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에 있는 화정석은 자갈색을 띠고 있어 일반 유리구슬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강한 뜨거운 에너지를 품고 있지만 일반인이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유리 돌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이 작은 강성에 이런 보물이 있을 줄이야!”윤구주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손안의 화정석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이 물건은 제기사에게 있어서 아주 귀한 재료였다.이 재료로 고급 법기들을 제련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윤구주는 법기보다 여자친구 소채은을 위해 호신품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다.“그래, 바로 이거야!”“호신용 목걸이를 만들어 채은이 목에 걸어주면 기본적인 상해는 막을 수 있을 거야!”여기까지 생각한 윤구주의 눈이 더 반짝였고 바로 제련을 시작했다.눈앞의 화정석은 주먹만 한 크기였고 겉은 평범한 수정석이지만 속에는 진정한 화염 정혼이 담겨 있었다. 호신 법기를 만들려면 반드시 가장 순도가 높게 제련해야 했다.동시에 부적 도장을 새겨야 효과가 있었다!화정석을 훑어보더니 윤구주는 오른손으로 화정석을 공중으로 던졌다.곧이어 윤구주는 손으로 화정석을 가리켰다.순간 금빛 현기가 화정석에 들어갔다. 현기를 먹은 화정석은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뜨거운 열기가 마치 불바다처럼 화정석의 사방팔방에서 퍼져나갔다.뒷산뿐만 아니라 용인 빌리지 전체로 퍼졌다.뜰 안.백경재는 멀리서 뜨거운 열기가 엄습해 온몸이 불에 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저하께서 제련하시고 있나? 너무 뜨거워.”그는 말하면서 얼굴에 흐르는 뜨거운 땀을 닦았다.바로 그때, 한 여자애가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불이야! 불이야! 어르신, 뒷산에 불이 난 것 같은데 빨리 가보세요!”뛰쳐나온 어린아이는 바로 두씨 가문의 딸이었다.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며 겁을 먹고 뛰어나와 백경재를 보면서 말했다.백경재는 이 나쁜 계집애를 좋아하지 않았다.두나희는 백경재가 자신을 보며 시큰둥한 표정을 짓자 참지 못하고 그의 팔을 낚아채며 말했다.“어르신, 귀먹었어요? 뒷산에 불이 났다
용인 빌리지 전체가 하루 동안 뜨겁게 타올랐다.산에 있던 많은 백년 된 고목들이 바로 말라 죽었다.그리고 가장 재수 없는 사람은 백경재와 두씨 가문의 두나희였다.두 사람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을 뿐만 아니라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힐 뻔했으니 찜질방에 있는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너무 더워. 더워 죽을 것 같아!”“악, 미치겠네!”두나희는 비명을 지르며 산 아래로 달려갔다.백경재 역시 뜨거운 열기에 피부가 터질 것 같았고 땀 범벅이 된 채로 뒷산을 쳐다보았다.“신이시여! 저하께서 계속 제련하시다가 산 전체가 녹아내릴 것 같네요!”뒷산!마치 화산이 폭발한 듯한 폭염이 윤구주의 앞에 전해졌다.윤구주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고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었다.주위에는 온통 화염 같은 불꽃이 감돌고 있었다.그의 앞에서 강렬한 화염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 것이 바로 그 화정석이었다.다만 주먹만 하던 화정석은 하루 동안의 제련을 거쳐 이미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로 변했고 자갈색이었던 표면까지 완전히 화염 홍색으로 변해 윤구주의 앞에 떠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윤구주가 두 눈을 번쩍 떴다.두 줄기 찬란한 금빛이 그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왔다.“돌아와!”그가 손을 들자 공중에 떠 있던 화정석이 ‘휙’하고 윤구주의 손바닥으로 돌아갔다.여전히 뜨거운 에너지를 발산하는 화정석을 바라보며 윤구주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이제 거의 다 왔어.”이어 윤구주는 화정석 위에 부적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복잡한 부적들이 화정석에 떨어지면서 원래 반짝이던 화정석 안에 이상한 무늬가 나타나서 보기가 아주 이상했다.순간,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윤구주가 화정석을 완전히 제련하니 마침내 주위의 온도가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다.“기온이 내려갔어. 저하가 제련을 끝내셨나?”개울물에 앉아 있던 백경재는 갑자기 두 눈을 깜박이며 뒷산 쪽을 바라보았다.“하하, 이미 끝내셨나 보네!”주변 온도가 점점 낮아지고 이윽고 정상 온도와 비슷해진 것을 느낀 백경재
