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용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염구준도 그녀가 혼잣말을 하는 건지 그와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림자 용은 곁눈질로 염구준을 흘끗 보았는데,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 선배…”그림자 호랑이는 시험 삼아 그녀를 불렀다. 그녀 역시 자신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든 듯했다.“또 여자야?!”염구준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림자 호랑이를 흘끗 보았다.염구준는 신기하고 놀라웠다. 설마 암영당의 4대 지존이 다 여자라고?“주작, 현무, 사상진법의 주문 아직 기억하지?”그림자 용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마치 시크한 한 송이 장미 같았다.“선배, 이건 뼛속까지 새겨뒀죠!”주작도 여자였다. 염구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왜 한숨을 내쉬었는지 몰랐다.이제 현무만 남았다. 그는 말을 하지 않았고, 두 손은 계속 결인을 하고 있었다. 아마 죽을 힘을 다해 예전의 지식을 보충하고 있을 것이다.염구준은 현무가 딱 한 글자라도 좋으니 말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갈라진 틈의 끝까지 갈 때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런 거였군!”그림자 용은 두 갈래의 길을 보고 고개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예상 밖의 일인 것 같았다.“영험한 뱀이시어 길을 찾아주소서!”현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역시 여자였다. 염구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얀 뱀 한 마리가 허공에 나타났다. 현무의 힘이 응집되어 만들어진 것이었다.작은 뱀은 다시 두 마리로 나눠져 각각 두 갈래 길로 들어갔고, 남은 사람들은 모두 현무의 탐색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아!”현무가 살짝 놀란 듯 뒤로 물러섰다.“무슨 일이야?”그림자 용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도 예감이 좋지 않은 듯했다.“거대한 두 눈에서 붉은빛이 나오고, 뱀의 영혼을 통해 나랑 시선을 마주하고 있어…”현무는 겁을 먹은 듯 말했다. 염구준은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염구준도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어떻게 밀봉되어 있는 묘실에서 생활할 수 있는가.“창용칠숙이 곧 사라져,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해. 찢어져서 움직이자!”그림자 용은 다급한 듯 말했다. 확실히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기에 그녀들은 애초에 염구준과 창용 묘실을 열었다.“염구준, 현무 너희는 날 따라와. 백호는 주작을 따라가고!”그림자 용은 배치를 하고, 먼저 신비로운 힘이 있는 왼쪽 동굴 입구로 들어갔다. 백호와 주작은 창용 호위대를 찾으러 갔다.염구준은 주변을 살피더니 그림자 용을 따라갔다. 어차피 지하세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주군님, 선배랑 결혼은 언제 하실 겁니까?”길 찾기에 온 정신을 쏟고 있던 염구준은 현무가 갑자기 장난스럽게 묻자 아주 깜짝 놀랐다.“뭐?”염구준은 잠시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생각했다. 두 사람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을 논하던 원수 지간이었는데, 어떻게 결혼이라는 말을 하지?“난 당연히 강요하지 않을 거야. 창용의 오래된 무덤의 비밀을 찾으면, 나 스스로 결정해도 돼.”그림자 용이 대충 대답했다. 염구준은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더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선배…”“닥쳐, 묘지 찾는데 집중해!”그림자 용이 조용히 소리치자, 현무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염구준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작정 두 사람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선배, 돌 벽에 그림이 있어!”현무가 갑자기 말했다. 염구준은 현무 쪽을 바라보았고, 돌 벽에는 정말 벽화가 있었다.“쉿!”그림자 용이 소리를 내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녀는 다른 것을 발견한 것 같았다.염구준은 숨을 참았다. 그러자 갑자기 등 뒤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비록 아주 약했지만 아주 또렷했다.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만 뻗어 잡으려 했지만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숨소리도 사라졌다.염구준은 깜짝 놀랐다. 그의
