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는 서유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직도 첫사랑을 걱정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안 좋았다.그는 평생에 두려운 것이라곤 없었지만 송사월이라는 남자만 볼 때면 두려움이 밀려왔고 이름만 들어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대체 어떤 기분인지 말로 형용하긴 어려웠다. 그냥 앞으로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행복을 송사월에게 빼앗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런 황당한 생각은 두려움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 너무 소중해서 이 행복을 잃을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서유가 이승하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건 송사월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았다는 걸 뜻했다. 만약 내려놓지 않았더라면 그 이름마저도 꺼내기 조심스러웠을 것이다.두 사람은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함께 나아갈 미래를 꿈꿨다.그 생각에 이승하는 순간 밀려왔던 짜증도 많이 사라졌다.“있긴 있어.”“연락처 있어요?”이승하는 서유를 보면서 남자라면 마음이 넓어야지 쪼잔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그렇게 겨우 자신을 설득한 후 연락처를 뒤져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수가 시간이 있고 다리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며 임상 치료 경험도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서유에게 연락처를 넘겼다.“그냥 가혜 씨한테 줘. 그 사람이랑 연락하지 말고.”서유에게 연락처를 넘긴 후에도 쪼잔한 마음은 내려놓지 못하고 살짝 째려보았다. 두 눈에 질투가 가득하다 못해 흘러넘칠 지경이었다.“승하 씨 질투하는 모습 참 귀엽네요.”서유는 이승하의 마음을 달래려 두 볼을 잡고 이마에 뽀뽀했다. 효과는 아주 짱이었다. 이승하는 뽀뽀 한 번에 바로 기분이 풀린 듯했다.“내가 보는 앞에서 가혜 씨한테 보내.”서유는 하마터면 소리 내 웃을 뻔했다.‘뭘 이렇게까지 감시해? 내가 몰래 사월이한테 연락할까 봐 이러나?’그녀는 이승하를 째려보긴 했지만 그래도 고분고분 정가혜에게 교수의 연락처를 보냈다. 이승하는 보낸 걸 보고 나서야 그녀를 안고 다리에 앉혔다.“사실
정가혜는 전화를 끊은 후 적당한 타이밍에 송사월에게 교수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서유 얘기는 꺼내지 않았고 다리를 치료하는 교수를 한 분 아는데 진료 시간을 잡았다고만 했다.송사월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누나.”그의 순진한 웃음에 정가혜는 켕기는 게 있어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괜찮아. 별것도 아닌데, 뭐.”정가혜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송사월은 그녀가 거짓말에 능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여 표정만 봐도 켕기는 게 있다는 걸 알아챘다. 서유와 통화를 하자마자 다리를 치료하는 전문가를 찾았다고 하는 건 누가 봐도 서유가 이승하에게 부탁한 게 틀림없었다.송사월은 속이 말이 아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정가혜에게 말했다.“오늘은 별장에서 자고 가요.”정가혜는 심형진이 남의 집에서 자는 걸 불편해할까 봐 거절했다.“오늘 저녁은 말고 내일 다시 올게.”송사월도 강요하진 않았다.“알았어요. 내일 나랑 같이 부산 구경이나 해요.”별장을 나가는 두 사람을 배웅한 후 송사월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행기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그는 한동안 멍하니 보다가 김태진에게 말했다.“진해로 가는 비행기 티켓 끊어줘. 가서 바람 좀 쐬어야겠어.”김태진이 물었다.“교수님 안 기다리실 겁니까?”송사월이 대답했다.“기다려야지.”‘당연히 기다려야지. 서유 마음인데 저버릴 수 없어.’“교수님이 오기 전에 돌아올 거야.”김태진은 송사월이 치료를 받겠다고 하자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그럼 어느 날로 끊을까요?”“모레.”정가혜가 서울로 돌아간 다음에 갈 생각이었다.“그럼 전용기로 준비할게요. 다른 사람도 같이 가게.”송사월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상태가 이래서 어딜 가나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휠체어를 타다 보면 조금만 실수해도 넘어졌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정가혜와 심형진은 호텔로 왔다. 카운터 직원이 어떤 방을 몇 개 필요하냐고 묻자 심형진은