“쓸데없는 소리. 당연히 작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채은이에게 호신용 펜던트를 만들어주겠어?”윤구주가 백경재를 향해 눈을 흘겼고 백경재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화정석을 바라보았다.엄지손가락만 한 화정석의 안쪽에는 여러 가지 신기한 무늬가 있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평범했다.윤구주가 이 호신용 펜던트를 들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졌더라면 백경재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저하, 이게 진짜 사람을 지켜줄 수 있는 겁니까?”백경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안 믿기나?”“아뇨, 아뇨. 제가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전 단지 궁금한 것뿐입니다. 전 평생토록 이렇게 생긴 호신용 펜던트는 처음 보거든요!”백경재가 말했다.윤구주는 당연히 백경재의 말뜻을 이해했다백경재의 불신에 찬 눈빛을 본 윤구주는 덤덤히 웃었다.“믿기지 않는다면 한 번 시험해 보든지!”“시험이요? 어떻게 시험해 본다는 말씀이죠?”백경재가 물었다.“전력을 다해 이걸 공격해 봐!”윤구주가 손가락으로 화정석 펜던트를 가리켰다.“네?”“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백경재는 윤구주가 본인더러 전력을 다해서 펜던트를 공격하라고 하자 황급히 손을 저었다.현재 그는 귀선 초경에 다다랐기에 수법 중에서 하류 고수에 속했다. 만약 그가 실수로 윤구주가 힘들게 만든 펜던트를 망가뜨린다면 벽에 머리를 들이받고 죽는 편이 나았다.“아니, 걱정하지 마. 넌 그냥 전력을 다해 공격하면 돼!”윤구주가 펜던트를 들었다.“저하, 정말입니까? 제가 혹시라도 힘 조절을 잘못해서 이걸 부수면 어찌합니까?”백경재가 물었다.“걱정하지 마. 네게 그럴 실력이 있다면 말이야.”윤구주가 대답했다.백경재는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윤구주가 높이 쳐든 펜던트를 보았다. 윤구주의 진지한 모습에 백경재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말을 마친 뒤 백경재는 빠르게 공격을 발동했다.그의 몸에서 순식간에 짙은 음기
“전 안 믿습니다!”백경재는 다시 한번 두 손으로 인계를 맺었다. 그의 몸에서 음기가 넘실대며 뿜어져 나왔고 주위에서는 광풍이 몰아쳤으며 하늘조차 어두워졌다.흑흑하는 귀신의 울음소리가 백경재의 주변에서 들려왔다.그 순간 귀신 하나가 백경재의 뒤에 나타났다.“백귀야행, 가거라!”외침과 함께 백경재는 모든 내공을 시전했다. 그 순간 수십 개의 귀신들이 윤구주의 펜던트를 향해 덤벼들었다.백경재는 이번에 최선을 다했다.그는 내공을 수행하는 자신이 겨우 펜던트 하나 상대하지 못한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소문이라도 난다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무수히 많은 귀신이 윤구주의 펜던트로 달려들었다.그러나 더욱 무시무시한 상황이 벌어졌다.백경재의 백귀야행이 펜던트에 가까워지는 순간, 작은 펜던트는 마치 위협을 감지한 것처럼 굉음과 함께 주변으로 성스러운 흰 빛을 맹렬히 발산했다.백경재의 귀신들이 접근하자마자 펜던트는 손쉽게 그것들을 전부 물리쳤다.‘어?’그 광경에 백경재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그리고 더욱더 뜻밖이었던 것은, 흰 빛이 귀신들을 물리친 뒤에 전광석화와도 같은 속도로 백경재를 향해 덮쳐들었다는 점이다.“망할!”흰색 빛이 자신을 향해 돌진하자 백경재는 놀란 듯 소리를 지르면서 황급히 인계를 맺어 방어했다.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펑 소리와 함께 흰 빛이 그를 덮쳐드는 순간, 불쌍한 노인은 충격을 받고 4, 5미터 정도 날아간 뒤 바닥에 철퍼덕 엎어지더니 앓는 소리를 냈다.“이제 어때? 승복할 수 있겠어?”백경재가 앓는 소리를 내는 와중에 윤구주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충격을 받아 온몸의 관절이 쿡쿡 쑤셨던 백경재는 서둘러 바닥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승복합니다! 정말 완벽히 승복합니다!”“하하!”윤구주가 크게 웃었다.“저하, 이 펜던트는 대체 어떻게 만드신 겁니까? 왜 이렇게 강합니까?”백경재는 아픈 허리를 주무르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윤구주가 들고 있는 펜던트를 바라보았다.“이 보물은 보기 드문 화