“악령아 물렀거라!”그는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손바닥으로 돌 벽을 쳤다. 하지만 돌 벽은 마치 지우개처럼 움푹 패었다.“이건…”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묘실 전체가 흔들렸다. 염구준은 힘주어 서있으려 했지만 발아래의 땅도 움푹 패었다.“고래!”염구준은 뭔가 익숙한 느낌에 문득 이 묘실은 거대한 고래의 뱃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더 이상 힘을 주어 때릴 수 없었다. 만약 고래가 깊은 바닷속으로 도망가기라도 한다면, 정말 끝장이다.염구준은 고래의 배가 텅텅 빈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아마 어떤 내장 안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 고래가 얼마나 큰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전에 본 균열은 분명 고래의 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그곳을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염구준은 흑인이 남긴 주문을 떠올렸다. 그 당시 흑인도 주문을 이용해 고래의 섬을 컨트롤했던 것이었다.“끝까지 포기할 수 없지!”염구준은 눈을 감고 흑인의 주문을 외웠다. 이번엔 자신의 몸 안에서 어떤 힘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몸 안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너의 힘은 다시 돌려줄게!”염구준의 직감이 고래의 힘은 단순히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그의 몸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당연히 고래의 흙일 것이다. 예전에 흑인이 이런 흙으로 살수 몇 명을 만들었었다.고래의 흙은 마치 소환이라도 된 듯, 염구준의 몸 안에서 천천히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됐다! 이제 편히 쉴 수 있어.”고래의 힘을 빼은 염구준이 눈을 뜨며 안심한 듯 말했다.“이제 난 가도 되지? 난 아직 알고 싶은 비밀이 있어.”염구준은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고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어디선가 부드러운 고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염구준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고래 울음소리가 사라지자, 주변은 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염구준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오로지 직감에 의지
염구준은 현무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그는 새끼 고래가 이 음파의 원천인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현무는 음파에 의해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고, 콧구멍과 입가에서는 이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망했다!”염구준은 고통을 힙겹게 참으며 현무를 새끼 고래의 곁에서 떼어내며 그와 동시에 석화된 새끼 고래를 향해 주먹을 날리자 괴상한 음파가 뚝 그쳤다.“신명은 무슨, 생물 자기장이 네 목숨을 가져갈 거야.”절망에 빠진 현무를 보고 염구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앙은 원래 좋고 나쁨이 없지만, 과도한 미신은 죽음을 자초할 뿐이다.“진짜 무서운 음파였어.”그림자 용도 아직 두려운 듯 말했다. 그녀의 내공은 확실히 현무보다 높았고, 상처도 치료할 수 있었다.“흐흐, 흐흐.”염구준은 갑자기 괴상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어디서 오는 건지 몰라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사람 그림자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왜 발소리가 들리지?”현무를 치료해 주고 있던 청룡도 경계하며 말했다. 하지만 염구준은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거대 고래의 자기장이 모든 걸 다 기록할 겁니다! 제가 가문 사람들의 고함소리를 들었어요.”현무가 고통스러워하며 말했다. 거대 고래에 대해서는 확실히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됐어. 중요한 시점에는 미신을 믿지 않을 거야.”염구준은 한참을 멍하니 있더니 드디어 입을 뗐다.“전에 신비롭게 사라진 가문 사람들이 여기에 잡혀와서 막노동을 하게 된 겁니다. 이곳에 그 공백 역사의 진실이 있어요!”현무는 슬픈 눈으로 말했다. 그녀는 청룡을 살짝 밀어내고 힘겹게 일어섰다.“거대 고래의 몸 안에 있는 자기장은 아주 이상해. 아마 수많은 환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야. 우리 빨리 도망쳐야 해.”예전에 상어의 독으로 이미 경험이 있는 염구준이었다.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 안 된다.“저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요? 깊은 바닷속일까요?”현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중얼거렸다.“지금 섬이 가라앉고 있다는
