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아버지한테 형제자매가 세 명이었어요. 아버지까지 포함해서 자식이 총 네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밖에서 낳은 자식이에요.”밖에서 낳은 딸이라니. 김씨 가문도 참 복잡한 집안이었다. 내심 꺼리면서도 겉으로는 놀란 척하며 말했다.“네 명을 낳은 걸 보면 할아버지께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않으셨나 보네요.”은근히 할아버지를 엿먹이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김선우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 밖에서 낳은 딸이 김씨 가문에게 큰 상처를 주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그 딸을 가문에서 쫓아내신 거예요. 원래는 김씩 가문의 둘째 아가씨였어요.”상황 파악이 잘 안됐던 그녀는 다시 물었다.“그럼 현재 김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는 누구예요?”“우리 작은고모요.”아직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며 김선우는 그녀의 머리를 톡 쳤다.“진짜 바보네. 우리 첫째 고모는 김윤주이고요. 둘째 고모는 김율. 셋째 고모가 김영주예요. 우리 아버지 김종수는 네 남매 중에 제일 막내이고요. 지금은 둘째 고모가 없으니 셋째 고모가 둘째가 된 것이죠.”어머니의 이름은 김영주였다. 언니가 설립한 건설회사는 어머니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그 외에 또 한 가지 사실은 우리 사촌 형도 잘 몰라요.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얘기하는 걸 내가 엿들었거든요.”“세 명의 고모 중에서 한 사람은 우리 김씨 가문의 딸이 아니라고 했어요.”김씨 가문의 딸이 아니라고? 혹시 그녀의 어머니였던 걸까? 그래서 김선우의 할아버지와 할머니한테 미움을 받았던 걸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가 자신을 의심할까 봐 그만두기로 했다. 가뜩이나 작은고모와 닮았다고 하는데 자신이 바로 김초희가 어렸을 때 잃어버린 그 아기라는 게 들통나게 될까 봐 경솔하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우리 집안의 비밀까지 다 알려줬으니까 이젠 사진 한 장 찍어줄 거죠?” 테이블을 치는 소리에 놀라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라스베이거스를 떠난 두 사람은 몰디브로 향했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정가혜와 심형진의 왕래는 점점 더 잦아졌고 아무리 병원 일이 바빠도 심형진은 틈틈이 그녀를 보러 왔었다. 아침이면 그녀에게 아침을 가져다주고 저녁에는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가끔 클럽의 일 때문에 새벽까지 밤을 새우면 그는 잠도 자지 않고 그녀를 기다렸다. 묵묵히 자신을 기다려주는 심형진을 볼 때마다 그녀는 감동받았다. 이렇게 그녀한테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시간을 내어 심형진과 함께 밥도 먹고 영화도 봤다.점점 데이트도 많아지고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손도 잡게 되고 처음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오늘도 늦게까지 일하고 나온 그녀는 우산을 쓰고 입구에 서 있는 그를 보고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다. “선배, 비가 오는 데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해요?”사귀는 사이는 맞지만 선배라고 부르는 게 더 편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자연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비가 그렇게 많이 내리지 않아.”무슨 일이라도 생긴 듯 우울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며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무슨 일 있어요?”검은 우산을 쓰고 있던 그가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우산을 내려놓고는 그녀를 끌어안았다.남자의 턱이 어깨에 닿자 그녀는 몸이 굳어졌다. 그러나 그를 밀어내지 않고 그의 포옹을 받아주려는 듯 가만히 있었다. 그녀를 품에 안자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고 눈 밑의 우울하고 슬픈 감정이 많이 사라졌다.“오늘 저녁에 수술이 있었는데. 환자가 죽었어.”그가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살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그러나 결국은 살리지 못했고 심장 박동수 그래프가 점차 일직선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의학을 배우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사람을 살리는 것인지 아니면 환자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다시는 찾아올 줄 몰랐다. 