“아빠, 엄마. 이렇게 좋은 날씨에 왜 외출하지 않으셨어요?”예전이었다면 그녀의 부모님은 일찌감치 외출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채은은 이런 상황이 의외였다.“외출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걸 어떡해!”소청하가 중얼거렸다.“네? 왜요?”소채은은 이해할 수 없었다.“왜긴? 요즘 해외 조직이 우리 강성에 잠입했는데 정부 쪽에서 도시를 봉쇄해서 외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어.”“뭐라고요?”“해외 조직이 우리 강성에 잠입했다고요?”소채은은 그 말을 듣자 안색이 흐려졌다.“그래!”소채은은 문득 이틀 전의 암살 사건을 떠올렸다.그녀는 윤구주가 판인국을 얘기했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설마 그 사람들 때문인 건가?”소채은은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분인국의 사람들이 강성에 잠입해서 왜 윤구주를 죽이려고 했지?”소채은은 아무리 고민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윤구주에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똑똑똑!똑똑똑!이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소채은을 포함한 마당에 있던 사람들 모두 흠칫했다. “누구지?”“이미 성을 봉쇄했을 텐데 왜 누군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거지?”소청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문을 열게요!”소채은은 윤구주가 자신을 찾아온 거라고 생각해 잔뜩 신이 난 채로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문이 끼익 소리를 내면서 열리자 잘생긴 얼굴에 건장한 몸을 가진 남자가 선물을 양손 가득 들고 있는 게 보였다.“누구시죠...?”갑자기 나타난 낯선 남자를 보자 소채은은 살짝 놀랐다.“바보 같긴, 네 사촌 오빠도 알아보지 못하는 거야?”이때 문 앞에 선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어?’“혹시... 소룡 오빠?”소채은이 예쁜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눈앞의 오소룡에게 물었다.“당연하지! 못 본 지 7, 8년쯤 됐는데 그사이 날 잊은 거야? 정말 슬프네.”오소룡이 웃으며 말했다.“아하하하하, 정말 소룡 오빠네요!”“미안해요, 미안
소채은은 오소룡을 열정적으로 응대했지만 소채은의 부모님은 달랐다.오소룡이 오자 그들은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 표정이 냉담했다.상황을 모르는 소채은은 차가운 부모님의 태도에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아빠, 엄마. 무슨 상항이에요? 제 사촌오빠가 왔는데 왜 인사도 하지 않는 거예요?”소청하는 코웃음치며 말했다.“인사는 무슨!”차갑게 그 한마디를 뱉은 뒤 소청하는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천희수는 그나마 나은 편으로 오소룡에게 건성으로 인사를 건넸다.“소룡이 왔니? 여기서 며칠 지내다 가지 그러니? 채은이랑도 좀 놀고 좋잖아. 난 밥하러 가 볼게.”말을 마친 뒤 천희수도 돌아섰다.부모님의 태도에 소채은은 난처해졌다.“오빠, 신경쓰지 마요. 아빠랑 엄마 전에도 오빠 얘기를 계속하셨어요.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오빠를 모른 척하네요.”오소룡은 당연히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내 잘못이니까 이모부랑 이모는 아무 잘못 없어.”“참, 채은아. 우리 오래 못 봤잖아.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야!”오소룡은 말하면서 귀한 황화리목 상자를 꺼냈다.“와!”“이건 뭐예요?”오소룡이 갑자기 선물을 건네자 소채은은 들뜬 얼굴로 말했다.“이건 재작년에 내가 북쪽에 임무 수행하러 갔을 때 한 불가 스님이 주신 거야.”오소룡은 말하면서 황화리목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밝은색의 구슬이 들어 있었다.“이건 뭐예요?”소채은은 기이한 광택이 나는 구슬을 바라보면서 얼른 물었다.“이 구슬은 구안천주라고 하는데 아주 귀한 불가의 소장품이야.”오소룡은 말하면서 그 구슬을 소채은에게 건넸다.“구안천주요?”“알아요, 알아요! 몇 년 전에 박물관에 갔을 때 이걸 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 박물관에서는 육안천주를 소장하고 있었어요.”소채은은 흥분해서 말했다.오소룡은 웃었다.“맞아! 이 천주는 숫자가 클수록 더 귀해! 구안천주 같은 경우에는 이 세상에 얼마 없을 거야.”“세상에! 그렇다면 엄청 비싸겠죠?”소채은이 놀라며 말했다.
