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지도 못하게 그의 손에 지팡이를 가져간 사람은 옆에 앉아 있는 외손녀도 아니었고 가운데 앉아 있는 이승하도 아니었고 이씨 가문의 그 누구도 아닌 그한테 한 대 맞은 서유였다. 상냥하고 온화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조금은 풀린 듯했다. “네가 김씨 가문의 딸인데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느냐?”“제가 김씨 가문의 딸이든 아니든 정확히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이태석의 말에 대답을 마친 그녀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이씨 가문과 김씨 가문이 원수 집안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가족을 잃은 슬픔은 엄청 크겠죠. 하지만 김씨 가문의 사람들도 많은 가족을 잃었어요. 제가 알기로는 이씨 가문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하더라고요.”“그리고 그들을 Y국으로 쫓아내지 않았나요? 지금까지 김씨 가문의 사람들은 더는 이씨 가문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씨 가문이 김씨 가문을 몰살할 그 당시 전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요. 가문의 원한을 저한테 짊어지라고 하시는 건 정말 억울합니다.”이때, 채은서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당신이 김씨 가문의 딸인 이상 당연한 거 아니에요?”서유는 그녀를 힐끗 쳐다만 볼 뿐 반박하지 않았다. “방금 어르신께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엄마는 김씨 가문의 딸이긴 하지만 젊었을 때 이미 그 집안에서 쫓겨난 사람이고 그 집안과는 오래전부터 연이 끊어진 사람이에요.”“제가 정말 김씨 가문의 딸이면 또 뭐 어때서요? 그 집안에서는 저와 엄마를 인정해 주지 않아요. 저희가 그 집안의 원한까지 감당하는 건 저희한테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요.”“그리고 전 어렸을 때 보육원에서 자랐고 엄마의 얼굴을 본 적도 없어요. 김씨 가문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고요. 근데 제가 어떻게 김씨 가문에서 보낸 스파이겠어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이때, 셋째 할아버지의 부인이 몸을 부르르 떨며 한마디 내뱉었다.“자네가 말하는 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서유가 미처 입을 열기도
이태석은 화를 벌컥 냈다.“감히 말대꾸를 해?”화가 난 이태석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었던 이연석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한편, 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듣자 하니 이승하한테 설명을 요구하려는 것 같았다. 소파에 앉아 있던 이승하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인내심이 바닥났다. “제 아내가 말한 건 모두 사실입니다. 김씨 가문의 일은 이 사람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믿지 못하겠으면 한번 조사해 봐요. 조사를 하고도 여전히 그 원한을 이 사람한테 짊어지게 한다면 그땐 나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그 말인즉 조사한 결과가 서유가 한 말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그는 끝까지 서유를 지키겠다는 뜻이었다. 그의 뜻을 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다만 이 집안의 권력자로서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게 정말 좋은 일인 걸까?채은서는 둘째 오빠가 언젠가는 이 여자 때문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자에게 약점이 있다는 건 누구나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니까. 그녀는 이승하가 후회할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승하는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훤칠한 손을 들어 경호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손님들 배웅해 드려.”주식을 받으러 온 이씨 가문의 친척들은 그냥 이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어르신, 말씀 좀 해보세요. 김씨 가문의 원한은 자신과 무관하다는 저 여자의 말만 듣고 이대로 끝낼 일은 아니잖아요.”셋째 할아버지의 부인은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유를 노려보았다.“어르신, 어찌 됐든 이 여인은 김씨 가문의 딸이에요. 예전의 방식대로 이 여인을 처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비밀에 대해서 난 더 이상 감추지 않을 거예요.”그 말이 나오자 사람들을 하나 같이 묻기 시작했다.“셋째 할머니, 비밀이라는 게 무엇입니까?”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어두운 눈빛으로 이태석을 쳐다보았다. 많이 당황스러웠지만 겉
이태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날 따라 서재로 오거라.”서유와 이연석의 앞에서는 꺼낼 수 없다는 얘기란 말인가? 이연석과 서유는 서로를 마주 보다가 이승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승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연석이랑 서유가 들어서는 안 되는 얘기가 뭡니까?”그 물음에 이태석이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대답했다.“네가 먼저 들어보고 이들에게 말할지 말지 결정하거라.”잘생긴 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그는 몇 초간 머뭇거리더니 소수빈을 쳐다보았다.“주서희는 도착했어?”소수빈이 공손히 대답했다.“병원이 여기서 좀 멀어서요. 지금 오는 길이라고 하니 곧 도착할 겁니다.”그제야 그는 시선을 거두고 조심스럽게 서유의 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많이 아프지?”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걱정하는 그 모습에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많이 좋아졌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서 일 봐요.”그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소수빈을 향해 차갑게 입을 열었다.“주서희가 도착하면 바로 치료하게 해.”소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그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이태석은 이미 소파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가 차가운 얼굴을 한 채 안으로 들어가 이태석의 맞은편에 앉았다.