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이수는 호텔 문 앞의 기둥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면서 번쩍이는 부산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몇 대 피운 후 지루해진 그는 담배를 버리고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들어가자마자 소파에 앉아 술잔을 들고 있는 이연석을 발견했다. 불빛이 어두컴컴해 더욱 흐릿하게 보였다.그리고 아가씨들이 옆에서 이연석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애교를 떨었지만 이연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단이수는 문 앞에서 잠깐 지켜보다가 그의 옆에 앉았다.“왜 그래? 이젠 여자한테도 관심이 없어? 고자가 된 거야?”소파에 축 늘어졌던 이연석은 단이수를 싸늘하게 째려보았다.“그 입 닥쳐.”단이수는 가볍게 웃더니 종업원이 건네는 술을 받고 한 모금 마셨다.“혹시 지금 배하린 때문에 이리 넋이 나간 거야?”친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면서 일부러 빙빙 돌려서 말했다.“보고 싶으면 내가 전화할게. 전화 받자마자 바로 달려올걸?”이연석은 단이수를 째려보았다. 기분이 별로인지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단이수는 이연석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봤다. 처음 연애하고 배하린에게 아무 이유 없이 차였을 때도 이런 적이 없었다.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던 단이수는 시간을 계산했다.‘샤워하고 분위기 잡고 하면 지금쯤 시작할 때 됐겠네.’이대로 더 지체했다간 이연석이 잊지 못하는 여자를 완전히 잃을지도 모른다. 단이수는 독한 술 한 병을 들고 이연석에게 건넸다.“이거 다 마시면 뭐 하나 알려줄게.”“관심 없어.”지금 그 무엇도 이연석의 흥미를 끌어내진 못했다. 부산에 계약하러 온 게 아니었더라면 아마 밖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이연석의 모습에 단이수는 술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가혜 씨에 관한 거야.”그 순간 이연석의 잘생긴 얼굴이 살짝 변하긴 했지만 그리 선명하진 않았다. 단이수는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말했다.“3년이나 아꼈던 누나한테도 이젠 관심이 없는 거야?”그러자 이연석이 피식 웃었다
단이수는 다시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지금 안 내려가면 늦어.”이연석은 그를 째려보았다.“할 얘기 있으면 그냥 해. 빙빙 돌리지 말고.”그의 태도에 단이수는 되레 알려주기 싫었다.“다른 남자랑 8층 방에 들어갔어.”이연석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단이수를 보았다.“정가혜 말이야?”단이수가 두 눈을 깜빡였다.“응. 아까 내려가다가 가혜 씨가 다른 남자랑 8층 가는 거 봤어.”그러고는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벌써 30분이 지났어. 둘이 했는지 모르겠네...”단이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옆에 있던 이연석은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룸을 뛰쳐나갔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서 사라졌다.그 모습에 단이수는 피식 웃었다.‘신경 쓰지 않는다더니 다른 남자랑 호텔 방에 들어갔다니까 바로 뛰쳐나가는 것 좀 봐. 이번에 여자한테 제대로 잡혔어.’잠시 후 단이수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웠다. 그는 테이블 위의 술잔을 들고 가볍게 몇 모금 마셨다. 예전에는 술이 걱정을 덜어준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쓰기만 했고 게다가 마실수록 점점 쓴 것 같았다. 마음이 씁쓸해서 술맛도 잃은 모양이다.‘연석이 봐봐. 이수 넌 절대 연석이 같은 실수를 해선 안 돼. 자기 마음 잘 보고 잘해줘.’정가혜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주서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서희 씨, 이 늦은 밤에 무슨 일이에요? 혹시 연이가 떼를 썼나요?”주말에 부산으로 온 정가혜는 연이를 데리고 올 수 없어 주서희에게 이틀 맡겼다.평소 연이를 챙겼던 정가혜는 연이가 저녁에 잠들기 전에 장난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30분 이상 놀아주지 않으면 절대 자지 않았다.“연이는 말 잘 듣고 있어요.”‘말을 잘 듣는다고?’주서희의 품에서 자는 척하는 연이는 얼핏 보면 참 말을 잘 듣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은 귀를 쫑긋하고 두 사람의 통화를 엿듣고 있었다.‘가혜 이모 또 서희 이모한테 고자질하고 있어. 나중에 가혜 이모가 돌아오면 밤에 장난치는 시간을 한 시간으로 늘