염구준은 괴물을 보며 경계 태세로 말했다. 그가 충분히 괴물을 처치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그들은 말을 하며 뒤로 물러났고, 작은 괴물은 펄쩍거리며 날개를 세웠다. 움직임이 어설프긴 했으나 발걸음을 떼는데 성공했다.염구준 일행은 최선을 다해 숨을 참았지만, 괴물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날개를 흔들고 있었지만 괴물은 사실 두 발로 뛰어오고 있었다.“칙!”청룡이 주문을 외워 괴물을 향해 불꽃을 내뿜자, 괴물의 날개가 불에 타기 시작했다.“망했어!”염구준은 두 여자의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했다. 불이 붙은 괴물은 더더욱 상대하기 어렵다. 그도 많은 것을 신경 쓸 수는 없어 그대로 괴물의 머리에 주먹을 내리꽂았고 이내 괴물은 바닥으로 쓰러졌다.“여기 분명 출구가 있어!”괴물을 처리한 염구준은 문득 음식과 산소가 없으면 고대 괴물도 살아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여우?”통로 끝, 너무 익숙한 실루엣이 염구준의 시야에 들어왔다.“조… 존주…”청룡은 두 다리를 덜덜 떨고 있다가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여우? 너 죽은 거 아니었어?”염구준은 경계 태세로 물으며 청룡, 현무에게서 일정 거리를 확보했다. 지금의 그녀들은 순식간에 배신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여우는 꼼짝도 하지 않다가 제자리에서 잠시 왔다 갔다 하더니, 또 다른 통로로 사라졌다.“자기장이 만든 투영인가?”염구준도 알 수 없었다. 비록 여우의 실력이 그에게는 못 미치지만, 절대 염구준과 힘을 겨룰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존주님은 분명 부활하셨고, 벌써 묘실에 들어간 거야.”청룡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여우의 진짜 얼굴을 정확히 보았지만, 여전히 주인을 굉장히 꺼려 하고 있었다.“선택권은 너희한테 달렸어. 하지만 지금은 서로 죽이는 건 좋지 않아!”염구준도 그녀들을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지금 현무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이고, 싸우기 시작하면 이길 수밖에 없다.“조심해!”염구준이 그녀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염구준은 훌쩍 뛰어올라 검은 그림자를 쫓아갔다. 기술과 인기척이 왠지 아주 익숙했는데, 바로 이영이었다.“넌 어떻게 나온 거야?”염구준은 빠르게 이영의 길을 가로막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넌 안개가 자욱한 섬의 능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은세집안도 창용칠숙의 비밀에 대해 두 손 놓고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겠지.”이영은 요염하게 웃었다. 염구준은 청해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가 처리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목숨을 가져와!”청룡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날카로운 칼을 뽑아들고, 숨을 들이쉬고 이영을 향해 돌진했다.“시조새의 독소는 네 목숨을 앗아갈 거야!”이영이 콜록거리며 공격을 받아들었다. 염구준이 여기에 있으니 그녀는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었다.이영이 현무를 죽였으니, 청룡은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염구준도 쉽게 끼어들 수 없어, 그저 돌아가 현무의 상태를 확인할 뿐이었다.현무의 피는 벌써 바닥을 빨갛게 물들였다. 목에 난 긴 상처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고 흘렀다. 이미 가망이 없었다.“안개가 자욱한 섬의 암살자 실력은 겨우 이 정도야?”청룡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염구준은 소리를 따라가 보니, 이영은 이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청룡은 그녀를 죽이지 않았지만 손과 발의 힘줄을 모두 끊어버렸다.“날 죽여!”이영은 절망적인 얼굴로 소리쳤다. 청룡은 그런 그녀를 발로 걷어찼고, 얼굴에 칼을 몇 번 휘둘렀다.“현무야…”청룡은 이미 숨을 거둔 현무를 보며 웃음을 쥐어 짜내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저기, 너…”염구준은 청룡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녀의 입술은 검게 변해있었고, 몸에는 수많은 보랏빛 멍이 나타나 있었다. 독소가 퍼진 것이다.“말하지 마. 내가 독소 빼줄게!”염구준은 입을 열려던 청룡을 저지하고, 기를 모아 청룡의 몸 안으로 밀어넣었다.“괜히 힘 빼지마. 난 글렀어. 빌어먹을 괴물 자식!”청룡은 쓴웃음을 지으며 염구준을 밀어내려