단이수는 호텔 문 앞의 기둥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면서 번쩍이는 부산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몇 대 피운 후 지루해진 그는 담배를 버리고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들어가자마자 소파에 앉아 술잔을 들고 있는 이연석을 발견했다. 불빛이 어두컴컴해 더욱 흐릿하게 보였다.그리고 아가씨들이 옆에서 이연석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애교를 떨었지만 이연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단이수는 문 앞에서 잠깐 지켜보다가 그의 옆에 앉았다.“왜 그래? 이젠 여자한테도 관심이 없어? 고자가 된 거야?”소파에 축 늘어졌던 이연석은 단이수를 싸늘하게 째려보았다.“그 입 닥쳐.”단이수는 가볍게 웃더니 종업원이 건네는 술을 받고 한 모금 마셨다.“혹시 지금 배하린 때문에 이리 넋이 나간 거야?”친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면서 일부러 빙빙 돌려서 말했다.“보고 싶으면 내가 전화할게. 전화 받자마자 바로 달려올걸?”이연석은 단이수를 째려보았다. 기분이 별로인지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단이수는 이연석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봤다. 처음 연애하고 배하린에게 아무 이유 없이 차였을 때도 이런 적이 없었다.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던 단이수는 시간을 계산했다.‘샤워하고 분위기 잡고 하면 지금쯤 시작할 때 됐겠네.’이대로 더 지체했다간 이연석이 잊지 못하는 여자를 완전히 잃을지도 모른다. 단이수는 독한 술 한 병을 들고 이연석에게 건넸다.“이거 다 마시면 뭐 하나 알려줄게.”“관심 없어.”지금 그 무엇도 이연석의 흥미를 끌어내진 못했다. 부산에 계약하러 온 게 아니었더라면 아마 밖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이연석의 모습에 단이수는 술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가혜 씨에 관한 거야.”그 순간 이연석의 잘생긴 얼굴이 살짝 변하긴 했지만 그리 선명하진 않았다. 단이수는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말했다.“3년이나 아꼈던 누나한테도 이젠 관심이 없는 거야?”그러자 이연석이 피식 웃었다
단이수는 다시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지금 안 내려가면 늦어.”이연석은 그를 째려보았다.“할 얘기 있으면 그냥 해. 빙빙 돌리지 말고.”그의 태도에 단이수는 되레 알려주기 싫었다.“다른 남자랑 8층 방에 들어갔어.”이연석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단이수를 보았다.“정가혜 말이야?”단이수가 두 눈을 깜빡였다.“응. 아까 내려가다가 가혜 씨가 다른 남자랑 8층 가는 거 봤어.”그러고는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벌써 30분이 지났어. 둘이 했는지 모르겠네...”단이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옆에 있던 이연석은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룸을 뛰쳐나갔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서 사라졌다.그 모습에 단이수는 피식 웃었다.‘신경 쓰지 않는다더니 다른 남자랑 호텔 방에 들어갔다니까 바로 뛰쳐나가는 것 좀 봐. 이번에 여자한테 제대로 잡혔어.’잠시 후 단이수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웠다. 그는 테이블 위의 술잔을 들고 가볍게 몇 모금 마셨다. 예전에는 술이 걱정을 덜어준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쓰기만 했고 게다가 마실수록 점점 쓴 것 같았다. 마음이 씁쓸해서 술맛도 잃은 모양이다.‘연석이 봐봐. 이수 넌 절대 연석이 같은 실수를 해선 안 돼. 자기 마음 잘 보고 잘해줘.’정가혜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주서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서희 씨, 이 늦은 밤에 무슨 일이에요? 혹시 연이가 떼를 썼나요?”주말에 부산으로 온 정가혜는 연이를 데리고 올 수 없어 주서희에게 이틀 맡겼다.평소 연이를 챙겼던 정가혜는 연이가 저녁에 잠들기 전에 장난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30분 이상 놀아주지 않으면 절대 자지 않았다.“연이는 말 잘 듣고 있어요.”‘말을 잘 듣는다고?’주서희의 품에서 자는 척하는 연이는 얼핏 보면 참 말을 잘 듣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은 귀를 쫑긋하고 두 사람의 통화를 엿듣고 있었다.‘가혜 이모 또 서희 이모한테 고자질하고 있어. 나중에 가혜 이모가 돌아오면 밤에 장난치는 시간을 한 시간으로 늘