“미쳤어?”“그러게 말이야. 한밤중에 뭐 하는 짓이야?”호텔에 묵은 투숙객들이 화를 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이연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손가락을 튕기자 한 무리의 경호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경호원들은 현금이 담긴 돈 봉투를 나눠주었다. 조금 전까지 욕설을 퍼붓던 투숙객들은 얌전히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그런데 문을 걷어찬 방 중에 단 두 개의 방만 문이 꽉 닫혀있었다. 한창 휴대 전화를 말리던 정가혜는 헤어드라이기 소리가 하도 커서 듣질 못했다.심형진도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수술 과정을 열심히 지켜보느라 아무 소리도 듣질 못했다.이연석은 앞으로 다가가 방문을 힘껏 걷어찼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자 굳게 닫힌 다른 방 앞으로 다가갔다.이번에는 구두를 신은 채 있는 힘껏 걷어찼다. 어찌나 세게 걷어찼는지 문에 걸린 번호 패마저 뚝 떨어졌다.정가혜는 소리를 듣고 헤어드라이기를 껐다. 누군가 문을 걷어차는 것 같아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정가혜, 문 열어!”문을 열려던 정가혜는 분노와 짜증이 섞인 이연석의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지금 심형진이랑 같이 있는 거 알아. 당장 문 열어!”걷어차여 흔들리는 문을 보며 정가혜는 눈살을 찌푸렸다.“이연석 씨, 당신 미쳤어요?”문밖에서 더 걷어차려고 발을 든 이연석은 정가혜의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만약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더라면 다시 올라가서 단이수를 한 대 치려 했다. 이게 다 단이수가 헛소리를 해서 벌어진 일이니까.그런데 지금 정가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연석은 온몸이 다 떨렸다.이런 기분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지라 이마에 식은땀마저 송골송골 맺혔다. 이젠 화가 나다 못해 무감각해졌고 숨을 쉬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심장이 멈췄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런데 이연석은 그 문을 열 용기가 없었다. 혹시라도 더러운 장면을 목격할까 봐 너무도 두려웠다.‘근데 이 문을 열지 않으면 두 연놈이 밤새 즐길 거잖아. 그 꼴을 어
정가혜는 이연석의 손을 따라 잠옷을 내려다보았다.이연석과 만날 때 이연석은 그녀의 낡은 옷들을 모두 버렸고 매주 비싼 옷들을 가득 보냈다.그녀의 옷장에는 온통 이연석이 사준 옷과 가방, 그리고 액세서리였다. 명품 브랜드에 신상이 나오면 이연석은 바로 사서 보냈다.그가 사준 게 정말 셀 수 없이 많았다. 어릴 적부터 근검절약하며 살아온 정가혜는 버리기 아까워 계속 입고 있었다.그런데 이연석이 콕 집어 말하자 그제야 잘못됐음을 깨달았다.‘전 남자 친구가 준 물건은 다 돌려줬어야 했는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지?’그 점을 깨달은 정가혜의 안색이 갑자기 바뀌었다.“돌아가면 나한테 선물했던 것들 다 돌려줄게요.”그러고는 이연석을 더 쳐다보기도 싫은 듯 급히 문을 닫으려 했다.이연석은 한 발로 문틀을 막고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모습에 정가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정가혜의 경계심 가득한 행동이 이연석의 화를 돋우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힘이 센 이연석은 한 손으로 정가혜의 두 손을 잡은 후 뒤로 가져갔다. 그 바람에 정가혜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높은 콧대가 정가혜의 매력적인 빨간 입술에 여러 번이나 스쳤다.정가혜는 손을 움직일 수가 없어 이연석을 발로 걷어차려 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입술이 그의 볼에 닿기도 했다.가볍게 몇 번 스쳤을 뿐인데도 이연석은 온몸에 전기가 흐른 것처럼 찌릿했다. 하지만 아직 화가 난 상태라 그쪽으로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이연석은 싸늘한 얼굴로 계속 반항하는 정가혜를 노려보다가 길고 탄탄한 허벅지로 미친 듯이 발버둥 치는 그녀를 가두었다.“이연석 씨, 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비록 이연석과 아무것도 하진 않았지만 심형진이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대체 뭐라 설명해야 할까?이연석은 다른 한 손으로 정가혜의 볼을 잡고는 예쁘고 매력적인 얼굴을 눈앞으로 가까이 가져다 댔다.“내 질문에 아직 대답 안 했어요.”이연석은 정가혜의
