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생각에 김선우는 흥분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어 벽에 붙어있는 규칙을 가리켰다.“누구의 제안을 받아들일지는 카지노의 규칙에 따라 추첨을 통해 결정할게요. 어때요?”이승하는 총을 거두어 경호원에게 던져준 뒤 김선우를 차갑게 쳐다봤다.“내가 한 말이 바로 규칙이야.”그는 어떤 규칙도 상관하지 않았다. 규칙은 그가 정하는 거니까.이렇게 독불장군인 사람은 또 처음 본다. 그 모습에 김선우는 피식 웃었다. “역시 이씨 가문의 권력자답게 기세가 엄청나네요. 하지만 이곳은 JS 그룹이 아니라 불야성입니다.”“불야성에 온 이상, 모든 건 이 카지노의 규칙에 따라 행동해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내기가 무슨 의미 있겠습니까?”김선우 또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내기가 시작도 하기 전에 두 사람의 힘겨루기가 이미 시작된 듯하다. 김선우를 쳐다보는 이승하의 눈빛에 핏기가 서리고 살의가 가득 찬 것을 보고 서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김선우가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이승하는 진작에 손을 썼을 것이다. 김선우가 이렇게 날뛰는 걸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이었다. 서유를 구해준 이유로 이승하가 자신에게 손을 쓰지 않을 거라는 걸 김선우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감히 이리 이승하의 앞에서 날뛰는 것이었다.“이 대표님, 판돈은 추첨을 통해 결정하시죠. 그래야 이 내기가 공평해질 거 아닙니까? 그러니...”“시작해.”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남자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김선우와 내기를 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신세를 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타협할 수밖에 없는 그의 모습을 보고 김선우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딜러.”카지노의 딜러가 그 소리를 듣고 이내 깍듯이 다가왔다.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추첨통 가져와요.”“네.”직원이 곧 추첨통을 가지고 왔다. “이 대표님, 알파벳 하나 고르시죠.”김선우
치를 떨고 있는 그녀의 시선을 김선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VIP룸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는 아주 예의 바르게 가늘고 긴 손을 내밀며 이승하를 향해 말을 건넸다.“가시죠. 이 대표님, 내기 한 판 합시다.”“이 대표, 내기하지 마.”바로 이때, VIP룸에서 나온 로버트, 케네디, 스티븐, 제프 네 사람이 앞으로 다가와 이승하를 막았다. “저자는 카지노의 황제라고 불리는 사람이야. 도박에서 저자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어.”로버트가 먼저 이승하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카지노의 사장으로서 김선우를 막아섰다.“김선우 씨는 이곳의 단골손님이잖이. 이 대표는 이곳에 처음 놀러 온 사람이야. 그런 이 대표한테 한판 하자고 하는 건 너무 한 거 아닌가?”김선우가 로버트를 향해 차갑게 웃었다.“뭡니까? 카지노 사장으로서 손님들의 도박판에 끼어들 생각인가요?”“그런 뜻이 아니야.”“그럼 무슨 뜻인가요?”로버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좋아. 꼭 해야겠다면 방법을 바꾸는 건 어때?”“그래. 방법을 바꿔.”테이블 위에서는 김선우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 조금 전, 아무리 그들과 내기해서 이긴 이승하라도 말이다. 일 년 내내 카지노에서 빈둥거리는 김선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김선우가 어떤 사람인지 로버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자연히 이승하가 속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명문 집안의 자제들이 이승하를 두둔하는 것을 보고 김선우는 냉소를 금치 못했다.이승하같이 이렇게 냉혈한 인간에게도 그를 도와주는 친구가 있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한편, 김선우는 로버트가 좀 꺼렸다. 라스베이거스 쪽은 앞으로도 로버트의 가문에 의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바꿉시다. 어차피 이기는 사람은 나니까.”말을 마치고는 그가 몸을 옆으로 돌려 복도 끝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레이싱 대결은 어떠합니까?”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이승하를 말해 물었다. 서유의 손
