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부산 출장이었던 이지민은 친구로부터 이연석이 클럽에서 사람을 때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늦은 시간에 이연석의 별장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남자를 향해 한소리했다.“오빠,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뭐 하러 가혜 씨 남자 친구한테 주먹질을 해?”술에 취해 흐릿해진 시선 속에서 이지민의 윤곽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밀쳤다.“신경 꺼.”그녀는 손에 든 가방을 내려놓고 술병을 빼앗았다.“그만 마셔. 이렇게 마시면 위가 남아나겠어?”허구한 날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먹고 놀기만 하니. 둘째 오빠한테 사진이라도 보내 혼내주라고 하고 싶었다. 그녀가 술병을 빼앗자 이연석은 벌컥 화를 났다.“여기서 귀찮게 하지 말고 그만 돌아가.”힘이 딸린 그녀는 술병을 빼앗지 못해 화가 났다.“그래. 아예 마시고 죽어. 나도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까.”그 말을 뿌리치고 돌아서는데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렸을 때부터 늘 오빠들의 기에 눌려 자랐기 때문에 그들이 그녀의 말을 들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승연 언니의 말이라면 오빠가 새겨들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한 이지민은 별장을 나와 이승연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에야 차를 몰고 별장을 떠났다.마침 부산에 있었던 이승연은 그 얘기를 듣고 바로 차를 타고 이연석의 별장으로 향했다. 만취한 채로 겨우 침대에 엎드려 잠을 청하려는데 이승연의 경호원에게 들려 욕조에 던져졌다.“물 틀어놔. 이놈 정신 좀 차리게.”경호원이 물을 틀자 그가 정신을 차렸다. 허우적거리며 욕조에서 나와 숨을 돌리던 그는 차갑고 굳어있는 이승연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었다.“누나?”구역질이 나는 걸 억지로 참으며 욕조 아래의 계단에 거꾸로 앉아 욕조 가장자리에 머리를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누나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그의 입에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말이 다 나오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노릇이다.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그녀는 가슴이 아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연석아, 네가 가혜 씨를 좋아하는 마음은 이해하는데. 하지만 가혜 씨 마음도 헤아려야 하는 거 아니니?”“가혜 씨가 너한테 마음이 없다면 네가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건 오히려 가혜 씨한테 미움만 더 사게 될 거야.”그런 건가? 내가 지금 소란을 피우고 있는 건가? 왜 다들 내가 소란을 피운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정가혜 그 여자가 먼저 날 화나게 한 건데 말이다.“누나. 가혜 씨가 나한테 이러는 건 내가 싫어서 그런 걸까요?”그 말에 그녀는 흠칫했다. 바보 같은 동생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아직 구별이 잘 안되나보다. 그동안 사귀었던 여자 친구한테는 마음을 줘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제 겨우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그 물음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정가혜와 만난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는 이승연도 잘 몰랐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더 이상 정가혜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동생을 타이를 수밖에 없었다. “이연석.”그녀는 그를 부축하며 말을 이어갔다.“일단 집에 가자. 가혜 씨한테는 내가 물어볼게. 너에 대한 마음이 어떤 건지. 여전히 널 좋아하고 있다면 설득해 볼게. 하지만 너에 대해 마음을 접었다면 너도 나랑 약속해. 다시는 찾아가지 않겠다고.”겉으로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그녀가 좋든 싫든 절대 놓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한편, 정가혜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송사월을 보러 갔다. 그녀는 어젯밤에 이연석과 심형진이 싸운 일에 대해 송사월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다. 그저 병원에 일이 있어서 심형진이 먼저 서울로 돌아갔다는 핑계만 댔다.송사월은 그 말에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주서희가 혼인신고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정가혜와 함께 쇼핑몰로 가서 주서희에게 줄 선물