소청하가 기쁘게 귀중한 구안천주를 들고 있을 때, 윤구주가 백경재를 데리고 함께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거리에서 윤구주가 말했다.“성 전체에 계엄령이 내려진 거야?”“네, 저하!”“정부에서 봉쇄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백경재가 대답했다.그 말에 윤구주의 머릿속에 강성에 잠입했던 판인국 살수가 떠올랐다.상황을 보아하니 아마 민규현 쪽에서 내린 명령 같았다.그가 아니라면 도시 전체에 계엄령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민규현 쪽의 결과는 어떠할까?윤구주는 알 수 없었다.휴대전화를 꺼낸 윤구주는 지금 가고 있다고 소채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거실에서 오소룡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소채은은 윤구주가 보낸 메시지를 보고 기뻐했다.“오빠, 내 남자 친구 이따가 온대요. 내가 소개해 줄게요!”오소룡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전에 그 사람이야?”“네!”오소룡은 침묵했다.그는 아직 윤구주의 신분을 몰랐다.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민규현 같은 미친 인간도 윤구주 앞에서는 고분고분했다는 것이다.그런데 윤구주는 대체 정체가 뭘까?오소룡은 알지 못했다.그리고 민규현이 얘기해줄 리도 만무했다.그러나 윤구주를 떠올리니 오소룡은 왠지 불안했다.“채은아, 누가 온다고?”귀가 밝은 소청하가 그 소리를 들었다.“구주가 절 보러 온대요.”소채은이 솔직하게 말했다.“뭐라고?”“또 그 빌어먹을 윤구주야?”윤구주라는 말에 소청하는 화가 울컥 치밀어올랐다.그리고 민규현이 저번에 대놓고 그를 죽일 뻔한 걸 떠올리자 소청하는 더욱더 분통이 터졌다.“구주는 그냥 절 보러 오는 거예요. 아빠, 뭘 그렇게 흥분해요?”소채은은 아빠의 태도가 맞뜩지 않았다.“난 걔 싫다! 그것도 몹시 싫어!”“소룡아, 시간 있으면 이 바보 같은 채은이 좀 설득해 줘. 그런 별 볼 일 없는 놈이랑 절대 만나지 말라고 타일러!”소청하가 오소룡에게 말했다.오소룡은 속으로 한탄했다.‘세상에,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어요? 저번에
소채은이 소개를 마치자마자 오소룡이 빠르게 걸어왔다.그는 비록 윤구주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매번 윤구주를 마주할 때마다 엄청난 압박을 느꼈다.그것은 지휘사의 최고 권력자를 마주했을 때도 느끼지 못한 기분이었다.“안녕하세요, 전 오소룡이라고 합니다.”오소룡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윤구주에게서 느껴지는 압박을 견디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윤구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안녕하세요, 전 윤구주라고 합니다.”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오소룡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어쩐지 그 이름에서 어떠한 마력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두 개의 큰 손이 맞닿았다. 오소룡은 윤구주의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윤구주가 오소룡과 악수를 나누고 있을 때 소청하가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화가 난 얼굴로 윤구주를 멀리서 노려보고 있었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혐오는 단번에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뚜렷했다.그러나 윤구주는 소청하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윤구주의 눈에는 오로지 소채은뿐이었으니 말이다.“채은아, 내가 오늘 널 찾아온 이유는 너에게 주고 싶은 게 있어서야!”윤구주가 말했다.“뭐? 나한테 줄 게 있다고? 구주야,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소채은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당연하지. 우리 만난 지도 꽤 됐는데 그동안 네게 진짜 선물다운 선물은 해준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너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어!”그 말을 들은 소채은은 더욱 기뻤다.“무슨 선물인데? 얼른 보여줘!”소채은이 들뜬 얼굴로 손을 뻗었다.옆에 있던 소청하와 오소룡은 윤구주가 소채은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하자 저도 모르게 윤구주를 바라보았다.그들은 윤구주가 소채은에게 대체 무엇을 선물로 주려는 건지 궁금했다.윤구주는 품속으로 손을 뻗어 화정석으로 만든 펜던트를 꺼냈다.작은 화정석은 마치 유리구슬 같아서 아주 평범해 보였다.그러나 윤구주는 그 속에 81개의 부적 문양을 새겨 넣었고 그것은 현재 화정석 안에서 감돌고