“미쳤어?”“그러게 말이야. 한밤중에 뭐 하는 짓이야?”호텔에 묵은 투숙객들이 화를 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이연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손가락을 튕기자 한 무리의 경호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경호원들은 현금이 담긴 돈 봉투를 나눠주었다. 조금 전까지 욕설을 퍼붓던 투숙객들은 얌전히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그런데 문을 걷어찬 방 중에 단 두 개의 방만 문이 꽉 닫혀있었다. 한창 휴대 전화를 말리던 정가혜는 헤어드라이기 소리가 하도 커서 듣질 못했다.심형진도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수술 과정을 열심히 지켜보느라 아무 소리도 듣질 못했다.이연석은 앞으로 다가가 방문을 힘껏 걷어찼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자 굳게 닫힌 다른 방 앞으로 다가갔다.이번에는 구두를 신은 채 있는 힘껏 걷어찼다. 어찌나 세게 걷어찼는지 문에 걸린 번호 패마저 뚝 떨어졌다.정가혜는 소리를 듣고 헤어드라이기를 껐다. 누군가 문을 걷어차는 것 같아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정가혜, 문 열어!”문을 열려던 정가혜는 분노와 짜증이 섞인 이연석의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지금 심형진이랑 같이 있는 거 알아. 당장 문 열어!”걷어차여 흔들리는 문을 보며 정가혜는 눈살을 찌푸렸다.“이연석 씨, 당신 미쳤어요?”문밖에서 더 걷어차려고 발을 든 이연석은 정가혜의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만약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더라면 다시 올라가서 단이수를 한 대 치려 했다. 이게 다 단이수가 헛소리를 해서 벌어진 일이니까.그런데 지금 정가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연석은 온몸이 다 떨렸다.이런 기분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지라 이마에 식은땀마저 송골송골 맺혔다. 이젠 화가 나다 못해 무감각해졌고 숨을 쉬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심장이 멈췄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런데 이연석은 그 문을 열 용기가 없었다. 혹시라도 더러운 장면을 목격할까 봐 너무도 두려웠다.‘근데 이 문을 열지 않으면 두 연놈이 밤새 즐길 거잖아. 그 꼴을 어
정가혜는 이연석의 손을 따라 잠옷을 내려다보았다.이연석과 만날 때 이연석은 그녀의 낡은 옷들을 모두 버렸고 매주 비싼 옷들을 가득 보냈다.그녀의 옷장에는 온통 이연석이 사준 옷과 가방, 그리고 액세서리였다. 명품 브랜드에 신상이 나오면 이연석은 바로 사서 보냈다.그가 사준 게 정말 셀 수 없이 많았다. 어릴 적부터 근검절약하며 살아온 정가혜는 버리기 아까워 계속 입고 있었다.그런데 이연석이 콕 집어 말하자 그제야 잘못됐음을 깨달았다.‘전 남자 친구가 준 물건은 다 돌려줬어야 했는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지?’그 점을 깨달은 정가혜의 안색이 갑자기 바뀌었다.“돌아가면 나한테 선물했던 것들 다 돌려줄게요.”그러고는 이연석을 더 쳐다보기도 싫은 듯 급히 문을 닫으려 했다.이연석은 한 발로 문틀을 막고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모습에 정가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정가혜의 경계심 가득한 행동이 이연석의 화를 돋우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힘이 센 이연석은 한 손으로 정가혜의 두 손을 잡은 후 뒤로 가져갔다. 그 바람에 정가혜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높은 콧대가 정가혜의 매력적인 빨간 입술에 여러 번이나 스쳤다.정가혜는 손을 움직일 수가 없어 이연석을 발로 걷어차려 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입술이 그의 볼에 닿기도 했다.가볍게 몇 번 스쳤을 뿐인데도 이연석은 온몸에 전기가 흐른 것처럼 찌릿했다. 하지만 아직 화가 난 상태라 그쪽으로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이연석은 싸늘한 얼굴로 계속 반항하는 정가혜를 노려보다가 길고 탄탄한 허벅지로 미친 듯이 발버둥 치는 그녀를 가두었다.“이연석 씨, 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비록 이연석과 아무것도 하진 않았지만 심형진이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대체 뭐라 설명해야 할까?이연석은 다른 한 손으로 정가혜의 볼을 잡고는 예쁘고 매력적인 얼굴을 눈앞으로 가까이 가져다 댔다.“내 질문에 아직 대답 안 했어요.”이연석은 정가혜의
