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는 이태석을 비롯한 이씨 가문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이연석이 말했던 셋째 할아버지, 고모님 그리고 결혼식에서 딱 한 번 만났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서유를 보자마자 증오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사나운 그들의 눈빛을 보며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나와 순식간에 그녀의 옷을 적셨다. 이태석은 용머리 지팡이를 짚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내가 널 서유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김초아라고 불러야 할까?”육성재가 어르신께 말씀드린 것 같다. 그녀는 핸드폰을 꽉 잡고 소지섭을 돌아보았다.차에 타고 있던 소지섭은 바로 이승하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러고는 자신을 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뜻을 알아차린 그녀는 그제야 다시 용기를 내어 이태석을 마주했다. “할아버님, 안으로 드세요.”“그리 부르지 말거라.”이태석이 손을 뻗으며 그녀를 막았다.“할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거라. 난 너 같은 손주며느리 없다.”마음이 약간 아팠지만 그녀는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며 상냥하게 그를 대했다.“그럼 어르신이라고 부르겠습니다.”그가 못마땅한 얼굴로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날 어떻게 불러도 네가 김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바뀔 수가 없는 거야. 말해보거라. 이름도 성도 다 바꾸고 우리 승하한테 접근해서 온갖 수단을 다 써 그와 결혼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복수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우리 이씨 가문의 가업을 모조리 빼앗을 생각인 것이냐?”흠칫하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어르신, 전 어렸을 때부터 서울에 있는 보육원에서 자랐습니다. 제 이름은 원장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고 신분증도 원장님께서 대신 해주신 겁니다. 서유라는 이름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조사해 보시죠. 모두 기록이 남아있을 테니까.”그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너희 김씨 가문은 신분 조작을 감쪽같이 하더구나. 내가 한 번 속았는데 또 두 번 속겠느냐?”한 번 속았다니
이를 갈며 소리를 지르는 그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김씨 가문을 미워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그러나 서유한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김씨 가문의 어른들조차 보지 못한 그녀가 가문의 원한을 이리 짊어져야 하는 것인지?“어르신, 어르신과 숙부님 그리고 숙모님들이 겪은 일들에 대해서는 저도 유감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저와 무관합니다. 전...”자신이 관여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태석이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갑자기 그녀의 몸을 향해 내리쳤다.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의 동작이 너무 빨라서 그녀는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가느다란 팔뚝을 얻어맞았다. 그가 또다시 지팡이를 들어 내리치려고 하는데 누군가 그의 지팡이를 한 손으로 잡았다. 그의 지팡이를 낚아챈 소지섭이 무릎 위에 지팡이를 올려놓고 두 동강을 냈다.“제가 여기 있는 한 누구도 우리 사모님을 괴롭힐 수 없습니다. 어디 한번 해보시죠.”이태석이 적어도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노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성을 잃은 그가 손자며느리에게 손찌검까지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소지섭은 첫 번째 지팡이가 그녀를 내리칠 때 한발 늦었고 그녀가 괜히 한 대 맞게 되었다.이태석을 사납게 노려보던 소지섭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팔을 쳐다보았다.“괜찮아요?”단단한 물체가 살갗에 부딪혀 고통이 전해졌지만 그녀는 애써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자신의 왼팔을 감싼 채 맑은 눈을 들어 여전히 분노에 차 있는 이태석을 바라보았다.“어르신께서 절 때린다고 해도 어르신 마음속 원한은 풀리지 않으실 겁니다. 게다가 승하 씨와의 사이만 더 멀어지게 되겠죠. 굳이 이러실 필요 있겠습니까?”“굳이?”그가 크게 분노하며 소리쳤다.“너 때문에 승하 그 녀석이 정신을 못 차리고 집안의 원한까지 다 잊고 사는데 내가 어찌 두고 볼 수만 있겠느냐?”그동안은 서유의 신분이 낮아서 손자한테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크게 반대하지 않았고 이승하의 뜻대로 결혼을 허락