“말씀하세요.” 자신에 대한 이승하의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이 녀석은 이미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놈인데.마음이 섭섭했던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 일은 말하자면 길어. 너희 아버지 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구나.”아들의 얘기를 하면서 이태석의 눈 밑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무거운 족쇄가 그를 조이고 있는 것 같이 한순간에 부쩍 늙어 보였다. 이승하한테 아버지는 술고래였다. 늘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채 박화영이 그를 때리고 욕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그녀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사람과 무슨 상관입니까
그 말을 하던 이태석은 이승하를 힐끗 쳐다보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그 여자가 임신을 하게 되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박화영은 해외까지 쫓아와 아이를 지우라고 강요했어. 너희 아버지는 죽어도 동의하지 않았고 그 아이를 빌미로 박화영에게 이혼을 요구했었다. 화가 날 대로 난 박화영는 나한테 전화를 걸었고 나보고 처리하라고 하더라.”“내가 어떻게 처리할 수 있겠느냐? 한쪽은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있는 내 아들이고 다른 한쪽은 내가 직접 고른 내 며느리인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어. 근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더구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난 박화영한테 아이는 죄가 없는 것이 아니냐고 설득했다. 박화영도 그걸 인정하더구나. 하지만 아이를 남기고 그 여자를 처리하고 했었어. 그렇지 않으면 이씨 가문에 알려 집안 사람들에게 그 여자를 처리하게 하겠다고 했었지.”“이씨 가문에 알리는 걸 내가 어떻게 동의하겠느냐? 그래서 아들을 남기고 그 여자를 죽이는 걸로 결정했다.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던 너희 아버지는 나한테 무릎을 꿇고 저에게 애원했었어. 너희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망설였지. 내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박화영은 두 사람의 불륜 증거를 이씨 가문의 사람들에게 보냈어.”“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고 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나한테 그 여자를 죽이라고 강요했어. 난 어쩔 수가 없었다. 너희 아버지의 마음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 여자를 납치했어. 그 여자를 처리하려고 하는데 그 여자가 나한테 애원하더라. 아이를 낳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했어. 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박화영이 나타났고 그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에 박화영도 동의했어.”“너희 아버지는 그 여자와 박화영 사이의 거래를 전혀 알지 못했어. 우리가 그 여자를 놓아준 걸로만 알고 있었어. 그러고나서 박화영과 너희 아버지 사이는 많이 좋아지게 되었고 박화영이 무슨 수를 썼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임신을 했다고 했어.”“그러나 박
한편, 이승하는 그 얘기를 듣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김진태의 딸이 낳은 그 아이는요?”이태석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표정한 얼굴의 이승하를 바라보았다. “아주 번듯하게 잘 자랐어. 남 부러울 것 없이 아주 훌륭하게.”“지금 어디 있습니까?”그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관심 없다. 그저 갑자기 이복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은 궁금해졌을 뿐이다. 이태석은 한참 동안 그를 쳐다보고는 가슴속 깊이 숨겨둔 비밀을 털어놓았다.“그 아이는 지금 내 앞에 앉아 있어.”무심했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이태석은 자세를 바로잡고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박화영는 임신을 하지 않았었어. 그 여자가 아이를 낳은 다음 그 아이를 박씨 가문으로 보냈고 출산이 임박하자 그때 널 다시 데려온 거야. 자신이 낳은 아이라고 하면서. 나조차도 깜빡 속아 넘어갔어.”“너희 셋째 할머니가 우연히 널 학대하는 모습을 보고 의심이 들어 나한테 알려주지않았더라면 아무도 이 비밀을 몰랐을 거다.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너희 아버지한테 복수하기 위해서라고 했어. 나한테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도 했고.”“너의 몸에는 김씨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어. 매번 널 볼 때마다 김씨 가문에 살해당한 우리 집안 사람들이 생각나. 게다가 너희 아버지한테 박화영과의 결혼을 강요했으니 늘 박화영한테 미안했었어. 그래서 박화영이 너한테 분풀이를 하는 걸 그냥 내버려둔 거야.”박화영이 그한테 그리 모질게 대했던 건 그가 그녀의 친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유전자 검사를 한 적 있었는데...”믿을만한 부하한테 검사를 시켰기 때문에 절대 조작할 리가 없었다.“내가 바꾼 거다. 네가 박화영의 아들이 아니라 김씨 가문의 딸이 낳은 자식이라는 게 밝혀진다면 아마 넌 지금까지 살아있지도 못했을 거야.”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에 대한 박화영의 복수심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박화영이 그를 때릴