그러나 김선우 또한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승하가 판돈을 바꾸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지.“좋아요. 하지만 그 대신 대결하는 동안 누나가 제 뒤에 앉아 있어야 합니다.그가 손을 뻗어 모터사이클의 뒷좌석을 두드리며 도발적인 눈빛으로 이승하를 쳐다보았다.“김선우, 정도껏 해.”주먹을 불끈 쥔 이승하의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났고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쥐어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동의 못 합니다.”추첨에서 이긴 사람은 그였으니 그의 제안에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전혀 바꿔 줄 이유가 없었다. 결국 이번 내기는 이승하를 엿먹이려는 김선우의 속셈이었다. 때문에 이승하가 제안한 것처럼 유리하게 판돈을 바꾸는 것이 먼저였다. 판돈을 바꿔야만 이승하가 이기게 되었을 때 김선우한테 뽀뽀를 할 필요가 없게 되고 이승하도 김선우의 파트너와 엮이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남편은 이길 자신이 있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다만 김선우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고 조건을 제시하는 대가를 얻으려 했다. 날라리 같은 김선우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뭔가 생각난 듯 이승하의 손을 놓고는 빠른 걸음으로 김선우를 향해 걸어갔다.“그래요. 내가 뒤에 앉을게요. 시작해요.”그녀의 한마디로 상황이 종료되었고 이승하가 막으려 해도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뭐 하는 거야?”고개를 돌리고 그에게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여보, 힘내요. 꼭 이겨야 해요.”그녀의 눈빛을 읽은 듯 미간을 찌푸리던 그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승하는 무조건 그녀를 믿기로 했다. 서유는 그를 다독인 후, 주먹을 뻗어 김선우의 등을 힘껏 내리쳤다.“헬멧 좀 줘요.”그녀에게 한 방 얻어맞은 김선우는 등에서 전해진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서유를 돌아보았다. “뭘 먹고 자랐길래 힘이 이렇게 센 거예요?”“사람이요.”그는 헬멧을 그녀에게 건네주고 올바른 착용법까지 가르쳐 준 뒤, 반대편에 서 있는 이승하를 쳐
펑.총성이 울리는 순간, 모터사이클 두 대가 화살처럼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이승하가 운전하던 그 사이클에서 책 한 권이 날아왔고 로버트가 그걸 주워 확인해 보았다.그걸 펼쳐보던 로버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세상에. 모터사이클 사용 설명서라니.”익숙하게 모터사이클을 운전하는 이승하의 모습을 보고 몰래 배운 줄 알았다. 근데 이 현장에서 운전법을 터득하게 될 줄이야?대단한 배짱이었다. 한편, 김선우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서유는 잘 잡히지 않자 그의 뒷덜미를 꽉 잡았다. 모터사이클의 속도가 빠르고 서유가 뒤에서 옷깃을 꽉 잡자 김선우는 숨이 막혀 미간을 찌푸렸다.“이것 좀 놓아요. 목 졸려 죽겠네.”그러나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한사코 손을 놓지 않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였다.속도를 내면 서유가 뒤로 넘어지면서 더욱 목을 조였기 때문이다. 그가 속도를 낮추자 옆에 있던 모터사이클이 그를 가뿐히 앞질렀다.속도를 올리는 것과 목이 졸려 죽는 것 두 가지 선택을 놓고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목이 졸려 죽는 걸 선택했다. 어찌 됐든 이승하에게 뺨을 맞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건 너무 창피한 일이었다. 코너를 돌던 그때, 그가 갑자기 속도를 높였고 미친 듯이 이승하의 뒤를 쫓았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서유는 한 손을 떼어 김선우의 허리를 잡았다. 자신의 허리를 감싸안은 그녀의 손을 보고 김선우는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렸다.“진작에 그럴 것이지.”말이 마치고 그는 다시 속도를 냈고 엄청난 속도에 서유는 두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안아야 했다. 두 손으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그녀를 보고 그는 미친 듯이 이승하의 뒤를 쫓으며 휘파람을 불었다.“봐요. 누나가 제 허리를 잡았어요.”이승하가 차가운 눈빛으로 오만방자한 김선우를 쳐다보았다. 하찮은 표정을 지으며 아내한테 이런 바보 동생이 있다는 게 정말 창피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바보 동생 김선우는 신나서 다시 속도를 내어 앞으로 돌진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김선우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차를 돌려 산길로 접어들었다.