그녀의 뜻을 잘 알고 있었던 정가혜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당당하게 대답했다.“좋아했었죠.”진짜 좋아했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그 사람이 준 선물들은 돌려주지 않았었다. 어쩌면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올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좋아했었다는 건 그가 그녀의 마음을 잡지 못해서 이젠 지나간 일이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결국은 이연석 그의 잘못이었다. 다만 그 대답을 듣고 이승연은 어떤 말을 이어가야 할지 몰랐다. 설득하고 싶었지만 정가혜한테는 이미 지나간 일이 되어버렸고 설득하지 않으려니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 지금은...”“지금은 남자 친구 있어요.”정가혜는 그녀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버렸다. “이연석 씨 설득해 주세요. 더 이상 저와 심형진 씨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해요.”이미 결정한 이상 마음을 굳게 먹을 것이다. 심형진이 먼저 헤어지자고 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역경에도 절대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똑똑히 알아들었다. 그녀는 이연석을 원하지 않았다. 아주 확고하게 현재의 남자 친구를 선택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그래요. 연석이는 내가 잘 타이를게요.”두 사람의 대화가 끝날 무렵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다주었다.정가혜는 몇 모금 마시고는 더 앉아 있기가 민망하여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그 모습에 이승연은 더는 말리지 않고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별 인사를 했다.정가혜가 카페를 나간 뒤, 이승연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옆 좌석으로 가더니 난간을 톡톡 두드렸습니다.“똑똑히 들었어?”먼저 돌아가라고 했지만 이연석은 한사코 따라오려고 했다. 이젠 직접 그녀의 마음을 들었으니 물러서지 않겠는가?소파에 등을 기댄 채 눈을 내리깔고 있던 그는 핸드폰 사진첩에 한창 두 사람이 연애 중일 때 등산하면서 함께 찍었던 사진을 쳐다보았다. 사진 속 정가혜는 환한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를 바라보는 눈빛마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당시 그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
한편, 정가혜와 심형진이 막 체크아웃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려는데 이연석이 부랴부랴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숱이 많은 잔머리는 바람에 흐트러졌고 셔츠의 넥타이도 뒤틀려 엉망이 되어버렸다. 심형진은 그가 또 정가혜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줄 알고 한 걸음 앞으로 나와 그녀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이연석에게 경고했다. “또다시 함부로 굴면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그런 위협은 이연석에게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그가 새빨개진 눈으로 심형진의 뒤에 숨어있는 그녀를 응시했다. “누나랑 하는 얘기 다 들었어요. 늦은 고백이라고 생각할게요.”“가혜 씨의 고백을 받았으니 나도 가혜 씨한테 말해주고 싶어요. 나 가혜 씨 좋아해요. 아니 사랑하는 것 같아요.”술에 취한 주정뱅이가 헛소리를 하는 것처럼 횡설수설하고 온몸에 술 냄새가 가득했다. 당사자인 그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의 말을 알아듣더라도 바람둥이가 말한 사랑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제3자인 심형진은 한눈에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이제 와서 깨달은 남자의 사랑은 늦었지만 깊은 사랑이었다. 이 세상에서 이연석과 같은 부잣집 도련님이 이렇게 미친 듯이 쫓아다니면 당해낼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그는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려 그녀를 자신의 뒤로 완전히 숨겨버렸다. “이연석 씨, 가혜는 지금 내 여자 친구예요.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건 경우가 아닌 것 같네요.”그를 힐끗 흘겨보는 이연석의 새까맣고 그윽한 눈동자에 경멸이 가득했다. “아내가 아니라 그저 여자 친구일 뿐이죠. 그러니 나한테도 고백할 권리가 있는 겁니다.”그는 심형진을 밀어내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심형진 씨한테 사과할게요. 나 좀 다시 좋아해 주면 안 돼요?”갑자기 고개를 숙이는 그 모습에 그녀는 어리둥절해졌다. 이 사람이 선배한테 사과를 하겠다니?늘 도도하고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던 그런 사람이 사과를?멍하니 서 있는데 그가 몸을 돌려 심형진을 향해 사과했다.“미안합니다.”쿨하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승연은 두 사람이 떠나자 이연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이제 그만 현실을 받아들여. 