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벌 사람들은 장백웅이 모든 이를 처리해 버리겠다는 말에 놀라 어찌할 바 몰랐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장백웅이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말을 끄는 허름한 노인 하나 때문에 그들을 죽이려 하다니! “됐구만, 마차 안의 아가씨께서 피 냄새를 싫어하시니 길을 내주고 우릴 보내주면 돼.”허름한 차림의 노인이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선배님께서 도량이 넓으시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장백웅이 말을 마친 뒤 문벌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모두 자리를 비켜라!”그러자 모든 문벌 멤버들이 주동적으로 정양문에서 큰고 넓은 길을 내어주었다. 그리고서야 허름한 차림의 노인이 마차를 끌고 천천히 경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는 마차를 향해 장씨 가문의 절정 강자 장백웅이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작별 인사를 건넸다. “선배님 잘 다녀오세요.”달그락! 달그락! 마차는 장백웅과 다른 사람들의 놀라운 시선 속에서 천천히 정양문을 지나 경성으로 들어갔다. 마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장백웅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장백웅 님, 도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저 마부가 누구기에 장백웅 님처럼 존귀하신 분이 이처럼 존경스러운 태도로 맞이해야 하는 겁니까?”이때 다른 절정 강자가 장백웅 곁으로 다가와 의아해하며 물었다.“모 선생은 저분을 알아 봤습니까?”모 씨 성을 가진 절정 강자가 고개를 저으며 장백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40년 전, 육도 절정에 다다른 한 명의 강자가 갑자기 나타나 천하를 압도하는 무시무시한 실력을 보여줬다고 들어본 적 있을 것입니다.”“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술과 사랑에 미쳐 있다고 했습니다.”“그때 그는 곤륜하에 화진 제일 강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어느 때부터인지 아무도 그 강자의 소식을 알지 못했답니다.”장백웅의 말을 들은 그 모 씨 성을 가진 절정 강자는 눈동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육도 절정이라니! 신급의 정점이 바로 절정이다.하지만 절
“이럴 수가!”“어쩐지, 장백웅 님마저도 공손히 대해주더니……이제야 알았습니다.”모 씨 성을 가진 절정 강자는 드디어 자초지종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가마가 사라진 쪽을 올려다보며 다시 한번 깊은 인사를 올리며 존경을 표시했다.장백웅은 멀어져 가는 마차 쪽을 그윽이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태평성세가 도래한 지금, 사십 년 전에 이미 천하를 뒤흔들었던 육도 주도가, 뜻밖에도 경성의 황성에 숨어 버리다니, 정말 생각지 못할 일이군.”...... 서울.마차 한 대가 많은 사람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거리를 질주하고 있다. 마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그 허름한 차림의 노인이었다. “주도님, 아까 그 사람들이 어르신을 알아본 것 같은데요?”은방울을 굴리는 듯 은은하고 듣기 좋은 나긋한 목소리가 가마 안에서 흘러나왔다. 손에 채찍을 들고 술을 마시면서 마차를 몰고 있는 주도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이 늙은이는 40여 년 동안이나 이름을 숨기고 살았으니, 설사 알아낸다고 해도 지금은 그때의 제가 아닙니다.”“허허!”“제 앞에서 시치미 떼지 마세요!”마차 안에 있는 사람이 대답했다.“허허, 이 늙은이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강산은 수백 년 동안 대대로 인재를 배양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현재 우리 화진의 소년 인왕, 이 녀석은 수많은 강자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온몸의 내공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물론이죠. 그렇지 않았다면 당시 제가 어찌 그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습니까?”그 사람이라고 말할 때 가마 안의 목소리는 분명 원망하면서도 애정이 들어있었다.“여섯째 공주님이 참 부럽네요. 이 세상에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직 존재하니까요.”주도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만 하세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나요?”가마 안의 사람이 호통을 치자 주도는 급히 말을 돌리며 사과했다. “예, 공주님의 말씀이 맞으십니다. 하지만 저도 공주님이
