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찾아올 줄 몰랐다. 이렇게 우연히 맞은편에 그가 서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저 현재 자신의 남자 친구가 심형진이라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새겼다. 잠시 후, 그녀를 놓아준 심형진이 그녀에게 우산을 씌어주며 그녀를 차에 태운 뒤 익숙하게 그녀의 별장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작별 인사를 한 뒤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그가 그녀를 불렀다.“가혜야.”그가 쑥스러워하며 한 걸음 다가왔다.“왜 그래요?”그를 올려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는 집까지 데려다주고 바로 돌아섰던 사람이 오늘은 왜 그녀를 부른 건지?심형진은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붉은 입술을 빤히 쳐다보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키스를 하고싶은 데 망설이고 있는 눈치였다. 결혼까지 해본 그녀였으니 욕망이 가득 한 그의 눈빛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진도가 너무 빠른 것 같았다. 솔직히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어른들이니 사실 그리 빠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자꾸만 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망설이게 된다. 마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심형진과 키스를 하거나 잠자리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그녀의 마음을 알지 못했던 그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물었다.“키스해도 돼?”직설적으로 물어보긴 했지만 그의 얼굴은 원래의 얼굴색을 잃어버릴 정도로 빨개졌다.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그를 쳐다보니 엄청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어린 소년처럼 수줍어하는 모습이 그녀의 앞에서 훤히 드러났다. 인생 경험이 많지 않은 고등학생처럼 깨끗하고 순수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불현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선배, 선배는 내가 좋은 거예요? 아니면 단순히 내가 결혼에 적합한 상대라서 그런 거예요?”맞선 자리에서 만난 상대이니 대부분은 결혼에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좀 더 만나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 결혼만을 위해 이러는 건 같지 않았다. 아름
심형진은 정가혜가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자 무례를 범했다는 걸 알아채고 재빨리 사과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지...”심형진은 정가혜를 향한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늦었어. 일찍 쉬어.”그러고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려는데 정가혜가 그의 팔을 잡았다.“선배, 굿나잇 키스하고 가요.”심형진은 몸이 굳어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가혜를 돌아보았다. 정가혜는 그의 팔을 잡고 발끝을 들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부드러운 입술이 서로 닿은 순간 심형진의 두 눈에 기쁨이 돌았다. 그녀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올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듯했다.정가혜는 입술이 닿자마자 바로 뗐다.“잘 자요.”귀까지 빨개진 심형진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너도 잘 자.”그녀는 손을 들고 흔들었다.“가서 운전해요.”매번 갈 때마다 심형진은 정가혜가 집으로 들어간 다음에 떠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그녀의 말대로 고분고분 차에 탔다.차에 시동을 건 후에도 아쉬운 듯 유리창을 내려 정가혜를 쳐다보다가 잘 가라고 하자 그제야 떠났다.정가혜는 멀어져가는 차를 보면서 입술을 어루만졌다. 첫 번째 단계 손잡기와 두 번째 단계 키스까지 자연스럽게 했다. 만약 세 번째 단계까지 간다면 그녀는 경계심을 내려놓고 심형진과 함께할 것이다.어쩌면 재혼은 그녀에게 따뜻함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자신을 오랜 시간 짝사랑한 사람에게 시집간다면 사랑을 많이 받을 테니까.예전에 보육원의 한 어르신은 그녀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여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그래야만 남편이 소중히 아껴줄 거라고 했다.그때까지만 해도 그 얘기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직접 겪고 나니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많이 편하다는 걸 느꼈다.정가혜는 서유와 달라서 이승하처럼 목숨도 기꺼이 바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고 서유처럼 뜨거운 사랑을 할 일도 없었다. 평범하기 그지