이렇게 우연히 맞은편에 그가 서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저 현재 자신의 남자 친구가 심형진이라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새겼다. 잠시 후, 그녀를 놓아준 심형진이 그녀에게 우산을 씌어주며 그녀를 차에 태운 뒤 익숙하게 그녀의 별장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작별 인사를 한 뒤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그가 그녀를 불렀다.“가혜야.”그가 쑥스러워하며 한 걸음 다가왔다.“왜 그래요?”그를 올려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는 집까지 데려다주고 바로 돌아섰던 사람이 오늘은 왜 그녀를 부른 건지?심형진은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붉은 입술을 빤히 쳐다보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키스를 하고싶은 데 망설이고 있는 눈치였다. 결혼까지 해본 그녀였으니 욕망이 가득 한 그의 눈빛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진도가 너무 빠른 것 같았다. 솔직히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어른들이니 사실 그리 빠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자꾸만 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망설이게 된다. 마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심형진과 키스를 하거나 잠자리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그녀의 마음을 알지 못했던 그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물었다.“키스해도 돼?”직설적으로 물어보긴 했지만 그의 얼굴은 원래의 얼굴색을 잃어버릴 정도로 빨개졌다.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그를 쳐다보니 엄청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어린 소년처럼 수줍어하는 모습이 그녀의 앞에서 훤히 드러났다. 인생 경험이 많지 않은 고등학생처럼 깨끗하고 순수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불현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선배, 선배는 내가 좋은 거예요? 아니면 단순히 내가 결혼에 적합한 상대라서 그런 거예요?”맞선 자리에서 만난 상대이니 대부분은 결혼에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좀 더 만나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 결혼만을 위해 이러는 건 같지 않았다. 아름
심형진은 정가혜가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자 무례를 범했다는 걸 알아채고 재빨리 사과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지...”심형진은 정가혜를 향한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늦었어. 일찍 쉬어.”그러고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려는데 정가혜가 그의 팔을 잡았다.“선배, 굿나잇 키스하고 가요.”심형진은 몸이 굳어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가혜를 돌아보았다. 정가혜는 그의 팔을 잡고 발끝을 들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부드러운 입술이 서로 닿은 순간 심형진의 두 눈에 기쁨이 돌았다. 그녀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올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듯했다.정가혜는 입술이 닿자마자 바로 뗐다.“잘 자요.”귀까지 빨개진 심형진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너도 잘 자.”그녀는 손을 들고 흔들었다.“가서 운전해요.”매번 갈 때마다 심형진은 정가혜가 집으로 들어간 다음에 떠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그녀의 말대로 고분고분 차에 탔다.차에 시동을 건 후에도 아쉬운 듯 유리창을 내려 정가혜를 쳐다보다가 잘 가라고 하자 그제야 떠났다.정가혜는 멀어져가는 차를 보면서 입술을 어루만졌다. 첫 번째 단계 손잡기와 두 번째 단계 키스까지 자연스럽게 했다. 만약 세 번째 단계까지 간다면 그녀는 경계심을 내려놓고 심형진과 함께할 것이다.어쩌면 재혼은 그녀에게 따뜻함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자신을 오랜 시간 짝사랑한 사람에게 시집간다면 사랑을 많이 받을 테니까.예전에 보육원의 한 어르신은 그녀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여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그래야만 남편이 소중히 아껴줄 거라고 했다.그때까지만 해도 그 얘기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직접 겪고 나니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많이 편하다는 걸 느꼈다.정가혜는 서유와 달라서 이승하처럼 목숨도 기꺼이 바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고 서유처럼 뜨거운 사랑을 할 일도 없었다. 평범하기 그지