“이봐요, 근데 문벌들이 왜 모두 서울에 모여있는 거죠?”가마 안에 있던 여섯째 공주님이 물었다. 마차를 몰고 있던 주도가 코끝을 만지며 대답했다. “아마도 공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인왕 때문인 것 같은데요.”“윤구주 말입니까?”“예, 제가 들은 바로는, 얼마 전, 서울의 문벌 절정이 제멋대로 뛰쳐나왔다가 정양문 아래에서 참살당했다고 합니다. 그 사건에 육도진도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고 하는데 저는 바로 그 소년 인왕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그가 곤륜에서 왕으로 봉해질 때 서열들은 세가를 비롯하여 종문까지 정치에 관여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게다가, 그의 사망 소식이 세상에 널리 퍼져서 3대 서열은 그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나서서 소란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그들은 이 소년 인왕이 살아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공주는 주도의 말을 듣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죠. 제 남자는 쉽게 목숨을 잃을 사람이 아니에요.”“공주님 말씀이 맞으십니다.”“이 무식한 놈들이 감히 제 남자를 상대하다니 죽여야 마땅하지요.”공주는 화가 나는지 말투가 점점 거칠어졌다. “이 문벌들은 걱정할 게 못 됩니다. 하지만, 만약 세가와 종문이 참여한다면, 일이 번거로워질 것입니다.”“흥! 제 아버지는 너무 인자하세요. 그러니까 문벌, 세가와 종문이 이리 창궐하죠! 제 뜻대로라면 그들을 모두 죽여버릴 것입니다.”주도는 급히 공주를 말리며 대답했다. “공주님,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화진은 당시 3대 서열에 뒷받침받고 현재의 번화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공주님의 이 한마디는 천하의 무인들을 모두 단번에 때려죽이는 것입니다.”“안됩니까? 누가 그들더러 제 남자를 건드리라고 했습니까?”주도는 공주의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됐어요. 듣기 싫은 말은 그만하고 빨리 윤씨 일가로 가요.”마차 안의 공주가 말을 끝냈다.주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를 몰고 윤씨 일가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화진 여섯째 공주가 마차에서 내린 뒤 그녀는 아름다운 눈으로 윤씨 일가의 금으로 쓰인 간판을 보았다. 예전에 이 금으로 된 간판은 윤씨 가문의 자랑이었다. 왜냐하면, 이 간판 위에 글을 쓴 사람이 바로 화진의 오늘날 국주이기 때문이다.하지만 16년 전에 사고가 난 뒤로 윤씨 일가는 간판에 대해 더 언급한 적이 없었다. “이게 바로 아버지께서 직접 하사하신 간판이군요. 참 아쉽게 됐네요.”공주는 윤씨 일가의 금으로 쓰인 간판을 보며 말했다. 옆에 서 있던 주도가 눈을 비스듬히 뜬 채 그 간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찌 되었든 국주님의 글은 아주 예술입니다.”공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어릴 적 기억에 빠져들어 갔다. “어렸을 때 저는 항상 그를 따라 대문 앞에 와서 함께 놀았어요.”“그는 저를 누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고, 저는 구주 오빠라고 불렀어요.”윤씨 일가의 대문을 바라보는 공주는 마치 10여 년 전 윤구주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공주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주도는 그녀가 소중한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공주가 드디어 기억 속에서 빠져나왔다. “들어가죠.”말을 마친 공주가 발걸음을 내디디며 먼저 윤씨 일가 안으로 들어가자 뒤에 있던 주도도 빠른 걸음으로 공주를 따라갔다. 윤씨 일가에 들어서자 갑자기 4줄기의 센 기운이 감돌았다.뒤이어 네 사람의 모습이 마당에 나타났다.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사람은 50살 좌우지만 온몸에서 고위 신급 강자의 기운을 뿜어냈다.나머지 세 사람도 모두 윤씨 일가의 신급 강자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윤씨 일가의 안위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분이시다. “두 분이 말도 없이 무슨 일로 윤씨 일가를 침입하셨나요?”네 사람이 나타나기 바쁘게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공주는 그 사람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하 할머니를 찾으러 왔는데요?”“하미연 님 말씀입니까?”“실례지만 그쪽 성함이 무엇입니까?