염구준은 흑풍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말은 반은 추측이었다. 하지만 직감 상 국주도 창용칠숙의 비밀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국주? 겨우 그 사람이 감히 은세집안에 대항하겠다고?”흑풍은 시큰둥하게 웃었다.“아!”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을 때, 이미 숨통이 끊어진 현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시체가 벌떡 일어났어!”흑풍은 놀라서 뒤로 뛰어갔고, 현무는 숨을 몇 번 크게 쉬더니,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이영에게 천천히 다가갔다.‘벌레잖아!’염구준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는 수많은 작은 벌레들이 지하의 균열에서 나와 현무의 몸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이영의 몸에도 똑같이 벌레들이 타고 올라갔는데, 그녀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염구준은 처음엔 피가 벌레들을 유인했다고 생각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아래를 내려다 본 순간, 수많은 벌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흐흐흐.”방금 전까지만 해도 슬픔에 잠겨있던 이영도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일어설 수 없어, 지렁이처럼 기어다녔다.“염구준, 쟤들 머리를 날려버려! 좀비 바이러스야!”청룡도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런 바이러스는 그녀가 흑주에 있을 때 본 적이 있었다. 괴담으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그 벌레들 아니야?”염구준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흑풍도 이 벌레들을 발견하고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고래의 잔해를 먹이로 하는 심해 동물의 유충이야.”청룡은 말을 하면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바닥은 불꽃에 뒤덮여, 심해 동물의 유충에도 불이 붙었고 이어서 탄내가 났다.“빨리, 쟤들 머리를 베어버려. 좀비 바이러스는 주로 신경을 제어해.”청룡이 다시 재촉했다. 염구준이 갑자기 뛰어올랐다. 그러자 ‘쓱삭’ 소리가 두 번 들리더니 현무와 이영의 머리가 날아갔다.“너?”흑풍은 염구준이 갑자기 손을 쓰는 것을 보자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내가 말했지, 여기가 너희들 무덤이라고!”염구준이
국주의 카리스마에 염구준도 경각심을 높였다.본인도 황가의 눈엣가시이기 때문이다.“멍청한 놈!”흑풍이 냉소를 짓더니 시체 한 구를 던지고 순식간에 사라졌다.“이형환영!”염구준은 한참 뒤에야 만단의 준비가 없이 흑풍을 잡는 건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전력으로 수색하고 묘실의 사람들 전부 죽여라!”국주가 모조리 죽이라는 명을 내리자 4대 호위가 신속하게 명을 받들고 떠났다.“망했어. 암영당의 두 사람!”염구준은 갑자기 수상함을 감지했다.국주가 오면 은세집안도 왔을 텐데, 그러면 혼전이 벌어질 것이다.“염 전주님, 이분은 누구세요?”모두 떠난 뒤, 국주가 청룡을 유심히 쳐다보며 물었다.“제 친구입니다.”염구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비록 국주는 위험한 인물이지만 전신전도 황가를 무서워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우리가 손을 잡아야 용국은 진정한 태평성세를 누릴 수 있어요.”국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 자리에 앉으면 밑도 끝도 없는 고민들이 많아서 모든 세력을 적절히 조절해야 했다.“전신전의 사명은 용국을 지키는 겁니다.”염구준은 이 말만 남기고 청룡을 부축해 앞으로 걸어갔다.아직 체내의 독소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으니 약점을 드러내면 안 되었다.“염 전주님, 이제 어디로 가면 됩니까?”국주는 아예 떠날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염구준도 잘 알고 있었다. 국주의 무공도 약하지 않으니 안전을 위해서 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저도 잘 모릅니다. 그냥 직감을 따라갈 뿐이죠.”염구준이 입꼬리를 올렸다. 가장 진실한 대답이었다.“창용대제의 전설을 어떻게 생각하세요?”국주는 그의 곁에 따라붙으며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용국 대륙의 창시자지만 나쁜 짓을 많이 했으니 결국은 인간이죠.”이번에도 진실한 대답을 했다.“저와 창용대제를 비교하면 누가 더 훌륭합니까?”국주는 염구준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만 냈다.국주들만의 폐단으로 항상 최고의 호칭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이 시대에서 국주님은 최고십니다.”염구준은 담담하게 웃었