“너도 억울해할 필요 없어. 네가 화진을 위해 공을 세운 건 사실이지만 그건 전적으로 구주왕에 대한 충성심 위에 쌓인 것일 뿐이야. 앞으로 네가 성장하면 윤구주도 널 통제하지 못할 테니 그 전에 널 제거하려 할 거다.”말이 끝나자 청현은 순식간에 수천 미터를 날아 수비영으로 다시 뛰어들었다.삼척청봉이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그 검 끝은 백호를 정확히 겨눴다.날카로운 검의 울림은 수 킬로미터 안의 모든 이들의 고막을 찢을 듯 진동하며 어지러움을 유발했다. “지껄이지 마. 죽이려면 날 죽여. 내 형제들을 어떻게 죽였지? 그리고 여긴 어딘 줄 아나? 이곳은 화진 서울이야. 너 같은 쓰레기가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백호의 눈빛은 살기로 가득했고 상공엔 살기가 짙게 뭉쳐 수신의 형상이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그 위압감은 실로 섬뜩할 정도였다.솔직히 이런 백호의 모습은 정말 마인으로 오해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그는 윤구주에 대한 충성은 변함없었지만 그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윤구주만이 아니었다.구주의 전우와 화진의 백성들 그 모든 이들이 그가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그의 행보는 그를 점점 인간 요귀로 만들어가고 있었다.“그래? 지금은 네가 그들을 인정하고 있어도 언젠가 네가 마인으로 타락하게 된다면 그때는 네 의지대로 되지 않을 거야. 난 간다. 미리 경고했으니 후회하지 마. 내게 자비란 없다.”슈욱!청현은 한 자루 검과 함께 어둠을 가르며 잔상처럼 백호를 향해 돌진했다.한 줄기 칼날의 섬광이 나타나며 수천 개의 검기가 일제히 백호에게 쏟아졌다.쾅! 쾅! 쾅!각 칼날 하나하나가 구오지존 초입의 수련자를 가볍게 썰어버릴 위력이었지만 백호의 몸엔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대부분의 검기는 튕겨 나갔고 일부는 살을 파고들었지만 뼈에 닿으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휙!강풍이 맹렬히 불어치는 가운데 청현은 백호의 천령개를 향해 칼을 날카롭게 휘둘렀다.슉!백호는 머리를 살짝 비켜 피했지만 칼은 그의 어깨를 정확히 내리꽂
화진의 외곽에서 청룡의 흔적을 추적하던 빙신전 전주는 갑자기 신경을 곤두세우며 말했다.“늙은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뭔가 감지된 거야?”현모와 주작은 즉시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몇 번을 말해. 난 황보웅이라고.”빙신전 전주가 차갑게 대답했다.“헛소리 작작 해. 널 신발이라 안 부른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 청룡은 찾았어?”성질 더러운 주작은 그에게 전혀 봐주는 법이 없었다.“아니. 백호한테 걸어둔 천술이 강제로 해제됐어.”황보웅이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뭐라고?”현모와 주작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서울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현모와 주작은 즉시 위성 전화로 서울에 연락을 시도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근처 도시에 연락한 결과 서울에 이상 상황이 발생한 것은 맞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고 했다.그들은 이미 서울로 인원을 파견했다고 전했다.“젠장! 진동왕 그 늙은 놈 처음부터 믿지 않았어. 청해는 더 말할 것도 없고!”주작은 크게 분노하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현모는 차분하게 말하며 주작을 진정시켰다.황보웅은 무관심하게 말했다.“진동왕 임성진이야 고작 구오 경지에 불과해서 그가 뭘 하든 별 소용없어. 청해는... 그놈은 이제 더 이상 반역하지 않을 거야. 곤륜 구역은 배신자를 용납하지 않거든. 구주왕은 더 말할 것도 없고.”현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웅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말도 소용이 없었다. 설령 서울에 큰 위기가 닥쳤다 해도 이곳에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걱정하지 마. 국주도 서울에 있고 왕이 말했듯이 국주가 이제 최고급 신급에 올랐으니 진형만 유지하고 주변 도시에 원군을 요청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야.”현모는 힘차게 말했다. 이어서 두 사람에게 청룡 추적에 전념할 것을 지시했다.황보웅은 서울의 사상자 수에는 무관심했고 윤구주만 무사하면 대국에 지장이 없다고 여겼다.그리하여 세 사람은 다시 깊은 산과 밀림으로 들어가서 청룡을 추적했다.한
청해는 모든 일을 마무리한 후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죽음을 기다렸다.청의 검객은 그의 곁을 무심히 지나가며 담담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네가 곤륜 구역의 사술사긴 해도 화진 백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건 충성이라 할 만하다. 윤국주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켰군. 내가 굳이 너를 죽일 필요는 없어. 정리할 게 있다면 정리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해라.”청해의 마지막 충성을 보고 청의 검객은 그를 살려두었다.그리고 얼음 진법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청해가 온 힘을 다해 짜놓은 얼음 결계는 한 번에 산산조각 나버렸다.