“나는 이홍연이라고 해. 꼬마야 너는 이름이 뭐야?”공주가 윤하율에게 물었다. “저는 윤하율이라고 해요.”윤하율은 물음에 대답하고 공주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 정말 예쁘세요. 하율이는 지금까지 언니처럼 예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요.”이홍연은 윤하율의 칭찬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홍연은 윤하율에게서 아름답다는 칭찬을 받고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너는 입이 참 달콤한 꼬마구나.”“그러면 언니한테 하 할머니께서 집에 계시는지 알려줄 수 있어?”“제 할머니 말씀하시는 거예요?”“그래 맞아.”“할머니께서는 지금 오빠 장난감 정리하고 계세요. 예쁜 언니, 제가 같이 찾아 줄게요.”윤하율은 대답하며 그네 위에서 뛰어내렸다. 이때 이홍연의 시선이 윤하율이 손에 쥐고 있던 흙인형에 꽂혔다. 그 흙인형을 보자 이홍연은 흠칫하더니 물었다. “하율아, 저 흙인형 어디서 가진 거야?”이홍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윤하율은 오른손으로 흙인형을 들고 신이 나서 대답했다. “이 흙인형은 할머니께서 갖고 놀라고 주신 거에요. 할머니께서 알려주신 건데 이 흙인형은 구주 오빠가 어렸을 때 소꿉친구랑 같이 놀던 거래요.”소꿉친구? 이 네 글자가 이홍연 머릿속에 들어가자 그녀가 갑자기 몸을 살짝 떨기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입에 붙인 적 없는 네 글자였는데 지금 다시 들으니 이홍연의 어릴 적 기억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그녀는 넋을 놓은 채 윤하율 손에 있는 인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율아, 그 인형을 언니한테 보여줄 수 있어?”윤하율은 잠깐의 고민 뒤에 대답했다. “좋아요.”그리고 손에 있던 흙인형을 이홍연에게 건네주었다. 이홍연은 인형을 건네받고 복잡한 표정으로 인형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 인형은 이홍연이 어렸을 때 윤구주와 같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흙인형이 하나는 남자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이다. 남자는 윤구주를 뜻하고 여자는 이홍연을 뜻했다. 그들은 두 손을 맞
하미연은 뒤에 서 있는 이홍연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섯째 공주님이시죠?”이홍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이가 공주님을 뵙습니다.”하미연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겨우 다섯 살 먹은 윤하율이 이 장면을 보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께서 왜 예쁜 언니를 만나자마자 갑자기 무릎을 꿇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 이러지 마세요. 어서 일어나세요.”이홍연은 급히 말리며 하미연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이 늙은이가 이번 생에 다시 공주님을 뵐 수 있으리라 상상도 못 했습니다.”하미연이 일어선 뒤 흐릿한 눈을 뜨고 후들거리며 말했다. “할머니, 왜 이러십니까? 벌써 잊으셨어요? 저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를 제 친할머니라고 생각했는걸요.”이홍연이 웃는 얼굴로 하미연의 팔을 껴안았다. 하미연은 매우 흥분했다. 그녀는 화진의 가장 아름다운 이홍연 만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십여 년 전, 이홍연이 황성으로 돌아간 뒤, 몇 년 동안 윤씨 일가에 한 번도 발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오시다니!“공주님, 어서 들어오세요.”하미연은 감격에 겨워 이홍연을 끌어당기면서 대나무 의자를 들고 그녀를 앉혔다.이홍연도 사양하지 않고 의자 한쪽에 앉았다.“오랜 시간 못 뵈었더니 공주님께서는 정말 점점 예뻐지셨네요.”하미연은 한쪽 눈을 보지 못했지만, 여전히 이것이 십여 년 전의 이홍연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할머니, 칭찬 감사해요. 근데 왼쪽 눈은 어떻게 되신 거예요?”이홍연은 그제야 하미연의 한쪽 눈이 실명했다는 것을 알았다. “괜찮아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눈이 나빠졌습니다.”하미연은 그녀의 눈이 윤구주를 위해 울어서 실명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홍연은 그 말을 듣고 더 묻지 않았다.“공주님.”하미연이 입을 열려 하는데 이홍연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 “할머니, 저를 홍연이라고 불러주세요. 어릴 적에 계속 이렇게 불러주셨잖아요.”“하지만.”하미연이
