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단식을 한 소준섭은 많이 여윈 모습이라고 했다. 마음이 약해진 소씨 가문의 사람들은 그녀와의 결혼을 포기하면 그를 풀어주겠다고 했다.그러나 소준섭은 포기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죽은 사람처럼 매일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는 집안 사람들에게 그녀와의 결혼을 허락한다면 그녀가 돌아올 거라고 그녀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그 말까지 듣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참 우스운 일이다. 전에는 항상 그에게 자신과 결혼할 것인지에 대해 묻곤 했었다. 돌아오는 말은 자궁도 없는 여자가 어떻게 그와 결혼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토록 그녀를 싫어하던 그가 그녀에게 유혹당하고 그녀에게 속아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제 와서 죽기 살기로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한다니... 그러나 그녀는 그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을 약속했으니까.10년을 계획한 복수가 바로 이거였다. 원망 어린 주서희의 눈빛을 보며 정가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곧 윤 선생님과 결혼하잖아요. 지난 일의 일들은 훌훌 털어버려요.”이제 곧 그녀만의 울타리가 생기게 되었으니 비록 아이를 낳지는 못하더라도 그녀의 앞날은 행복할 것이다. 주서희가 과거의 원한에 갇혀 사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저 남은 인생을 윤주원과 함께 잘 살기를 바랄 뿐이다.“그래요. 다 털어버릴 거예요.”말을 마친 주서희가 손을 뻗어 연이를 품에 안았다.“인형이 더러워졌네. 서희 이모가 깨끗하게 빨아줄까?”“싫어요.”인형을 씻어야 한다는 말에 연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이모랑 이모보가 돌아오면 이 인형을 줄 거예요.”연이를 돌봐주던 아주머니가 그랬었다.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이 인형을 준 거라고. 앞으로 커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이 인형을 선물하라고 엄마가 그랬었다. 이모와 이모부는 그녀가 가장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돌아온 후에 그들에게 이 인형을 줄 생각이다. 꼬질꼬질한 인형을 이리 귀하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뭔데?”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며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종모마가 뭔지 몰라요? 난 당신은 뭐든 다 알 줄 알았는데. 우리 남편도 뭐든 다 잘하는 건 아니었구나...”못 하는 게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당연히 알고 있지.”그녀는 그의 턱을 치켜올리더니 볼을 꼬집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그럼 어디 한번 말해봐요.”이승하는 제멋대로 해석했다. “담력이 큰 말이라는 뜻 아니야?”웃음이 터진 그녀는 하마터면 웃다가 숨이 넘어갈 뻔했다.“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남자는 처음으로 모르는 걸 아는 척하다가 와이프의 놀림을 받고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그녀한테 아래층에 내려가서 먹을 것을 찾아 먹으라고 손짓하고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종모마가 무엇인지 대해 검색해 보았다. 한편,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고 음식을 찾으려는데 그녀의 뒤에서 플래시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젠장. 소리를 끈다는 걸 깜빡했네.”문 뒤에 숨어 있던 김선우는 셰프 차림으로 핸드폰을 들고 그녀가 있는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찍기 위해 유람선까지 들어온 그를 보고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선우 씨, 제정신이에요?”서유에게 들키자 김선우도 차라리 잘 됐다는 듯이 모자와 마스크를 훌훌 벗고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솔직히 말할게요. 누나가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느낌이에요. 누나의 사진을 아버지한테 보여드리고 확인받고 싶었어요. 내 가족인지 아닌지.”며칠 동안을 따라다녀도 정면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을 수가 없어서 화가 엄청 나 있었다. 오늘은 소수빈이라는 남자가 도착하여 유람선이 기슭에 닿았고 그도 방법을 생각에 따라 올라온 것이었다. 그녀가 내려올 때까지 주방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긴장하고 흥분한 나머지 소리를 끄는 것을 깜빡하고 말았다. 사진 찍는 데 실패한 것도 모자라 주방장의 지시에 따라 하루 종일 양파를 썰었다. 열 손