“선생님, 환자 갑자기 복강 내 출혈이...”꽉 닫힌 욕실 문을 열기 전에 다른 한쪽 이어폰에서 집도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심형진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이어폰을 끼고 수술을 가르쳤다.이연석은 정가혜와 키스하다가 산소 부족으로 숨이 가빠져서야 키스를 멈췄다. 정가혜도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너무도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따귀를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손과 발이 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여 그저 이를 꽉 깨물고 씩씩거리며 욕만 퍼부었다.“이연석 씨, 나 남자 친구 있는 거 몰라요? 지금 나더러 남자 친구 어떻게 보라고 이러는 건데요?”이연석은 남자 친구라는 소리에 겨우 가라앉았던 화가 또다시 끓어올랐다.“내가 헤어지라고 했잖아요. 헤어지기 싫다면 양다리 걸칠 준비나 해요, 그럼.”두 눈에 핏발이 선 이연석이 이 말을 내뱉었을 때 정가혜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맞아요!”이연석이 고개를 숙이고 이를 깨물었다.“난 이상하고 문제 많아요. 어릴 적부터 정상이 아니었어요.”거의 포효하듯이 소리쳤다. 목소리가 방 전체에 울려 퍼지자 정가혜는 화들짝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조용히 해요.”“왜요? 들을까 봐 무서워요?”이연석은 다시 그녀의 볼을 잡고 꾹 눌렀다.“우리가 이러는 거 볼까 봐?”그러고는 또 일부러 정가혜의 귓가에 바람을 불었다.“생중계로 그 사람한테 보여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난.”“미친!”정가혜는 이를 악물고 그를 욕했다.“미친 짓 다 했으면 이거 놓고 나가요!”그런데 이연석이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가혜 씨, 내가 미치는 건 다 당신 때문이고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요.”그는 예전에는 둘째 형이 왜 서유가 다른 남자와 자는 걸 그렇게 싫어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까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픈지 제대로 느꼈다.이연석은 개의치 않아 할까? 아니, 죽어도 받아들
“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이연석은 정가혜를 욕실 앞으로 끌고 가더니 욕실 문 쪽으로 밀어붙였다. 화들짝 놀란 정가혜가 고개를 돌렸다. 간유리 사이로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심형진의 모습이 보였다.심형진은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있어 소리도 듣지 못했고 보지도 못했다. 정가혜는 혹시라도 그에게 들킬까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그런데 이연석은 그녀가 당황하든 말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 손을 잠옷 안으로 넣었다.그가 직접 가르친 거라서 어느 부위가 가장 민감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손이 살짝만 닿았을 뿐인데도 정가혜는 꼼짝도 하질 못했다.“연석 씨, 당신...”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퉁퉁 부은 입술로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훅 들어왔다. 그녀 입안의 공기마저도 다 빼앗아버렸다.이연석은 마치 그녀를 벌하듯이 마구 키스했고 손으로 계속 그녀의 민감한 부위를 어루만졌다.정가혜는 이런 모습의 이연석을 처음 봤다. 정말 미친 사람이 따로 없었고 앞뒤라곤 가리지 않았다.겁이 난 그녀는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세 살 어린 이연석은 나이만 어릴 뿐 힘은 놀라울 정도로 셌다.이연석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와 목에 키스하기 시작했다. 정가혜는 분노를 참으면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연석 씨, 난 형진 선배랑 아무 일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러지 말아요. 무고한 사람한테 상처 주지 말라고요.”심형진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소리에 터질 것처럼 아팠던 심장의 고통이 순식간에 덜해졌다. 하지만 뒷말이 또 이연석을 자극하고 말았다.그는 정가혜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잡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야말로 조롱이 가득한 웃음이었다.“그 사람이 상처받는 건 안 되고 난 받아도 된다는 거예요?”정가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를 벗어나려고 힘을 주면 줄수록 더 벗어날 수 없어서 차라리 포기하고 그냥 노려보기만 했다.그녀가 이젠 말도 섞지 않자 이연석은 화가 나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손가락마저 부들부들 떨렸다.“
