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하면서 그녀는 심형진이 확실히 유흥업소에 자주 드나들지 않고 카드놀이도 잘할 줄 모른다는 걸 느꼈다. 저도 모르게 심형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선배, 선배는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시고 노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죠?”좋은 패를 손에 쥐고도 제대로 카드놀이를 못 하는 심형진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응. 담배도 안 하고 술도 안 하고 막 놀지도 않아.”이연석과는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깨끗하고 물들지 않는 사람이고 남자 친구로서는 완벽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이연석 때문에 그녀의 남자 친구가 되었으니. 이 사람한테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심형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무슨 생각해?”고개를 흔들던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패를 보려고 고개를 숙이는데 앞머리가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다. 머리카락을 정리하려고 손을 뻗는데 큰 손이 다가와 그녀의 시선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손끝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다시 귀 뒤로 향할 때,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진도가 너무 빠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어제 맞선 파티에서 심형진을 남자 친구로 받아들였으니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진도가 빨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고마워요.”“난 네 남자 친구야. 이제부터 나한테 고맙다는 얘기 하지 마.”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심형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저 그녀가 수줍어서 그런 줄로만 생각했다.한편, 소수빈을 거절한 이연석은 술을 몇 잔 더 마셨다. 술에 취하면 정가혜의 클럽으로 그녀를 찾아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근데 잘못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고 아무리 애를 써도 지워지지가 않았다.그녀가 많이 보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술병을 들고 비틀거리며 클럽으로 향했다. 술기운을 빌려 그녀한테 묻고 싶었다. 도
“여긴... 어쩐 일이에요?”그는 얼굴은 잘생겼지만 성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지난번에 이곳에 와서 김초희의 행방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육성재의 기세에 잔뜩 겁을 먹었었다. 무서워서 죽을 뻔했지만 서유를 보호하기 위해 김초희가 Y국으로 갔다고 육성재에게 거짓말을 했었다. 이렇게 또 찾아온 걸 보면 아마 그녀가 자신을 속인 것을 알고 따지려 온 듯하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그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향해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성격이 안 좋은 사람을 대할 때는 최대한 부드럽게 상대방의 뜻에 맞혀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김초희 지금 어디 있나요?”육성재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키가 큰 그는 우뚝 서 있었고 그녀를 보려면 고개를 숙여야 했다.다행히 오늘은 외출하기 전에 약을 챙겨 먹었기 때문에 급한 성질을 조금은 억누를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가 육씨 집안의 권력자인데. 클럽 사장이라는 자가 이렇게 홀대를 하다니? 장사를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지?장사를 못하는 게 아니라 사실 그가 두려웠기 때문에 룸으로 안내하는 것을 깜빡한 것이었다. 돈 많은 다른 손님이었다면 진작에 룸으로 안내해 잘 대접했을 것이다.그를 속인 적이 있어서 제 발이 저려 감히 그러지 못한 것이다. 근데 김초희의 행방만 묻고 더는 뭐라 하지 않는 모습에 정가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생각대로 성격이 급한 육성재는 김초희의 항공편 정보를 확인할 인내심이 없어서 그녀의 말을 믿었던 것 같다. 그녀의 말을 믿고 있으니 더 이상 따지지 않은 것이고. 차라리 다행인 것 같다. 하지만 김초희의 일에 대해 어떻게 그한테 말을 해야 할지?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계속 그를 속이기로 했다. 어차피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 않은 것 같으니까.“저기...”그녀는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자신의 입을 틀