얼마 지나지 않아 공연이 시작되었다.종목들은 정말 신나고 하나같이 감탄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었다.암퇘지가 철사슬 위로 걸어가고, 곰이 외발자전거를 타는 장면을 본 아이들이 깔깔 웃으면서 연신 박수를 쳤다.방금 일로 염구준은 자꾸 주변을 살펴보며 경계했다.여러 종목이 끝난 후, 광대 진행자가 나와서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존경하는 여러분, 이어서 저희 피날레 종목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활인을 할 텐데 어느 분이 게스트로 올라오시겠습니까?”그 말에 현장이 조용해지고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어떤 아이들은 자기가 나가겠다고 했지만 부모가 한사코 입을 막으면서 말렸다.“나가면 안 돼. 이 서커스단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야.”“나도 들었어요. 인근 도시에서 발생했는데 게스트가 계약서까지 작성했대요.”“무서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어?”서커스 공연은 재미있지만 이 종목은 다들 뒤로 물러나며 지켜보기만 했다.“아빠, 내가 나가도 돼요?”그때 염희주가 말했다.“가지 마. 나중에 내가 믿을 만한 마술사를 불러서 체험하게 해 줄게.”옆에서 하는 말을 들었으니 딸을 위험하게 내보낼 수 없었다.“알았어요.”염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무룩해 있었다.곧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공연장의 불빛이 어두워지며 한 줄기 전등만 광대를 비추었다.“여러분, 제가 행운 게스트를 뽑으면 전등이 그분을 비출 겁니다. 물론 나올지 말지는 그분이 결정하면 되겠습니다.”서커스의 수법은 한번 또 한 번 곤란한 상황으로 밀어붙였다.정말 게스트로 당첨된다면 체면 때문이라도 무대에 올라갈 것이다.“감격스러운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광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전등이 현장을 누비며 빠르게 움직였다.“멈추세요!”한참 뒤, 광대의 말에 전등이 멈추었다.게스트로 염구준이 당첨되었다.이번에야말로 현장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이 되었다.역시 나름 계획이 있었다.염구준은 방금 몰래 감시하던 사람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고 생각했다.“축하드립니다. 무대에 올라와서 협조해 주
당황한 조련사가 긴 막대기를 들고 사자의 머리를 누르며 뒤로 물리쳤다.탁!사자가 손바닥으로 막대기를 쳐서 부러트리고 아이에게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우와아아앙!”깜짝 놀란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아이가 높은 소리로 울수록 사자는 더 흥분되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드러냈다.“저기 누가 들어가고 있어요.”그때 한 그림자가 갑자기 철창 앞에 나타났다.바로 염구준이었다.“으아아아악!”염구준이 두 손으로 철창을 잡고 힘을 주자 단단한 쇠가 구부러지며 양쪽으로 휘었다.그리고 구멍을 통해 철창 안에 들어가 울고 있는 아이를 안았다.“울지 마. 이제 괜찮아.”“으르렁!”사자는 먹잇감이 빼앗기자 입을 크게 벌리고 으르렁거리며 덮쳤다.“죽어!”염구준이 강력한 기운을 발사하자 사자는 뒤로 튕겨 구석에 나가떨어졌다.그가 살의를 뿜어냈다.동물은 워낙 살의에 예민했다.사자는 벌러덩 드러누워서 작은 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렸다.그 동작은 서커스단에서 배운 것이다.염구준은 아이를 안고 철창에서 나와 아이 엄마에게 넘기며 신신당부했다.“앞으로 아이 손을 꼭 잡고 다니세요.”“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아이 엄마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염구준 가족은 경악해 있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계속 동물을 구경했다.“아빠는 슈퍼맨이에요?”방금 장면을 떠올리던 염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사자가 아버지 앞에서 고양이처럼 말을 잘 들어서 깜짝 놀랐다.“하하하. 방금 아빠가 마술을 부려서 그래.”염구준이 웃으면서 대답했다.어떤 일은 설명하기 어렵기도 하고 그렇다고 아이에게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마술? 이따가 마술쇼도 있는데 가르쳐줄 수 있어요?”염희주는 두 눈을 깜빡이며 염구준을 봐라봤다.그 말에 염구준은 난감했다.마술을 할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됐어. 마술은 나중에 배워. 이제 곧 마술쇼 시작이야. 들어가서 앉아야지.”손가을이 나서서 남편을 도와줬다.“시작했어요? 그럼 빨리 들어가요!”염희주는 빨리 들어