말문이 막힌 이연석은 약이 바싹 올라 정가혜의 얼굴을 잡았다.“남자 친구라고요?”손가락에 힘을 가하자 정가혜의 얼굴이 움푹 패어 들어갈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목을 조여서 죽이고 싶었다.“내일에 심형진 없애버릴 거예요. 누가 또 감히 당신 남자 친구가 되려는지 두고 볼 겁니다.”서울에서 이연석이 사람 하나 없애는 것쯤은 정말 일도 아니었다. 정가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연석이 무슨 자격으로?정가혜는 고개를 들고 이연석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연석 씨는 여자 친구랑 다정하게 끌어안고 키스하면서 난 왜 남자 친구랑 그러면 안 되는데요? 당신이 뭔데 없애버리겠다 말겠다예요?”‘자기는 할 거 다 하면서 왜 날 통제하는 거야?”이연석은 그녀가 화가 났다는 걸 바로 알아채고는 얼굴을 잡은 손을 내려놓고 그녀를 안았다.“가혜 씨, 난 하린이를 터치한 적이 없어요. 뽀뽀도 안 했다고요. 가혜 씨랑 헤어진 후에 다른 여자 건드리지도 않았어요.”그는 금욕적인 생활을 꽤 오래 했다. 처음에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정가혜와 스킨십을 하고 나서는 다른 여자는 건드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이런 감정이 생긴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세상이 정가혜 때문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 건 확실했다.“가혜 씨, 심형진이랑 헤어져요. 두 사람이 함께하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리고 두렵기도 하고...”두 사람을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잠자리라도 하게 될까 두려웠다. 서로 침대 위에서 뒹구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연석은 길어봤자 보름이면 정가혜를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를 찾아왔다.그런데 정가혜를 만나기도 전에 클럽 문 앞에서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고 달려왔을 땐 이미 입까지 맞췄다. 차 안에서 이 모든 과정을 목격한 이연석은 홧김에 핸들을 부러뜨릴 뻔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착각이길 바랐다.그렇게 정가혜가 고개를 끄덕이고 인정하고
이연석은 정가혜를 한번 찾아온 후로 마치 증발이라도 한 듯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뉴스에서 이연석이 이승하를 대신해 연해 그룹과 전략적 협력 계약을 체결하는 걸 보게 되었다.정가혜는 그제야 그동안 이연석이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는 걸 알게 되었다.화면 속 이연석은 깔끔한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거기에 올백 머리까지 더해지니 나름 대표다워 보였다.정가혜는 경제 뉴스를 다 본 후 TV를 끄고 심형진에게 전화를 걸어 도착했냐고 물었다. 주말이 됐으니 송사월을 보러 가야 했다.전에 송사월과 자주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기에 주말마다 계속 갔다. 그리고 심형진과도 이젠 꽤 만나 송사월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정가혜가 다시 용기 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걸 송사월도 본다면 상처의 수렁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두 사람은 공항에서 나오다가 이지민을 만났다. 어떤 남자가 그녀에게 끈질기게 매달리자 정가혜는 두말없이 달려갔다.“지민 씨, 무슨 일이에요? 신고할까요?”갑자기 앞에 나타나 자신을 지켜주는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이지민은 멈칫했다가 이내 손을 내저었다.“신고할 것까진 없어요.”이지민은 단이수에게서 벗어나 인내심 있게 말했다.“오빠, 우린 이미 끝났어. 그러니까 그만해, 이제.”단이수가 손을 다시 잡으려 하자 이지민은 뒷걸음질 쳤다.“우리 부모님이랑 오빠네 부모님 다 반대하셔. 그러니까 부모님 말씀대로 해.”사실 이지민은 부모의 말을 꼭 들으려는 게 아니었다. 더 큰 이유는 예전에 단이수를 좋아했을 때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단이수는 그녀의 오빠처럼 놀기를 좋아했고 주변에 여자가 많은 연애 고수였다. 그런데 여자 친구가 있어도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갖는 그와는 달리 그녀의 오빠는 아니었다.단이수의 여자 친구였던 이지민은 실제로도 그가 여러 번이나 다른 여자와 잠자리하는 걸 목격했었다.그때 이지민은 문 앞에 서서 속으로 생각했었다.‘나중에 내 마음이 식으면 다시는 이수 오빠 때문에 아프진 않겠지.’그리고 이