하미연의 물음에 이홍연은 갑자기 침묵을 지켰다. 하미연도 자기의 말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이 늙은이가 말을 잘못했네요.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이홍연은 당연히 조그마한 일에 화를 낼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손을 저으며 고개를 들고 물었다. “할머니,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무슨 일입니까? 물어보세요.”“할머니 구주 오빠 지금 서울에 있나요?”이홍연는 예쁜 눈으로 하미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미연은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구주는 지금 서울에 있어요.”이 말을 들은 이홍연은 순간 감격에 겨워 할머니의 투박한 두 손을 잡아끌었다. “진짜로 살아있어요? 죽지 않았어요?”“예, 살아있답니다.”이홍연의 가냘픈 몸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아름다운 눈이 너무 흥분된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쁜 놈! 살아있으면서 저에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어요.”이홍연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억울해져서 눈물이 줄 끊어진 진주처럼 흘러내렸다.화진의 공주님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하미연이 얼른 말했다. “공주님 용서하소서. 확실히 구주가 잘못했습니다만 구주에게도 고초가 있습니다.”“알고 있어요.”“십여 년 전 그 일은 제 아버지 잘못이에요. 하지만 구주 오빠가 곤륜에서 왕이 된 후로부터 아버지께서 더는 책임을 묻지 않았잖아요.”이홍연도 사실 십 여년 전 사건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이홍연은 윤하율만한 아이였기 때문에 사고를 막을 수 없었다. “공주님 말씀이 맞아요. 하지만 공주님도 아시다시피 구주가 고집이 세요. 고생을 너무 많이 한 아이인지라, 제가 제멋대로 결정해줄 수는 없어요.”하미연의 말속에는 온통 윤구주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를 무시하면 안 되죠.”“예전에 저랑 결혼할 거라고, 저만 사랑할 거라고 약속했으면서 곤륜에서 왕이 되고는 문아름이랑 결혼했잖아요.”말하는 이홍연의 목소리가 분노로 가득 찼다. 그녀는 주먹
이홍연은 아버지 생각에 갑자기 안색이 나빠졌다. 왜냐하면, 이홍연의 아버지께서 확실히 그녀와 윤구주가 사귀는 것를 반대하며 막으려 했었다. 그가 이홍연을 황성에 가두어 윤구주를 만나지 못하게 한 것도 사실이다.이홍연은 순간 뭔가 깨달았다. “홍연아, 구주는 너에게 항상 미안하다고 생각했어. 비록 너를 입에 올린 적은 없지만 그 애의 마음은 이 할머니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하미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홍연은 하미연의 말에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렸을 적에 이홍연은 윤씨 일가를 찾아와 윤구주를 만나기 좋아했다. 윤하율이 가지고 놀던 흙인형마저 이홍연이 어릴 때 윤구주와 함께 만든 것이였다. 하지만 16년 전 윤구주 모자가 윤씨 일가에서 쫓겨난 뒤로부터 이홍연은 윤구주를 만난 적이 없었다. 줄곧 윤구주가 곤륜에서 왕이 될 때까지 말이다. 그때 화진의 공주인 이홍연은 멀리서 윤구주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홍연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왕을 배후하고 화진의 제1인왕이 되었는데 여전히 그와 상봉하지 못했다.윤구주가 문씨 가문과 결혼한 뒤에야 이홍연은 슬픈 나머지 홀로 화진을 떠나 세계 각지를 유람하게 되었다. 이제 그녀가 드디어 돌아왔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면, 이홍연의 마음속에는 온갖 신맛, 단맛, 쓴맛이 다 있었다. 다만 지금 두 사람이 만나면 어떤 모습일지 그녀 자신도 모르고 있다. “할머니, 제발 구주 씨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이홍연은 깊은 생각에서 잠깐 빠져나와 눈물을 닦고 하미연을 바라보았다. “구주는 지금 예전에 엄마가 살던 곳에 머물러 있을 거야.”“할머니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이홍연은 하미연을 향해 큰 인사를 하며 감사를 표했다. “할머니, 저희가 만나면 구주 오빠가 저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이홍연이 갑자기 물었다. 어릴 적에 이홍연은 윤구주를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아이였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이 다시 만나면 윤구주가 이홍연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하미연은