용필과 하윤나는 초고속으로 이튿날에 바로 미니 결혼식을 올렸다.정식 결혼식은 나중에 다시 성대하게 올리려고 했다.쌍방 부모님들이 모두 도착했다.하동철과 김연주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염구준이 두 사람에게 손씨 그룹에서 일하면 월급을 200만씩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하동철은 경비원으로 취직하여 경호 대장인 용필과 함께 일하고 김연주는 청소부에 취직했다.용필을 봐서 두 노인과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고 이렇게 안배한 것이다.어차피 앞으로 한 식구로서 자주 만날 텐데, 강하게 밀어붙이다가 물러날 때는 이득을 주는 방식으로 두 사람을 탄복하게 만든 것이다.재미있는 것은 하동철이 출근하면 회사에서 용필을 대장이라 부르고 퇴근하면 용필이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한다는 것이다.미니 결혼식은 무사하게 진행되어 두 사람은 드디어 부부가 되었다.이 모든 것은 다 염구준이 추진한 덕분이라 두 사람은 엄청 고마웠다.행복한 시간은 빠르게 지나, 어느덧 서커스단이 공연하는 날이 다가왔다.염희주가 계속 재촉하는 바람에 세 사람은 아침 댓바람부터 공연장에 도착했다.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아직 공연장 문이 열리지 않았다.밖에 철창을 몇 개를 놓고 안에 맹수들을 가둔 것이 보였다.독수리, 호랑이, 원숭이 등등 동물들을 관람용으로 놓은 것이었다.이곳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아이가 있는 가족들이었다.다들 신기해서 감탄을 금지 못했다.“아빠는 사자를 본 적이 있어요?”염희주가 궁금해하며 물었다.“봤기도 했고 먹어도 봤어. 근데 맛이 없었어.”염구준은 딸을 속일 필요가 없어 솔직하게 대답했다.전에 흑주 벌판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 팀과 연락을 잃어서 먹을 것이 없었다.그래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잡는 족족 배를 채웠다.“아빠는 왜 맨날 거짓말만 해요? 내가 나쁜 것만 배우면 어떡해요?”염희주는 아예 믿지 않았다.사자는 사나운 짐승이고 초원의 패권자이자 흑주의 우두머리인데 그것을 잡아 먹었다니믿어지지 않았
“시작.”오백하는 ‘시’자를 말할 때부터 얼마되지도 않는 힘을 손에 넣었다.억지가 따로 없었다.그러나 용필의 손은 꿈쩍하지도 않았다.힘으로 똘똘 물친 용필과 힘을 겨룬다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힘을 준다. 합!”용필이 한마디 하더니 오른팔에 힘을 주어 가볍게 상대방의 손목을 꺾었다.그런데 테이블까지 부숴버렸다.겨우 이 정도에 진 것이다.“악!”왼쪽 팔이 탈구된 오백하는 귀가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질렀다.어려서부터 다친 적이 없이 곱게 자랐으니 이런 고통을 감당할 리가 없었다.“안 된다고 했는데 뭐 하러 용필 오빠한테 개기냐?”하윤나가 말하면서 용필의 팔을 끌어당겼다.참지 못하고 상대방을 해칠까 봐 그런 것이다.솔직히 그녀는 용필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가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윤나야, 나 정말 힘을 쓰지 않았어.”용필이 억울한 표정으로 설명했다.“나도 알아.”하윤나가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했다.팔씨름에서 졌으니 오백하는 패배하고 유일한 선택은 용필밖에 없었다.“꺼져. 설마 남아서 밥 먹고 가게?”염구준은 아직도 아파서 바닥에서 뒹구는 오백하에게 싸늘하게 내뱉았다.“이놈들 잡아 쳐!”열받은 오백하는 경호원들에게 고함을 질렀다.반드시 복수를 할 것이다.쿵!경호원들이 다가가려고 할 때 염구준이 기운을 펼치며 그들을 문밖으로 몰아냈다.봐주지 않았다면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퍽!그리고 오백하를 발로 뻥 차서 밖으로 쫓아냈다.룸 안이 드디어 조용해졌다.글로벌 호텔의 경호원들이 우르르 달려오더니 오백하 일행을 들어 호텔 밖으로 내쫓았다.이 과정은 고작 몇 분만에 진행되었다.“사돈 어르신, 두 사람 이제 결혼해도 됩니까?”두 노인은 염구준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그럼요. 저희도 찬성해요.”하동철과 김연주는 깜짝 놀라며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원래 사위 후보가 2명이었는데 한 명이 도망쳤으니 이제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그럼 두 사람 먼저 시청에 가서 혼인신고하고 나중에 결혼
“진정하세요. 많지도 않습니다.”염구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이게 많지 않다니 두 사람은 경악했다.최근 청해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땅값이 점점 올라 제일 저렴한 별장도 20억 이상이었다.“염 선생님, 그쪽과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오백하가 못마땅 해하며 물었다.손씨 그룹이 끼어들면 그는 뒷배인 회사를 내세워도 대항할 수 없었다.“용필 형, 나를 뭐라고 부르죠?”염구준이 옆을 보며 물었다.“내 매제지.”용필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들었어요? 나랑 상관 있죠?”염구준이 되물었다.상대방이 기어코 끼어들겠다고 하니 오백하는 심란하여 계속 머릿속을 굴렸다.‘어떡하지, 어떡하지?...’돈은 어느 정도는 있었다.하지만 적어도 52억은 있어야 상대방과 싸울 수 있었다.평소 그는 돈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즐겼는데 오늘은 다른 사람에게 돈으로 억압당할 줄은 몰랐다.인과로 보복을 당하니 매우 불쾌했다.“저기요. 왜 예물값을 올리지 않나요?”염구준은 그가 대답하지 않자 주의를 주었다.‘올리긴 뭘 올려?’오백하는 속으로 욕하면서도 겉으로 애써 웃었다.돈으로 통하지 않으니 다른 방면으로 능력을 보여서 자신의 우세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저 멍청한 놈은 윤나를 지킬 자격이 없어요. 두 분 신중하게 생각해 보세요.”오백하가 갑자기 흠집을 내기 시작했다.“그게…”하동철은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무조건 가격을 올리라는 속셈이었다.“주먹다짐을 비교하고 싶으면 그냥 말하면 되죠.”염구준이 분명하게 말했다.종사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한 녀석이 감히 용필 앞에서 나대다니 속으로 우스웠다.능력이 안 되면 가만히 있을 것이지 자기 무덤을 파는 꼴이 되었다.“안 돼.”갑자기 하윤나가 용필을 부둥켜안으면서 싸우지 못하게 붙잡았다.하지만 오백하의 눈에는 그녀가 용필을 걱정하는 것으로 보였다.그 순간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펄쩍 뛰었다.“남자라면 나랑 겨루자. 지면 알아서