심형진과 헤어질 거란 소리에 이연석의 분노도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는 정가혜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손을 들어 품에 안았다. 마치 잃었던 소중한 보물을 다시 얻은 것처럼 꼭 안았고 내려놓기 아쉬웠다.“가혜 씨, 심형진이랑 헤어지면 예전처럼 나랑 다시 만나요. 앞으로는 절대로 다른 여자 만나지 않고 가혜 씨한테만 잘해줄게요. 가혜 씨만 괜찮다면 우리...”부모님을 만나고 결혼까지 하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가혜가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요. 난 연석 씨 다시 만날 생각 없어요.”정가혜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갑자기 굳어졌다. 이연석은 품속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귀먹었어요?”정가혜는 무서울 게 없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연석 씨랑 다시 만나지 않고 남자 친구도 만나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 쭉 혼자 살겠어요.”‘남자 해서 뭐 해.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경로당이나 사서 간병인 찾아 남은 인생을 사는 것도 얼마나 좋아. 나처럼 버려진 고아는 가정을 꾸릴 자격도 없어. 그냥 혼자서 늙다가 죽어야지.’정가혜는 이연석을 힘껏 밀어냈다. 이연석은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이었다.“당신...”이연석은 정가혜의 고집이 이렇게 셀 줄은 몰랐다. 남자 친구를 만나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그와 다시 만날 생각은 없다고 했다.‘나랑 만나는 게 그렇게 싫은가?’“가혜 씨.”이연석은 정가혜의 코앞까지 다가갔다.“날 또 거절했네요. 앞으로 가혜 씨랑 다시 만나자는 얘기 절대 안 할 겁니다.”정가혜는 그의 말을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든 말든 그냥 짜증 섞인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먼저 나가 있어요. 적어도 형진 선배랑 단둘이 얘기할 시간은 줘야죠. 헤어지는데 옆에서 감시라도 할 거예요?”정가혜의 말투가 어찌나 차분한지 모든 걸 다 체념한 듯했다.이연석은 얼굴을 찌푸린 채 그녀를 빤히 보다가 결국 돌아섰다. 방을 나가기 전 발걸음을 멈추고 정가혜를 싸늘하게 돌아보았다.“깔끔하게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경호원은 마지못해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그의 입에 가져다 댔다.“도련님, 처음 한 모금 빨 때 폐로 들이마시지 마세요. 사레에 걸릴 수 있습니다.”콜록콜록.경호원이 담배를 피우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전에 한 모금 빨아 마시던 그는 사레에 걸려 연속 기침을 했다.“도련님, 괜찮으십니까?”깜짝 놀란 경호원은 얼른 굳은살이 박인 손을 들어 그의 등을 두드렸다.힘이 너무 세서 그를 아프게 할까 봐 조심스럽게 간지럽히듯 그의 등을 쓰다듬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까스로 숨을 돌린 그가 다시 담배를 집어 입에 넣었다. 정가혜도 피우는 담배를 난 왜 안 되는데?담배를 물기도 전에 큰 손이 다가와 그의 입에서 담배를 낚아챘다. “네가 뭔 담배를 피운다고 난리야?”고개를 들어보니 흰색 정장 차림으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단이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내놔.”대답하기 귀찮았던 단이수는 담배를 집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휴지통에 던졌다. “너 또 이러면 누나한테 전화할 거야.”이승하가 없으니 제멋대로인 이연석을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이승연뿐이었다. 차가운 누나의 얼굴이 떠오른 그는 더 이상 담배를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지만 얼굴의 분노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씩씩거리는 친구를 보며 단이수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겪어본 사람으로서 솔직하게 말하는데. 좋아한다면 소중히 여겨. 그 여자한테 상처 주지 말고.”“그 여자랑 싸우고 억지 부리면 결국은 내 꼴이 될 거야. 나중에는 울면서 무릎 꿇고 빌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라.”별처럼 반짝이던 그의 눈 밑에 걷잡을 수 없는 우울함이 가득했다.과거의 자신을 원망이라도 한 듯 두 눈에 슬픔이 차올랐다. 뼈에 사무친 기억을 접어두고 그가 다시 이연석의 어깨를 힘껏 두드렸다.“내 말 들어. 잃고 난 다음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붙잡아.”“난 너랑 달라.”한참을 타일렀지만 결국 그한테서 돌아온 대답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