‘헐, 대박.’진동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윤구주를 신처럼 떠받들었다.‘이게 진짜 신이지. 곤륜에 있는 그 자식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었어. 허위적이기 그지없지.’오늘 밤 그는 여러 강자의 싸움을 직접 목격하고 강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문경우도 아주 강했지만 윤구주가 나타나자 문경우는 도망조차 제대로 치지 못하고 영혼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윤구주의 술법에 의해 영혼도 남기지 못하고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승리는 결국 화진에게 돌아갔다. 화진을 무너뜨리려는 역적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윤구주는 자신의 힘으로 화진의 막강한 실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문경우를 처단한 윤구주는 즉시 임정설의 치료에 돌입했다.“짐은 별일 없으니 먼저 왕숙과 네 친구를 치료해줘라.”임정설이 임성진과 청해를 가리키며 말했다.청해는 이미 정신을 차렸다. 비록 상처가 심해 반쯤 죽은 상태였지만 화진 국주에게 인정받은 첫 순간이었다. 묘한 영예감이 그의 마음을 꽉 채우며 날아갈 듯 기뻤다.“이 두 사람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오히려 국주님이 더 위험하십니다. 경지를 무리하게 넘어서셨고 섭혼번 아래서 정기를 너무 많이 잃으셨습니다. 지금 국주님의 기운이 안정하지 않으니 제 도움이 없다면 폭주 할수도 있어요. 그때가 되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윤구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임정설은 결국 윤구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윤구주의 치료를 거부한 이유는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황자급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예전보다 죽음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있었다. 윤구주는 임정설에게 풀지 못한 원한이 있음을 눈치채고 치료를 해주며 화진으로 압박했다.“국주님께서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화진에게는 국주님이 필요합니다. 국주님은 30년 동안 화진을 지켜오셨잖아요. 지금 승부가 달린 이 중요한 시점에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임정설
서울 삼천만 명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고 섭혼번이 작동되면 화진의 국운은 영원히 봉인될 것이다.“우리 문씨 가문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쇠퇴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화진의 주인이다. 감히 누가 복종하지 않겠느냐?”문경우는 하늘을 향해 큰소리로 웃어댔다.이때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며 공간이 갈라지더니 한 남자가 시체 한 구를 밟고 서울에 강림했다.“웃기고 있네. 문씨 가문이 화진의 주인이 되겠다고? 문씨 가문 따위가 어디 감히 그런 꿈을 꾸는 것이냐? 나 윤구주가 용납하지 않겠다.”우르릉.우렁찬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지자 문경우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윤구주의 기운이 섭혼번 아래에 나타나며 음의 기운을 찢어버렸다.거대한 섭혼번이 관통당하자 전법이 무너지고 문경우는 피를 토해냈다.고개를 돌리니 윤구주가 허공에 우뚝 서 있었고 그의 발아래에는 아사 신전의 신주 오딘의 시체가 보라색 번개에 휩싸여 있었다.“이게 무슨? 네가 신왕 오딘을 죽였다고?”문경우는 오딘의 시체를 바라보며 벌벌 떨었다.“이 개 같은 자들이 여러 번 화진을 범했으니 죽이는 게 당연하지. 나는 오딘뿐만 아니라 아사 신족 전체를 멸했다. 이제 곤륜에 아사 신족은 존재하지 않는다.”윤구주가 공중에 우뚝 서서 음양의 기를 손아귀에 감아쥐었다. 그의 머리 위 갈라진 공간 너머로 아사 신전의 폐허가 보였다. 수만 신령이 죽어 아사 신족이 멸족한다는 종말이 예언이 현실이 된 것이다.문경우의 눈에 비친 윤구주는 무적의 화신이었다. 그는 윤구주와 싸울 용기도 내지 못하고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너희들이 내가 없을 틈을 타 화진의 기운을 봉인하려 했다고? 문씨 가문은 정말 개수작만 부리는군. 예전에는 나를 죽이려 온갖 더러운 수작을 다 부렸잖아. 내가 없는 틈만 노리는 걸 보니 이젠 내가 무서웠나 보지?”“팔기지, 술자결.”윤구주가 손짓하자 삼천만 생령이 국운 속으로 모여들었다. 백성들은 새 국운에 각자의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냈고 모두의 영혼이 육체로 돌아가며 위기가 해소되었다.“팔기지, 어