“지민 씨, 소개할게요. 내 남자 친구 심형진입니다.”정가혜는 숨기지 않고 심형진을 이연석의 여동생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어떤 남자가 공항에서 이지민을 귀찮게 한 일은 눈치 있게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그녀의 말에 이지민은 화들짝 놀랐다.‘가혜 씨한테 남자 친구 생기면 우리 오빠는 어떡해요?’그런데 곧바로 자신이 당했던 일을 떠올린 그녀는 같은 여자로서 정가혜의 기분이 이해가 되었다. 이 세상에 양쪽에 여자를 끼고 사는 바람둥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이지민의 오빠는 단이수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그래도 바람둥이인 건 사실이었다. 성인이 된 후로 옷을 갈아입듯 여자를 바꿨기에 딱히 나을 것도 없었다.그 생각에 이지민은 하려던 얘기를 삼키고 예의 바르게 정가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가혜 씨 남자 보는 안목이 있네요. 그럼 언제 결혼해요?”이지민이 떠보듯 물었다. 아직 오빠가 정가혜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빠를 도와주려는 건 아니고 나중에 두 사람의 사이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질 수도 있기에 미리 오빠에게 마음의 준비라도 하게 할 생각이었다.결혼 문제에 관해 정가혜가 대답을 망설이자 심형진이 말했다.“아직 프러포즈도 안 했는데요, 뭐. 프러포즈한 다음에 날짜 잡으려고요.”심형진은 정가혜의 의견을 먼저 물었다. 정가혜가 그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 걸 확인하고 프러포즈를 하는 게 상대를 존중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이지민은 두 사람이 아직은 그냥 만나는 단계고 결혼 얘기까지 나오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더는 묻지 않았다.“좋은 소식 있으면 나한테 알려줘요.”그녀는 두 사람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짐을 챙기고 공항을 나가려 했다.그런데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공항 밖에서 양복 차림의 김태진이 휠체어를 밀면서 천천히 공항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휠체어에 탄 남자는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고 무릎 위에는 얇은 담요를 덮고 있었다. 도도한 자태에 깨끗한 얼굴은 마치 그림을 찢고 나온 비주얼이었다.이지민은 김시후를 보자마자
송사월이 두 사람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한 후 김민정이 약과 물을 가져와 건넸다.심형진은 그 약병을 보자마자 송사월이 왜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지 알게 되었다.‘우울증 환자였구나.’상태를 보면 이미 중증 환자였고 그저 계속 스스로 참고 있었다.송사월도 심형진이 아는 걸 꺼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김민정이 건네는 약과 물을 받아 제때 먹었다.‘가혜 누나가 약만 잘 먹으면 천천히 나을 수 있다고 했어. 언젠가는 낫겠지...’“사월아, 약 다 먹었으니까 누나랑 별장 밖에 산책 가자.”다행히 정가혜가 옆에 있어 줘서 송사월의 기분도 조금은 나아졌다. 짧디짧은 주말이지만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가 있었다.“심 선생님도 같이 가요.”심형진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는 묵묵히 따라나섰다.정가혜는 그에게 자신의 과거를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녀와 송사월은 보육원에서 함께 자랐고 어릴 적부터 송사월을 남동생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친남매보다도 더 가까웠다.송사월의 가족이 그를 찾아 화진 그룹의 대표가 되긴 했지만 어릴 적 함께 자란 정은 여전했다. 이삼십 년이 지나도 절대 끊을 수 없는 그런 정이었다. 심형진은 두 사람 사이의 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정가혜가 동생에게 심형진을 소개하는 것 자체가 가족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다. 기뻐해도 모자랄 판인데 불만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부산의 밤은 조금 무더웠다. 심형진은 길가의 자동판매기에서 물 몇 병을 사서 송사월과 김태진에게 건넸다. 정가혜가 마실 물은 손으로 움켜쥐고 미지근해진 다음에 뚜껑을 열어 건넸다.“조금만 마셔봐. 찬지 어떤지.”“찬 거 마시고 싶은데...”“넌 몸이 약해서 찬 거 자주 마시면 안 돼.”심형진의 따뜻한 말에 송사월은 저도 모르게 자꾸 힐끔거렸다. 두 눈에 담긴 웃음은 마치 이 ‘매형’을 인정하는 것만 같았다.송사월은 휠체어에 손을 올려놓고 미지근한 물을 마시기 싫어하는 정가혜를 쳐다보았다.“누나, 심 선생님은 누나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니까 고집