“이 미친놈. 차이가 너무 크잖아. 고급 신급뿐인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강력할 수 있지?”청해는 욕설을 퍼부으며 이를 악물었다.그래도 자신이 오늘 죽으면 화진을 위해 싸운 셈이니 윤구주가 자신을 잘 묻어주고 이름을 남길 거라고 생각했다.평생 신령으로 살아온 청해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명예를 되새기며 웃고 있었다.멀리서 진동왕 일행이 도착했지만 그는 발을 디디기도 전에 칼날 같은 살의와 검의 기운에 압도당했다.바로 그 순간 그는 미친 스님의 말을 떠올렸다. 임정설이 올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백호의 생명은 위태로웠다.그는 얼음 속에 갇혀 전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백호 네 안에는 살기가 너무 많다. 성수의 피를 융합한 이상 언젠가는 인간계의 마인으로 폭주할 것이다. 윤국주는 결코 너를 죽일 수 없겠지만 내가 대신 끝내주마.”청현의 검 끝에서 한 줄기 서늘한 빛이 뻗어 나와 얼음 결계를 뚫고 백호의 단전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청의 검객인 청현은 이미 그 흐름을 감지하고 있었다.성스러운 짐승의 피를 깨뜨린다면 백호는 죽을 운명이었다.진동왕은 숨을 삼킨 채 그 칼끝을 노려보고 있었다.하지만 구주군은 더는 참지 못했다.“대장님을 구하라. 돌격.”수천 명의 구주군이 함성을 지르며 청현을 향해 돌진했다.하지만 청현은 단 한 번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그는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더니 순식간에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아 손바닥
진짜 부처의 금빛 광채가 서울 하늘을 뒤덮었다.수많은 불빛이 만불종의 보도자항을 송두리째 태워버렸다.그의 육신이 타들어 가며 내면의 음험한 영혼과 사악한 기운이 드러나자 그동안 그에게 속아왔던 이들은 마침내 진실을 깨달았다.그는 진정한 부처가 아니라 불교의 이름을 악용해 사술을 부리는 사악한 존재였음을. 불빛은 순식간에 희미해졌고 하늘의 황금 형상은 다시 검은 구름에 삼켜졌다.지상에 남은 금빛 실루엣도 점차 사라지며 그 자리에는 누더기 법복을 입은 한 스님의 모습이 드러났다.그는 바로 공수이의 스승인 미친 스님이었다.최고급 신급에 근접한 존재였다.“역시 스승님. 평소에는 미친 척하시더니 제대로 할 땐 정말 대단하시네요.”공수이는 온몸이 엉망이 되었음에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미친 스님? 200년 전 풍화산의 불동 주지 스님 이름이 뭐였더라?”진동왕 임성진은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그 이름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불은 본래 형상이 없으니 내가 불을 닦는다면 이름 자체가 무의미하지요.”미친 스님은 아미타불을 외우며 몇 개의 단약을 꺼내 진동왕과 공수이에게 먹였다.하지만 은용위의 부대는 이미 요승 불경의 손에 전멸한 후였다. 미친 스님은 그들을 위해 자리에 앉아 초혼 의식을 치렀다.“스님 지금은 초혼할 때가 아닙니다. 그들이 백호를 노리고 있음이 분명해요. 청해도 위험한 상황일 겁니다. 부디 백호를 구해주십시오.”진동왕은 숨을 고르자마자 미친 스님을 향해 절박하게 외쳤다.예의를 갖추지 못한 것은 상황이 너무나 긴급했기 때문이었다.그 말을 들은 미친 스님은 안타깝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내 도행은 보도자항과 팽팽한 대결 수준입니다. 그를 죽일 수 있었던 건 수련이 아니라 운 때문이었습니다. 백호에게 닥친 이 재앙은 그의 운명에 이미 각인된 것입니다. 그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뭐... 뭐라고요?”곤륜 구역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고인조차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진동왕은 충격을 받았다.“어서 말하거라.
“미친놈. 이 가짜 스님아, 당장 꺼져.”공수이는 온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혈액을 인으로 새겼다.그의 피는 놀랍게도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십장 금불인이 발동되었다.공수이가 모든 힘을 다해 불러낸 공격은 보도자항이 소환한 금불상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갔다.“네 놈이 고작 불법 몇 년 수련했다고 대단한 줄 아느냐? 서방여래는 만불지존이다. 네가 감히 뭐로 나와 겨룬단 말이냐. 깨져라.”보도자항은 냉소를 띠며 금불상의 양손을 모았다. 그러자 손끝에서 번개 같은 금뢰가 튀어나와 공수이의 금강불인을 산산이 부수었다.그 충격에 공수이는 완전히 쓰러졌다.그는 바닥에 쓰러져 일어설 엄두조차 낼 수 없게 되었다. 문득 공수이는 이것이 정말 여래인지 의문이 들었다. “하찮은 요귀가 어찌하여 참불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게 세상 이치인가? 내가 배운 불법은 전부 거짓인가? 아니면 선악을 막론하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건가?”그 순간 하늘을 가르며 천지의 정기를 품은 무지갯빛 호연정기가 짙은 기운을 가르며 쏟아졌다.“금강인 불문을 열어라. ”거대한 메아리 같은 음성이 하늘을 울렸고 곧이어 백장 금인이 칠색 구름을 타고 서울 상공에 강림했다.“뭐라고?”보도자항의 표정이 굳었다.그 압도적인 기운은 그의 숨조차 막히게 했다.“불.”백장 금인이 왕부로 내려오자마자 뱉은 한마디에 보도자항이 펼쳤던 모든 사술이 산산조각 나버렸다.“안돼... 나의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군. 이 세상에 아직도 대승 불법을 익힌 자가 남아 있었다니.”보도자항은 이를 갈며 몸을 떨었다.그는 질투에 사로잡혔다.왜 자신은 만불종 종주임에도 이런 참된 불법의 정수를 얻지 못했는지 의문이 들었다.“불본무도 심성위령. 일념으로 도를 향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너희 같은 자들은 마음을 그르쳐 불을 왜곡하고 형상 없는 불을 우상화해 신처럼 떠받들었다. 만불종은 불타의 이름을 빌려 사익을 취했고 종교를 가장해 세상을 속였으며 그 어떤 정의로운 종
