게.”“반드시 해야 해. 출장 사흘 간다고 했지?”안지영은 고은영에게 이 사흘이 아이를 지울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상기시켰다.이번 출장이 끝나면 배준우는 대략 2개월 정도 출장 스케줄이 없다.그때가 되면 아이를 지우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결국 진호영이 다가가서 말했다.“할머니, 지금 이 장소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진윤과 진정훈이 오늘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두 사람이 오지 않은 이유도 명백했다.진성택이 두 사람을 너무 크게 실망시켰기 때문이다.진유경은 진호영이 진윤과 진정훈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면서 더욱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호영 오빠, 진윤 오빠랑 정훈 오빠한테 연락해주면 안 돼요? 적어도 아버지 보내드리는 길은 보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은영이도요... 아버지는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잖아요.”“그만 떠들어.”진유경이 말을 마치자마자 진호영이 싸늘하게 얘기했다.다른 건 몰라도 이 상황에서 고은영의 얘기를 꺼내다니.진호영은 진유경에게서 이례 없는 메스꺼움을 느꼈다.진유경은 진호영의 반응에 멍해졌다.하지만 사람들의 화제는 이미 고은영으로 넘어가 버렸다.다들 고은영을 불효녀라고, 은혜도 모르는 매정한 여자라고 욕했다.진호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진유경을 노려보며 얘기했다.“너 때문에 은영이는 집에 돌아오지도 못했어.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다고? 도대체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거야? 네 눈은 장식이야?”예뻐한 적이 있었나?한 번도 없었다.진성택이 고은영에게 조금이라도 잘해줬다면 고은영이 진씨 가문 문턱을 넘어보지 못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 그게 아니라...”“아버지는 남은 주식을 모두 너한테 남겨줬어. 하지만 친딸인 은영이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잖아. 그런데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하셨다고?”진호영이 모든 것을 까밝히자 진유경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호영 오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진유경은 더욱 크게 울먹이면서 눈물을 흘렸다.진유경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진호영은 진유경의 편이었는데 지금은 왜...‘이게 다 고은영 때문이야! 대체 무슨 수로 꼬드겼기에 오빠들이 다 고은영의 편을 들어주는 거냐고!’“왜 이러냐고? 우리 어머니가 은영이에게 남겨준
이윽고 고은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진호영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고은영이 진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진호영과 고은영은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진호영은 보통 직접 찾아와서 문제를 얘기하는 편이기에 전화를 잘 걸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진호영이 전화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고은영은 잘 알고 있었다.진윤에게 전화하자마자 또 고은영에게 전화하다니.고은영이 전화를 받기도 전에 진윤이 고은영의 전화를 빼앗아갔다.“오빠...”진윤은 바로 전화를 꺼버렸다.“꺼버리면 어떡해요. 혹시 언니가 전화라도 하면...”“걱정하지 마. 네 언니는 너한테 연락하지 않을 거야.”“...”그렇다고 해도 마음대로 핸드폰을 꺼버리는 건 좀...게다가 고은지가 정말 무슨 일이 생겨서 고은영을 찾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진윤은 자연스럽게 고은영의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돌려주지 않았다.“오빠.”“오늘은 나한테 집중해.”그 말투는 아주 강압적이었다.“...”마치 그동안 진윤에게 신경 써주지 않아 삐진 것만 같았다.하지만 고은영도 어쩔 수 없었다.고희주와 고은지에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말이다.사실 고은영도 알고 있었다. 고은지는 고은영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고희주의 일 때문에 고은지는 언제든지 화를 낼 수 있었다.“그래요.”“...”“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너한테 뭘 좀 사주려고.”“...”사준다고?고은영은 진윤의 목적을 알 수 없었다.진성택이 죽었다.장례식에 안 가는 건 이해가 되지만 굳이 고은영을 데리고 나와 쇼핑을 하는 목적은 뭘까.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그때 윤설의 전화가 걸려왔다.진윤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정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그런 진윤을 보면서 고은영은 진윤이 참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다.진윤과 비교하면 나태현은 정신병이 틀림없었다....진성택은 오늘 화장하게 된다.김영희, 진유경과 진호영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진윤과 진정훈은 결국
