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게 윤씨 일가의 현판을 본 뒤 윤구주의 시선은 천천히 윤씨 일가의 대문으로 향했다.그는 이 대문을 기억하고 있었다.당시 어렸을 때 그는 두 돌사자 위에 타는 걸 좋아했다.과거를 떠올린 윤구주의 안색이 점점 서늘해졌다.몇 분간 문을 바라보던 윤구주는 몸을 움직였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윤씨 일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이치대로라면 엄청난 부지면적을 가진 화진 제일 문벌인 윤씨 일가는 사람이 아주 많아야 했다.그러나 안으로 들어간 윤구주는 마당이 텅 비어있는 걸 보았다.예전에는 도우미들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아주 썰렁했다.그러나 윤구주는 이러한 것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오늘 그가 서울로 돌아온 이유는 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해주기 위해서였다.이것은 그가 18년 만에 처음으로 돌아온 것이었다.검은 망토로 얼굴을 가린 윤구주는 할머니가 계시는 방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18년이 흘렀지만 윤씨 일가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윤구주는 익숙하게 가장 뒤쪽에 있는 할머니의 거처에 도착했다.도착하자마자 윤구주는 앳된 목소리가 화원 쪽에서 들리는 걸 발견했다.“할머니, 엄마가 오늘 할머니 90세 생신이라고 했어요. 할머니, 무병장수하세요!”화원 안에서 5, 6살쯤 되는 여자아이가 방금 딴 꽃을 나이 든 노인에게 건넸다.눈 한쪽이 실명된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꽃을 건네받으며 말했다.“고마워, 하율아. 우리 하율이 정말 착하네!”“할머니, 오늘은 할머니 생신인데 왜 케이크를 드시지 않는 거예요? 하율이는 과일 케이크를 제일 좋아해요!”아이가 계속해 말했다.“그래, 그래. 할머니가 잠시 뒤에 하율이를 위해 케이크를 준비해달라고 일러둘게.”노인은 아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네!”“하율아, 넌 놀고 있어. 할머니는 힘들어서 먼저 들어가서 쉴게. 괜찮지?”노인은 나이가 많아서 힘든 것 같았다.“좋아요!”하율은 계속해 그네를 타면서 말했다.노인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뒤 돌아가 쉬려고 했다.나이가 드니 노인은 다리가 잘 움직
18년이 흘렀다.노인은 다시 윤구주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그녀는 거친 손으로 윤구주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그가 자기가 가장 사랑하던 손주가 맞는지 알아보려고 했다.윤구주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를 보았다.할머니는 나이가 들어 흰머리가 가득했다.자애롭던 할머니는 90대 고령이라 풍전등화 상태였다.“할머니, 오늘은 할머니 생신이라서 돌아왔어요!”노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윤구주를 품 안에 안았다.“돌아왔으면 됐어. 돌아왔으면 됐어! 18년이야. 18년 3개월 8일이지. 그동안 잘 지냈니? 힘든 일은 없었어? 밖에서 배를 곯지는 않았어?”노인은 윤구주의 공로나 명성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신경 쓰는 것이라고는 손주가 밖에서 고생하지는 않았냐는 것이다.“할머니, 저 그동안 잘 지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윤구주는 노인의 거친 손을 잡았다.그러나 노인은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바보야, 넌 윤씨 일가를 떠났을 때 겨우 다섯 살이었어. 겨우 다섯 살! 그런데 잘 지냈을 리가 없잖아.”윤구주는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할머니, 제 말은 사실이에요. 보세요, 저 이렇게 컸는걸요!”노인은 혼탁한 오른눈으로 눈앞의 건장한 윤구주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그래. 18년이나 됐는데 그사이 참 많이 자랐구나. 네가 구주라고 밝히지 않았더라면 나는 네가 옆에서 지나가도 널 알아보지 못했을 거야. 자, 할머니랑 같이 안으로 들어가자. 우리 들어가서 얘기를 나누자!”노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윤구주의 손을 잡고 앞에 있는 작은 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집은 크지 않았고 안에는 아이의 장난감이 가득했다.인형도 있고 새총도 있고 유리구슬도 있었다.집 안으로 들어가자 노인은 들떠서 손가락으로 집 안 가득한 장난감을 가리키며 말했다.“구주야, 이것들을 기억하니?”윤구주는 시선을 든 순간 곧바로 알아보았다. 그것들은 전부 그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하던 것들이었다.“네!”윤구주는 고개를
