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살짝 몸을 숙이며 남자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당신이 매일 아침 핑크 장미를 한 송이 꺾어서 나한테 주잖아요. 그래서 나도 매일 점심 당신한테 도시락을 챙겨줄 생각이에요. 누가 끝까지 견지하는지 우리 내기해요.”그의 눈 밑에 물든 웃음은 창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처럼 화사했다.“어떻게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어?”“김칫국부터 마시지 말아요. 오늘은 첫날이니까 내가 직접 한 거고 다음부터는 셰프가 만든 거 챙겨오기만 할 거예요.”사실 그녀에게 요리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중요한 기념일 같은 날에는 직접 요리를 해줄 의향은 있어요.”말을 하면서 그녀는 가글을 집어 그에게 건네주었다.그는 식사 후에 입안을 깨끗이 씻는 습관이 있었다. 남자는 가글을 받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오자 마침 책장 앞에 기대어 경영학에 관한 책을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따스한 햇볕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자 옅은 솜털이 훤히 보였고 햇빛 아래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햇빛 아래 그녀의 피부는 하얗고 껍질을 벗긴 계란처럼 매끈해 보였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맑고 깨끗했던 남자의 눈이 점점 흐릿해졌다. 사무실 안에 있는 휴게실을 들여다보면서 문득 그 안에 침대가 놓여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여보...” 그가 시선을 거두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우리 회사에서는 한 적 없지? 한번 할까?”그 말에 그녀는 몸을 곧게 세우고 다급히 뒤로 물러나 그에게서 떨어졌다.“가까이 오지 말아요.”알았다고 하면서도 그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마침 점심시간이라 아무도 방해하는 사람 없어.”그가 휴게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더니 이내 발로 문을 닫아버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잠기더니 자동 커튼이 닫히면서 휴게실 안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회사에서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건 정말 아니에요...”욕정이 가득 차
자신을 이불 속에 감싼 채 손가락 하나만 드러낸 여인을 보며 그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이리 와.”쑥스러워서 그한테 오라고 한 건데 그가 오히려 그녀한테 가까이 오라고 한다. 그건 내가 먼저 다가간 게 되잖아. 난 싫은데...눈이 가늘게 떨리던 그가 그녀를 안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고개를 숙인 채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옷을 입었다.벨트를 채우는 모습에 마음이 급해진 그녀가 이불을 젖히고 달려들어 그의 허리를 감싸안았다.“당신이 날 이렇게 만든 거예요.”그녀의 작은 손이 허리를 감싸는 순간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초만 더 늦었더라면 참지 못하고 항복할 생각이었다. 아내가 그보다 더 참을성이 없을 줄은 몰랐다. 근데 그게 너무 좋았다. 그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몸을 돌렸다. 한 손으로 그녀의 몸을 잡고 위로 들어 올려 자신의 품속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고개를 숙이고 키스를 하려는데 그녀의 하얀 손이 입술에 닿았다.“서두르지 말아요. 내가 할게...”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당신이? 어떻게 하고 싶은데?”복수심에 불타 있던 그녀는 그에게서 내려오더니 갑자기 그의 벨트를 잡아당기며 뒤로 넘어뜨렸다.두 사람이 푹신한 침대에 나란히 쓰러졌고 그녀의 차가운 손이 남자의 복근에서 벨트 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갔다. 남자의 아랫배 부근을 어루만지던 그녀가 갑자기 그의 벨트를 확 풀었다.“뭐... 하려고?”간드러진 눈망울로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당신이 하고 싶었던 거요.”그녀의 몸에 밴 향기가 입안을 가득 채우자 빽빽하게 저린 느낌이 밀려왔다.아랫쪽 배에서 뜨거운 느낌이 몰려왔고 몸이 한껏 달아올라 구름 위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급해진 그가 그녀의 허리를 꽉 조르고는 몸을 뒤척이며 그녀를 자신의 아래에 가두려고 했다. 그녀의 허벅지를 헤집고 있는데 그녀가 그의 손등을 눌렀다. 그가 어리둥절한 눈동자를 치켜들었다.“왜? 싫어?”고개를