붉게 물들어진 그의 눈빛을 보고 그녀는 가슴이 떨렸다.왜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한 건지? 멀쩡하게 얘기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Y국이요. 지씨 가문의 공동묘지에 묻었어요.”지씨 가문의 공동묘지라는 걸 알려주면 김초희가 오래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조사하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육성재는 김초희가 언제 죽었는지조차 조사할 인내심이 없어 보였다. 어디에 묻혀있냐고 물어본 건 그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려고 한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죽었는지는 그한테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죽었는데 더 물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하여 김초희가 언제 죽었는지에 대해 조사하지 않은다면 김초희의 신분으로 살고 있는 서유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서유에 대해 조사하지 못하는 이상 어디에 묻혔는지 알려주는 것이 더 진실할 것 같았다. 그럼 김초희가 죽었다는 걸 알고 육성재도 다시는 그녀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지씨 가문이요?”지씨 가문의 공동묘지에 묻혔다면 김초희가 죽었다는 소식은 아마도 진실인 것 같다.김초희가 지현우의 후원으로 자랐고 그 후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걸 어머니한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대로라면 지씨 가문에 공동묘지에 묻히는 것도 정상이었다.다만 김초희가 죽었으니 어머니는 어떡하지?“제가 알고 있는 건 이미 다 얘기했어요. 이것 좀 놓아주세요.”조금만 더 붙잡고 있으면 정가혜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것이다. 육성재는 그녀를 한 번 훑어보고는 덥석 내려놓았다.똑바로 선 뒤, 그녀는 붉게 물든 자신의 목덜미를 만지며 육성재를 빤히 쳐다보았다.“안으로 들어갈래요?”핸드폰을 꺼내고 있던 그가 그 말을 듣고 애써 차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내가 지금 저 안에 들어가서 놀 기분으로 보입니까?”이를 악물고 말하는 그 모습에 정가혜는 더 이상 감히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러나 호기심에 슬그머니 그를 훔쳐보았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왜 이렇게 김초희를 찾는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육성재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지현우가 죽었을 때, 같이 묻은 사람이 있다는 걸 왜 난 몰랐었지?”지현우와 케이시가 죽었다는 소식은 이 바닥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왕실까지 얽힌 사건이라 소식은 이미 봉쇄된 지 오래되었고 정확한 이유도 합장 소식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전화기 맞은 편의 사람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나도 이제 막 알게 된 소식이야. 지씨 가문 쪽에서 소식을 꽉 잡고 있어서 외부로 흘러나오지 않은 것 같아.”“지씨 가문에서는 김초희를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었잖아? 근데 왜 갑자기 죽은 뒤에는 합장에 동의한 거지?”“지현우한테 짝을 만들어 주고 싶었나 보지. 살아있을 때는 결혼도 안 했으니까.”어렴풋이 지씨 가문에서 합장을 동의한 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뭔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김초희는 어떻게 죽은 거야? 언제 죽었어?”전화기 너머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모르겠어. 최근 몇 년 동안의 행적을 누군가 다 바꿔버린 것 같아. 찾을 수가 없어.”설마 누군가 자신이 김초희를 찾는 목적을 알고 미리 김초희의 진짜 정보를 차단이라도 한 걸까? 그래서 김초희를 찾을 수 없었던 걸까?줄곧 이상하다고는 느꼈지만 정보가 모두 연관성이 있는 것 같아 지금까지 누군가가 중간에서 방해하고 있다고 의심한 적이 없다. 근데 이제 보니 그가 입수한 정보는 대부분 거짓이었다. 다만 김초희에 관한 정보를 조작한 사람은 누구일까?설마 그를 가지고 놀던 이승하는 아니겠지?그러나 이승하가 무엇 때문에 김초희의 정보를 조작하려고 한 것일까? 그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던 그는 생각할수록 짜증이 나서 아예 생각을 접고 전화기 너머의 사람에게 말했다.“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더 이상 조사해 볼 필요 없을 것 같아. 적당한 때