노인의 말을 들은 윤구주가 말했다.“할머니, 오늘은 할머니 생일이잖아요. 그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노인은 윤구주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윤구주는 노인의 곁을 지켰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린아이가 갑자기 문 앞에 나타났다.“할머니, 이 오빠는 누구예요?”문 앞에 서 있는 건 윤하율이었다. 윤하율은 반짝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윤구주를 빤히 바라보았다.윤하율을 본 노인은 서둘러 윤하율의 손을 잡고 말했다.“네 오빠야. 얼른 오빠라고 불러 봐.”“오빠요?”윤하율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면서 다시 윤구주를 보았다.“이 오빠가 바로 할머니가 그동안 계속 기다렸던 구주 오빠예요?”윤하율이 다시 물었다.노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구주 오빠예요? 정말 다행이에요! 구주 오빠, 전 하율이라고 해요!”아이는 낯을 가리지 않는 건지 윤구주를 향해 말했다.“할머니가 그러셨어요. 구주 오빠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오빠라고요! 할머니는 그동안 계속 오빠를 기다렸어요. 그리고 항상 오빠 얘기를 해줬고... 오빠를 그리워했어요... 그리고 가끔은 할머니가 이불 속에 숨어서 몰래 우는 소리도 들었어요... 이것 봐요. 할머니는 너무 울어서 눈 한쪽이 실명되었어요!”윤하율은 그렇게 말하면서 할머니의 실명된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윤하율의 말을 들은 윤구주는 마음이 아파서 할머니의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할머니, 죄송합니다!”윤구주는 평생 살면서 한 번도 무릎 꿇어본 적이 없었다.부모님에게도 꿇어본 적이 없는 그인데 할머니 앞에서만 꿇었다.윤구주가 무릎을 꿇자 노인은 서둘러 윤구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미안해야 할 사람들은 윤씨 일가지. 넌 아무 잘못도 없어. 자, 얼른 일어나.”윤구주는 부축을 받고 일어난 뒤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할머니, 제가 불효하여 그동안 할머니의 곁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저 때문에 많이 힘드셨죠? 하지만 걱정
윤구주가 떠난 뒤 윤씨 일가의 대전.건장한 체구의 신급 강자 노인이 윤신우에게 말했다.“가주님, 조금 전에 누군가 가주님 어머님의 거처에 멋대로 침입했습니다.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강했습니다!”그 말을 들은 윤신우가 다급히 물었다.“어머니는 괜찮아?”“가주님, 어르신은 무사하십니다.”그 말에 윤신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어떤 놈이 이렇게 대담한 것이지? 감히 우리 윤씨 저택에 침입하다니.”윤신우가 매섭게 물었다.“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력이 신급 중후기인 듯했습니다. 심지어 더 강할 수도 있습니다...”건장한 노인이 말했다.“음? 그렇게 강하다고?”“네! 조금 전 막으려고 해보았으나 제게 손을 쓸 기회조차 주지 않고 물러나게 했습니다...”건장한 노인이 말했다.그 말을 듣자 윤신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거의 백 년 가까이 윤씨 일가에 몸담은 신급 강자였기에 윤신우는 그의 실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윤씨 일가는 비록 겉보기에는 몰락하고 있고 사람도 적어 보였지만 사실 화진 제일의 문벌이었던 윤씨 일가에는 숨겨진 12명의 신급 강자가 있었다.그러나 그 12명의 신급 강자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윤씨 일가는 화진 문벌 중 최고라고 불릴 수 없었을 것이다.그런데 어떤 놈이 이렇게 배짱 좋게 공공연히 윤씨 저택에 침입한 걸까?게다가 공격도 하지 않고 윤씨 일가의 신급 강자 한 명을 물러나게 했다.그런 생각이 들자 윤신우는 잠깐 침묵했다가 말을 이어갔다.“알겠으니 이만 나가봐.”“네!”신급 강자인 노인이 나간 뒤 윤신우는 어두워진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윤씨 일가의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 안.노인은 윤구주를 본 뒤로 들뜬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이때 그녀는 오두막 안에 앉아서 윤하율에게 윤구주 어릴 때의 얘기를 해주었다.“하율아, 그거 아니? 이 장난감들은 네 구주 오빠가 어릴 때 좋아했던 것들이야. 구주는 어릴 때 장