“알죠. 우리 작은고모의 딸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근데 만난 적은 없어요.”그가 의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김초희를 알고 있어요? 두 사람은 무슨 사이예요?”흠칫하던 그녀는 김선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김선우는 김초희에 대해 알고 있었고 김초희는 김선우의 작은고모 딸이었다.그렇다면 김선우가 그녀의 사촌 동생이란 말인가?어쩐지 그가 누나라고 부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진짜 동생처럼 느껴졌었다. 이런 혈연관계가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이런 혈연관계를 그녀는 원치 않았다. 이씨 가문과 김씨 가문 사이에 원한이 있다는 걸 예전에 이승하한테서 들었었다. 사업적으로 얽힌 원한이 아니라 죽고 죽일 만큼의 피맺힌 원한이라고 했다. 이렇게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는데 그녀가 이승하와 결혼까지 했으니 만약 이씨 가문에 그걸 알게 된다면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생각해 보니 예전에 이승하는 그녀의 신분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은 그가 그녀의 신분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인데. 그럼 그는...그는 개의치 않았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꼭 자신을 믿어달라고 절대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그 사람이 있으면 이씨 가문에서 두 사람을 갈라놓을 일은 없겠지?이씨 가문에서 그녀를 받아들인다면 김씨 가문 쪽은...어렸을 때, 언니는 거리를 떠돌아다닐지언정 김씨 가문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거부했다. 김씨 가문의 사람들이 얼마나 그들한테 못되게 했는지 얼핏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어떻게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고 김선우한테 사진을 찍힐 수 있겠는가?이승하와의 행복한 가정을 잘 지키려면 그녀가 김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걸 남들한테 들켜서는 안 되었다. 그 생각을 한 서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김선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유명한 건축 디자이너잖아요. 당연히 알죠. 두 사람이 같은 성씨라서 그냥 물어본 건데. 진짜로 사촌지간일 줄은 몰랐네요.”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김선우는
김선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아버지한테 형제자매가 세 명이었어요. 아버지까지 포함해서 자식이 총 네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밖에서 낳은 자식이에요.”밖에서 낳은 딸이라니. 김씨 가문도 참 복잡한 집안이었다. 내심 꺼리면서도 겉으로는 놀란 척하며 말했다.“네 명을 낳은 걸 보면 할아버지께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않으셨나 보네요.”은근히 할아버지를 엿먹이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김선우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 밖에서 낳은 딸이 김씨 가문에게 큰 상처를 주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그 딸을 가문에서 쫓아내신 거예요. 원래는 김씩 가문의 둘째 아가씨였어요.”상황 파악이 잘 안됐던 그녀는 다시 물었다.“그럼 현재 김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는 누구예요?”“우리 작은고모요.”아직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며 김선우는 그녀의 머리를 톡 쳤다.“진짜 바보네. 우리 첫째 고모는 김윤주이고요. 둘째 고모는 김율. 셋째 고모가 김영주예요. 우리 아버지 김종수는 네 남매 중에 제일 막내이고요. 지금은 둘째 고모가 없으니 셋째 고모가 둘째가 된 것이죠.”어머니의 이름은 김영주였다. 언니가 설립한 건설회사는 어머니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그 외에 또 한 가지 사실은 우리 사촌 형도 잘 몰라요.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얘기하는 걸 내가 엿들었거든요.”“세 명의 고모 중에서 한 사람은 우리 김씨 가문의 딸이 아니라고 했어요.”김씨 가문의 딸이 아니라고? 혹시 그녀의 어머니였던 걸까? 그래서 김선우의 할아버지와 할머니한테 미움을 받았던 걸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가 자신을 의심할까 봐 그만두기로 했다. 가뜩이나 작은고모와 닮았다고 하는데 자신이 바로 김초희가 어렸을 때 잃어버린 그 아기라는 게 들통나게 될까 봐 경솔하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우리 집안의 비밀까지 다 알려줬으니까 이젠 사진 한 장 찍어줄 거죠?” 테이블을 치는 소리에 놀라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라스베이거스를 떠난 두 사람은 몰디브로 향했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정가혜와 심형진의 왕래는 점점 더 잦아졌고 아무리 병원 일이 바빠도 심형진은 틈틈이 그녀를 보러 왔었다. 