숨을 깊게 내쉰 나태현이 얘기했다.“량천옥이 나씨 가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 지금...”“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배준우가 나태현의 말을 끊었다.그때 나씨 가문 내부는 부글부글 끓었었다. 게다가 량천옥을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다.나태현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갔고 나태현의 어머니도 그 시기에 돌아갔다.그 모든 모순의 시작은 량천옥이었다.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씨 가문은 여전히 량천옥과 원한이 있었다.다들 그저 그 원함을 꾹 참고 있었는데 고은지가 나타났다.량천옥의 딸이면서 나태현의 딸 엄마인 고은지 때문에 나씨 가문과 량천옥의 전쟁이 다시금 시작되었다.“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요.”우정과 사랑 중에서 배준우는 당연히 사랑이었다.게다가 이번 일에는 나씨 가문에서 숨기는 것이 너무 많았다.또 나태현이 회사의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보니 프로젝트가 위험했다.나태현은 화가 나서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 소리를 들은 배준우는 핸드폰을 소파에 툭 던졌다....다른 한편.고은영과 진윤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진윤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나씨 가문과 엮인 프로젝트를 모두 엎어버리라고 명령했다.옆에 있는 고은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걱정했다. 진윤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화하려고 할 때 고은영이 진윤의 손을 잡았다.“오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나씨 가문이 밉긴 하지만 진윤의 일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진윤이 계약을 많이 해지할수록 진윤에게 영향이 더 클 테니까 말이다.진윤은 본인을 걱정해주는 고은영을 보면서 마음이 누그러졌다.부드러운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진윤이 얘기했다.“다 필요 없는 것들이야. 나태현은 지금 당장 귀국해야 해.”그 말을 들은 고은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머릿속에는 병원에 있는 고은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은지는 나태현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눈치채고 얘기했다.“지금 나태현과 량천옥이 해외에서 서로 죽이고 난리가 났어. 만
화가 난 나태범을 보면서 집사는 안절부절못했다.“지금 상황이 조금 복잡합니다.”생각하던 집사가 말을 이었다.“게다가 진씨 가문 쪽도 걱정해야 합니다.”“진씨 가문? 거기는 왜.”나태현과 량천옥이 싸우는 것만으로도 나태범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이러다가는 정말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게다가 배씨 가문에서 계약까지 해지했지...이러다가는 그룹이 파산될지도 몰랐다.“배준우 씨 아내가 진윤 씨와 진정훈 씨의 친여동생입니다. 그러니 이 세 사람 다 그 고은지 씨의 동생을 위해 움직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나태범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저 진씨 가문에서 친딸을 찾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성택이 친딸보다 양딸을 더욱 아낀다는 것까지 말이다.배준우가 고은영과 결혼할 때 강성의 사람들은 배준우가 많이 아깝다고 생각했다.일반적인 신분으로는 배준우의 옆에 설 수 없으니까 말이다.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은영이 진짜 진씨 가문의 친딸이었다.나태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이튿날 아침.고은영이 아침을 다 먹자마자 진윤이 도착했다.그리고 조카를 위한 선물도 가득 가져왔다.고용인들이 진윤이 가져온 물건을 보관해주었다.약간 붉어진 고은영의 눈가를 보면서, 진윤이 배준우한테 물었다.“어젯밤 계속 운 거예요?”배준우도 머리가 약간 아팠다.“제대로 자지 못했어요.”진윤이 다가가서 고은영을 마주 보더니 고은영이 입고 있는 귀여운 잠옷으로 눈을 돌렸다.배준우는 정말 딸을 키우는 것처럼 고은영을 보호해주는 것만 같았다.고은영은 원래도 키가 작은 편이어서 배준우와 함께 있을 때면 아주 작아보였다.“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 하자.”“정말 나가야 해요?”고은영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고은영은 병원에 가서 고은지를 보고 싶었다.고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진작 알아차렸다는 듯이 얘기했다.“병원 쪽에는 내가 사람들을 깔아놨어. 무슨 일 없을 거야. 가자.”진윤의 말을 들은