욕정에 불타오른 남자는 화장실 안 아리따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자신이 그녀의 꼼수에 넘어갔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다. 간신히 욕망을 참으며 그가 옆에 있던 타올을 집어 하반신을 감싼 뒤 화장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그 안에서 얼마나 있을 거야?”옷을 입고 있던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조차 들지 않고 대답했다.“당신이 김빠질 때까지요.”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몸이 식어갈 때쯤 화장실에서 뛰쳐나와 바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가 피식 웃었다.“그래 그럼. 그 안에 있어. 난 회의하러 갈 거야.”이 사람이 또 날 속이려고? 이번에는 절대 속지 않을 거야. 여기 앉아서 핸드폰을 보더라도 절대 나가지 않을 거라고.한편, 걸음을 옮기던 그는 그녀가 문을 열지 않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우리 와이프 그새 많이 똑똑해졌네.화장실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그가 옷을 갈아입고 휴게실을 나섰다.문을 열고 닫는 소리에 그녀는 그가 정말 간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살금살금 다가가 문을 열었다.틈새 사이로 눈을 깜박이며 휴게실을 둘러보는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서둘러 밖으로 걸어 나왔다. 쏜살같이 휴게실의 문을 열고는 사무실을 뛰쳐나가려는데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히고 말았다. 단단한 가슴을 타고 올려다보니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얼굴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피식 웃고 있었다.“당신이 날 놀린 벌이야.”“싫어요.”한 걸음 뒤로 물러나 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는데 그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남자는 그녀를 벌떡 안아 올려 침대로 내던진 후 거침없이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당신 뜻대로는 안 될 거야.”불을 지펴놓았으니 책임지고 불을 꺼줘야지. 그렇지 않으면 몸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잠시 후, 그의 만족스러운 눈빛 아래서 기진맥진한 그녀가 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힘없이 차창에 기대어 잠시 숨을 돌린 후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 반이었다. 기가 막혔다. 오후 시간을 이리
눈앞에는 이태석을 비롯한 이씨 가문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이연석이 말했던 셋째 할아버지, 고모님 그리고 결혼식에서 딱 한 번 만났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서유를 보자마자 증오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사나운 그들의 눈빛을 보며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나와 순식간에 그녀의 옷을 적셨다. 이태석은 용머리 지팡이를 짚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내가 널 서유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김초아라고 불러야 할까?”육성재가 어르신께 말씀드린 것 같다. 그녀는 핸드폰을 꽉 잡고 소지섭을 돌아보았다.차에 타고 있던 소지섭은 바로 이승하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러고는 자신을 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뜻을 알아차린 그녀는 그제야 다시 용기를 내어 이태석을 마주했다. “할아버님, 안으로 드세요.”“그리 부르지 말거라.”이태석이 손을 뻗으며 그녀를 막았다.“할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거라. 난 너 같은 손주며느리 없다.”마음이 약간 아팠지만 그녀는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며 상냥하게 그를 대했다.“그럼 어르신이라고 부르겠습니다.”그가 못마땅한 얼굴로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날 어떻게 불러도 네가 김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바뀔 수가 없는 거야. 말해보거라. 이름도 성도 다 바꾸고 우리 승하한테 접근해서 온갖 수단을 다 써 그와 결혼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복수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우리 이씨 가문의 가업을 모조리 빼앗을 생각인 것이냐?”흠칫하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어르신, 전 어렸을 때부터 서울에 있는 보육원에서 자랐습니다. 제 이름은 원장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고 신분증도 원장님께서 대신 해주신 겁니다. 서유라는 이름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조사해 보시죠. 모두 기록이 남아있을 테니까.”그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너희 김씨 가문은 신분 조작을 감쪽같이 하더구나. 내가 한 번 속았는데 또 두 번 속겠느냐?”한 번 속았다니
