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얼굴에 너무 화끈거려 몇 마디 반박하려는데 영상에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하얀 슈트를 입은 남자가 정가혜 손에 들린 담배를 낚아채 비벼서 끄고는 쓰레기통에 버리더니 정가혜를 바라봤다.“담배 피우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왜 말을 안 들어요?”화면 너머로 갑자기 나타난 이연석을 보고 넋을 잃었다.정가혜는 서유보다 더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이연석이 클럽으로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 줄은 몰랐다.전에 클럽에서 그렇게 얼굴을 붉히고 나서는 만난 적이 없었다. 마치 죽을 때까지 마주치지 않을 듯한 기세였다.하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 이연석은 자세를 낮추고 다시 정가혜의 클럽에 찾아왔고 예전처럼 그녀의 담배를 뺏어갔다.정가혜는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저번에 병원에서 그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산부인과로 가는 걸 분명 봤는데 말이다.조심스럽게 부축하는 모습은 여자를 임신시켜 놓고는 낙태하러 가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이연석은 여자를 자주 바꿨지만 그래도 한번 만나면 꽤 일편단심이라는 걸 정가혜는 알고 있었다. 다른 여자가 생겼으면서 왜 그녀를 찾아온 걸까?정가혜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이연석은 딱히 표정이라고 할게 없이 그저 화면 속의 서유를 힐끔 쳐다봤다.“서유 씨, 친구 좀 빌려 갈게요.”이연석은 이렇게 말하더니 영상 통화를 끝냈다.서유는 그렇게 끝나버린 영상통화 화면을 보며 점차 정신을 차렸다.정가혜와 이연석의 사이는 사실 어딘가 복잡했다.서유는 정가혜에게 이연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정가혜는 그냥 스쳐 가는 바람이라고 했다.하지만 3년이라는 시간을 사귀었는데 정말 스쳐 가는 바람이 맞을까?둘 사이의 감정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해결하겠지.서유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원형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요 며칠 정말 너무 삭신이 쑤셨다. 계단 하나 내려가는 것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서유는 한 걸음 한 걸음 간신히 계단에서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서유는 맑고 깨끗한 눈동자로 이 물건들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다시 봉지를 닫았다.뽀얀 얼굴은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이런 작은 일에 휘둘리지는 않을 것이다.사실 서유는 잘 알고 있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았음에도 제때 그녀에게 돌려주지 않은 건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서였을 것이다.이승하가 그녀를 위해 몸을 던졌을 때, 많이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부터 걱정할 때, 그때 이미 결정은 끝났다.서로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으면 이런 작은 꼼수쯤은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서유는 봉지를 잘 닫은 뒤 아까 챙긴 도구들도 다시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았다.그녀가 이 도구들을 가져간다면 이승하도 눈치챌 테니 아예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할 생각이었다.욕실에서 나온 이승하는 서유가 보이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져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도우미들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이승하의 모습에 놀라 옆으로 비켜섰고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한바퀴 빙 둘러봐도 서유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잘생긴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혼자 나가게 하지 말라고 내가 당부하지 않았나요?”화를 억지로 누르는 듯한 목소리에 도우미들은 그가 왜 갑자기 이렇게 화가 났는지 알게 되었다.“미스터 이…”아까 서유와 얘기를 나누었던 도우미가 부들부들 떨며 앞으로 나왔다.“미스 서는 어디 간 게 아니라 서재에 그림 도구 찾으러 갔습니다.”이를 들은 이승하는 분노가 사그라들긴 했지만 이내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그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서재로 향했고 마침 서재에서 나오는 서유와 마주쳤다.그는 멈칫하더니 앞으로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두려움이 그를 잠식했다.서유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큰 감정 기복이 없어 보였다. 그저 그를 향해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승하 씨, 니콜이 서재에 그림 도구가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못 찾겠어요. 좀 찾아줄래요?”이 말에 딱딱하게 굳었던 이승하의 얼굴이 조금 풀렸고 꽉 움켜쥐었던 주먹에도 슬슬 힘이 풀렸다.그는 단숨