말문이 막힌 이연석은 약이 바싹 올라 정가혜의 얼굴을 잡았다.“남자 친구라고요?”손가락에 힘을 가하자 정가혜의 얼굴이 움푹 패어 들어갈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목을 조여서 죽이고 싶었다.“내일에 심형진 없애버릴 거예요. 누가 또 감히 당신 남자 친구가 되려는지 두고 볼 겁니다.”서울에서 이연석이 사람 하나 없애는 것쯤은 정말 일도 아니었다. 정가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연석이 무슨 자격으로?정가혜는 고개를 들고 이연석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연석 씨는 여자 친구랑 다정하게 끌어안고 키스하면서 난 왜 남자 친구랑 그러면 안 되는데요? 당신이 뭔데 없애버리겠다 말겠다예요?”‘자기는 할 거 다 하면서 왜 날 통제하는 거야?”이연석은 그녀가 화가 났다는 걸 바로 알아채고는 얼굴을 잡은 손을 내려놓고 그녀를 안았다.“가혜 씨, 난 하린이를 터치한 적이 없어요. 뽀뽀도 안 했다고요. 가혜 씨랑 헤어진 후에 다른 여자 건드리지도 않았어요.”그는 금욕적인 생활을 꽤 오래 했다. 처음에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정가혜와 스킨십을 하고 나서는 다른 여자는 건드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이런 감정이 생긴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세상이 정가혜 때문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 건 확실했다.“가혜 씨, 심형진이랑 헤어져요. 두 사람이 함께하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리고 두렵기도 하고...”두 사람을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잠자리라도 하게 될까 두려웠다. 서로 침대 위에서 뒹구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연석은 길어봤자 보름이면 정가혜를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를 찾아왔다.그런데 정가혜를 만나기도 전에 클럽 문 앞에서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고 달려왔을 땐 이미 입까지 맞췄다. 차 안에서 이 모든 과정을 목격한 이연석은 홧김에 핸들을 부러뜨릴 뻔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착각이길 바랐다.그렇게 정가혜가 고개를 끄덕이고 인정하고
이연석은 정가혜를 한번 찾아온 후로 마치 증발이라도 한 듯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뉴스에서 이연석이 이승하를 대신해 연해 그룹과 전략적 협력 계약을 체결하는 걸 보게 되었다.정가혜는 그제야 그동안 이연석이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는 걸 알게 되었다.화면 속 이연석은 깔끔한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거기에 올백 머리까지 더해지니 나름 대표다워 보였다.정가혜는 경제 뉴스를 다 본 후 TV를 끄고 심형진에게 전화를 걸어 도착했냐고 물었다. 주말이 됐으니 송사월을 보러 가야 했다.전에 송사월과 자주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기에 주말마다 계속 갔다. 그리고 심형진과도 이젠 꽤 만나 송사월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정가혜가 다시 용기 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걸 송사월도 본다면 상처의 수렁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두 사람은 공항에서 나오다가 이지민을 만났다. 어떤 남자가 그녀에게 끈질기게 매달리자 정가혜는 두말없이 달려갔다.“지민 씨, 무슨 일이에요? 신고할까요?”갑자기 앞에 나타나 자신을 지켜주는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이지민은 멈칫했다가 이내 손을 내저었다.“신고할 것까진 없어요.”이지민은 단이수에게서 벗어나 인내심 있게 말했다.“오빠, 우린 이미 끝났어. 그러니까 그만해, 이제.”단이수가 손을 다시 잡으려 하자 이지민은 뒷걸음질 쳤다.“우리 부모님이랑 오빠네 부모님 다 반대하셔. 그러니까 부모님 말씀대로 해.”사실 이지민은 부모의 말을 꼭 들으려는 게 아니었다. 더 큰 이유는 예전에 단이수를 좋아했을 때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단이수는 그녀의 오빠처럼 놀기를 좋아했고 주변에 여자가 많은 연애 고수였다. 그런데 여자 친구가 있어도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갖는 그와는 달리 그녀의 오빠는 아니었다.단이수의 여자 친구였던 이지민은 실제로도 그가 여러 번이나 다른 여자와 잠자리하는 걸 목격했었다.그때 이지민은 문 앞에 서서 속으로 생각했었다.‘나중에 내 마음이 식으면 다시는 이수 오빠 때문에 아프진 않겠지.’그리고 이