“아씨, 저 새끼가 내 물건을 훔쳤어. 다음에 눈에 띄면 바로 죽여버릴 거야.”목소리에서 상대방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도련님, 어서 오세요.”하윤나의 부모님은 목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반갑게 맞이했다.염구준은 그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방금 용필이 들어올 때 쳐다보지도 않더니 지금은 개처럼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당당한 사람이 되는 게 좋지 않은가?“네.”오백하는 한 글자로 답하고 당연하듯이 주석에 앉아 거만하게 행동했다.그리고 눈에 불을 켜고 용필과 하윤나를 노려보았다.염구준 부부도 봤지만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도련님, 무슨 일로 늦게 오셨어요?”하동철이 차를 따르면서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말도 마세요. 오는 길에 미친놈을 만났는데 내가 윤나한테 주려고 준비한 선물을 도둑맞았어요. 차로 뒤쫓아도 잡지 못했어요.”오백하는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무슨 인간이 그렇게 빨리 달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초상비.’염구준과 용필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챘다.‘의리 있는 사람이네. 앞으로 잘 지내야겠어.’용필 입장에서 초상비가 오백하를 죽이지 않고 그냥 방해한 것만으로도 형제로서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했다.“분명 비싼 물건이겠죠.”하동철의 관심은 언제나 돈이었다.“그렇게 비싸지도 않아요. 2억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에요.”오백하가 허풍을 떨기 시작했다.어쨌든 물건을 찾아오지 못했으니 가격을 20억, 200억을 불러도 누구도 따지지 않을 것이다.“아쉽게 됐네요. 제가 경찰에 신고할까요?”하동철이 말하면서 휴대폰을 꺼냈다.“됐어요. 이따가 가서 다시 살게요.”오백하는 손을 들어 하동철을 제지시켰다.그는 허풍이 들통나지 않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솔직히 하윤나와 연인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귀한 물건을 선물할 리가 없었다.“됐어요. 허풍은 그만 떨고 본론으로 갑시다.”염구준은 귀가 썩을 것 같아서 대화를 끊어버렸다.오늘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될 텐데 체면을 줄 필요도 없었다.
하윤나는 먼저 시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나중에 부모님들에게 말하려고 했다.그런데 부모님들이 눈치를 챘는지 자꾸 방해를 하는 것이다.보다 못한 김연주가 나서서 말렸다.“됐어. 그만 싸워. 이따가 두 사람 다 오니까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결정해.”듣기에 공평한 것 같지만 실은 오백하를 두둔하고 있었다.용필의 상황으로는 경쟁할 가치도 없고 그냥 망신만 주려고 생각한 것이다.똑똑!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염구준 일행이 들어왔다.방금 세 식구가 한 말을 밖에서 다 들은 것이다.용필의 안색이 퍼렇게 질려서 보기 흉했다.“들어오세요.”하동철이 이내 표정을 바꾸고 반갑게 맞이했다.지금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만약 오백하라면 추태를 보여주지 않았나 은근 걱정이 되었다.끼익!문이 열리자 제일 먼저 용필이 들어오면서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아버님, 어머님. 제가 왔습니다.”그를 본 하동철의 웃던 얼굴이 바로 굳어져버졌다.“앉아.”모든 말이 얼굴에 써져 있었다.“오빠, 이쪽으로 와서 앉아.”하윤나는 앞으로 다가가 용필의 팔을 잡아당겨 자기 옆에 앉혔다.두 사람은 깨알이 쏟아질 정도로 다정했다.그 장면을 본 하동철은 혈압이 슬슬 올라왔다.“형님, 안목이 있네요.”염구준이 장난을 치며 손가을과 함께 룸으로 들어왔다.병원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다.그런데 오늘 가까이서 봤더니 하윤나의 외모는 경국지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뻤다.“어머, 손 대표님, 염 선생님이 오실 줄은 몰랐어요. 어서 앉으세요.”하동철은 얼른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대했다.얼굴 표정이 변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적응되지 않았다.“편하게 말씀하세요.”염구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는 아내와 함께 용필의 옆자리에 앉았다.세력과 재부에 눈이 멀어 아부하는 소인배를 용필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하하하.”하동철은 뻘쭘해서 헛웃음을 지었다.돈만 준다면 그를 어떻게 대해도 기꺼이 참을 수 있었다.세 사람이