“우리 아들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우리 아들이... 돌아왔다고?”윤신우는 중얼거리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감격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시야가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한참 지난 뒤 그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으며 말했다.“역시 우리 윤씨 일가의 후손은 용과 같구나!”...밤이 깊어졌다.서울 외곽 지역의 공동묘지.한 남자가 조용히 한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밤바람이 불어와 남자의 긴 머리를 헝클어뜨렸고 남자는 유령처럼 조용히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어머니, 이 아들이 어머니를 보러 왔습니다.”그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달빛을 빌려 보니 그는 화진 제일의 왕 윤구주였다.18년 전, 다섯 살 때 어머니와 함께 윤씨 일가에서 쫓겨난 뒤로부터 그는 어머니와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윤구주의 어머니는 윤구주를 먹여 살리기 위해 매일 네 가지 일을 했고 1년도 되지 않아서 과로 때문에 크게 앓게 되었다.어린 윤구주를 먹여 살리기 위해 그의 어머니는 아픔을 참으며 계속 일했다.그러다 윤구주가 7살이 되었을 때, 결국 과로로 쓰러졌다.윤구주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은 음력 섣달그믐날이었다.그는 그날을 기억했다. 눈이 펑펑 내리던 그날, 집마다 가족들이 단란하게 모였다.병으로 쓰러진 어머니는 잠시 뒤 일어나서 떡국을 만들어주겠다며 그를 위로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말을 한 뒤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과거를 떠올린 윤구주는 마음속에서 일그러진 증오가 치솟아 올랐다.그 증오는 마치 칼과 같아 공동묘지 전체가 쓸쓸하고 음산해졌다.어두운 밤, 윤구주는 그렇게 조각상처럼 어머니의 무덤 앞에 오랫동안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무덤 앞에 무릎 꿇고 있던 윤구주는 어둠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와요!”곧 어둠 속에서 귀신 같은 남자 한 명이 공동묘지에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윤신우였다.멀지 않은 곳, 오랫동안 무덤 앞에
“당시 저와 어머니를 집안에서 내쫓을 때는 왜 제 아버지라고 하지 않은 거죠? 어머니가 과로로 쓰러졌을 때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감히 제 아버지라고 하는 거죠?”윤구주의 입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어둠 속에 서 있던 윤신우는 변명하지 않고 윤구주의 날 선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그는 그저 묵묵히 그곳에 서 있었다.그는 한참 뒤에야 말했다.“그래. 난 아버지로서 자격이 없고 남편으로서는 더더욱 자격이 없어. 하지만 네 몸에 윤씨 일가의 피가 흐른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네가 나 윤신우의 아들이라는 것도 변하지 않아.”“닥쳐요!”윤구주는 분노에 차서 고함을 질렀다. 그는 아주 빠른 속도로 윤신우의 가슴팍을 공격했다.화진 제일의 문벌 윤씨 일가의 가주이자 30년 전 서울 최강자라고 불렸던 윤신우는 윤구주의 치명적인 일격을 피하지 않았다.쿵!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손바닥이 윤신우의 가슴에 자국을 남겼다.무시무시한 기운이 사방을 뒤흔들었고 주위에 있던 십여 그루의 나무가 전부 부러졌다.그러나 윤신우는 뿌리라도 내린 듯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그의 주위로 바닥이 갈라졌다.새빨간 피가 윤신우의 입가에서 뚝뚝 흘러내렸다.그의 준수한 얼굴에서는 원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괴로운 얼굴로 자신의 가슴에 공격을 날린 눈앞의 윤구주를 바라볼 뿐이었다.“구주야... 날 죽여서 네 마음속 응어리가 풀린다면 난 기꺼이 죽을 것이다. 콜록콜록.”윤신우는 그렇게 말한 뒤 피를 왈칵 토했다.어쩔 수 없었다.그를 공격한 건 화진에서 천하무적이라고 불렸던 윤구주이기 때문이다.그건 신급 강자도 막아내지 못하는 공격인데 윤신우는 여전히 서 있을 수 있었다.피하지도 않고 공격을 받은 윤신우의 모습을 본 윤구주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어둠을 향해 말했다.“죽인다고요? 아뇨! 당신은 제 손에 죽을 자격이 없어요. 전 당신이 평생 미안함 속에서 살길 바라요!”차갑게 말한 뒤 윤구주는 끝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형님은 신급 절정 경지라서 서울의 그 늙은 괴물들도 형님을 다치게 할 수 없는데 대체 어쩌다가 다친 거죠?”윤정석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말했다.“젠장! 석이윤, 얘기해 봐. 대체 어떤 놈이 우리 형님을 다치게 한 거야?”윤창현은 살기등등하게 옆에 있던 신급 강자에게 물었다.