“지민 씨, 소개할게요. 내 남자 친구 심형진입니다.”정가혜는 숨기지 않고 심형진을 이연석의 여동생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어떤 남자가 공항에서 이지민을 귀찮게 한 일은 눈치 있게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그녀의 말에 이지민은 화들짝 놀랐다.‘가혜 씨한테 남자 친구 생기면 우리 오빠는 어떡해요?’그런데 곧바로 자신이 당했던 일을 떠올린 그녀는 같은 여자로서 정가혜의 기분이 이해가 되었다. 이 세상에 양쪽에 여자를 끼고 사는 바람둥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이지민의 오빠는 단이수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그래도 바람둥이인 건 사실이었다. 성인이 된 후로 옷을 갈아입듯 여자를 바꿨기에 딱히 나을 것도 없었다.그 생각에 이지민은 하려던 얘기를 삼키고 예의 바르게 정가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가혜 씨 남자 보는 안목이 있네요. 그럼 언제 결혼해요?”이지민이 떠보듯 물었다. 아직 오빠가 정가혜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빠를 도와주려는 건 아니고 나중에 두 사람의 사이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질 수도 있기에 미리 오빠에게 마음의 준비라도 하게 할 생각이었다.결혼 문제에 관해 정가혜가 대답을 망설이자 심형진이 말했다.“아직 프러포즈도 안 했는데요, 뭐. 프러포즈한 다음에 날짜 잡으려고요.”심형진은 정가혜의 의견을 먼저 물었다. 정가혜가 그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 걸 확인하고 프러포즈를 하는 게 상대를 존중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이지민은 두 사람이 아직은 그냥 만나는 단계고 결혼 얘기까지 나오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더는 묻지 않았다.“좋은 소식 있으면 나한테 알려줘요.”그녀는 두 사람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짐을 챙기고 공항을 나가려 했다.그런데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공항 밖에서 양복 차림의 김태진이 휠체어를 밀면서 천천히 공항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휠체어에 탄 남자는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고 무릎 위에는 얇은 담요를 덮고 있었다. 도도한 자태에 깨끗한 얼굴은 마치 그림을 찢고 나온 비주얼이었다.이지민은 김시후를 보자마자
송사월이 두 사람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한 후 김민정이 약과 물을 가져와 건넸다.심형진은 그 약병을 보자마자 송사월이 왜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지 알게 되었다.‘우울증 환자였구나.’상태를 보면 이미 중증 환자였고 그저 계속 스스로 참고 있었다.송사월도 심형진이 아는 걸 꺼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김민정이 건네는 약과 물을 받아 제때 먹었다.‘가혜 누나가 약만 잘 먹으면 천천히 나을 수 있다고 했어. 언젠가는 낫겠지...’“사월아, 약 다 먹었으니까 누나랑 별장 밖에 산책 가자.”다행히 정가혜가 옆에 있어 줘서 송사월의 기분도 조금은 나아졌다. 짧디짧은 주말이지만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가 있었다.“심 선생님도 같이 가요.”심형진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는 묵묵히 따라나섰다.정가혜는 그에게 자신의 과거를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녀와 송사월은 보육원에서 함께 자랐고 어릴 적부터 송사월을 남동생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친남매보다도 더 가까웠다.송사월의 가족이 그를 찾아 화진 그룹의 대표가 되긴 했지만 어릴 적 함께 자란 정은 여전했다. 이삼십 년이 지나도 절대 끊을 수 없는 그런 정이었다. 심형진은 두 사람 사이의 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정가혜가 동생에게 심형진을 소개하는 것 자체가 가족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다. 기뻐해도 모자랄 판인데 불만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부산의 밤은 조금 무더웠다. 심형진은 길가의 자동판매기에서 물 몇 병을 사서 송사월과 김태진에게 건넸다. 정가혜가 마실 물은 손으로 움켜쥐고 미지근해진 다음에 뚜껑을 열어 건넸다.“조금만 마셔봐. 찬지 어떤지.”“찬 거 마시고 싶은데...”“넌 몸이 약해서 찬 거 자주 마시면 안 돼.”심형진의 따뜻한 말에 송사월은 저도 모르게 자꾸 힐끔거렸다. 두 눈에 담긴 웃음은 마치 이 ‘매형’을 인정하는 것만 같았다.송사월은 휠체어에 손을 올려놓고 미지근한 물을 마시기 싫어하는 정가혜를 쳐다보았다.“누나, 심 선생님은 누나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니까 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