오전 내내 시달리고 나서야 이승하는 서재에서 그림 도구를 꺼냈다.서유는 손을 내밀어 받으려 했지만 이승하가 서유의 손을 잡더니 다른 서재로 데리고 갔다.이 서재는 전에 봤던 서재보다 더 컸다. 해살이 유럽풍 인테리어를 한 방안에 비쳐 들자 너무 따듯해 보였다.이승하는 물품을 기다란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고운 손으로 서유의 단발을 매만졌다.“서유야, 이 서재 괜찮아?”“괜찮네요.”건축 도면을 그리려면 긴 테이블이 필요했는데 원목으로 만든 이 테이블은 크고 넓은 게 치수를 재고 구도를 그리는데 딱이었다.서유는 테이블 앞에 앉아 도면을 펼치고 구도를 설계하려는데 이승하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이승하의 품에 안긴 이승하는 수줍어하며 밀어냈다.“아니...”이를 들은 이승하의 창백한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너 아직 점심 식사 전이잖아. 내려가서 뭐 좀 먹자.”이승하를 오해한 서유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머리를 그의 튼실한 가슴에 파묻고 품에 안긴 채 주방으로 향했다.오후에 심이준은 상대가 원하는 스타일을 소통한 후 서유에게 보내주며 먼저 초안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서유는 핸드폰 화면을 슬라이드 해서 여러 번 확인했고 설계 방향을 대략 정했다.그녀는 서재로 돌아와 테이블 앞에 앉아 펜슬과 자를 들고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워싱턴의 사오월은 초봄이라 햇살이 따듯했다. 햇살은 창밖의 나뭇잎 사이를 뚫고 방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몸을 따듯하게 비춰줬다.원래도 충분히 아름다운 얼굴에 햇살이 언뜻언뜻 비치니 더욱 매혹적으로 보였다.이승하는 창문 아래에 놓인 소파에 앉아 한 손으로는 책을 들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짚고 있었다.이승하는 덤덤한 눈빛으로 책을 보다가 열심히 도면을 그리고 있는 서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시선 한 번에 이승하는 그대로 빠져들었다. 어두웠던 눈동자에 점점 빛이 스며들었다.그는 서유가 도면을 그리는 걸 조용히 바라봤다. 두 사람이 서재에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따듯하고 아름다워 보였다.그렇게 앉아서 몇 시간을 그린 서유는 깔깔해진
“서유야.”이승하는 도면을 손으로 누르며 열심히 도면을 그리고 있는 서유를 내려다봤다.“내가 신분도 다시 찾아주고 회사도 만들어줄게. 앞으로는 네 신분으로 마음껏 설계해.”자를 들고 있던 서유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이승하를 바라보며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신분을 되찾는 일은 언니 꿈 이뤄주고 나서 보는 걸로 해요.”언니 김초희는 좋아하는 프로젝트를 50개 넘게 받아왔지만 설계를 완성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서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 신분으로 이 프로젝트를 잘 끝내 하늘에 있는 언니가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하지만 회사를 만드는 일은 됐어요.”언니의 꿈을 완성하고 나면 혼자만의 힘으로 이승하와 견줄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고 싶었다.그와 맞먹는 위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학력도 배경도 없는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이승하는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했다.“서유야, 난 너를 위해 그 무엇도 만들어줄 수 있어. 그러니 다른 생각은 안 해도 돼.”자리에서 일어난 서유는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이승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알아요. 하지만 어떤 일은 스스로 해내고 싶어요.”정말 어느날엔가 이승하가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스스로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는 이상 남자 덕으로 성공했다는 타이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서유의 굳건한 눈빛에서 이승하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자신감을 느꼈다. 지금의 서유는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우러러보게 했다.이에 서유에 대한 이승하의 사랑은 점점 깊어져만 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해야 할 게 있다면 반드시 해줄 테니 말이다.서유는 설계 도면에 집착했고 이승하가 말려도 듣지 않았다. 이승하는 별수 없이 그녀에게 먹거리와 약을 준비해 주고는 묵묵히 곁을 지켰다.새벽까지 노력한 끝에 초안의 틀은 거의 잡았지만 아직 더 다듬어야 했다.그녀가 다시 허리를 숙이고 그림에 몰두하려 하자 이승하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안방으로 향했다.서유는