석이윤이라고 불린 신급 강자는 서둘러 대답했다.“둘째 가주님, 저도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이라곤 가주님이 예전 부인이 묻히신 서쪽 교외 공동묘지에 갔고 그곳에서 다쳐서 왔다는 것뿐입니다.”“뭐라고? 공동묘지에 갔다 왔다고?”그 말을 들은 윤창현과 윤정석은 더 어리둥절해졌다.서쪽 교외 공동묘지가 윤신우의 원래 부인이 묻힌 곳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일이었다.그러나 그녀는 이미 십여 년 전 죽었다.그런데 윤신우는 왜 오늘 밤 그곳에 간 걸까?“얼른, 얼른 형님을 보러 가자!”말을 마친 뒤 두 형제는 곧바로 정전 안쪽으로 달려갔다.커다란 윤씨 일가의 정전.십여 명의 신급 강자는 양쪽에 꼿꼿이 서 있었다.그들은 윤창현, 윤정석이 들어오자 곧바로 예를 갖췄다.“둘째 가주님, 셋째 가주님을 뵙습니다!”“형님은요?”윤창현이 바로 물었다.“가주님은 지금 내전에서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한 노인이 말했다.윤창현 등 사람들은 그 말을 듣더니 곧바로 내전 쪽으로 걸어갔다.조용한 내전 안.윤창현은 창백한 안색으로 병상 위에 누워있었다.그는 호흡이 아주 약했다.그의 앞에는 빨간색 핏자국이 가득했다.“신우 씨... 신우 씨... 깨어나 봐요! 이러지 말아요!”윤신우의 곁에 있는 중년 여성은 설희윤이었다.그녀는 눈물을 닦으면서 남자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형님!”이때 윤창현과 윤정석이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피를 많이 흘렸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윤신우의 모습을 본 두 형제는 당황했다.“형수님, 형님은 어떻게 된 겁니까?”윤창현은 바로 물었다.설희윤은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깨어난 뒤에 직접 물어보세요.”말을 마친 뒤 설희윤은 눈물을 닦으면서
윤씨 일가의 세 형제 모두 성격이 불같았다.윤신우가 심하게 다친 모습을 본 두 사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윤창현이 사람을 데리고 상대를 죽이러 가려고 할 때, 갑자기 문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다들 멈춰!”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윤창현과 윤정석은 그 말을 듣고 흠칫했다.“어머니!”그들은 고개를 돌렸고 눈 한쪽이 실명된 노인을 보게 되었다. 노인은 어느샌가 내전에 와 있었다.그리고 노인의 곁에는 윤하율이 있었다.“어머니,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노인을 본 윤창현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노인은 윤창현을 차갑게 노려보면서 물었다.“내가 오지 않으면 오늘 윤씨 일가는 대책 없는 너희 둘 때문에 엉망이 됐을 거야!”“어머니, 그 빌어먹을 놈이 형님을 다치게 했는데 어떻게 복수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윤창현이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며 말했다.“누가 신우를 다치게 한 게 서울의 그 괴물들이라고 했어?”노인은 눈을 부릅떴다. 그 모습은 아주 위엄이 넘쳤다.“우리 형님은 신급 절정이에요. 이 세상에 서울의 그 괴물들을 제외하면 누가 우리 형님을 다치게 할 수 있겠어요?”윤창현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틀렸어! 신우를 다치게 한 건 그들이 아니야. 그리고 신우는 이미 10년 전 신급 절정이 되었는데 그 괴물들이 신우를 다치게 할 수 있겠어?”노인의 말을 들은 윤창현과 윤정석은 모두 충격을 받았다.“어머니, 조금 전에 형님이 10년 전 신급 절정이 되었다고 하셨어요? 정말이에요?”윤정석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노인은 기운이 흐트러진 채 병상 위에 누워있는 윤신우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래! 10년 전 신우는 이미 신급 절정이 될 수 있었어. 하지만 신우는 원하지 않았지. 그런데 서울의 그 늙은 괴물들이 무슨 수로 우리 아들을 다치게 해?”90세 고령에 눈 한쪽이 실명되었지만 노인은 카리스마 넘치게 말했다.“그러면 대체 누가 형님을 다치게 한 겁니까?”윤정석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눈 한쪽이 실명된 노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