“너 혹시 내 금강인을 노리는 거야? 이 썩을 놈아. 이 빌어먹을 스님아. 금강인은 불문의 최고 금의인데 너 같은 가짜 스님한테 줘봤자 쓸모없어. 멍청이야.”공수이가 거칠게 욕설을 퍼부었다.보도자항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네 이놈. 네놈 같은 자는 죽여야 해.”보도자항이 눈을 부릅뜨며 불문의 비기를 펼쳤다.하지만 그의 동작은 도저히 정통 도술로 보이지 않았다.몸 전체에서는 사악한 기운과 요기가 넘실대고 있었다.“요승아, 내 공격을 받아라.”공수이는 다시 한번 금강인을 펼쳤다.그를 감싼 금강불인은 보도자항의 사기를 완전히 차단했고 강렬한 공격이 연속으로 날아들어 보도자항을 계속해서 밀어냈다.보도자항은 억울함을 느꼈다.그의 눈에 공수이는 그저 개미만도 못한 존재였다.공수이는 물론 공씨 가문 전체가 나서더라도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임 씨 초대 국주 임세현이 돌아와도 자신 앞에 무릎 꿇을 것이라 확신했다.하지만 금강인만은 보도자항의 모든 사기 무공을 정면으로 제압하는 천적이었다.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보도자항은 속이 타들어 갔다.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수이는 보도자항을 몰아붙이며 집요하게 공격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동왕은 속이 다 시원했다.“공수이, 본때를 보여줘. 더 세게 패.”공수이는 보도자항의 머리 위로 올라가 정통으로 내리쳤고 보도자항이 머리를 감싸자마자 바로 아래로 파고들어 극한의 회음부 공격을 퍼부었다.퍽! 퍽! 빗발치는 주먹이 급소에 꽂히자 아무리 경지 높은 보도자항이라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이 썩을 놈 물러가라.”보도자항은 사기를 폭발시키며 공수이를 멀리 내던졌다.하지만 공수이는 금강인의 보호를 받고 있어 공격을 맞아도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다시 공격하려는 찰나 보도자항은 양손을 합장하더니 눈동자가 새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전신에 흑기가 치솟았다.“요승아, 너 또 그 짓거리냐?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그런 사술은 통하지 않아
“우습군. 이런 조잡한 칼 한 자루로 어쩌겠다고? 설령 임세현이 직접 나타나도, 내가 제압할 방법은 있다. 하물며 너 같은 놈은? 애초에 수련 자질도 없으면서 평소엔 그저 인생을 낭비하다가 위기에 처하니 발버둥 치는 거야. 정말 한심하군.”“너 같은 놈은 그냥 처박혀서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해. 부처님 말씀에 이르길, 부처는 인연 없는 자는 구하지 않느니라. 너는 불문과 인연이 없으니, 지옥에서 고통이나 받는 게 어울리지.”“고해무변. 네가 돌아갈 곳은 지옥뿐이다.”“하하하!”보도자항은 한 손으로 불인을 그리며 마력을 응축해 진동왕의 명문을 향해 내리찍었다.“젠장! 이제 끝이군.”진동왕 임성진의 눈에 분노와 절망이 교차했다.그 말이 맞았던 거다. 잘난 척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오만함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막상 상황이 닥치자 그는 평화롭게 죽지 못할 운명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안 돼!”임성진의 절규는 하늘을 갈라놓을 만큼 강렬했다.“뭐, 뭐야?”보도자항은 진동왕이 그런 힘을 낼 리 없다며 비웃었지만, 그때였다.하늘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곤두박질쳤다.“뭐야, 이놈은?”보도자항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곧이어 그 검은 그림자가 땅에 내리꽂히자 바닥에 금이 쩍쩍 가기 시작했다.진동왕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내가 소리쳤다고 사람이 떨어진다고? 혹시 구주왕이 돌아온 건가?’하지만 그건 아니었다.구주왕은 저리 허접하게 등장할 인물이 아니었다.임성진이 눈을 부릅뜨고 확인한 순간 완전히 넋이 나갔다.떨어진 이는 바로 공씨 가문의 세자 공수이였다.“네... 네가 왜 여기에... 공씨 가문에서 보낸 게 고작 이 하찮은 놈이라고?”진동왕은 절규했다.분노와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그 순간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던 공수이는 허접하다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허접? 지금 누굴 보고 하는 소리야, 이 늙은이야!”“내 이름은 공수이! 공씨 가문의 세자지. 법호는 널 죽여주마다!