그 당시 정가혜는 옆에 가만히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었다. 한 사람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지만 한 사람은 계속 거절했었다.그때도 정가혜는 송사월이 언젠가는 후회할 거라 생각했지만 진짜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돌이켜 보면 두 사람이 만나는 과정에서 서유를 밀어낸 건 송사월이었다.송사월은 후회 속에서 살다 보니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점점 지옥으로 빠져들어 갔다. 정가혜는 옛날 생각은 뒤로하고 송사월의 어깨를 잡고는 허리 굽혀 눈을 쳐다보았다.“사월아, 지나간 일은 지나간 거고 또 무슨 일이든 강요해선 안 돼. 그러니까 자신을 너무 가두려고 하지 마. 넌 인생 아직 조금밖에 안 살았어. 앞을 내다보면 20년이 여러 개나 남았잖아. 이미 지나간 20년에 갇혀 살지 마.”다른 철학적이고 심오한 말은 정가혜도 할 수가 없어 간단한 것만 얘기했다. 송사월이 이 얘기를 듣고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길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송사월은 듣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그가 알아들었는지 말았는지 정가혜도 알 리가 없었다.옆에 있던 심형진은 두 사람의 얘기가 잘 이해되진 않았다. 그런데 송사월이 여자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다는 건 대충 알 수가 있었다.‘병원의 배후 보스와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설마 보스랑 결혼한 그 여자가 바로 김 대표님 전 여자 친구?’심형진이 관계를 정리하던 그때 정가혜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정가혜가 휠체어를 밀고 있어 대신 휴대 전화를 챙겼다.고개를 숙여 화면에 나타난 발신자를 본 심형진은 눈치 있게 밝히지 않았다.“가혜야, 전화 받아.”정가혜는 눈치채지 못하고 심형진에게 물었다.“누군데요?”심형진이 아무 말이 없자 바로 알아챈 송사월은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서유라는 두 글자만 생각하면 송사월은 심장이 터져 나올 듯이 아팠고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정가혜는 송사월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휴대 전화를 받았다가 발신자가 서유인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눈치를 살폈다.“사월아, 누나 전화 받고 올게.
이승하는 서유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직도 첫사랑을 걱정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안 좋았다.그는 평생에 두려운 것이라곤 없었지만 송사월이라는 남자만 볼 때면 두려움이 밀려왔고 이름만 들어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대체 어떤 기분인지 말로 형용하긴 어려웠다. 그냥 앞으로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행복을 송사월에게 빼앗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런 황당한 생각은 두려움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 너무 소중해서 이 행복을 잃을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서유가 이승하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건 송사월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았다는 걸 뜻했다. 만약 내려놓지 않았더라면 그 이름마저도 꺼내기 조심스러웠을 것이다.두 사람은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함께 나아갈 미래를 꿈꿨다.그 생각에 이승하는 순간 밀려왔던 짜증도 많이 사라졌다.“있긴 있어.”“연락처 있어요?”이승하는 서유를 보면서 남자라면 마음이 넓어야지 쪼잔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그렇게 겨우 자신을 설득한 후 연락처를 뒤져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수가 시간이 있고 다리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며 임상 치료 경험도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서유에게 연락처를 넘겼다.“그냥 가혜 씨한테 줘. 그 사람이랑 연락하지 말고.”서유에게 연락처를 넘긴 후에도 쪼잔한 마음은 내려놓지 못하고 살짝 째려보았다. 두 눈에 질투가 가득하다 못해 흘러넘칠 지경이었다.“승하 씨 질투하는 모습 참 귀엽네요.”서유는 이승하의 마음을 달래려 두 볼을 잡고 이마에 뽀뽀했다. 효과는 아주 짱이었다. 이승하는 뽀뽀 한 번에 바로 기분이 풀린 듯했다.“내가 보는 앞에서 가혜 씨한테 보내.”서유는 하마터면 소리 내 웃을 뻔했다.‘뭘 이렇게까지 감시해? 내가 몰래 사월이한테 연락할까 봐 이러나?’그녀는 이승하를 째려보긴 했지만 그래도 고분고분 정가혜에게 교수의 연락처를 보냈다. 이승하는 보낸 걸 보고 나서야 그녀를 안고 다리에 앉혔다.“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