네 사람은 비석을 지나자마자 환각의 전법에 부딪혔다. 이 전법은 우연히 들어오거나 경고를 무시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결국 서요산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것이었다.의지력으로 환각의 전법을 통과하면 다음 전법이 기다리고 있었다.당연히 네 사람에게 환각의 전법은 통하지 않았다. 윤구주와 임정설은 물론, 백호와 청해도 곤륜에서 강자로 존경받는 존재들이었다.다음은 섭혼 전법이었다.전법에 들어가기 전부터 하늘을 찌를듯한 원한의 기운이 밀려왔다.그 기운을 느낀 임정설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수년간 왕궁에서 비술을 연구해서 알아본 건데. 이곳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거야. 반경 수천 리 이내의 원한의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여있어. 내 치하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그걸 내가 몰랐다니.”그는 깊은 자책에 빠졌다.“국주님, 인간이 있는 곳에는 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근대에 들어 큰 전쟁은 사라졌지만 소규모 충돌은 끊이지 않았죠.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게다가 이곳에 모여진 원한의 기운은 억울한 죽음뿐만 아니라 극형을 받은 흉악범들의 원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죠. 사랑 때문에 미워하고, 미움 때문에 미쳐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윤구주의 말을 듣고 임정설이 한마디 물었다.“구주야, 너는 문아름을 미워하지 않느냐?”문아름의 이름을 들은 윤구주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번뜩였다.“당연히 미워하죠. 저 윤구주는 순수하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간입니다. 사랑은 사랑, 증오는 증오에요. 그녀를 위해 변명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문아름이 저를 배신했으니 저에게 당연히 미워할 권리가 있죠. 하지만 문아름을 사랑한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문아름이 제게 사랑이 무엇인지, 인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으니깐요. 가려는 길이 다르면 미래를 함께할 수 없죠. 저희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었어요. 저희의 만남 자체가 잘못이었지만 문아름이 저를 구주왕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죠. 그리고 제가 문아름을
“저하와 생사를 함께할 수 있다니. 그건 제 영광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전하와 제가 정말로 서요산에서 죽게 되면 청룡이 돌아온다 해도 성수가 한자리 비게 되는 건데 그분을 어떻게 소환하시렵니까?”백호가 의혹이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윤구주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그걸 설명하려면 너를 실험체로 삶고 실험을 진행할 때부터 얘기해야 해. 정확히 말하면 청룡, 현모, 주작의 몸속에는 네 피가 흐르고 있어. 네가 성수의 피를 융합한 첫 번째 수련자야.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너만이 진정한 융합에 성공했지. 네 피를 빌려 그들에게 성수의 정수를 주입했던 거야.”“백호,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다. 네가 이런 괴물 같은 모습이 된 건 전부 내 탓이야. 그러니 나를 원망해도 좋아.”백호는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어떻게 저하를 원망하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저하께서는 제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신 거였잖아요. 제가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로 융합에 성공한 수련자는 제가 아닐건데요? 저하께서도 성수의 피를 다루시지 않았습니까?”그 말을 들은 윤구주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달라. 그건 그냥 성수의 피를 통제하는 것 뿐이야. 진짜 융합했으면 나도 네 꼴이 됐을 거야.”백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됐다. 옛날얘기는 그만하고 얼른 서요산으로 떠날 준비나 해.”며칠 후, 윤구주는 임정설 국주, 청해, 백호와 함께 서요산으로 향했다.비 오는 밤, 연기를 뿜는 수송기가 짙은 구름을 뚫고 산을 향해 돌진했다.비행기가 산에 충돌하기 직전, 수많은 바람의 부적이 나타나 비행기를 강제로 선회시켜 간신히 산기슭에 착륙했다.비행기가 막 착륙하자 비행기 문이 누군가의 주먹 한 방에 박살 났다. 멀미로 비틀거리던 청해가 나오더니 몸을 움츠린 채 구토를 멈추지 못했다. 뒤이어 내린 임정설도 배를 움켜쥐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그들과 달리 윤구주는 멀쩡한 상태로 내려와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백호의 질문에 윤구주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네가 진짜라 믿는다면 그것은 진짜야. 