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뒤에 앉아 있던 서유는 하마터면 튕겨 나갈 뻔했다. 그녀는 그의 옷깃을 꽉 움켜쥐고 나서야 비로소 몸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김선우 씨, 패배를 인정할 용기가 없어요?”분노에 찬 그녀의 목소리가 쌩쌩 부는 바람과 함께 귓가를 스쳐 갔다. “그러길래 누가 경기를 방해하래요?”그녀보다 더 화가 난 그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았다.“목 조르고 간지럽히지 않았으면 내가 이겼을 거라고요.”흠칫하던 그녀가 이를 악물고 다시 반박했다.“그러길래 왜 날 뒤에 앉혀요?”화가 난 그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의 말처럼 그녀를 뒤에 태우지 말았어야 했다.하지만 아내의 방해로 대결에서 이긴 것이니 이승하도 떳떳한 것은 아니었다. 이 대결의 결과를 김선우는 승복할 수 없었다. 백미러를 통해 다시 모터사이클을 운전해서 뒤를 쫓아오고 있는 이승하의 모습이 보였다.그가 따라잡을 수 있다면 기꺼이 뺨 두 대를 맞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원래의 코스대로 속도를 내어 앞으로 질주했고 다시 이승하와 대결이라도 하듯 안간힘을 썼다. 서유는 고개를 돌리고 뒤따라오는 이승하를 쳐다보았다.거리가 멀어서 남자의 안색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미친 듯이 두 사람을 쫓아오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김선우가 자신을 납치할까 봐 걱정되어 이렇게 미친 듯이 쫓아오고 있는 것이었다.이러다가는 그한테 큰일이라도 날까 봐 두려웠던 그녀는 손을 뻗어 김선우의 뒷덜미를 꽉 잡았다.“당장 내려줘요. 그렇지 않으면 목 졸라 죽일 거예요.”“그러든지 말든지. 난 죽어도 멈출 생각 없어요.”원수한테 지고 뺨 맞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훨씬 더 나았다. 김선우는 필사적으로 속도를 냈고 끊임없이 질주했다. 자신이 방해받지 않고 진정한 능력을 발휘한다면 이승하가 따라잡을
온 힘을 다해 내려친 이승하의 뺨에 의해 김선우의 희고 부드러운 얼굴에 이내 빨간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바닥에 쓰러진 김선우는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붉게 부어오른 얼굴을 감싸고는 우뚝 솟은 이승하를 쳐다보았다.이런 젠장. 처음으로 누구한테 맞았다. 근데 그 사람이 원수 가문의 이승하라니. 싸움을 한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이승하한테 뺨을 맞았다. 뭐랄까... 형이나 아버지한테 교육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불쾌했다. 창피하기 짝이 없었던 그가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대로 보기도 전에 이승하가 또다시 엄청난 힘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뺨을 연달아 두 대 맞으니 눈에서 불꽃이 튀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런데 왜 오른쪽 얼굴만 때리는 건지. 같은 곳을 맞으니 아파 죽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승하가 다시 손을 뻗어 그의 왼쪽 얼굴을 세게 내리쳤다. 한 대 때린 것도 모자라 또다시 한 대 내리쳤다. 마치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이기면 뺨 두 대만 때린다고 했던 사람이 무턱대고 두 대를 더 때르니 김선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주먹을 불끈 쥐고는 바닥에서 일어나 이승하와 싸우려고 했다.근데 일어나기도 전에 상대방의 발길에 세게 걷어차여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다시 한번 발버둥을 쳤지만 늘씬한 다리에 꼼짝없이 짓눌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승하는 그의 가슴을 힘껏 밟은 후 팔꿈치를 무릎 위에 괴고 몸을 약간 숙이며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첫 번째 뺨은 누나를 대신한 혼내준 거야.”“두 번째 뺨은 매형인 내가... 네가 마음에 안 들어서고.”그 뜻을 김선우는 알아듣지 못했다. 자신을 매형이라고 하는 그의 말에 김선우는 화가 나서 얼굴을 붉혔다.“앞에 맞은 두 대의 뺨은 제가 졌으니까 인정할게요. 근데 그 후의 뺨은 무슨 자격으로 때리는 겁니까?”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의 얼굴에 갑자기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내 허락 없이 내 아내를 데려갔으니 당연히 맞