태양으로 변한 그 부적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독한 태양 빛이 대지를 지지며 수많은 건물을 녹여버렸고 그 안에 있던 평민들도 산 채로 타죽고 말았다.“그만해. 화진의 백성들을 건드리지 마라!”임정설이 분노에 차 외쳤다.“너와 나는 모두 화진의 절정 수련자인데 어찌 무고한 자들을 끌어들이느냐?”“하하! 무고하다니? 임정설, 현실을 직시하지. 이 하등한 것들은 개미나 다름없어. 한 무리를 죽여도 금방 다시 번식할 테니. 게다가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삼천만 백성의 목숨으로 화진의 새 국운을 봉인하는 거라네. 우리 문씨 가문이 얻지 못하는 것은 부숴버려도 남에게 주지 않을 거야.”문경우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그는 윤구주가 문씨 가문의 뜻을 거역하는 것에 화가 났다.만약 윤구주가 그들에게 순종했다면 지금쯤 화진의 주인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천추만대가 지나도 윤구주는 여전히 화진 최고의 명군으로 남았을 것이다.“저 빌어먹을 윤구주. 역사는 승자가 쓴다는 걸 모르나? 역사를 조작한 왕조가 그렇게나 많은데 유독 그놈만 고집을 부리잖아. 화진의 재난은 모두 윤구주 때문이야. 명군이 되길 거부한다면 영원한 역적으로 만들 거야. 윤구주는 역사의 수치주에 못 박혀 천년만년을 욕먹을 것이다.”“닥치거라! 구주는 우리 화진의 영웅이다. 너 같은 쓰레기가 어찌 감히 구주를 함부로 논하는 것이냐?”그의 말에 단단히 열 받은 임정설은 양혼을 불살라 목숨을 걸려 했다. 그러나 문경우가 이미 임정설의 기를 봉쇄하고 제삼의 전법으로 그의 영혼까지 잠가버렸다.“임정설, 내 앞에서 자살조차 못 하는 주제에 어디서 목숨을 걸겠다고 떠드는 건가?”문경우는 기고만장했다. 임정설이 황자가 되면 뭐하나? 어차피 문씨 가문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데.“오늘이 바로 화진 황제의 멸망일이라네. 섭섭해하지 말게. 윤구주도 곧 자네 뒤를 따를 거니까. 하하!”그가 양손을 내리자 백 미터 크기의 사악한 검은 기발이 구름을 뚫고 서울 상공에 나타났다.“이, 이것은 섭혼번이군!”그 거대
말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쓸모없는 대화는 필요 없었다.임정설은 황제의 의지를 칼로 삼았다. 황자의 기세가 모여 금빛 칼날을 형성하더니 국운을 상징하는 그 칼로 문경우를 향해 내리쳤다.우르르.음과 양이 맞부딪치며 터져 나온 충격파가 반경 수 킬로미터를 휩쓸었다. 사령부 빌딩과 인근 건물들의 유리가 모조리 산산조각이 났다.두 사람은 빌딩 꼭대기에서 결투를 시작했다. 칼 빛이 번뜩이며 천지의 영기를 뒤흔들었고 광풍과 폭우가 몰아쳤다. 산해가 울부짖으며 서울은 보라색 번개와 금빛 불길에 휩싸였다.그들은 각각 화진 최강의 무도를 대표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정의와 사악의 대결이 아니라 임씨 가문과 문씨 가문의 결전이었다.서울 상공에서는 용의 형상이 구름 사이를 휘저으며 흉수와 피 묻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이게 바로 황자의 힘인가. 정말 굉장하군.”진동왕마저 넋을 잃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이때 다른 도시의 지원병들이 서울에 도착해 진동왕과 연락을 취했고 이 소식을 해외에 있는 현모와 주작에게 즉시 전했다.“국주께서 문경우와 결전을 벌이고 계신다고?”“국주께서 황자급 경지에 오르셨다니.”이는 분명히 좋은 소식이었다. 비록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었지만 윤구주와 임정설의 관계는 남달랐다. 임정설은 윤구주의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너무 기뻐하지 마라. 저 문경우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곤륜에서 오랫동안 잠적하며 수많은 신전의 공법을 익혔어. 저놈이 서울로 온 목적은 바로 임정설을 죽이기 위함일 것이야.”옆에 있던 황보웅이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주작과 현모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직 화진이 무사하고 임정설이 문경우를 물리치길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한창 싸우고 있던 두 강자는 공중에서 다시 한번 맞붙었다. 두 사람의 손짓 하나에 산이 뒤집히고 천지가 진동했으며 그들의 기세는 수백 리 밖까지 영향을 미쳤다.임정설은 기세를 최고조로 끌어올려 거침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임정설은 문경우가 극 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전법이 발동되면 서울 수천만 사람들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야. 비록 이길 자신은 없지만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화진의 백성을 위해 싸우겠다. 구주군과 금위군의 여러 장수들은 듣거라. 짐이 전사하면 너희들이 나라를 지킬 책임을 지고 계속해서 적들을 섬멸하라.”임정설은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나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홀로 서울 사령부로 날아갔다.서울 사령부는 진동왕과 수비영이 도착하기 훨씬 전에 함락된 상태였다. 주둔지는 죽음의 적막에 휩싸여 있었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말라붙은 백골들이 널브러진 참혹한 장면뿐이었다.당시 강적의 침입을 받은 주둔지의 병사들은 한 명도 물러서지 않고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적들과 맞서 싸웠을 것이다.이 생각에 임정설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우리 화진의 자랑이다. 저 요망한 것들이 화진을 어지럽힌 지 얼마나 되었느냐? 