초심을 잃지 않아야 길이 열리는 법이지.”이 말은 백호에게만이 아닌 자신에게도 하는 것이었다.서울의 위기는 해결되었지만 윤구주는 이 모든 것이 문씨 가문의 그 여자의 계획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국주님, 이제 서요산으로 갈 때입니다.”그가 임정설을 바라보며 말했다.“서요산을 지키려는 거니? 마인이 나타날 거란 말이야?”임정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요탑 아래에는 천년 동안 갇힌 수많은 마인들이 있었다.“맞아요. 서요산의 지맥 영기가 거의 고갈되었습니다. 만약 진요탑이 무너지면 큰 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윤구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요탑이 붕괴하여 마인들이 쏟아져 나오면 윤구주라도 그들을 처리하기 힘들 것이다.“좋아. 내가 같이 가주마. 이 늦은 재앙은 언젠가 닥칠 운명이니 우리가 짊어져야 해. 지금의 희생은 후손들을 위한 것이야.”임정설의 눈빛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화진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그는 언제든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윤구주는 현모에게 연락을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뭐라고요? 저하께서 서요산으로 가신다고요? 그렇다면 저희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현모와 주작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특히 주작은 서요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천년 동안 축적된 재앙을 겨우 수십 년 수련한 윤구주 혼자서 떠맡기엔 버거웠다.“괜찮아. 너희에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어. 내가 서요산에 있는 동안 너희는 국경을 지켜줘. 청룡의 행방은 잠시 접어두고 내가 시킨 일에 몰두해. 난 문아름을 그 여자를 잘 알고 있어. 문아름은 일이 내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추가로 부탁이 있는데 만약 내가 전사한다면 그때쯤 청룡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청룡을 불러내는 게 복인지 화인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이 오면 너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야. 문아름이 결정을 내리겠지. 그러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유언을 남기는 듯한
‘헐, 대박.’진동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윤구주를 신처럼 떠받들었다.‘이게 진짜 신이지. 곤륜에 있는 그 자식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었어. 허위적이기 그지없지.’오늘 밤 그는 여러 강자의 싸움을 직접 목격하고 강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문경우도 아주 강했지만 윤구주가 나타나자 문경우는 도망조차 제대로 치지 못하고 영혼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윤구주의 술법에 의해 영혼도 남기지 못하고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승리는 결국 화진에게 돌아갔다. 화진을 무너뜨리려는 역적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윤구주는 자신의 힘으로 화진의 막강한 실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문경우를 처단한 윤구주는 즉시 임정설의 치료에 돌입했다.“짐은 별일 없으니 먼저 왕숙과 네 친구를 치료해줘라.”임정설이 임성진과 청해를 가리키며 말했다.청해는 이미 정신을 차렸다. 비록 상처가 심해 반쯤 죽은 상태였지만 화진 국주에게 인정받은 첫 순간이었다. 묘한 영예감이 그의 마음을 꽉 채우며 날아갈 듯 기뻤다.“이 두 사람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오히려 국주님이 더 위험하십니다. 경지를 무리하게 넘어서셨고 섭혼번 아래서 정기를 너무 많이 잃으셨습니다. 지금 국주님의 기운이 안정하지 않으니 제 도움이 없다면 폭주 할수도 있어요. 그때가 되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윤구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임정설은 결국 윤구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윤구주의 치료를 거부한 이유는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황자급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예전보다 죽음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있었다. 윤구주는 임정설에게 풀지 못한 원한이 있음을 눈치채고 치료를 해주며 화진으로 압박했다.“국주님께서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화진에게는 국주님이 필요합니다. 국주님은 30년 동안 화진을 지켜오셨잖아요. 지금 승부가 달린 이 중요한 시점에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임정설