하지만 진윤이 내일 고은영을 데리고 나가는 것의 목적을 떠올리면 고은영은 어쩔 수 없었다.“당연한 거 아닌가요?”진윤이 당당하게 얘기한 후 전화를 끊었다.배준우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더니 고은영을 쳐다보았다.“이미 다 들었지?”“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진성택은 사망했다.진정훈은 고은영이 장례식에 올 것인지 안 올 것인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하지만 진윤은 장례식에 가지 말고 나가서 쇼핑하자고 했다.그것도 웃으면서 말이다.“넌 어떻게 하고 싶어?”“안 가도 돼요?”고은영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웃으면서 쇼핑해야 한다니. 고은영에게 있어서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배준우도 짐작하고 있었다.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배준우가 얘기했다.“아마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쇼핑이 최종 목적이 아닐 거야.”“위로하는 거예요?”진윤은 배준우더러 고은영을 잘 위로해주라고 했다.“위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네 큰형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하는 말이야. 단순하게 쇼핑하는 게 목적일 리 없어.”배준우가 확신하면서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배준우는 허락하는 고은영을 보면서 한숨을 돌렸다.그리고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얘기했다.“걱정하지 마. 다 지나갈 거야.”“나씨 가문 쪽은...”거기까지 말한 고은영은 고개를 들고 배준우를 쳐다보았다.고희주의 일로 마음 아팠지만 배준우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배준우는 고은영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고은영에게 짧게 키스한 배준우가 이어서 얘기했다.“나씨 가문과 협업하는 프로젝트 두 개가 있었는데 이미 계약을 해지했어.”“주주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고은영이 걱정하면서 물었다.“그 두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서 다들 발을 빼는 분위기야. 아마도 량천옥 씨가 한 일 같은데.”그래서 배준우도 큰 문제 없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다.지나간 일에 대해 배준우는 뭐라고 할 수 없
진정훈이 전화를 건 것은 진정훈에게도 계획이 있어서였다.“진유경을 조심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진유경에게 남긴 주식이 있는데 꼭 되찾아올 겁니다.”진유경이라...진정훈은 진유경이 왜 계속 고은영을 끌어내리려는지 깨달았다.그건 바로 진유경이 아직 자기 위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니 이제라도 제대로 알게 해줘야 했다.배준우는 진정훈의 말을 알아듣고 얘기했다.“네. 알겠습니다.”“장례식은 와도 되고 안 와도 괜찮다고 전해줘요.”“네.”진정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은영의 뜻을 존중해주었다.하지만 장례식에 고은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 뻔했다.“장례식은 언제입니까.”“이틀 뒤입니다.”“알겠습니다.”이틀 뒤라니. 생각보다 장례를 서두르는 모습에 배준우는 약간 의아했다.진정훈은 그저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그래서 그동안 배준우가 고은영을 잘 지켜줄 수 있도록 전화를 건 것이다....진정훈과의 통화를 마치고 배준우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데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이번에는 진정훈이 아닌 진윤이 걸어온 전화였다.배준우는 고은영을 안고 소파에 앉았다. 영원히 고은영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처럼 고은영을 꼭 안고 있었다.“여보세요.”배준우는 진윤을 존경하는 편이었다.진윤은 정말 가문의 도움 없이 지금 그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다.“은영이는요? 연락이 안 돼서.”“기분이 안 좋아요. 무슨 일이죠?”“왜 기분이 안 좋은 거죠?”“고은지 씨한테 일이 좀 생겨서... 컨디션이 좋지 않아요.”고은지의 상황을 전해 들은 진윤은 머리가 아팠다.지금 고은영에게는 모든 일이 설상가상이었다.“내일 오전 아홉 시에 내가 데리러 간다고 전해줘요.”“내일이요?”“네.”진윤이 대답했다.배준우는 진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진윤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씨 가문이 얼마나 엉망인지 광고할 셈이었다.진윤이 진성택의 장례식에도 나서지 않고 친여동생인 고은영을 데리고 밖에서 돌아다닌다면...“어디로 갈 겁
그 처참한 울음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진호영과 진정훈은 갑자기 심장이 내려앉았다.두 사람이 달려가 보니 병실의 문은 반쯤 열려있었다. 김영희는 눈물을 흘리면서 진성택을 껴안고 있었고 진유경도 진성택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침대 위의 진성택은 이미 눈을 감았다.의사와 간호사들도 두 사람의 소리를 듣고 얼른 달려왔다.5분 후. 의사는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안타깝게도 환자분은 이미 숨을 거두셨습니다.”“아버지... 제발 눈 좀 떠봐요! 이대로 가지 마요! 안 돼요!”진유경이 눈물범벅으로 얘기했다.김영희도 눈물을 훔치면서 얘기했다.“성택아, 이렇게 우리를 두고 가면 어떡하니! 나와 유경이는 어떻게 해...”“그러게요, 아버지. 저랑 할머니는 아버지뿐이에요. 제발 가지 마요. 눈 좀 떠보세요.”두 사람은 그렇게 울면서 밖을 흘깃거렸다.진호영이 다가가려고 할 때 진정훈이 진호영의 손목을 잡았다.진호영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진정훈을 쳐다보았다.진성택의 사망에 진호영도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하지만 진정훈의 얼굴에는 슬픔보다도 짜증이 더욱 많았다.