이를 갈며 소리를 지르는 그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김씨 가문을 미워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그러나 서유한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김씨 가문의 어른들조차 보지 못한 그녀가 가문의 원한을 이리 짊어져야 하는 것인지?“어르신, 어르신과 숙부님 그리고 숙모님들이 겪은 일들에 대해서는 저도 유감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저와 무관합니다. 전...”자신이 관여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태석이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갑자기 그녀의 몸을 향해 내리쳤다.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의 동작이 너무 빨라서 그녀는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가느다란 팔뚝을 얻어맞았다. 그가 또다시 지팡이를 들어 내리치려고 하는데 누군가 그의 지팡이를 한 손으로 잡았다. 그의 지팡이를 낚아챈 소지섭이 무릎 위에 지팡이를 올려놓고 두 동강을 냈다.“제가 여기 있는 한 누구도 우리 사모님을 괴롭힐 수 없습니다. 어디 한번 해보시죠.”이태석이 적어도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노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성을 잃은 그가 손자며느리에게 손찌검까지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소지섭은 첫 번째 지팡이가 그녀를 내리칠 때 한발 늦었고 그녀가 괜히 한 대 맞게 되었다.이태석을 사납게 노려보던 소지섭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팔을 쳐다보았다.“괜찮아요?”단단한 물체가 살갗에 부딪혀 고통이 전해졌지만 그녀는 애써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자신의 왼팔을 감싼 채 맑은 눈을 들어 여전히 분노에 차 있는 이태석을 바라보았다.“어르신께서 절 때린다고 해도 어르신 마음속 원한은 풀리지 않으실 겁니다. 게다가 승하 씨와의 사이만 더 멀어지게 되겠죠. 굳이 이러실 필요 있겠습니까?”“굳이?”그가 크게 분노하며 소리쳤다.“너 때문에 승하 그 녀석이 정신을 못 차리고 집안의 원한까지 다 잊고 사는데 내가 어찌 두고 볼 수만 있겠느냐?”그동안은 서유의 신분이 낮아서 손자한테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크게 반대하지 않았고 이승하의 뜻대로 결혼을 허락
서유가 고개를 들어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그 방법이 뭔데요?”이승하의 사촌 여동생이 팔짱을 낀 채 하이힐을 신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당연히 죽이는 거죠.”김씨 가문에서 이씨 가문을 대한 것처럼 이씨 가문에서도 그대로 되갚아줄 것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복수가 계속되면 그 원한은 점점 더 커지는 게 아닌가?그러나 이 도리를 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들을 리가 없었다. 이혼을 하지 않겠다는 그녀를 죽일 생각까지 하다니 너무 잔인했다. 그녀는 받아들이기 힘든 표정을 지으며 이태석을 쳐다보았다.“어르신, 승하 씨 생각도 좀 해주세요.”이승하를 앞세워 자신을 협박하는 그 모습에 이태석은 차갑게 웃었다.“네가 없어도 이 세상은 계속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잘 돌아갈 거야.”이승하의 아버지가 그 여자를 잃고 박화영과 결혼해 아이까지 낳은 것처럼 이승하도 그렇게 될 것이다.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이승하의 손목에 있는 네 개의 흉터를 떠올리며 안색이 어두워졌다.“승하 씨는 저 때문에 네 번이나 자살했었습니다. 저와 그 사람은 자신의 목숨보다 서로를 더 사랑하고 있어요. 둘 중 그 누구라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나머지 그 사람도 결국 따라가게 될 거예요. 어르신께서는 그 사람이 죽기를 바라시는 겁니까?”그 말이 이태석의 가슴을 찔렀다. 목숨이 위태로운 이승하를 의사들이 구조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 그는 눈 밑에 어두워졌다.“당연히 원하지 않지. 그래서 이혼하라고 하는 거야. 네가 이혼에 동의한다면 널 놓아줄 것이야. 무사히 이곳을 떠나게 해주겠다.”그녀는 아픈 팔을 감싸며 이태석을 타일렀다.“저희 두 사람은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어렵게 여기까지 왔어요. 근데 어떻게 쉽게 이혼할 수 있겠습니까?”그와 도리를 따지며 그가 원한을 내려놓고 다시는 그들의 결혼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태석은 아주 단호했다.“너희 두 사람은 반드시 이혼해야 해. 절대 함께할 수 없어.”왜 함께할 수 없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오후 6시쯤, 그녀가 이태석에게 한 대 맞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 남자가 긴 다리를 쭉 뻗으며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경호원들이 줄지어 들어와 소파에 앉아 있던 이씨 가문의 사람들을 둘러쌌다. 