서유는 멈칫하더니 아무 생각 없이 이승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이승하는 턱을 살짝 들고 그녀의 눈동자를 조용히 바라보며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서유는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고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기억이 안 나는데…”만약 서유가 예전처럼 꿈에서 송사월의 이름을 외쳤다면 둘 사이는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이승하의 가슴에 올려진 서유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나갈게요…”서유가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데 이승하가 그녀를 안고 방향을 돌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러더니 예쁜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이승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볼에 키스하고는 그녀를 안고 욕실로 향했다.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물소리와 함께 간간히 들려왔다.이승하가 아직 욕구를 채 쏟아내지 못한 듯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서유야, 드디어 네가 꿈에서 내 이름을 불렀어…”서유는 너무 피곤했지만 그래도 억지로 버티면서 도면을 그렸다. 그리면서도 속으로 이승하를 욕했다.그렇게 분노로 가득 찬 마지막 한 획이 그어졌고 자를 내려놓는 순간 서유는 의자에 그대로 널브러졌다.얼마 쉬지도 못했는데 심이준이 전화를 걸어와 도면을 재촉했다.“도면 완성했어요?”서유는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완성했어요. 사진으로 보내줄게요…”“사진은 안 되고 원본이 필요해요. 주소 보내주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서유는 창가에 앉아 경제 잡지를 보고 있는 이승하를 힐끔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심이준 씨가 직접 원본을 가지러 오겠다는데요?”이승하가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말했다.“올 용기는 있고?”수화기 너머로 듣고 있던 심이준은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에 얼른 이렇게 대답했다.“실례가 많았네요. 그럼.”서유는 꺼진 화면을 바라보며 몇초간 멍해 있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심이준은 왜 이승하를 이렇게 두려워하는 걸까?서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는데 심이준의 문자가 하나둘 날아왔다.[이승하 씨 너무 무서
워터풀 시티에 도착한 심이준은 눈앞에 펼쳐진 궁전 같은 별장에 조화롭던 얼굴이 일그러졌다.심이준은 이승하에게 작은 반항이라도 하기 위해 신고 온 슬리퍼를 내려다봤다.다시 한번 별장을 쳐다본 심이준은 방금 한 결정이 경솔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별장 문이 활짝 열리자 심이준은 침을 꿀꺽 삼키고 안으로 들어갔다.내부 인테리어가 밖에서 본 것보다 더 휘황찬란하자 심이준은 급 서러워지기 시작했다.“서유 씨, 혹시 그거 알아요? 대표님이 당신을 데려가던 그날 나는 어디서 지냈는지?”서유는 도면을 돌돌 말며 물었다.“어디서 지냈는데요?”심이준의 깔끔한 미소가 그대로 굳더니 이렇게 말했다.“육교 아래서 몇몇 아프리카 노숙자들과 함께요!”도면을 말던 서유의 손이 멈칫하더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미안해요. 그런 줄은 몰랐네요…”심이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비록 서유 씨가 나보다 좋은 데서 지내긴 하지만 당신은 2억을 잃었는걸요.”서유가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비참하다면 심이준도 그나마 심리적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하지만 뭐, 대표님과 결혼한다면 2억도 아쉬운 돈은 아니겠네요.”다시 한번 찬찬히 짚어본 심이준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얼굴이 일그러졌다.똑같이 외국에서 일하는 처지에 서유는 재벌을 만나고 있는데 자신의 곁엔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심이준은 마음이 씁쓸했다.서유는 표정이 다채로운 심이준을 힐끔 쳐다보더니 잘 말아둔 도면을 그의 손에 넘겨줬다.“이준 씨, 빨리 가서 일 봐요. 고객 쪽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곳이 있다면 기록해서 나한테 알려줘요. 수정할게요.”심이준은 표정을 정리하고 도면을 받았다. 그러더니 씩씩거리며 서재를 나섰다.서재에서 나오자마자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원형 계단에 기대 선 이승하와 눈이 마주쳤다. 이승하는 그를 향해 턱을 살짝 세우더니 이렇게 말했다.“심이준 씨, 제 서재로 오시죠. 잠깐 할 얘기가 있습니다.”“아니요, 우리 사이에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심이준이 놀라서 뒤