가혜 씨 마음은 이미 너한테서 떠났어. 이젠 남자 친구도 생겼으니까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최소한 반박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그녀는 막냇동생이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뭐라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예전의 동생은 꽤 행복해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의 막냇동생은...눈을 내리깔고 애써 눈 밑의 감정을 감추고 있는 동생을 보며 그녀는 마음이 아팠고 그의 팔을 다독였다. “괴로워하지 마. 인생은 길어. 언젠가는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그래요?”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데 예전과 같은 무심한 얼굴이었다. “누나. 나 노력한 거예요. 맞죠?”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확실히 노력했었으니까. 어렸을 때, 체격이 작았던 이연석은 늘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었다. 한번은 화를 참지 못하고 뚱뚱한 친구를 심하게 때린 적이 있었다. 학교 교장이 학부모를 불러왔고 두 어린이에게 서로 사과하라고 했었다.근데 뚱뚱한 아이가 사과를 하자 이연석은 죽어도 사과를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이렇게 고집이 센 사람이 정가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심형진에게 고개까지 숙였으니. 그한테는 참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천천히 묻는 그의 말에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몰랐다. “날 버린 여자이니 나도 이젠 그 여자 버릴 거예요.”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를 쳐다보았다.그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아는 사람 같았다. 조금 전까지도 미친 듯이 달려들어 사과를 하던 사람이 지금은 또 멀쩡한 듯했다. 그와 이승하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이었다. 이승하는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었지만 이연석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더 충실한 사람이었다. 이성보다 감성이 더 앞서는 사람은 결국 큰코다치게 될 것이다.세상만사 모든 걸 쉽게 생각하던 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어찌 동생들이 하나같이 이리 속을 썩이는지.그전에는 이승하가 죽느냐 사느냐 자살을 네 번이나 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근데 지금은 이연석이 또 이렇게...다른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도 바람 잘 날이 없었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햇볕에 타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와 결혼하지 않으려는 다섯째 동생. 그리고 여태껏 나타나지 않았던 여섯째 동생은 마치 은신이라도 한 것처럼 출근도 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매일 집에서 게임만 하고 있다. 거기에 이연석 이 녀석까지 더해 그들한테는 이미 두손 두발 다 들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려 한다. 그녀도 이젠 더 이상 신경 쓰기 귀찮다. 공항, 심형진은 물 한 병을 사서 뚜껑을 열어 대기실에 앉아 있는 정가혜에게 건네주었다.“고마워요.”그녀는 물병을 건네받아 묵묵히 물 한 모금을 마셨다.옆에 앉아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그가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금 전에 네가 이연석 씨의 질문에 대답하는 걸 내가 두 번이나 막았는데. 기분 상한 건 아니지?”그녀는 고개를 흔들 뿐 아무 말이 없었다.그 모습에 심형진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미안해. 네가 이연석 씨한테 끌려갈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서 그랬던 거야.”“알아요. 괜찮아요.”그녀는 괜찮다는 듯 그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고 긴장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 그녀를 붙잡기 위해 작은 꾀를 부린 것이다. 사실 이런 그의 속셈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심형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긴장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전 남자 친구라는 건 언제나 민감한 존재였다. 게다가 방금 이연석은 심형진이 보는 앞에서 그녀한테 고백까지 했으니 더 마음이 쓰이겠지. “선배, 걱정하지 말아요. 앞으로 다시는 나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그와 3년을 만났기 때문에 그의 성격이 어떤지는 어