서유가 고개를 들어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그 방법이 뭔데요?”이승하의 사촌 여동생이 팔짱을 낀 채 하이힐을 신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당연히 죽이는 거죠.”김씨 가문에서 이씨 가문을 대한 것처럼 이씨 가문에서도 그대로 되갚아줄 것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복수가 계속되면 그 원한은 점점 더 커지는 게 아닌가?그러나 이 도리를 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들을 리가 없었다. 이혼을 하지 않겠다는 그녀를 죽일 생각까지 하다니 너무 잔인했다. 그녀는 받아들이기 힘든 표정을 지으며 이태석을 쳐다보았다.“어르신, 승하 씨 생각도 좀 해주세요.”이승하를 앞세워 자신을 협박하는 그 모습에 이태석은 차갑게 웃었다.“네가 없어도 이 세상은 계속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잘 돌아갈 거야.”이승하의 아버지가 그 여자를 잃고 박화영과 결혼해 아이까지 낳은 것처럼 이승하도 그렇게 될 것이다.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이승하의 손목에 있는 네 개의 흉터를 떠올리며 안색이 어두워졌다.“승하 씨는 저 때문에 네 번이나 자살했었습니다. 저와 그 사람은 자신의 목숨보다 서로를 더 사랑하고 있어요. 둘 중 그 누구라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나머지 그 사람도 결국 따라가게 될 거예요. 어르신께서는 그 사람이 죽기를 바라시는 겁니까?”그 말이 이태석의 가슴을 찔렀다. 목숨이 위태로운 이승하를 의사들이 구조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 그는 눈 밑에 어두워졌다.“당연히 원하지 않지. 그래서 이혼하라고 하는 거야. 네가 이혼에 동의한다면 널 놓아줄 것이야. 무사히 이곳을 떠나게 해주겠다.”그녀는 아픈 팔을 감싸며 이태석을 타일렀다.“저희 두 사람은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어렵게 여기까지 왔어요. 근데 어떻게 쉽게 이혼할 수 있겠습니까?”그와 도리를 따지며 그가 원한을 내려놓고 다시는 그들의 결혼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태석은 아주 단호했다.“너희 두 사람은 반드시 이혼해야 해. 절대 함께할 수 없어.”왜 함께할 수 없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오후 6시쯤, 그녀가 이태석에게 한 대 맞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 남자가 긴 다리를 쭉 뻗으며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경호원들이 줄지어 들어와 소파에 앉아 있던 이씨 가문의 사람들을 둘러쌌다. 그 광경에 겁이 질린 사람들은 목을 살짝 움츠렸다. 이때, 채은서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오빠, 지금 뭐 하는 거예요?”그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서유의 곁으로 다가가 팔의 상처를 확인했다. 팔뚝에 새겨진 빨간 지팡이의 자국이 움푹 들어간 것을 보니 힘이 엄청 들어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상처를 어루만졌고 그 고통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움츠렸다. 연약한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아팠다. 뼈를 다친 것 같았다. 팔을 움츠리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소수빈, 당장 의사 불러.”소수빈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주서희에게 전화를 걸어 정형외과 의사를 데려오라고 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이 몽둥이의 원수는 내가 갚아줄게.” 남자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빨간 눈으로 이태석을 차갑게 노려보았다.“할아버지께서 이러신 건가요?”이태석은 당당하게 인정했다.“내가 때린 거다. 그래서 뭐 어쩔 거니? 네가 날 때리기라도 할 거냐?”윗사람이 손자며느리를 혼내는 게 뭐 어때서? 게다가 그 손자며느리가 김씨 가문의 딸인데.차갑게 콧방귀를 뀌던 이승하는 소지섭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지팡이 줘봐.”소지섭은 즉시 두 동강이 난 지팡이를 이승하에게 건네주었다. 지팡이를 건네받은 남자는 이태석의 앞으로 내던졌다. “저 여자를 때린 손을 할아버지께서 직접 내리치시죠.”이태석과 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채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오빠, 할아버지한테 왜 그래요? 원수 집안의 딸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어찌 됐든 윗사람인데 어떻게 전혀 존중이라는 게 없어요?”그 말을 듣고 있던 서유도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승하는 그녀의