이 빚을 짐이 갚아 내지 못하더라도 화진 자손들이 반드시 값나낼 것이다.”그는 절대 화진의 혼란에 맞선 마지막 황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선인이 걸어온 길을 밟으며 그의 발걸음은 더욱 확고해졌다.이 순간 황운이 임정설의 몸에 서리더니 새로운 국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순간부터 그는 특정된 누군가의 왕이 아닌 천하 만민이 우러러보는 황제가 되어 있었다.황도가 더해지자 임정설의 기세는 한층 더 강해졌다. 그는 사령부 빌딩 최상층에서 서울을 어지럽힌 장본인을 마주했다.검은 도포를 걸친 그 자는 사악한 부적으로 몸을 감싼 채 요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바로 그가 전법으로 서울을 뒤덮고 있었다.“참으로 예상치 못했어. 화진에 또 한 명의 황자가 나타나다니. 윤구주는 정말 신기하다니까. 자신의 기운으로 국운을 바꾸고 자네의 운명까지 바꿔놓았군. 하지만 내가 충고 하나 해주지. 임정설 자네가 황자가 된 이상 사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야. 넌 사흘 안에 목숨을 거둘 것이란 말이지.”검은 도포를 입은 사람은 임정설이 죽음을 각오하고 온 것을 알아
국주 임정설은 해청현의 음기를 제거한 후, 그를 보호하던 기운까지 걷어내 양기로 해청현을 완전히 눌러 버렸다.이게 바로 미친 스님이 말했던 진정한 자제력이었다.“해청현은 수법만 닦고 수도는 하지 않았으며 몸만 수련할 뿐, 마음은 단련하지 않았지. 그러다 보니 결국 다 헛것이 되어버린 거야.”미친 스님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그는 해청현에게 타고난 수도의 체질을 주었지만 그에 걸맞은 의지를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해청현은 더는 감당하지 못하고 되려 휘말려버린 것이었다.임정설의 머리 위엔 성스러운 빛이 맴돌았고 온몸엔 천지를 뒤덮을 만큼의 정기가 흘러넘쳤다. 해청현은 결국 싸움에서 져버렸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도 임정설처럼 황자급 경지였다면 이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작 두 사람의 경지가 같았다 해도 여전히 자신이 완전히 압도당했을 거라는 걸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임정설은 손바닥을 휙 내리치더니 끝까지 미련을 품던 해청현을 그 자리에서 즉사시켰다. 그는 영혼조차 남지 않은 채 완전히 소멸당했다. 이것이 바로 겉보기엔 수련했을지 몰라도 한 번도 진정한 수도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다는 증거였다.“국주님이 이렇게까지 강했다고?”공수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이렇게까지 강해졌지?”진동왕은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복잡한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예전에는 그가 임정설보다 더 강했었고 임정설은 국운 덕에 간신히 그를 이길 정도였으니 말이다.하지만 이젠 내공 차이가 너무 벌어져서 더 이상 비교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그제야 깨어난 백호는 조금 전 자신이 국주를 진왕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백호, 널 속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넌 내가 올 때까지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임정설은 양기를 끌어내어 백호의 몸속에 주입했고 그의 정기를 빠르게 회복시켰다. 이렇게 되면 백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회복할 것이었다.그 모습을 본 공수이와 진동왕은 또다시 멍해
“뭐? 저게 누구지? 지금 화진에 저런 강자가 또 있었다고? 설마... 저자가 바로 구주왕이란 말인가?”청현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당황스레 외쳤다.누가 알았겠는가, 이 결정적인 순간에 고수가 나타나다니!“젠장... 네가 누구든 상관없다!”“나는 반드시 백호를 죽인다!”청현은 더는 여유가 없었다.상대의 기세는 너무나도 강력했고, 이미 백호와 싸우면서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그와 맞붙는 건 목숨만 붙어 있을 뿐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청현은 그저 백호부터 처리하려 했다.“이런 건방진 것! 우리 화진의 전쟁 신이 너 같은 흉수에게 쓰러질 수는 없다!”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활기찬 천 음 소리!금빛 실루엣이 구름을 뚫고 내려오더니 손바닥으로 청현을 튕겨냈다!눈앞의 인물을 본 청현은 잠시 얼어붙었다. 모르는 인물이다.하지만 이 압도적인 기운은 분명 고위자일 것이다.화진에서 구주왕 말고는 누가 이런 존재감을 뿜어낼 수 있겠는가?기절해 있던 진북왕은 익숙한 기운에 눈을 번쩍 떴다.그리고 그 실루엣을 본 순간 기절할 뻔했다.“이런! 임정설! 너 황자가 된 거야!”“흠? 왕숙께서 실망하셨나 보네요??”금빛 그림자가 사라지며 실체가 드러났고, 그 모습은 바로 용맥에 들어가 수련하던 화진의 현직 왕 임정설이었다.“폐하 만세!”