정신을 차린 이승하가 그녀의 머리를 톡톡 쳤다.“아니야. 먼저 식당 가서 밥 먹어. 난 택이한테 볼 일이 있어.”그녀는 조직에서 또 그를 찾는 줄로만 알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그녀가 자리를 뜨자마자 그가 유람선의 창문을 두드렸고 이내 택이가 나타났다. “보스, 무슨 일이십니까?”“육성재가 계속 김초희를 찾고 있어. 무엇 때문에 김초희를 찾는 건지 한 번 알아봐.”육성재의 어머니 김윤주는 김영주의 언니였고 육성재는 김초희와 서유의 사촌 오빠였다. 그가 이렇게 공을 들여 김초희를 찾고 있는 걸 보면 김초희가 자신의 여동생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고 또한 김씨 가문에서 김영주 세 모녀를 어떻게 대했는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 왜 지금 와서 애타게 김초희를 찾고 있는 걸까? 김초희를 이용해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게 틀림없다. 육씨 가문에서 단순히 가족을 만나기 위해 김초희를 찾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그 당시 어린 김초희와 갓난아기였던 서유를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여 육성재가 무엇 때문에 김초희를 찾고 있는 건지 미리 알아봐야 했다. 김초희는 이미 죽었고 살아있는 사람은 서유뿐이다. 만약 그들이 김영주의 딸을 찾아 뭔가를 하려고 한다면 서유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서유의 신상에 대해 깨끗하게 지워버렸기 때문에 육성재가 찾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찾지 못한다는 법은 없으니까.그리고 또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 당시 김영주는 김초희와 서유를 데리고 도움을 요청하러 갔었다. 그렇다면 김씨 가문과 육씨 가문에서 서유의 존재를 알고 있을 텐데. 왜 육성재는 김초희만 찾고 서유를 찾지 않는 것인지?설마 김씨 가문과 육씨 가문에서는 서유를 잃어버린 줄 알고 더 이상 찾지 않는 건가?하지만 만약 김영주의 딸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두 사람을 다 찾아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고민 끝에 내린 결과는 단 하나였다. 그 이유는 서유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서유 씨의 아버지가 연중서 이사장이라고 의심하시는 겁니까?”이승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고 택이는 뭔가 미심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정말 그렇다면 서유 씨가 그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했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는 거죠?”그가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택이를 쳐다보았다.“지난번에 김영주가 얼굴이 망가진 채로 귀국했다고 하지 않았어?”아마도 김영주가 성형을 하고 신분을 바꾼 뒤 연중서를 만난 것 같다. 게다가 김영주가 신분을 바꿨다는 것은 그녀가 아픈 과거를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었고 당연히 연중서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연중서는 김영주의 예전 얼굴을 본 적도 없고 그녀의 과거도 모르고 있으니 고아인 서유를 몰라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말에 택이는 그제야 깨달았다.“그럼 연지유가 서유 씨의 언니 아닌가요?”손가락으로 소파를 두드리던 그가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연지유가 서유의 언니? 그럴 리가 없다. 연지유의 어머니 송옥숙은 10년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그러나 김영주가 두 아이를 데리고 김씨 가문으로 찾아간 건 근 30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시간상으로 전혀 맞지 않는다. 송옥숙은 신분을 바꾼 김영주가 아닌 게 틀림없다. 이 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태산이한테 당장 알아보라고 해. 연중서와 송옥숙이 언제 결혼한 건지.”“5분 내로 알아봐.”택이는 짧게 대답하고는 태산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금 잠이 든 태산은 그의 전화를 받고 바로 일어나서 확인했다. 5분 뒤, 태산이 보내온 자료를 받아 택이가 이승하한테 다시 전송했다.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싸늘한 눈빛으로 자료들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연중서가 송옥숙과 결혼한 시기가 바로 김영주가 Y국으로 가서 김씨 가문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던 시기였다. 정확하게 들어맞는 시기가 너무 의심스러웠다. 연중서와 송옥숙이 결혼하기 전에 연지유는 이미 태어났고 김초희보다 네 살 어렸다. 이 시간대로라면 연중서