CCTV를 확인한 결과,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더 이상 말이 없었지만 채은서는 여전히 날뛰고 있었다. “오빠, 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그러신 거예요. 오빠도 알다시피 우리 엄마와 넷째 오빠네 부모님 그리고 이씨 가문의 많은 사람들이 김씨 가문에 의해 죽임을 당했어요. 오빠가 그 집안의 딸과 결혼했는데 할아버지가 화 안 나게 생겼어요? 홧김에 분풀이를 하신 거라고요.”사람을 홀릴 만큼 말솜씨가 대단했지만 이승하는 그런 수작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김씨 가문과의 원한은 내 아내를 때린 일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야.”말을 마친 그가 테이블 위에 있는 지팡이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할아버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주는 대로 되갚아주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제 집사람한테 손찌검을 하신 일에 대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그다음에 김씨 가문과의 일에 대해 얘기하시죠.”그 말인즉 이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이태석이 스스로 자신을 한 대 때리는 걸 꼭 보고야 말겠다는 뜻이었다. 아내를 대신해 복수를 하지 않는 이상 다른 일은 얘기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이태석은 가슴을 움켜쥐었다.“이승하, 네가 감히 어떻게 나한테 이래? 이제는 이 할아버지도 안중에 없는 것이냐?”이승하는 똑바로 자리 잡고 앉아 이태석을 빤히 쳐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말했잖아요. 이 여자는 저한테 목숨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라고. 이 여자를 건드리는 건 절 건드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제 말을 그리 무시하시니 저도 이젠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지금껏 이태석이 그한테 해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박화영이 그를 때리는 걸 보고도 이태석은 방관했었고 그를 이용하기만 했었다. 기억 속에 어릴 때부터 가족이 뭔지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만약 그한테 이용 가치가 없었더라면 아마 진작에 쫓겨났을 것이다. 그의 인생에서 서유가 유일한 빛이었다. 근데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그가 행복한 걸 못마땅해하는 건지?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약간 떨리는 것을 느
생각지도 못하게 그의 손에 지팡이를 가져간 사람은 옆에 앉아 있는 외손녀도 아니었고 가운데 앉아 있는 이승하도 아니었고 이씨 가문의 그 누구도 아닌 그한테 한 대 맞은 서유였다. 상냥하고 온화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조금은 풀린 듯했다. “네가 김씨 가문의 딸인데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느냐?”“제가 김씨 가문의 딸이든 아니든 정확히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이태석의 말에 대답을 마친 그녀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이씨 가문과 김씨 가문이 원수 집안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가족을 잃은 슬픔은 엄청 크겠죠. 하지만 김씨 가문의 사람들도 많은 가족을 잃었어요. 제가 알기로는 이씨 가문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하더라고요.”“그리고 그들을 Y국으로 쫓아내지 않았나요? 지금까지 김씨 가문의 사람들은 더는 이씨 가문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씨 가문이 김씨 가문을 몰살할 그 당시 전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요. 가문의 원한을 저한테 짊어지라고 하시는 건 정말 억울합니다.”이때, 채은서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당신이 김씨 가문의 딸인 이상 당연한 거 아니에요?”서유는 그녀를 힐끗 쳐다만 볼 뿐 반박하지 않았다. “방금 어르신께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엄마는 김씨 가문의 딸이긴 하지만 젊었을 때 이미 그 집안에서 쫓겨난 사람이고 그 집안과는 오래전부터 연이 끊어진 사람이에요.”“제가 정말 김씨 가문의 딸이면 또 뭐 어때서요? 그 집안에서는 저와 엄마를 인정해 주지 않아요. 저희가 그 집안의 원한까지 감당하는 건 저희한테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요.”“그리고 전 어렸을 때 보육원에서 자랐고 엄마의 얼굴을 본 적도 없어요. 김씨 가문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고요. 근데 제가 어떻게 김씨 가문에서 보낸 스파이겠어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이때, 셋째 할아버지의 부인이 몸을 부르르 떨며 한마디 내뱉었다.“자네가 말하는 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서유가 미처 입을 열기도