구주군 장병들은 격동된 마음으로 일제히 무릎 꿇고 경례하며 외쳤다.자신들의 왕이 서울로 화진의 백성을 구하러 온 것이다!“임정설?! 그게 어떻게 가능해! 아무리 강해도 극한신경 정도일 텐데!”청현의 얼굴이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졌다.극한신경과 황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황자 한 명이면 수십 명의 극한신경을 상대할 수 있다!서울에 황자가 주둔해 있다면, 곤륜영역조차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설령 청현이 아무리 천재고 강하더라도 황자와의 싸움은 불가능했다.자칭 수요산 제일검이라던 청현은 위축됐다.그 모습을 본 임정설은 냉소하며 말했다.“이게 바로 검객이란 말인가? 검객의 마음은
진황은 외공만으로 도에 이른 황자였다.어떠한 술법도 수련하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백호가 중얼거리며 ‘진황신공!’을 외치고 있으니 이건 누가 봐도 미친 소리였다.“미쳐야 도를 이루는 법이다. 백호는 앞날이 창창하구먼.” 미친 스님이 아미타불을 외치며 말했다.“미쳤어, 미쳤어! 전부 다 미쳐버렸다고!” 진북왕이 고함을 지르다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기절해버렸다.그 사이 백호의 기세는 끝없이 치솟고 있었다!정신은 나갔지만, 힘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청현은 문득 깨달았다. 백호가 저토록 광폭한 이유—바로 그놈의 몸속에 흐르는 성수의 피였다.“이 썩을 놈... 성수 피가 아니었으면 네가 뭔데 날 상대로 이러는 거냐!”청현은 음기를 뿜으며 맹렬하게 연속으로 공격을 퍼부었다.그 음산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백호는 오히려 직선 돌진했다.공격은 완전 예측 불가였다.수요산 검종은 온갖 검술과 전법에 능했지만, 다음 공격이 뭔지도 모르는 미친놈을 상대로는 청현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결국, 또 한바탕 두들겨 맞고 땅바닥을 굴러다니던 중 놀랍게도 백호가 자신의 음신사체를 흡수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내 음기를 집어삼키다니?! 이 괴물 같은 놈!”“음기여 무한하라! 흑검이여, 사악을 베어라!!!”시커먼 흑검이 다시 응집되자, 수백 개의 검날이 연속으로 쏟아졌다.백호의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검은 피를 흘렸지만——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대로 돌진했다!“개자식... 음기야! 나에게 힘을 줘!!”청현은 검을 땅속 깊숙이 꽂았다.지맥에서 미친 듯이 영기를 빨아들이자, 머리 위에 떠 오른 음기 마기의 형상은 산만큼 거대해졌다!그 압도적인 힘으로 청현은 백호를 단숨에 쓰러뜨렸다.이건 이미 백호가 감당할 수 없는 한계치를 훨씬 초과한 위력이었다.쿵!!백호는 그대로 땅에 쓰러졌지만, 그런데도 그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다만 입에서 나오는 건 누가 들어도 미친 소리였다.“황이 온다... 황... 황이 온다....
“우리 스승 말이야, 진짜 고집쟁이에다 구닥다리야. 정의와 사악은 절대 함께할 수 없다고 믿고 목숨 걸고 몇백 년 동안 싸우고 피 흘렸지만 무슨 소용이 있어? 인마 좀 없앤 거 빼고는...?”“스승께서 날 산에서 내려가 속세의 삶을 보라고 하신 건, 결국 수련을 위한 경험이었겠지. 하지만 세상을 직접 겪고 나서야 똑똑히 알게 됐어. 이 세상은 결국, 강한 자가 무적이고 이긴 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세상에는 애초에 정의와 악, 흑과 백 따윈 존재하지 않아. 선악의 기준이란 결국 입만 살은 자들이 지껄이는 헛소리일 뿐이지. 역사가 진실이라고 믿어? 예로부터 어느 왕조의 흥망이 피바다와 시체더미 없이 이루어진 적이 있었나?”“무릇 장수가 공을 세운다는 건, 수만의 백골 위에 선다는 뜻이지. 그 윤구주가 '구주왕'이라 불리는 것도, 결국은 피로 쟁취한 자리 아니겠어?”“주먹이 곧 진리다. 내가 황위에 오르는 날, 선악이든 흑백이든 모두 내 기준으로 정의된다!”“백호, 이제 죽어라.”청현이 공격하려던 찰나 하늘 위의 백호가 먼저 움직였다. 다시 성수인을 발동하더니, 성수의 허상이 실체로 변해 거대한 기운을 모은 주먹을 뻗었다.그 주먹은 하늘을 가르고 청현을 향해 날아갔다.그러나 청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차가운 음기와 사기 담은 손으로 그 주먹을 받아내고 동시에 백 자 길이의 흑검을 형성해 단칼에 성수의 허상을 두 토막 내버렸다.그 검이 날아간 자리에는 구름이 쪼개졌고, 서울 상공을 덮고 있던 먹구름은 그 검기의 파도에 휩쓸려 모두 흩어졌다.먹구름이 사라졌지만, 서울 상공에는 여전히 짙은 요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마치 태양조차 삼키려는 어둠의 장막처럼.“진법까지 있었어?! 대체 어느 놈이, 언제 이따위 대형 진법을 몰래 깔아놓은 거야?!”진북왕은 혈압이 오르다 못해 피까지 토할 지경이었다.이건 곧 청현이 최종 보스가 아니라는 뜻이다!백호가 청현을 이긴다 해도 그보다 더 강한 놈이 있다는 얘기다.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백호가 청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