일 처리가 빠른 택이는 다음날 바로 이승하를 찾아왔지만 그가 가지고 온 소식은 그리 탐탁지 않았다. “육성재의 어머니가 살날이 얼마 남은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김영주의 딸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정확한 이유는 육성재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여동생밖에 모른다고 합니다. 김씨 가문의 사람들조차도 알지 못합니다.”육씨 가문은 해외에서 최고의 가문으로 손꼽히는 명문 가문이었다. 김씨 가문, 심씨 가문과 같은 레벨은 감히 육씨 가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육씨 가문의 권력자 육성재는 조울증을 앓기 전까지만 해도 이승하와 똑같이 일 처리가 거침없고 칼 같은 사람이었다. 그 당시 이씨 가문과의 대결에서 졌어도 육성재가 가업을 이어받은 후부터는 빠른 속도로 가문을 이끌고 재기에 성공했다. 다만 병을 앓고 난 뒤로는 정상적으로 사고를 할 수가 없었고 생각이 많으면 조급해지기 일쑤였다. 자신의 몸이 안 좋고 운이 없어서 번번이 이승하한테 패한 것이라고 한탄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 말도 맞는 말이었다. 병만 아니었다면 아마 이승하한테는 강력한 상대였을 것이다. 하여 육씨 가문에 대한 정보는 그쪽에서 의도적으로 누설하지 않은 한 깊은 곳에 숨겨둔 비밀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 점을 이승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택이를 탓하지 않았다. 그저 끝까지 조사해 보라고 당부했다.생각해 보니 신분을 속여 육성재의 여동생에게 접근하면 소식을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병상에 누워 있는 그의 어머니는 경비가 삼엄한 병원에서 간호를 받고 있으니 아예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여동생에게 손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럼 신혼여행 동안은 철호한테 두 분의 경호를 맡기겠습니다. 전 육성재의 목적에 대해 알아볼게요.”“그래.”이승하의 쉰 목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뒤돌아서 나가던 택이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걸음을 멈추고 이승하를 쳐다보았다.“참. 저번에 어르신의 첫사랑에 대해 물어보셨잖아요.”“어젯밤 태산이가 마침 본사로 돌아가게 돼
택이는 철호를 이승하의 곁에 두었다. 그러나 여전히 경호가 부족한 것 같아서 소수빈에게 전화를 걸어 바로 라스베이거스로 오라고 했다. 한편, 소수빈은 허윤서와 식사 중이었다. 택이의 전화를 받고 그는 포크를 내려놓고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요 며칠 소수빈은 자신이 게이가 아니라는 것을 해명하기 위해 회식하는 곳까지 찾아와서 일부러 만날 기회를 만들었다. 정신없이 서툰 변명을 늘어놓더니 오늘은 특별히 저녁을 사주겠다고 했다.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그가 어떤 뜻에서 이러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로 했다. 전화를 받고 들어온 소수빈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저기... 윤서 씨... 정말 미안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바로 라스베이거스로 떠나야 할 것 같아요.”JS 그룹 대표 이승하의 비서인 소수빈은 늘 바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가서 일 봐요. 나중에 시간 되면 다시 같이 밥 먹어요.”자신을 탓하기는커녕 다음에 또 만나는 그녀의 말에 소수빈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보면 볼수록 상냥하고 아름다운 여자 같았다. 주서희 말처럼 이젠 가정을 이룰 때가 된 듯하다. 그 생각을 하던 그가 자신의 개인 연락처를 허윤서한테 남겨줬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하라고 하면서. “정말 미안해요. 먼저 가볼게요.”신신당부를 한 뒤, 의자에 걸쳐놓은 양복 재킷을 집어 들고 발길을 돌렸다.그가 자리를 뜬 후, 메모지에 적힌 번호를 보고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오늘의 소수빈은 밥 먹는 데만 집중하지 않았다. 오늘은 그녀에게 스테이크도 잘라주고 말도 걸고 갈 때 인사도 하고 갔다. 태생이 목각처럼 딱딱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이런 남자는 믿을만한 것 같다.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쳐다보지도 않지만 마음에 들면 먼저 다가오는 사람인 것 같다. 이런 남자와의 결혼이라면 틀림없이 평생 행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