이태석은 화를 벌컥 냈다.“감히 말대꾸를 해?”화가 난 이태석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었던 이연석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한편, 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듣자 하니 이승하한테 설명을 요구하려는 것 같았다. 소파에 앉아 있던 이승하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인내심이 바닥났다. “제 아내가 말한 건 모두 사실입니다. 김씨 가문의 일은 이 사람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믿지 못하겠으면 한번 조사해 봐요. 조사를 하고도 여전히 그 원한을 이 사람한테 짊어지게 한다면 그땐 나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그 말인즉 조사한 결과가 서유가 한 말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그는 끝까지 서유를 지키겠다는 뜻이었다. 그의 뜻을 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다만 이 집안의 권력자로서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게 정말 좋은 일인 걸까?채은서는 둘째 오빠가 언젠가는 이 여자 때문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자에게 약점이 있다는 건 누구나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니까. 그녀는 이승하가 후회할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승하는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훤칠한 손을 들어 경호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손님들 배웅해 드려.”주식을 받으러 온 이씨 가문의 친척들은 그냥 이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어르신, 말씀 좀 해보세요. 김씨 가문의 원한은 자신과 무관하다는 저 여자의 말만 듣고 이대로 끝낼 일은 아니잖아요.”셋째 할아버지의 부인은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유를 노려보았다.“어르신, 어찌 됐든 이 여인은 김씨 가문의 딸이에요. 예전의 방식대로 이 여인을 처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비밀에 대해서 난 더 이상 감추지 않을 거예요.”그 말이 나오자 사람들을 하나 같이 묻기 시작했다.“셋째 할머니, 비밀이라는 게 무엇입니까?”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어두운 눈빛으로 이태석을 쳐다보았다. 많이 당황스러웠지만 겉
이태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날 따라 서재로 오거라.”서유와 이연석의 앞에서는 꺼낼 수 없다는 얘기란 말인가? 이연석과 서유는 서로를 마주 보다가 이승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승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연석이랑 서유가 들어서는 안 되는 얘기가 뭡니까?”그 물음에 이태석이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대답했다.“네가 먼저 들어보고 이들에게 말할지 말지 결정하거라.”잘생긴 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그는 몇 초간 머뭇거리더니 소수빈을 쳐다보았다.“주서희는 도착했어?”소수빈이 공손히 대답했다.“병원이 여기서 좀 멀어서요. 지금 오는 길이라고 하니 곧 도착할 겁니다.”그제야 그는 시선을 거두고 조심스럽게 서유의 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많이 아프지?”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걱정하는 그 모습에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많이 좋아졌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서 일 봐요.”그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소수빈을 향해 차갑게 입을 열었다.“주서희가 도착하면 바로 치료하게 해.”소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그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이태석은 이미 소파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가 차가운 얼굴을 한 채 안으로 들어가 이태석의 맞은편에 앉았다.“말씀하세요.” 자신에 대한 이승하의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이 녀석은 이미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놈인데.마음이 섭섭했던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 일은 말하자면 길어. 너희 아버지 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구나.”아들의 얘기를 하면서 이태석의 눈 밑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무거운 족쇄가 그를 조이고 있는 것 같이 한순간에 부쩍 늙어 보였다. 이승하한테 아버지는 술고래였다. 늘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채 박화영이 그를 때리고 욕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그녀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사람과 무슨 상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