아침이면 그녀에게 아침을 가져다주고 저녁에는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가끔 클럽의 일 때문에 새벽까지 밤을 새우면 그는 잠도 자지 않고 그녀를 기다렸다. 묵묵히 자신을 기다려주는 심형진을 볼 때마다 그녀는 감동받았다. 이렇게 그녀한테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시간을 내어 심형진과 함께 밥도 먹고 영화도 봤다.점점 데이트도 많아지고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손도 잡게 되고 처음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오늘도 늦게까지 일하고 나온 그녀는 우산을 쓰고 입구에 서 있는 그를 보고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다. “선배, 비가 오는 데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해요?”사귀는 사이는 맞지만 선배라고 부르는 게 더 편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자연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비가 그렇게 많이 내리지 않아.”무슨 일이라도 생긴 듯 우울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며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무슨 일 있어요?”검은 우산을 쓰고 있던 그가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우산을 내려놓고는 그녀를 끌어안았다.남자의 턱이 어깨에 닿자 그녀는 몸이 굳어졌다. 그러나 그를 밀어내지 않고 그의 포옹을 받아주려는 듯 가만히 있었다. 그녀를 품에 안자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고 눈 밑의 우울하고 슬픈 감정이 많이 사라졌다.“오늘 저녁에 수술이 있었는데. 환자가 죽었어.”그가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살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그러나 결국은 살리지 못했고 심장 박동수 그래프가 점차 일직선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의학을 배우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사람을 살리는 것인지 아니면 환자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다시는 찾아올 줄 몰랐다. 이렇게 우연히 맞은편에 그가 서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저 현재 자신의 남자 친구가 심형진이라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새겼다. 잠시 후, 그녀를 놓아준 심형진이 그녀에게 우산을 씌어주며 그녀를 차에 태운 뒤 익숙하게 그녀의 별장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작별 인사를 한 뒤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그가 그녀를 불렀다.“가혜야.”그가 쑥스러워하며 한 걸음 다가왔다.“왜 그래요?”그를 올려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는 집까지 데려다주고 바로 돌아섰던 사람이 오늘은 왜 그녀를 부른 건지?심형진은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붉은 입술을 빤히 쳐다보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키스를 하고싶은 데 망설이고 있는 눈치였다. 결혼까지 해본 그녀였으니 욕망이 가득 한 그의 눈빛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진도가 너무 빠른 것 같았다. 솔직히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어른들이니 사실 그리 빠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자꾸만 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망설이게 된다. 마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심형진과 키스를 하거나 잠자리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그녀의 마음을 알지 못했던 그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물었다.“키스해도 돼?”직설적으로 물어보긴 했지만 그의 얼굴은 원래의 얼굴색을 잃어버릴 정도로 빨개졌다.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그를 쳐다보니 엄청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어린 소년처럼 수줍어하는 모습이 그녀의 앞에서 훤히 드러났다. 인생 경험이 많지 않은 고등학생처럼 깨끗하고 순수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불현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선배, 선배는 내가 좋은 거예요? 아니면 단순히 내가 결혼에 적합한 상대라서 그런 거예요?”맞선 자리에서 만난 상대이니 대부분은 결혼에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좀 더 만나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 결혼만을 위해 이러는 건 같지 않았다. 아름