그 광경에 겁이 질린 사람들은 목을 살짝 움츠렸다. 이때, 채은서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오빠, 지금 뭐 하는 거예요?”그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서유의 곁으로 다가가 팔의 상처를 확인했다. 팔뚝에 새겨진 빨간 지팡이의 자국이 움푹 들어간 것을 보니 힘이 엄청 들어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상처를 어루만졌고 그 고통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움츠렸다. 연약한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아팠다. 뼈를 다친 것 같았다. 팔을 움츠리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소수빈, 당장 의사 불러.”소수빈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주서희에게 전화를 걸어 정형외과 의사를 데려오라고 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이 몽둥이의 원수는 내가 갚아줄게.” 남자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빨간 눈으로 이태석을 차갑게 노려보았다.“할아버지께서 이러신 건가요?”이태석은 당당하게 인정했다.“내가 때린 거다. 그래서 뭐 어쩔 거니? 네가 날 때리기라도 할 거냐?”윗사람이 손자며느리를 혼내는 게 뭐 어때서? 게다가 그 손자며느리가 김씨 가문의 딸인데.차갑게 콧방귀를 뀌던 이승하는 소지섭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지팡이 줘봐.”소지섭은 즉시 두 동강이 난 지팡이를 이승하에게 건네주었다. 지팡이를 건네받은 남자는 이태석의 앞으로 내던졌다. “저 여자를 때린 손을 할아버지께서 직접 내리치시죠.”이태석과 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채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오빠, 할아버지한테 왜 그래요? 원수 집안의 딸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어찌 됐든 윗사람인데 어떻게 전혀 존중이라는 게 없어요?”그 말을 듣고 있던 서유도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승하는 그녀의
CCTV를 확인한 결과,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더 이상 말이 없었지만 채은서는 여전히 날뛰고 있었다. “오빠, 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그러신 거예요. 오빠도 알다시피 우리 엄마와 넷째 오빠네 부모님 그리고 이씨 가문의 많은 사람들이 김씨 가문에 의해 죽임을 당했어요. 오빠가 그 집안의 딸과 결혼했는데 할아버지가 화 안 나게 생겼어요? 홧김에 분풀이를 하신 거라고요.”사람을 홀릴 만큼 말솜씨가 대단했지만 이승하는 그런 수작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김씨 가문과의 원한은 내 아내를 때린 일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야.”말을 마친 그가 테이블 위에 있는 지팡이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할아버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주는 대로 되갚아주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제 집사람한테 손찌검을 하신 일에 대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그다음에 김씨 가문과의 일에 대해 얘기하시죠.”그 말인즉 이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이태석이 스스로 자신을 한 대 때리는 걸 꼭 보고야 말겠다는 뜻이었다. 아내를 대신해 복수를 하지 않는 이상 다른 일은 얘기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이태석은 가슴을 움켜쥐었다.“이승하, 네가 감히 어떻게 나한테 이래? 이제는 이 할아버지도 안중에 없는 것이냐?”이승하는 똑바로 자리 잡고 앉아 이태석을 빤히 쳐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말했잖아요. 이 여자는 저한테 목숨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라고. 이 여자를 건드리는 건 절 건드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제 말을 그리 무시하시니 저도 이젠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지금껏 이태석이 그한테 해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박화영이 그를 때리는 걸 보고도 이태석은 방관했었고 그를 이용하기만 했었다. 기억 속에 어릴 때부터 가족이 뭔지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만약 그한테 이용 가치가 없었더라면 아마 진작에 쫓겨났을 것이다. 그의 인생에서 서유가 유일한 빛이었다. 근데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그가 행복한 걸 못마땅해하는 건지?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약간 떨리는 것을 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