서울 삼천만 명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고 섭혼번이 작동되면 화진의 국운은 영원히 봉인될 것이다.“우리 문씨 가문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쇠퇴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화진의 주인이다. 감히 누가 복종하지 않겠느냐?”문경우는 하늘을 향해 큰소리로 웃어댔다.이때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며 공간이 갈라지더니 한 남자가 시체 한 구를 밟고 서울에 강림했다.“웃기고 있네. 문씨 가문이 화진의 주인이 되겠다고? 문씨 가문 따위가 어디 감히 그런 꿈을 꾸는 것이냐? 나 윤구주가 용납하지 않겠다.”우르릉.우렁찬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지자 문경우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윤구주의 기운이 섭혼번 아래에 나타나며 음의 기운을 찢어버렸다.거대한 섭혼번이 관통당하자 전법이 무너지고 문경우는 피를 토해냈다.고개를 돌리니 윤구주가 허공에 우뚝 서 있었고 그의 발아래에는 아사 신전의 신주 오딘의 시체가 보라색 번개에 휩싸여 있었다.“이게 무슨? 네가 신왕 오딘을 죽였다고?”문경우는 오딘의 시체를 바라보며 벌벌 떨었다.“이 개 같은 자들이 여러 번 화진을 범했으니 죽이는 게 당연하지. 나는 오딘뿐만 아니라 아사 신족 전체를 멸했다. 이제 곤륜에 아사 신족은 존재하지 않는다.”윤구주가 공중에 우뚝 서서 음양의 기를 손아귀에 감아쥐었다. 그의 머리 위 갈라진 공간 너머로 아사 신전의 폐허가 보였다. 수만 신령이 죽어 아사 신족이 멸족한다는 종말이 예언이 현실이 된 것이다.문경우의 눈에 비친 윤구주는 무적의 화신이었다. 그는 윤구주와 싸울 용기도 내지 못하고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너희들이 내가 없을 틈을 타 화진의 기운을 봉인하려 했다고? 문씨 가문은 정말 개수작만 부리는군. 예전에는 나를 죽이려 온갖 더러운 수작을 다 부렸잖아. 내가 없는 틈만 노리는 걸 보니 이젠 내가 무서웠나 보지?”“팔기지, 술자결.”윤구주가 손짓하자 삼천만 생령이 국운 속으로 모여들었다. 백성들은 새 국운에 각자의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냈고 모두의 영혼이 육체로 돌아가며 위기가 해소되었다.“팔기지, 어
태양으로 변한 그 부적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독한 태양 빛이 대지를 지지며 수많은 건물을 녹여버렸고 그 안에 있던 평민들도 산 채로 타죽고 말았다.“그만해. 화진의 백성들을 건드리지 마라!”임정설이 분노에 차 외쳤다.“너와 나는 모두 화진의 절정 수련자인데 어찌 무고한 자들을 끌어들이느냐?”“하하! 무고하다니? 임정설, 현실을 직시하지. 이 하등한 것들은 개미나 다름없어. 한 무리를 죽여도 금방 다시 번식할 테니. 게다가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삼천만 백성의 목숨으로 화진의 새 국운을 봉인하는 거라네. 우리 문씨 가문이 얻지 못하는 것은 부숴버려도 남에게 주지 않을 거야.”문경우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그는 윤구주가 문씨 가문의 뜻을 거역하는 것에 화가 났다.만약 윤구주가 그들에게 순종했다면 지금쯤 화진의 주인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천추만대가 지나도 윤구주는 여전히 화진 최고의 명군으로 남았을 것이다.“저 빌어먹을 윤구주. 역사는 승자가 쓴다는 걸 모르나? 역사를 조작한 왕조가 그렇게나 많은데 유독 그놈만 고집을 부리잖아. 화진의 재난은 모두 윤구주 때문이야. 명군이 되길 거부한다면 영원한 역적으로 만들 거야. 윤구주는 역사의 수치주에 못 박혀 천년만년을 욕먹을 것이다.”“닥치거라! 구주는 우리 화진의 영웅이다. 너 같은 쓰레기가 어찌 감히 구주를 함부로 논하는 것이냐?”그의 말에 단단히 열 받은 임정설은 양혼을 불살라 목숨을 걸려 했다. 그러나 문경우가 이미 임정설의 기를 봉쇄하고 제삼의 전법으로 그의 영혼까지 잠가버렸다.“임정설, 내 앞에서 자살조차 못 하는 주제에 어디서 목숨을 걸겠다고 떠드는 건가?”문경우는 기고만장했다. 임정설이 황자가 되면 뭐하나? 어차피 문씨 가문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데.“오늘이 바로 화진 황제의 멸망일이라네. 섭섭해하지 말게. 윤구주도 곧 자네 뒤를 따를 거니까. 하하!”그가 양손을 내리자 백 미터 크기의 사악한 검은 기발이 구름을 뚫고 서울 상공에 나타났다.“이, 이것은 섭혼번이군!”그 거대