이태석은 충격적인 표정을 지으며 이승하를 쳐다보았다. “너...”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이승하는 눈을 감았다.“그만 나가세요.”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앉아 있던 이태석은 눈앞의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끝내 이혼을 하지 않겠다는 거냐? 네가 김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난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어.”셋째 동생의 아내는 그 당시,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그에게서 10%의 주식을 양도받았다. 현재 그 주식은 이승하에 의해 반이나 회수되었으니 당연히 못마땅할 것이다. 이승하가 이혼도 하지 않고 서유도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가 알게 된다면 분명모든 사실을 폭로할 것이다.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이씨 가문에서 이승하를 어떻게 처리할지...손자가 아들의 길을 걷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연석의 말대로 김씨 가문과의 원한을 잠시 내려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윤리에 어긋나는 일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이것이 밝혀진다면 이씨 가문은 큰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이 앞으로 아이를 낳는다면 태어난 아이는 건강하지 않을 것이다.절대 두 사람이 함께하는 걸 용납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승하는 친동생이라도 이혼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아들 녀석보다 더 미친 손자 녀석이었다. 이태석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다가가던 이태석은 발걸음을 멈추고 이승하를 돌아보았다.“잘 생각해 보거라.”거실에 앉아 있던 서유와 이연석은 어두운 얼굴로 걸어 나오는 이태석을 보고 두 사람의 대화가 유쾌하지 않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이태석은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고 그 모습에 이연석이 급히 일어나 그를 부축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그 물음에 이태석은 손을 저었다. 이태석이 자신에게는 비밀을 알려주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이연석은 눈치껏 더는 묻지 않았다.“제가 바래다줄
이승하가 도중에 웃음을 멈추고 웃자, 서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여보...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이승하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꼭 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유야, 말해봐, 왜 우리는 함께할 수 없는 걸까?”이 말을 듣고 서유의 심장은 점점 내려앉았다. “무슨 말이에요?”함께할 수 없다는 것은 이혼을 의미하는 걸까?그는 그저 이태석과 대화를 나눈 것뿐인데, 왜 이혼하자는 걸까?서유는 두려워하며 이승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랑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러니까 나를 버리면 안 돼요.”이승하는 그녀가 점점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 것을 몰랐다. 만약 그가 그녀를 버린다면 그녀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그녀의 눈에 비친 두려움이 이승하의 심장을 둔탁하게 아프게 만들었다. “난 널 원해, 서유야. 나는 널 원해.”그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그녀를 원할 것이고, 반드시 그녀를 원할 것이다...붉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서유는 어리둥절해졌다. “승하 씨, 왜 이래요?”이승하는 대답하지 않고 미친 듯이 그녀를 원했다. 잠시 후 지쳐버린 그는 그녀의 이마에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젖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제 괜찮아. 심리적 장애는 이미 지나갔어.”친척이라는 단어 때문에 영향을 받은 걸까?그는 그저 그녀가 있으면 됐다.이 말을 한 후, 서유는 그의 동작이 부드러워진 것을 느꼈고 그의 키스에도 무한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혼란스러운 그녀의 마음과 흐릿한 시야는 이승하의 안내로 전에 없던 경험에 빠져들었다. 이는 그녀가 평생 기억할 경험이었다.마침내 이승하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등을 가볍게 두드려 그녀가 조금씩 정신을 차리게 했다.그녀는 그의 품에 기대어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이 할 수 있어요?”이승하는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너를 위해 배웠어.”그는 그녀가 평생 기억할 수 있도록 침대에서 그녀에게 잊지 못할 경
이승하는 길고 늘씬한 다리로 서재로 빠르게 돌아가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이미 잠들었던 셋째 할머니는 전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이승하의 전화라는 것을 보고 그녀는 매우 놀랐다.이승하는 결코 먼저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한 걸까?그녀는 주름진 손가락으로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승하야...”이승하는 인사도 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식 10%를 돌려줄게요, 아들에게 5%의 옵션도 추가로 주죠. 대신 그 비밀은 영원히 가슴에 묻어둬요. 또, 내 아내를 괴롭히지 말고 이씨 집안 사람들을 선동하지도 마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과 당신 아들은 매장지도 없이 죽게 될 거니까!”이승하가 주식을 돌려주고 아들에게 옵션을 추가로 준다는 말에 셋째 할머니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매장지도 없이 죽게 될 거라는 말에 입술이 굳어졌다. “너...”이승하는 바로 말을 끊었다. “5초 안에 결정해요.”이건 분명히 강요였다!셋째 할머니는 ‘네가 할 수 있다면 해봐' 라고 욕을 했지만,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네 말을 따를게.”그녀의 남편은 이미 죽었고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그 원한도 그리 깊지 않았다.이 비밀로 주식을 되찾고, 아들의 남은 인생과 손자들의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목적이 달성된 이상 셋째 할머니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선동했지만 주식을 회수하지 못한 이씨 집안의 다른 사람들은 그녀와 무슨 상관인가?나중에 다른 친척들이 왜 주식을 되찾았는지 물어본다면 모든 것을 이태석에게 떠넘기고 직접 해결하게 하면 된다.셋째 할머니는 계산을 잘했다. 하지만 이승하가 이렇게 빨리 자신이 다른 친척들을 선동한 사람임을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역시 권력자다웠다그런데... 이승하에게서 이득을 얻는 것은 쉽지 않으니 이번 기회에 더 얻어내기로 했다. “승하야, 나한테 딸이 하나 더 있어. 그 아이에게도 5%의 옵션을 추가로 주면 또 다른 비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