진성택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하지만 김영희와 진유경의 뻔한 연기를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혔다.진성택은 진유경을 평생 아껴왔지만 진정훈에게 있어서 진유경은 아무것도 아니다.진호영은 그런 진정훈을 보고 약간 정신을 차렸다. 진호영은 증오심이 가득 묻은 두 눈으로 진유경을 쳐다보았다.진유경이 눈물을 흘리는 건 진성택의 죽음 때문이 아니다.진성택의 죽음으로 인해 전에 누리던 것을 누리지 못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진성택은 죽기 직전까지도 진유경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보고 있었다. 진유경이 남은 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도록 말이다.하지만 결국 아무도 진유경을 받아주지 않았다.진유경은 양딸인 데다가 진윤과 진정훈에게서 호감을 사지 못했기에 다른 가문에서는 진유경과 혼사를 맺고 싶지 않아 했다.유일하게 진유경을 받아들이는 허씨 가문은 진유경이 싫어했다.이젠 진
고은영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왔을 때 진정훈과 진호영이 돌아왔다.두 사람은 고은영을 보고 다가와 물었다.“은영아, 뭐라고 하셨어?”진정훈이 먼저 물었다. 진호영은 어두워진 고은영의 표정을 보면서 감히 물을 수 없었다.고은영은 진정훈을 보고 또다시 진호영을 쳐다보았다.지금 고은영의 표정은 진호영이 고은영을 끌고 올 때보다 더욱 어두웠다.“나한테 진유경을 부탁한다고 하셨어.”“...”“...”두 사람은 고은영의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굳어버렸다. 진정훈은 싸늘한 눈으로 진호영을 쳐다보았다.“중요한 얘기라는 게, 저런 거였어?”고은영에게 진유경을 맡기는 것. 그게 죽기 직전에 하고 싶은 말이었다니.어떻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지? 진호영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진호영은 고은영을 보면서 얘기했다.“미안해. 난 아버지가 그런 일로 널 부를 줄 몰랐어.”고은영은 진호영의 사과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진정훈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그리고 진유경에게 주식을 남겨주었으니 진유경의 주식을 정훈 오빠한테 빼앗기지 않게 챙겨주라고 했어.”“...”“...”두 사람은 또 그대로 얼어붙었다.정말 진유경 때문에 고은영을 부른 것이었다니.도대체 얼마나 진유경을 아끼기에 죽기 직전에도 친딸을 불러 양딸을 맡기려 하는 것인지, 두 사람은 알 수가 없었다.고은영은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먼저 갈게.”“그래. 잘 가.”진정훈이 고개를 저으면서 얘기했다.고은영은 그대로 떠났다.진씨 가문에 아무 기대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마음이 공허하고 적적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진호영은 떠나는 고은영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 아파했다.진정훈이 진호영을 보면서 말했다.“이제야 안 거야?”“난 전혀 몰랐어... 아버지가 진유경의 일로 은영이를 부른 걸 알았다면 은영이를 불러오지 않았을 거야.”진호영은 정말 후회했다.진호영은 그저 고은영이 진성택의 친딸이니까... 친딸에게 해줄 말이 있을 줄 알고 데려온 것인데.결국 진성택은 모든 것을 진유경에게
거기까지 들은 고은영의 표정은 잿빛이 되었다.진성택도 그걸 알아차리고 잠시 말을 끊었다.그리고 어두워진 고은영의 눈을 보면서 이어서 얘기했다.“나도 일이 이 지경이 될 줄은 몰랐다만. 하지만 은영아, 난 정말 유경이가 걱정돼. 그러니 네가 유경이를 잘 챙겨줘. 그럴 수 있지?”진성택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고은영을 되찾아온 다음부터 진성택은 고은영 앞에서 진유경을 잘 챙겨주라는 말을 했다.죽기 전까지도 말이다.“나한테 부탁하는 거예요, 준우 씨한테 부탁하는 거예요?”그 말투는 아주 차가웠다.전에 김영희가 진유경을 데리고 배준우를 찾아왔을 때도 고은영은 그저 묵묵히 참았다.하지만 진성택이 또 이런 말을 꺼내다니.뭘 어떻게 챙겨주라는 건지.고은영이 무슨 능력으로 챙겨주라는 건지.“은영아, 그게 아니라...”진성택이 말을 더듬었다.고은영은 손을 빼내고 얘기했다.“뭐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진유경이 걱정되면 데려가면 되잖아요. 죽어서도 계속 돌봐주면 되겠네요.”“...”고은영의 말을 들은 진성택은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내 말을 오해한 것 같은데... 배준우한테 도움을 청하는 건 아니야.”“...”“전에 정훈이 뭐라고 해서 네 엄마가 남겨준 주식을 너와 유경이한테 나눠줬잖아. 정훈이가 유경이 몫을 빼앗아가지 않게 잘 좀 챙겨줘.”고은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화가 끓어올랐다.죽기 직전까지도, 진성택은 진유경을 걱정하고 있었다.하지만 고은영은 그 정도로 마음 약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아무리 고은영이 나약해 보이고 연약해 보여도 마음만은 단단한 사람이었다.“제가 그래야 할 이유를 모르겠네요. 그리고 정훈 오빠가 진유경의 주식을 빼앗을까 봐 걱정하시는데... 그건 원래 진유경 몫이 아니었어요. 결국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될 거예요.”진성택이 진유경에게 주식을 남겨뒀을 줄은 몰랐다.진정훈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고은영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은영아, 잠깐만...”진성택은 밖으로 나가려는 고은영을 보면서 마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