어슴푸레 동이 튼 아침, 침대에 누워있던 주서희는 어렴풋이 눈을 떴고 창밖으로 갈매기들이 스쳐 지나갔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양쪽 창문으로 들어오자 실내의 향이 담백한 맛을 자아냈다. 그녀가 좋아하는 향기였고 그녀가 좋아하는 바다 풍경이었고 집안의 인테리어조차도 그녀가 한때 꿈꾸었던 신혼집 인테리어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 지나간 일일 뿐. 뒤늦게 찾아온 진심에 대해 그녀는 늘 외면해 왔지만 그 사람은 계속 과거에 살고 있는 듯했다. 방문이 열리고 보라색 셔츠를 입은 소준섭이 우유와 빵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한동안 갇혀 있더니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 잘생긴 얼굴이 지금은 눈 밑이 어두웠고 그늘이 져 있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아침 식사를 침대 머리맡에 놓고는 다시 몸을 일으켜 침대에 누워 자는 척하고 있는 주서희를 쳐다보았다.“일어났으면 뭐 좀 먹어.”그녀를 구청 앞에서 데려온 후, 그는 그녀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의 눈을 가린 채 그녀를 배에 태우고 섬으로 왔다. 그러고는 그녀를 밀폐된 방에 가두어 두었다. 밤새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퍼부어도 그는 상대조차 하지 않았고 방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윤주원과 왜 결혼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 일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그녀는 그를 외면한 채 눈을 내리깔고 묶여있는 자신의 두 손을 쳐다보았다. 손과 발이 밧줄에 묶인 채 밤새 몸부림치다가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안 일어날 거야? 내가 직접 먹여줘?”그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손목시계를 벗어 던진 뒤 침대에 반쯤 꿇어앉아 주서희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머리맡에 놓인 우유를 들고 그녀의 입에 부었다.그녀가 마시려 하지 않고 입술을 꼭 다물고 있으니 우유가 입가로 흘러내려 소준섭의 옷을 적셨다.우유가 묻은 옷을 보고 그가 깊고 음험한 눈을 들어 그녀를 차갑게 훑어보았다.“정말 안 먹을 거야?”천천히
“서희야, 나 정말 아파...”주서희 위에 올라타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지고 떨리기 시작했다.“아프면 나를 놔요!”“거기가 아픈 게 아니야.”소준섭은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위로 가져갔다.“여기가 아파.”주서희의 얼굴을 바라볼 때, 깊게 파인 눈에서 슬픔이 서서히 드러났다.“서희야, 너랑 결혼하려고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 정말 거의 죽을 뻔했어.”“그런데 넌 날 속이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러 갔지. 내가 얼마나 아픈지 네가 알기나 해?”말을 마친 후, 소준섭은 피로 범벅이 된 다른 손으로 주서희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내가 막지 않았다면, 넌 지금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겠지?”주서희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고, 눈에는 혐오와 증오가 가득했다.남자의 가늘고 약한 손가락이 공중에서 몇 초간 멈춘 후, 갑자기 주서희의 뺨을 꽉 잡았다.“서희야, 우리 약속했잖아. 내가 소 씨 집안 사람들을 설득하기만 하면 나랑 결혼해주겠다고. 그런데 왜 갑자기 윤주원과 결혼하려는 거야?”이 말을 할 때 그의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주서희의 얼굴을 움켜쥔 손가락에는 볼이 움푹 파일 정도로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주서희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소준섭의 행동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런 차가운 무시로 그를 몰아내려는 듯.소준섭은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잡았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따뜻한 손가락 끝이 목을 지나 계속 아래로 내려가며 차가운 감각을 남겼다.마치 복수하러 돌아온 뱀이 기어가는 곳마다 사람을 얼려 죽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주서희는 굴욕을 참으며 턱을 치켜들고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그녀보다 더한 증오가 드러나 있었다.그런 눈빛을 보자 주서희는 비웃었다.하, 소준섭이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증오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건 그가 자초한 일이면서.소준섭의 손가락은 그녀의 허리 뒤에서 멈췄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들어 주서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서희야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