말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쓸모없는 대화는 필요 없었다.임정설은 황제의 의지를 칼로 삼았다. 황자의 기세가 모여 금빛 칼날을 형성하더니 국운을 상징하는 그 칼로 문경우를 향해 내리쳤다.우르르.음과 양이 맞부딪치며 터져 나온 충격파가 반경 수 킬로미터를 휩쓸었다. 사령부 빌딩과 인근 건물들의 유리가 모조리 산산조각이 났다.두 사람은 빌딩 꼭대기에서 결투를 시작했다. 칼 빛이 번뜩이며 천지의 영기를 뒤흔들었고 광풍과 폭우가 몰아쳤다. 산해가 울부짖으며 서울은 보라색 번개와 금빛 불길에 휩싸였다.그들은 각각 화진 최강의 무도를 대표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정의와 사악의 대결이 아니라 임씨 가문과 문씨 가문의 결전이었다.서울 상공에서는 용의 형상이 구름 사이를 휘저으며 흉수와 피 묻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이게 바로 황자의 힘인가. 정말 굉장하군.”진동왕마저 넋을 잃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이때 다른 도시의 지원병들이 서울에 도착해 진동왕과 연락을 취했고 이 소식을 해외에 있는 현모와 주작에게 즉시 전했다.“국주께서 문경우와 결전을 벌이고 계신다고?”“국주께서 황자급 경지에 오르셨다니.”이는 분명히 좋은 소식이었다. 비록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었지만 윤구주와 임정설의 관계는 남달랐다. 임정설은 윤구주의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너무 기뻐하지 마라. 저 문경우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곤륜에서 오랫동안 잠적하며 수많은 신전의 공법을 익혔어. 저놈이 서울로 온 목적은 바로 임정설을 죽이기 위함일 것이야.”옆에 있던 황보웅이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주작과 현모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직 화진이 무사하고 임정설이 문경우를 물리치길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한창 싸우고 있던 두 강자는 공중에서 다시 한번 맞붙었다. 두 사람의 손짓 하나에 산이 뒤집히고 천지가 진동했으며 그들의 기세는 수백 리 밖까지 영향을 미쳤다.임정설은 기세를 최고조로 끌어올려 거침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임정설은 문경우가 극 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전법이 발동되면 서울 수천만 사람들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야. 비록 이길 자신은 없지만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화진의 백성을 위해 싸우겠다. 구주군과 금위군의 여러 장수들은 듣거라. 짐이 전사하면 너희들이 나라를 지킬 책임을 지고 계속해서 적들을 섬멸하라.”임정설은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나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홀로 서울 사령부로 날아갔다.서울 사령부는 진동왕과 수비영이 도착하기 훨씬 전에 함락된 상태였다. 주둔지는 죽음의 적막에 휩싸여 있었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말라붙은 백골들이 널브러진 참혹한 장면뿐이었다.당시 강적의 침입을 받은 주둔지의 병사들은 한 명도 물러서지 않고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적들과 맞서 싸웠을 것이다.이 생각에 임정설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우리 화진의 자랑이다. 저 요망한 것들이 화진을 어지럽힌 지 얼마나 되었느냐? 이 빚을 짐이 갚아 내지 못하더라도 화진 자손들이 반드시 값나낼 것이다.”그는 절대 화진의 혼란에 맞선 마지막 황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선인이 걸어온 길을 밟으며 그의 발걸음은 더욱 확고해졌다.이 순간 황운이 임정설의 몸에 서리더니 새로운 국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순간부터 그는 특정된 누군가의 왕이 아닌 천하 만민이 우러러보는 황제가 되어 있었다.황도가 더해지자 임정설의 기세는 한층 더 강해졌다. 그는 사령부 빌딩 최상층에서 서울을 어지럽힌 장본인을 마주했다.검은 도포를 걸친 그 자는 사악한 부적으로 몸을 감싼 채 요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바로 그가 전법으로 서울을 뒤덮고 있었다.“참으로 예상치 못했어. 화진에 또 한 명의 황자가 나타나다니. 윤구주는 정말 신기하다니까. 자신의 기운으로 국운을 바꾸고 자네의 운명까지 바꿔놓았군. 하지만 내가 충고 하나 해주지. 임정설 자네가 황자가 된 이상 사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야. 넌 사흘 안에 목숨을 거둘 것이란 말이지.”검은 도포를 입은 사람은 임정설이 죽음을 각오하고 온 것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