수영장의 물은 매우 맑았고 달빛 아래 잔잔한 물결이 일고 있었다.이승하는 서유를 수영장 벽으로 몰더니 매혹적인 목소리로 그녀를 홀렸다.“서유야, 너 여태까지 나 사랑한다고 말해준 적 없어…”사랑한다는 말은 일종의 약속이었다.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맹세와도 같았다.아직 용기가 부족한 서유는 하늘에 떠 있는 청아한 달빛을 바라보며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몰랐다.이승하는 품속의 여인을 바라보며 그녀가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기다렸지만 결국 원하는 답을 얻지는 못했다.이승하의 축 처진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입꼬리를 당기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나 봐.”서유가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 말하려는데 이승하가 그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타올로 그녀의 몸을 감싸주고는 욕실로 데려갔다.이날 밤 이승하는 아무 말 없이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사실 이걸로 충분했다.서유가 몇 번이나 그를 돌아봤지만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녀가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자 이승하가 꼭 감고 있던 눈을 뜨더니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잠들 수 있게 다독였다.“서유야, 자. 내일 데려갈 데가 있어.”서유는 그의 다독임 하에 불안한 마음을 안고 꿈나라로 향했다.무슨 꿈을 꿨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깨어나 보니 정신이 흐리멍덩했다.서유는 이런 정서를 잘 감추느라 애썼고 다행히 이승하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와 같이 아침을 먹고는 그녀를 데리고 승마장으로 향했다.서유는 말을 타면서 힐링할 거라고만 생각하고 대충 연하게 화장하고 갔는데 알고 보니 그의 친구들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이승하의 친구는 다들 있는 집 자제들이었다. 국적은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혼혈도 있었다.그들은 하나같이 키와 외모가 출중했고 성격도 젠틀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 것에도 품위가 느껴졌다.서유는 영어를 꽤 잘하는 편이라 그들과 대화가 가능했다. 조금 더 얘기를 나누려는데 기다란 뒷모습 하나가 시야를 가렸다.이
이승하는 그녀의 찬란한 웃음에 어젯밤부터 먹먹하게 조여왔던 가슴이 금세 풀리는 것 같았다.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탈의실로 향해 그녀에게 직접 승마복을 입혀주었다. 그러더니 관리원에게 자신의 전용 승마복을 가져오라고 했다.밖에서 기다리던 서유가 난간에 기댄 채 바닥에 놓인 자갈을 걷어차고 있는데 뒤에서 문이 서서히 열렸다.햇빛을 받으며 걸어 나오는 이승하의 도도한 얼굴에는 선글라스가 걸려 있었고 이는 그의 정교한 오관을 더 멋들어지게 받쳐주고 있었다.황금비율을 자랑하는 이승하는 위에는 타이틀한 하얀색 승마복에 허리춤에는 까만 벨트를 차고 있었다.아래도 색깔을 맞춰 하얀 승마용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기다란 다리를 더 돋보이게 했다. 그리고 무릎 아래로는 목 높은 까만색 부츠를 신고 있었다.이승하는 한 손으로 헬멧을 든 채 햇빛을 등지고 서서 살짝 고개를 한쪽으로 젖히고 서 있었다.오색찬란한 햇빛이 보일 듯 말 듯 그가 고개를 젖힌 방향으로 선글라스를 비춰주고 있었다.온몸으로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는 이승하는 고전 유화 속에서 걸어 나온 귀공자와도 같았다.그는 서유에게로 다가와 뼈마디가 선명한 예쁜 손으로 헬멧을 그녀의 머리에 씌워줬다.그 모습도 너무 귀티 나고 우아했다.서유는 그런 이승하를 넋을 잃은 채 바라봤다. 이승하는 그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유를 데리고 말을 고르러 갔다.그는 서유에게 지극히 온순하고 몸집이 작은 말을 선택해 주고는 등에 올라타라고 하더니 고삐를 잡고 승마장 안쪽을 돌았다.서유는 그녀에게 열심히 승마를 가르쳐주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빨리 배우지는 못할 것 같으니까 친구들이랑 가서 놀아요…”자신의 키보다 작은 말을 끄는 모습이 조금 웃기기도 했다. 건너편 승마장에 있는 귀공자들은 그런 이승하를 보고 웃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가 이렇게 그녀와 함께 승마장을 돌다가 친구들이 그를 비웃기라도 할까 봐 얼른 그에게 친구들에게로 가보라고 했다.이승하는 고삐를 잡은 채 그를 향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