그 생각이 떠오르자 김선우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육성재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정가혜의 클럽으로 가고 있던 육성재는 김선우의 전화를 보고 짜증스러운 얼굴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형, 김초희를 찾고 있지? 사진 좀 보여줄 수 있어?”마침 육성재는 손에 김초희의 사진을 들고 그녀의 얼굴을 머릿속에 새겨넣고 있었다.“사진은 왜?”남편을 따라 떠나는 서유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김선우가 입을 열었다.“어떤 여자를 봤는데 왠지 낯이 익어서 말이야. 형이 찾고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네.”그 말에 육성재는 바로 전화를 끊고 김초희의 사진을 찍어서 김선우에게 보냈다. 사진을 받아 확대해서 자세히 보니 사진 속 김초희의 모습은 서유와 비슷했다. 하지만 닮았을 뿐 김초희가 아니었다. 서유는 작은고모의 딸도 아니고 사촌 형이 찾던 사람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작은고모가 도와달라고 찾아왔을 때, 아이를 두 명 데려왔다고 했다. 한 명은 다섯 살이 된 김초희였고 또 한 명은 갓난아기였다. 다만 그 아기는 작은고모가 굶어 죽고 김초희가 그녀를 안고 거리를 돌아다닐 때 이미 심장마비로 죽었다.이 일은 김초희가 김씨 가문의 사람들에게 직접 알린 것이었다. 김씨 가문의 사람들은 다섯 살짜리 아이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조사하지 않았었다.김초희와 닮은 서유가 설마 그 죽은 아이는 아니겠지?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마침 육성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낯이 익다는 그 사람이 내가 찾던 사람 맞아?”성격이 급한 육성재는 그새를 못 참고 바로 전화를 걸어 결과를 물었다. “형이 찾던 사람은 아니야. 근데 그 여자가 작은고모의 또 다른 딸일 가능성은 없을까?”“네 말은 그 갓난아이가 다시 살아나서 네 앞에 있다는 거야?”“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지.”그의 황당한 말에 화가 치밀어오른 육성재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욕설을 퍼부었다.“김선우, 허구한 날 먹고 놀고 도박이나 하는 너한테 김씨 가
게임을 하면서 그녀는 심형진이 확실히 유흥업소에 자주 드나들지 않고 카드놀이도 잘할 줄 모른다는 걸 느꼈다. 저도 모르게 심형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선배, 선배는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시고 노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죠?”좋은 패를 손에 쥐고도 제대로 카드놀이를 못 하는 심형진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응. 담배도 안 하고 술도 안 하고 막 놀지도 않아.”이연석과는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깨끗하고 물들지 않는 사람이고 남자 친구로서는 완벽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이연석 때문에 그녀의 남자 친구가 되었으니. 이 사람한테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심형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무슨 생각해?”고개를 흔들던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패를 보려고 고개를 숙이는데 앞머리가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다. 머리카락을 정리하려고 손을 뻗는데 큰 손이 다가와 그녀의 시선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손끝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다시 귀 뒤로 향할 때,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진도가 너무 빠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어제 맞선 파티에서 심형진을 남자 친구로 받아들였으니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진도가 빨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고마워요.”“난 네 남자 친구야. 이제부터 나한테 고맙다는 얘기 하지 마.”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심형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저 그녀가 수줍어서 그런 줄로만 생각했다.한편, 소수빈을 거절한 이연석은 술을 몇 잔 더 마셨다. 술에 취하면 정가혜의 클럽으로 그녀를 찾아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근데 잘못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고 아무리 애를 써도 지워지지가 않았다.그녀가 많이 보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술병을 들고 비틀거리며 클럽으로 향했다. 술기운을 빌려 그녀한테 묻고 싶었다. 도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