심형진은 정가혜가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자 무례를 범했다는 걸 알아채고 재빨리 사과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지...”심형진은 정가혜를 향한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늦었어. 일찍 쉬어.”그러고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려는데 정가혜가 그의 팔을 잡았다.“선배, 굿나잇 키스하고 가요.”심형진은 몸이 굳어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가혜를 돌아보았다. 정가혜는 그의 팔을 잡고 발끝을 들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부드러운 입술이 서로 닿은 순간 심형진의 두 눈에 기쁨이 돌았다. 그녀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올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듯했다.정가혜는 입술이 닿자마자 바로 뗐다.“잘 자요.”귀까지 빨개진 심형진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너도 잘 자.”그녀는 손을 들고 흔들었다.“가서 운전해요.”매번 갈 때마다 심형진은 정가혜가 집으로 들어간 다음에 떠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그녀의 말대로 고분고분 차에 탔다.차에 시동을 건 후에도 아쉬운 듯 유리창을 내려 정가혜를 쳐다보다가 잘 가라고 하자 그제야 떠났다.정가혜는 멀어져가는 차를 보면서 입술을 어루만졌다. 첫 번째 단계 손잡기와 두 번째 단계 키스까지 자연스럽게 했다. 만약 세 번째 단계까지 간다면 그녀는 경계심을 내려놓고 심형진과 함께할 것이다.어쩌면 재혼은 그녀에게 따뜻함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자신을 오랜 시간 짝사랑한 사람에게 시집간다면 사랑을 많이 받을 테니까.예전에 보육원의 한 어르신은 그녀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여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그래야만 남편이 소중히 아껴줄 거라고 했다.그때까지만 해도 그 얘기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직접 겪고 나니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많이 편하다는 걸 느꼈다.정가혜는 서유와 달라서 이승하처럼 목숨도 기꺼이 바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고 서유처럼 뜨거운 사랑을 할 일도 없었다. 평범하기 그지
말문이 막힌 이연석은 약이 바싹 올라 정가혜의 얼굴을 잡았다.“남자 친구라고요?”손가락에 힘을 가하자 정가혜의 얼굴이 움푹 패어 들어갈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목을 조여서 죽이고 싶었다.“내일에 심형진 없애버릴 거예요. 누가 또 감히 당신 남자 친구가 되려는지 두고 볼 겁니다.”서울에서 이연석이 사람 하나 없애는 것쯤은 정말 일도 아니었다. 정가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연석이 무슨 자격으로?정가혜는 고개를 들고 이연석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연석 씨는 여자 친구랑 다정하게 끌어안고 키스하면서 난 왜 남자 친구랑 그러면 안 되는데요? 당신이 뭔데 없애버리겠다 말겠다예요?”‘자기는 할 거 다 하면서 왜 날 통제하는 거야?”이연석은 그녀가 화가 났다는 걸 바로 알아채고는 얼굴을 잡은 손을 내려놓고 그녀를 안았다.“가혜 씨, 난 하린이를 터치한 적이 없어요. 뽀뽀도 안 했다고요. 가혜 씨랑 헤어진 후에 다른 여자 건드리지도 않았어요.”그는 금욕적인 생활을 꽤 오래 했다. 처음에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정가혜와 스킨십을 하고 나서는 다른 여자는 건드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이런 감정이 생긴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세상이 정가혜 때문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 건 확실했다.“가혜 씨, 심형진이랑 헤어져요. 두 사람이 함께하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리고 두렵기도 하고...”두 사람을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잠자리라도 하게 될까 두려웠다. 서로 침대 위에서 뒹구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연석은 길어봤자 보름이면 정가혜를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를 찾아왔다.그런데 정가혜를 만나기도 전에 클럽 문 앞에서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고 달려왔을 땐 이미 입까지 맞췄다. 차 안에서 이 모든 과정을 목격한 이연석은 홧김에 핸들을 부러뜨릴 뻔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착각이길 바랐다.그렇게 정가혜가 고개를 끄덕이고 인정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