“선생님, 환자 갑자기 복강 내 출혈이...”꽉 닫힌 욕실 문을 열기 전에 다른 한쪽 이어폰에서 집도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심형진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이어폰을 끼고 수술을 가르쳤다.이연석은 정가혜와 키스하다가 산소 부족으로 숨이 가빠져서야 키스를 멈췄다. 정가혜도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너무도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따귀를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손과 발이 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여 그저 이를 꽉 깨물고 씩씩거리며 욕만 퍼부었다.“이연석 씨, 나 남자 친구 있는 거 몰라요? 지금 나더러 남자 친구 어떻게 보라고 이러는 건데요?”이연석은 남자 친구라는 소리에 겨우 가라앉았던 화가 또다시 끓어올랐다.“내가 헤어지라고 했잖아요. 헤어지기 싫다면 양다리 걸칠 준비나 해요, 그럼.”두 눈에 핏발이 선 이연석이 이 말을 내뱉었을 때 정가혜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맞아요!”이연석이 고개를 숙이고 이를 깨물었다.“난 이상하고 문제 많아요. 어릴 적부터 정상이 아니었어요.”거의 포효하듯이 소리쳤다. 목소리가 방 전체에 울려 퍼지자 정가혜는 화들짝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조용히 해요.”“왜요? 들을까 봐 무서워요?”이연석은 다시 그녀의 볼을 잡고 꾹 눌렀다.“우리가 이러는 거 볼까 봐?”그러고는 또 일부러 정가혜의 귓가에 바람을 불었다.“생중계로 그 사람한테 보여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난.”“미친!”정가혜는 이를 악물고 그를 욕했다.“미친 짓 다 했으면 이거 놓고 나가요!”그런데 이연석이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가혜 씨, 내가 미치는 건 다 당신 때문이고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요.”그는 예전에는 둘째 형이 왜 서유가 다른 남자와 자는 걸 그렇게 싫어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까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픈지 제대로 느꼈다.이연석은 개의치 않아 할까? 아니, 죽어도 받아들
“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이연석은 정가혜를 욕실 앞으로 끌고 가더니 욕실 문 쪽으로 밀어붙였다. 화들짝 놀란 정가혜가 고개를 돌렸다. 간유리 사이로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심형진의 모습이 보였다.심형진은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있어 소리도 듣지 못했고 보지도 못했다. 정가혜는 혹시라도 그에게 들킬까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그런데 이연석은 그녀가 당황하든 말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 손을 잠옷 안으로 넣었다.그가 직접 가르친 거라서 어느 부위가 가장 민감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손이 살짝만 닿았을 뿐인데도 정가혜는 꼼짝도 하질 못했다.“연석 씨, 당신...”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퉁퉁 부은 입술로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훅 들어왔다. 그녀 입안의 공기마저도 다 빼앗아버렸다.이연석은 마치 그녀를 벌하듯이 마구 키스했고 손으로 계속 그녀의 민감한 부위를 어루만졌다.정가혜는 이런 모습의 이연석을 처음 봤다. 정말 미친 사람이 따로 없었고 앞뒤라곤 가리지 않았다.겁이 난 그녀는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세 살 어린 이연석은 나이만 어릴 뿐 힘은 놀라울 정도로 셌다.이연석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와 목에 키스하기 시작했다. 정가혜는 분노를 참으면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연석 씨, 난 형진 선배랑 아무 일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러지 말아요. 무고한 사람한테 상처 주지 말라고요.”심형진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소리에 터질 것처럼 아팠던 심장의 고통이 순식간에 덜해졌다. 하지만 뒷말이 또 이연석을 자극하고 말았다.그는 정가혜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잡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야말로 조롱이 가득한 웃음이었다.“그 사람이 상처받는 건 안 되고 난 받아도 된다는 거예요?”정가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를 벗어나려고 힘을 주면 줄수록 더 벗어날 수 없어서 차라리 포기하고 그냥 노려보기만 했다.그녀가 이젠 말도 섞지 않자 이연석은 화가 나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손가락마저 부들부들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