“지금 윤나 부모님들도 이 금액을 요구하고 있어. 근데 나 돈이 없잖아. 어르신이 오후에 글로리 호텔에서 만나면 답변을 준댔어. 말로는 오백하도 온대.”용필은 워낙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감히 어머니에게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건장한 몸으로 반보천인 고수와 싸울 수 있지만 돈 앞에서 한결 작아졌다.하지만 돈은 확실히 만능인 물건이었다.“간단해. 내가 가서 오백하 놈을 죽여버릴게. 그럼 누구도 방해하지 않아.”초상비가 화끈한 제안을 했다.그는 강호에서 여러 해를 굴러먹어서인지 겁이 없고 수법이 거칠었다.“안 돼. 윤나가 폭력으로 해결하지 말랬어.”용필은 고개를 저으며 입구를 막았다.혹시나 방심한 사이에 초상비가 뛰쳐나갈까 봐 미리 방지한 것이다.보안실 경호원들 중에서 실력이 가장 약한 초상비도 정신지상 실력이니, 평범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염구준이 잠시 중얼거리더니 계속 물었다.“그 외에 다른 조건이 있어요?”용필은 생각하면서 말했다.“그리고 연봉이 높은 직장을 찾으래.”지금 그는 매달 월급 300만으로 청해시에서 수입이 중상 레벨이지만 부잣집 자식들과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일도 아니죠.”염구준이 일어나더니 용필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경고를 줄 필요가 있었다.아니면 앞으로 용필만 힘들게 될 것이다.“무슨 뜻이야?”돈이 없는 용필은 어리둥절했다. “돈이 필요하면 내가 낼게요. 호텔에 나와 가을도 함께 갈게요.”염구준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정말이야?”갑작스러운 행복에 용필은 어쩔 줄 몰랐다.“정말이죠. 거짓이겠어요?”그가 엄숙하게 대답했다.글로리 호텔 입구에 핑크색 포르쉐가 멈추더니 염구준 일행이 내렸다.“손 대표님, 저한테 맡기세요. 안전하게 주차하겠습니다.”입구에 있던 종업원은 거물이 오자 바로 달려왔다.“수고하세요.”손가을은 한마디하면서 팁으로 현금까지 쥐어 주었다.그리고 세 사람은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용필은
“맞아!”“얼마 전에 용필 오빠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었잖아?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오빠를 간호해 준 간호사 윤나 씨랑 정이 들어서 지금 결혼 얘기까지 오간 상태야.”“그런데 문제는 저 오백하라는 사람이 해외에서 돌아온 후 중학교 동창회에서 윤나 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려서 미친 듯이 쫓아다니고 있다는 거야.”손가을은 상황의 전말을 설명했다. 친척의 일이기도 해서 그녀는 유독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그럼 형님과 윤나 씨의 사이는 어떤데?”염구준은 듣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남녀 간의 감정은 억지로 이어질 수 없는 법이었다. 만약 하윤나가 과거의 인연에 흔들려 마음이 변했다면, 그건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아주 좋아. 근데 문제는 오백하가 윤나 씨 부모님께 돈을 줘서 두 분이 둘의 관계를 반대하고 있어.”손가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수작을 부렸네.’염구준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말했다.“시간 나면 형님과 얘기 좀 해봐야겠어.”용필은 그의 가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 해준 사람이라 그도 이번엔 상대방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오백하가 돈을 얼마를 줬대도 상관 없었다. 돈은 어차피 그가 더 많을 테니까 말이다.그 후, 가족들은 맛있는 식사를 마친 뒤 아쿠아리움에 들렀고, 저녁에는 어린이 영화를 관람하며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한편, 손태석과 진숙영이 여행을 떠난 탓에 집안은 조금 썰렁했다.‘역시 사람이 많아야 시끌벅적하구나.’다음 날, 염구준은 딸을 학교에 데려다 준 뒤 손씨 그룹 본사로 향했다.건물 입구에서 경비복을 입은 채 고개를 숙이고 서있는 용필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전투 인형으로 만들어졌다가 염구준에게 구출된 이후로, 그가 이렇게 고민에 빠진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남자는 쉽게 울지 않는 법이었다. 진짜로 슬플 때는 빼고 말이다.용필이 뇌 손상을 입긴 했지만 단지 정상인보다 지력이 낮을 뿐이지, 바보는 아니었다. “왜 그래요? 돈이라도 잃어버렸어요?”염구준은 농담하며 말을 걸었다.“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