구주군이 진동왕을 따라 돌격하려는 순간 진동왕은 단호하게 외쳤다.“물러서! 전원 후퇴하라. 저자는 만불종의 종주다. 너희가 가다간 전멸할 것이다.”진동왕은 자신의 권한으로 구주군의 진격을 막았고 홀로 왕부 안으로 다시 뛰어들었다.“진동왕, 네가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오늘 네 목숨은 내 것이고 왕궁 밖 구주군의 국운 또한 내 차지다.”보도자항은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움직였고 진동왕은 이를 악물고 금도를 휘둘러 필사적으로 맞섰다.그가 뿜어내는 기세는 실로 용맹했지만 사실상 그의 목숨을 스스로 갈아내는 싸움이었다.온 힘을 다했지만 그의 어떤 공격도 보도자항의 몸에 미치지 못했다. 그에게 남은 건 오직 시간을 끄는 것뿐이었다. 한편 다른 전장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청의 검객은 서요산 검종 종주의 제자였다. 그의 검술은 이미 신의 경지에 근접해 있었고 곤륜 구역의 수련자들을 상대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청해는 지금 자신의 음혼을 불태우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서울 상공에 먹구름이 짙게 깔렸고 그 먹구름은 서서히 거대한 해골의 형상으로 변해갔다.마치 서울 전체를 집어삼킬 기세였다.하늘은 먹구름에 뒤덮였고 땅에는 귀기 어린 안개가 스며들었다.서울 전역이 거대한 안개에 휩싸였고 그 안에서 쉬고 있던 시민들은 모두 악몽에 갇혔다.그 누구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꿈속임을 인지한 이들조차 가위에 눌린 듯 깨어나지 못했다.깨어 있던 이들마저 갑자기 정신이 붕괴된 듯 헛소리를 내뱉으며 광기에 휩싸였다.서요산 검종의 산속 검각에는 종주의 폐관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하얀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피처럼 붉은 달이 떠오르고 동쪽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무겁게 몰려 있었다. 그 위로는 거대한 형체가 아득히 떠다니고 아래로는 온갖 귀물이 들끓고 있었다.“마기가 짙어지고 있군. 누군가 화진의 국운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해.”노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자색 도포를 입은 중년 남성이 재빠르게 날아와 무릎을 꿇고 보고했
“신령의 기운이 너무 약해졌어. 안 돼. 저놈은 백호 대수령을 노리고 온 거야.”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은용위는 즉시 서울 본부에 상황을 보고했다.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서울 본부와의 모든 통신이 완전히 끊기었다는 점이었다.서울 본부 빌딩에는 생존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천 명의 왕실 금위군 역시 모두 피 웅덩이 속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해당 지역은 거대한 결계로 봉쇄되어 외부와의 연결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더욱 충격적인 문제는 왕궁 내부 고수들이 전멸했다는 것이다.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왕궁 바로 아래 거주하던 왕실 직계 가족들은 무사했다.왕궁 외곽에서 상황을 전해 들은 견배영은 교외에서 급히 돌아와 지휘권을 인계받았다.그는 원래 용맥 경계에서 방어 임무 중이었지만 사태가 긴급해지자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 역시 너무나 무력했다.진동왕과 신령도 그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존재들조차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혼자 사태를 수습한다는 건 불가능했다.“어쩌지... 현모와 주작은 해외에 있고 구주왕은 곤륜 구역에 갔는데. 서요산 검종도 내부 사정으로 정신이 없어서 당장은 도움을 받을 수 없어.”견배영은 고심 끝에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은용위와 구주군, 금위군을 총동원해 대규모 군사력으로 밀고 나갈 작정이었다.즉시 대군이 소집되었고 동시에 진동왕부와 수비영을 향해 출동했다.그중 백 명의 은용위 선봉대가 가장 먼저 진동왕부에 도착했다.이들이 왕부에 들어서자마자 진동왕을 고문 중이던 보도자항이 눈을 가늘게 떴다.“호오... 역시 임씨 가문의 국운이 약해졌다고 해도 아직 끝나지 않았군. 하지만 이번에 막아냈다고 해서 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지.”보도자항은 싸늘하게 웃었다.“전원 돌격!”백 명의 은용위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그들은 하사받은 금도를 뽑아 들었고 검날에서는 은은한 광휘가 번쩍였다.금도는 왕실의 보검이자 정식 법기였다.평소엔 집안 제단에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